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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이오 사변 73주년: 도큐멘타리 동영상과 소설 "산속의 소녀"
우리 집은 육이오 때 한강다리가 폭파되는 바람에 발이 묶여 피난을 못가고 서울에 갇혀 삼개월을 적 치하에서 보내면서 모진 고생을 해야 했다.
누나의 이야기에 의하면 서울에 인민군이 들어오자 빨간완장을 찬 사내들이 당시 중앙청에 근무하고 계셨던 선친을 잡으러 들이닥쳤는데 악질 반동 친일파의 명단 꼭대기에 선친이 올려져 있었더라는 것이었다.
지하실 벽을 파고 숨어계셨던 선친은 서울 수복 한달 쯤 전에 측근 누군가의 밀고로 결국 끌려가신 후 이제까지 소식이 없으시고 납북자로 기록이 되어계시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가끔 "지금 살아계시면 백살이 넘으셨을 아버님이 북한에 계신다"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서울이 수복된 직후 정부에서는 선친을 충청남도 도지사로 발령을 내 놓고 기다렸었다는 그런 믿지 못 할 후일담을 나이가 많으신 한 인척으로부터 듣고서 아연한 일도 있다.
육이오의 충격으로 모친께서는 소천하실 때 까지도 정신이 온전하시지 못하셨다.
요즘 들어 똥좌빨들이 설치는 꼴이 참으로 가관이다.
이 병신들이 민족이니 평화니 통일이니 쭈절대며 육이오사변이나 전쟁과 평화에 대해 제법 아는체 개 썰을 풀면서 남을 가르치려드는 꼴들을 자주 보는데 내가 이들에게 해 주고픈 말은 "니기미 개보지다" 딱 이 한 마디다.
전쟁이 나쁜 이유는 사람이 죽고 다치기 때문다. 민족이니 자주통일이니 이 다 개 보지에서 나온 것들이 배불러서 하는 헛소리일 뿐이다.
한번 제대로 휩쓸리게 되면 민족이니 평화니 하는 사치스러운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폭격과 포탄에 부서진 폐허에서 송장 썩는 냄새를 맡으며 지내야 하고 기회가 있을 때 마다 빈집이나 쓰레기 더미를 뒤져 아무거나 씹힐 만한는 것이면 입에 우겨 넣으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하는 게 내가 겪은 전쟁이기에 지금 나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국의 젊은이들이 참호 속에서 겪는 참상을 이해하고도 남지만 비위가 약한 아내에게는 이런 말을 절대로 하지 않고 나만 혼자 생각으로 그친다.
육이오 때 한번은 동네의 길가에 쌓여있던 썩은 짚 가마니에 숭숭 돋아있던 버섯을 다른 나이 많은 아이들 하는데로 나도 거기 끼어서 따서 먹은 일이 있었는데 그걸 먹고 무사했던 게 기적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나는 왜 그러한 나의 지난 일에서 아직까지도 마음으로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걸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그 일들을...
전라도는 육이오로 인해 가장 피해를 많이 본 곳이고 아직도 그 후유증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작전상 어쩔 수 없었다 한다면 할말이 없긴 하지만 어쨌든 국군이 제대로 한번 싸워 보지도 않고 적에게 그냥 내주고 도망간 땅 전라도의 주민들은 자기들이 불러들이지도 않은 인민군들 때문에 같이 빨갱이로 몰렸다는 억울함은 타 지역 사람들이 좀 이해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전쟁이란 군인들의 몫이지 민간인들의 몫이 아닌 것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 아닌가?
진짜 웃기는 물건들은 경상도 종자들인데 자기들은 국군이 떠나지 않고 남아서 끝까지 지켜주었기에 적 치하에 들어가지 않고 살아 남은 것인데 마치 자기들이 의병이라도 일으켜서 빨갱이들을 막아낸 양 으스대는 꼴을 보면 내 입에서 또 한번 "니기미 개보지다" 하는 쌍욕이 튀어나오는 것을 참기가 어렵다.
에이 쓰벌... 그만 하자.
아래에 육이오 사변 동영상과 육이오를 기념해서 육이오 시대를 배경으로 소생이 오래 전에 지었었던 자작 소설 "산속의 소녀"를 약간 덧 손질을 해서 다시 올린다.
육이오 사변 동영상
소설 산속의 소녀
저 남쪽 어느 산골 마을의 뒷산 양지바른 곳에 조그만 무덤 하나가 있습니다.
누가 일부러 가꾼 것도 아니건만 이 무덤 주위에는 여기저기 예쁜 꽃들이 피어 있어 찾는 이들이 신기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을에서 이 무덤을 관리 하면서 매년 단오절이 되면 마을 규모로 이 무덤에 묻힌 이에게 버드나무 가지로 둥글게 엮은 테에다 백합꽃과 빨간 장미꽃으로 장식한 화관을 바치는 추모행사를 합니다.
아래에 적힌 글은 이 추모행사를 하게 된 사연입니다.
이 마을의 인가가 몰려 있는 지역에서 뚝 떨어져서 마을 뒷산 산기슭에는 일제 때 산지기가 살았던 작은 삼 칸 기와집이 있었고 그 뒤로 텃밭이 있어서 감나무와 밤나무와 잣나무, 그리고 도토리나무 등 제법 여러 그루의 유실수들이 심겨 있었습니다.
그 집은 일제 말기에 한동안 비어 있다가, 해방되고 나서 서울에서 젊은 남자 한 사람이 이 마을의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아 와서 살게 되었는데 그 사람에게는 부인과 두 살 난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남편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 어린 딸과 함께 가끔 마당에 나와 거니는 것 말고는 그 집 부인은 집 밖에 나오는 일이 별로 없어 동네 사람들과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어쨌든 그때부터 이 집은 마을 사람들에게 서울집으로 통하게 되었습니다.
이 서울사람들이 이사 오고 나서 이 년쯤 있다가 육이오 사변이 일어났습니다.
아이 아빠는 군에 징집되어 전선으로 나가고 엄마 혼자 이제 막 네 살 된 딸을 돌보며 혼자 살게 되었습니다. 그 동네에도 인민군들이 들이닥치고 군경가족들이나 교육받은 사람들은 모두 반동으로 몰려 어디론가 끌려갔는데 그중 일부 살아 돌아온 이들의 말에 의하면 군경 가족들은 곧바로 아이들까지 모두 총으로 쏘아 죽였고 군경 가족 아닌 사람들 중 일부는 의용군으로 차출되어 끌려가고 나머지는 돌려보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서울집의 여인과 딸은 아무 탈 없이 살아 돌아와서 마을 사람들이 처음엔 의아하게 생각을 했었지만 워낙 자기 목숨 부지하기 바빴던 때라 별 관심을 둘 여유가 없어 그냥 잊혀졌습니다.
몇 달 후 낙동강 전선을 돌파한 국군이 북상하면서 이 마을까지 들어오자 퇴로가 끊겨 갈 곳이 없어진 인민군들은 마을 뒤의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 공비가 되어서 밤이면 내려와 군경의 초소를 습격하고 마을 사람들에게서 식량을 약탈해가는 빨치산 작전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여름날 밤에 산에서 몰래 내려온 인민군 장교가 그 서울 여인 집 안에 숨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기동타격대가 출동하게 되고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어느 쪽에서 날아왔는지 유탄 하나가 소녀의 머리를 관통하고, 곧 이어 그 인민군 장교도 쓰러집니다.
머리에 피를 흘리며 숨져 있는 소녀의 고사리손에는 마치 누구에게 주려고 했었던 양 하아얀 백합꽃 한 송이가 꼬옥 쥐어져 있었습니다.
소녀의 엄마는 소녀에게 수의 대신 하얀 드레스를 입히고, 머리의 상처를 가리기 위해 버들가지를 둥글게 엮어서 흰 백합꽃과 빨간 장미꽃 송이로 장식한 화관을 씌워 뒷산 좋은 곳에다 정성스레 묻어줍니다.
소녀의 엄마는 몇 번 앞마당의 백합꽃을 꺾어 들고 하아얀 소복 차림으로 소녀의 무덤을 찾아오더니, 어느 날 들이닥친 두 사람의 헌병에게 양팔을 붙들린 채 군 찝차에 태워져 읍내 쪽으로 사라진 후 소식이 끊깁니다.
이 여인은 인민군들과 내통한 혐의로 특무대의 수사를 받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도 하고 고문으로 죽었다고도 하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만 한두 번 들리고는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소녀의 아버지는 육이오 직후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던 인민군과 전투중 전사했다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그 소녀의 엄마마저 사라지고 빈집이 된 그 서울집에는 두어 달 후 그 마을에서 부부가 같이 이집 저집 허드렛일들을 거들어 주면서 살아오던 “장 씨”라는 남자가 부인과 함께 들어와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을에는 장 씨 부부가 그 서울 여인을 인민군과 내통을 했다고 경찰에 밀고를 하고 그 대가로 그 집과 땅을 받은 것이라는 소문이 그 인민군 장교가 사실은 서울여인의 사촌오빠였다는 소문과 함께 나돌았습니다.
그런데 장씨 부부가 그 서울집으로 이사온지 한 달도 안 지난 어느 날 저녁 장 씨의 부인이 옷고름이 다 풀어져 앞가슴이 드러나고 머리가 산발이 된 채 동네 인가로 뛰어 내려와 자기 집 쪽을 가리키며 횡설수설하는 것이 발견되어 사람들이 급히 달려가 보니 장씨가 대청마루 앞 댓돌에 두 다리를 걸친 채 큰대자로 마당에 뒤로 쓰러져 있는데 자세히 보니 목이 부러져 죽어 있더랍니다.
그리고 장씨 부인이란 여자가 사시나무 떨 듯하면서 한사코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를 않아 동네 여인 하나가 이상해서 안방을 들여다보았다가 기겁을 하고 뛰쳐 나온 후 부들부들 떨면서 하는 말이 안방 아랫목에 하얀 옷에 꽃 관을 쓴 서울집 딸이 앉아 있다가 자기를 빤히 쳐다 보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을 동네 이장 부인의 간호를 받으며 고열에 헛소리를 하면서 앓던 장씨 부인이 다시 그 서울집으로 들어가서 목을 매고 죽어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이장 부인 말이 장씨 부인이 마침 잠이 들었기에 괜찮겠거니 하고 잠시 뒤뜰 텃밭에 나가 일을 하다 와보니 없어졌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장 씨 부부가 그 서울집 여인의 원혼이 씌워 죽었다고 믿게 되었고 서울집은 귀신이 나오는 집으로 낙인이 찍혀 아무도 가까이 가려 하지를 않았으며 그 집 임자라고 나타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결국 서울집은 주인 없는 빈집이 된 채 방치되어, 눈과 비바람에 벽이 무너지고 지붕도 내려앉아 아주 보기 흉한 모습의, 문자 그대로 凶家가 되고 말았습니다.
소녀의 魂은 흩어지지 않고 산속에 머무릅니다.
때때로 산에서 내려와 이제는 빈집이 된 살던 집의 마루 끝에 앉아서 멍하니 엄마를 기다리기도 하지만 주로 산속에서 지냅니다.
낮이면 산속의 새들이나 풀벌레등과 동무해서 노느라 심심하지 않지만 해가 지고서 무덤 옆에 핀 들꽃들과 풀벌레들과 소곤소곤 이야기하다가 그들마저 잠이 들면 소녀는 혼자가 됩니다.
그러면 소녀는 멀리 하늘 아래 검은 산등성이만 보이는 깜깜한 밤중에 칠흑 같은 어둠뿐인 마을 쪽을 내려다보며 엄마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듭니다.
잠이 들면 소녀는 꿈을 꿉니다.
꿈속에서 소녀는 백합꽃 한 송이를 들고 그 백합꽃만큼이나 눈이 부시게 하얗게 빛나는 모습으로 찾아오는 엄마를 봅니다.
겨울이 되면 소녀는 풀벌레들과 같이 끌어안고 겨울동안 깨지않고 긴긴 잠을 잡니다.
그러면서 엄마를 꿈에 봅니다.
어떤 해에는 온갖 기화요초가 우거지고 형형색색의 새들과 벌레들과 짐승들과 물고기들이 노는 곳에서 소녀는 엄마와 겨울을 나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휴전되고 나서 몇 년이 지났습니다. 마을은 이제 정상으로 돌아가 옛날의 평화롭던 시절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이상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소 꼴을 베러 나가던 소년이 흰옷에 꽃 관을 쓴 서울집 딸이 마을이 동구에 서서 자기 엄마가 끌려간 읍내 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을 보고 혼비백산해서 다시 뛰어들어온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나물 캐러 나왔던 동네 여인들도 그 소녀를 보았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행여나 그 소녀의 원혼 때문에 동네가 저주를 받아 흉년이 들고 역병이라도 돌지 않을까 불안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하필 그때에 산짐승이 동네에 내려와 돼지나 개 등 가축들을 물어가는 일들이 생기자 동네 사람들은 이 사건은 산신령이 노해서 내린 虎患이 분명하니 다음엔 사람이 물려갈 차례라고 단정을 짓게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볶이다 못 한 이장은 마침내 마을 회의를 소집해서 대책을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마을에서 그 소녀의 무덤을 관리하면서 매년 단오절마다 소녀의 무덤 앞에 화관을 바치면서 소녀의 혼을 위로하는 추모제를 지내게 된 시발점이 된 것입니다.
그 추모제 덕인지 호환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고, 더 신기한 일은 그 마을에는 홍수나 가뭄이나 병충해 같은 일이 없이 매년 풍년이 들어 사람들은 그 소녀의 원한이 이제 풀렸나 보다고 마음들을 놓았답니다.
그러나 가끔 소녀의 환영이 사람들 눈에 띄긴 했답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이 합장을 하며 “이렇게 나와 다니면 사람들이 놀라니 어서 산으로 돌아가거라”하고 말하면 사라지는데 그 사라지는 모습이 매우 신기했답니다.
소녀가 사라질 때 소녀의 몸은 여러마리의 하얀 나비로 변하여 공중으로 흩어지다가는 이윽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더라는 것인데, 한번은 동네의 한 심술궂은 사내가 나쁜 말로 욕을 했다가 소녀의 몸이 나비대신 수 많은 벌떼로 변해 달려드는 바람에 놀라서 기절한 후 여러 시간만에 깨어난 일도 있었는데 그 일이 있고서 그 사내와 그 가족들 전부가 마을을 떠나 어느 먼 곳으로 이사를 가서는 다시는 그 마을에 오지를 않더랍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밤 그 서울집에는 원인 모를 불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귀신 불이라고 믿은 마을 사람들이 불을 끄겠다고 나서지를 않아 그대로 전소되고 말았으며 타다 남은 것들마저 그 이듬해에 내린 많은 비에 모두 쓸려 내려가 완전히 공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서울집 터에는 교회가 생기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는 젊은 전도사 부부가 부임해 오셨는데 교회와 사택을 보더니 매우 마음에 들어하셨습니다.
키가 크고 잘생기신 이 전도사님은 통기타를 치면서 따오기나 오빠 생각 같은 흘러간 동요풍의 노래를 하기를 즐기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산기슭에 있는 작은 무덤에 얽힌 사연을 듣고 몹시 가슴 아파하시더니 스스로 작사를 하셔서 동요 “가을밤” 노래의 곡조에 맞춰 기타를 치시며 노래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전도사님은 서울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미술선생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제작한 예쁜 비석을 소녀의 무덤 앞에 세워 주는데 그 비석에는 전도사님이 소녀를 위해 지으신 그 즉흥시가 가을밤 노래 일절 가사와 함께 아래와 같이 새겨져 있습니다.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 길 어두워 갈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꽃들과 풀 벌레들 동무 삼아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고 놀다가
밤 깊어 모두 다 잠이 들면은
나 혼자서 엄마를 기다립니다.
밤 깊은 산중에 홀로 앉아서
엄마를 기다리다 잠이 듭니다.
밤마다 꾸는 꿈은 우리 엄마 꿈
백합꽃 꺾어 들고 찾아오는 꿈
Epilogue (後記):
얼마 후 전도사님 부부 사이에 아주 아주 예쁘고 순하디 순한 딸이 하나 태어납니다.
그 후로는 이 마을에 소녀의 환영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