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웅 아킬레오 신부
대림 제4주일
미카 5,1-4ㄱ 히브리 10,5-10 루카 1,39-45
행복한 신앙인
어느덧 성탄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성탄이 다가올 즈음 되면 한 해를 보내면서
마쳐야 하는 일과 각종 송년회 모임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어 차분하게 보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 년 중 가장 바쁜 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대림 시기를 잘 준비해서 아기 예수님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현실은 달라 때론 자책감과 성탄 준비에 소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이렇게 성당에 와서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를 드리는 것은 하느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처럼 부족함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믿고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행복한 분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으니 성모님은 복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그 행복한 방법을 보여주시고 알려주신 성모님을 기억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한 성모님이십니다.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겠습니까?
이런 성모님을 향해 엘리사벳은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해주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가장 힘이 되는 말입니다.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확인시켜준 엘리사벳의 말에
성모님께서는 특별한 날을 맞이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다시 힘차게 사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매일의 순간을 특별한 날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이 나에게
그런 날을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그런 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또한 남들에게 그런 특별한 날을 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신앙의 기쁨과 행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성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올해도 똑같이 그냥 흘러가는 성탄절을
기다리기보다 처음 대림을 맞이하면서 세웠던 계획과 다짐을 다시금 되돌아봐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더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하다(마카리오스 μακάριος )
‘마카리오스’는 ‘마카르’, 곧 신(神)을 가리키는 말마디에서 나온 형용사로,
신적인 차원의 행복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참된 행복은 그리스도를 통해 만나는
하느님과의 내적 친교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으로 우리 인간의 자리는 천상의 행복이 드러나는 자리가 되고
서로의 행복을 비는 것은 하느님을 이 세상에 소개하는 일이 됩니다.
대구대교구 조한웅 아킬레오 신부
2024년 12월 22일
***********
김종성 요한 사도 신부
대림 제4주일
미카 5,1-4ㄱ 히브리 10,5-10 루카 1,39-45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서둘러 간 이유는?
상상 1. 입덧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입덧은 임신 4~8주부터 시작하여 평균 5주 정도 나타난다고 한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6개월 터울이다. 그러니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서둘러 간 이유가
입덧 때문이라는 엉뚱한 상상(몇 주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은 시기상으로 개연성이 있다.
마리아가 ‘이해되지 않는 일’에 “예!”라고 응답한 것은 신앙의 신비다. 그런데 응답한 이후의 삶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결정하는 게 어렵나? 결정한 대로 사는 게 어렵지.
우여곡절 끝에 마리아가 모든 것을 감당하기로 결심했다 쳐도,
파혼을 철회한 요셉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암 투병 중인 사람이 어렵게 굳은 결심으로 항암치료 중단을 결정한다 해도,
가족 설득이라는 더 어려운 벽에 부딪힌다. 아마도 본인이 결심하는 것보다 가족을 설득하는
일이 더 힘들 것이다. 그렇듯 이 시기에 마리아는 요셉에게 복잡한 감정을 느끼던 중
느닷없이 입덧이 시작돼 버렸다. 입덧은 요셉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감정에
역행하는 본능이다.
그래서 엘리사벳 언니 집에 산전 도우미 핑계로 서둘러 갔다. 서둘러 언니네로 간 게 아니라,
서둘러 요셉을 떠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가 서둘러 간 이유는 요셉에 대한 마리아의 배려다.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인 배려이며 공감이다. 이해되지 않는 일에 “예!” 하며 응답한 마리아의 삶을
따르기는 너무 어렵다. 그렇다면 사람에 대한 배려와 공감의 삶을 따라 사는 건 어떨까?
상상 2. ‘걱정의 외주화’ 덕분이다
나는 요즘 두 가지에 꽂혀 지낸다. 하나는 몇 달 전 인천주보에서 김영욱 신부님이
소개해 주신 “냅둬, 하느님(한님) 하시게.”라는 문장이다.
어쩌면 이렇게 믿음을 화끈하고 정확하게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요즘 그 문장을 곳곳에 써두고 자주 곱씹으며 산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비슷한 시기에 이경환 신부님에게서 우연히 얻게 된 ‘침묵의 성모’
상본이다. 마치 조용히 하라는 듯 마리아가 입에 손을 대고 있는 이콘이다.
누가 프란치스코 교종께 봉헌한 작품이란다. 침묵의 순례지인 일만위순교자현양동산에
아주 딱 맞는다 싶어 입구에 아주 크게 설치하고 기도문도 만들어놓았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 아니라 맡기는 것이고,
맡기기 위해서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조바심과 걱정들을 침묵시켜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모든 일들을 하느님께 맡기기로 결심한다.
“예!” 하고 응답한 이후 감당해야 하는 일들은 감히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하지 않고, 맡기기로 한다. 즉, ‘걱정의 외주화’를 결심한다.
마리아는 하느님이 걱정하시고, 하느님이 처리하시게 나를 놔두기로 하고
엘리사벳 언니를 만나기 위해 출발한다. 나도 가끔 이러고 싶을 때가 있었는데,
요즘 들어 더 잦아졌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그게 ‘방치’겠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그게 ‘믿음’인 것이다. “엘리사벳을 통해 세례자 요한을 낳게 하려고, 즈카르야의 입을
잠시 닫아버리셨듯이, 저를 침묵하게 하시어 주님의 일을 시작하소서. 아멘.”
인천교구 김종성 요한 사도 신부
2024년 12월 22일
***********
손웅락 요셉 신부
대림 제4주일
미카 5,1-4ㄱ 히브리 10,5-10 루카 1,39-45
내 안에 품은 소명
대림 제4주일, 성탄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대림 시기도 이제 며칠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성탄을 앞 둔 오늘 복음 안에서는 엘리사벳을 찾아가시는 성모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모님은 메시아의 탄생 예고와 함께 전해진 친척 엘리사벳의 소식을 듣고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 로 가셨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이 고을은 예루살렘 남서쪽으로 7~8㎞쯤 떨어져 있는 아인 카림(Ein Karem)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갔다’ 라고만 나와 있지만 성모님이 계시던 나자렛에서 아인 카림까지는
실제로 130㎞가 넘는 먼 거리라서, 빨리 가도 사흘이 넘게 걸리는 산 너머 험한 길이었습니다.
일부러 그 길을 내달려 엘리사벳을 만나게 된 순간, 이 여정의 목적이 드러나게 됩니다.
인사도 설명도 필요 없이 바로 “내 주님의 어머니” 라고 부르는 엘리사벳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이미 구원 역사의 대열에 합류한 두 분이 하느님 사명의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모님이 이 여정을 서둘러 실행했던 이유는, 천사가 알려준 말씀이 불확실해서거나
의심이 생겨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성모님께 주신 약속의 증거를 엘리사벳을 통해
더 확실히 바라보기 위해서, 함께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한 사람은 미혼모나 다름없는 소녀이고, 다른 한쪽은 아이를 갖기에는
나이가 많아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어머니는 어려운 상황을 뛰어넘어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두 아기를 소중히 품고서, 서로를 한없는 기쁨으로 맞이합니다.
이 장면은 성모님과 엘리사벳의 만남을 넘어서서,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첫 만남으로써도
비추어지게 됩니다.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다’ 는 말씀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서로를 알아보고 기뻐하였다는 서사일 것입니다.
이 두 분은, 이렇게 아주 어린 아기일 때 만난 이후 거의 30년이 지나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 터에 찾아오시게 되어서야 재회하게 됩니다.
이때도, 그때도 서로 얘기 나누는 소소한 일들도 없이, 성령의 힘을 통하여 서로를 알아보고는
스쳐 지나가듯 떠나가 각자의 길에 매진하곤 합니다.
성령 안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은 다들 그런가 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사람이 보여주는 오늘의 복음은 요란하지도 않고 그저 담담하면서도,
믿는다는 것이 일생일대를 건 가시밭길 투쟁이란 사실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그 소명을 소중히 품어 안은 이들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과정 속의
한 걸음마다 얼마나 정성과 사랑으로 그 신비를 이루어 갔는지 보게 됩니다.
이 대림 시기의 끝에서 우리에게 오실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품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성모님을 통해 ‘내 안의 소명’ 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그분들에 비하면 작디작은 나름의 소명을,
내가 그분들 못지않은 정성과 사랑으로 소중하게 품고 있는지 말입니다
춘천교구 손웅락 요셉 신부
2024년 12월 22일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