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김씨(金海金氏)』
⊙ 연원
▶ 시조 : 김수로왕(金首露王)
‘고려사’에 신라 유리왕 18년 가락(駕洛)의 아도(我刀) · 여도(汝刀) · 피도(彼刀) · 오도(五刀) · 유수(留水) · 유천(留天) · 신천(神天) · 오천(五天) · 신귀(神鬼) 등 9干이 백성들과 더불어 놀이를 나갔다가 구지봉(龜旨峰)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그곳을 살펴보니 어린 동자(童子)가 있었는데, 나이는 열다섯, 용모가 빼어나 모두가 예(禮)로 맞아 왕을 삼으니 바로 수로왕(首露王)이고 나라이름을 가락(駕洛)이라 하였다는 설화가 있다.
‘가락선원세계(駕洛璿源世系)’에 보면 태조왕 수로왕(首露王) 이후 11세 세종 김무력(金武力)의 대부터 크게 번창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 까닭은 김해김씨의 중조(中祖)라 할 수 있는 흥무왕 김유신(金庾信)이 그의 손자일 뿐 아니라 조부 김무력(金武力)은 신라조에 각간(角干)의 벼슬을 한 뛰어난 무장(武將)이었으며 아버지 김서현(金舒玄)은 신라 진흥왕의 아우 숙흘종(肅訖宗)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신라의 종성(宗姓)과 인척을 맺고 가락국(駕洛國)을 합병, 소판 대양주도독안무대양주도군사장군(蘇判 大梁州都督按撫大梁州諸軍事將軍)의 지위에 오른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해김씨(金海金氏) 선원대동세보(璿源大同世譜)에도 상계(上系)편을 그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 본관지(本貫地) 연혁
▶ 김해 : 본래 가락국(駕洛國)으로 가야(伽倻)라 부르기도 한다.
구해왕이 신라에게 항복하자 법흥왕이 읍(邑)으로 만들어 금관국(金官國)이라 불렀다.
문무왕 때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였고 경덕왕은 김해소경(金海小京)이라 하였다.
고려조 성종이 금주안동도호부(金州安東都護府)라 고쳤으며 현종은 방어사(防禦使)로 강등시켰다.
이후 변천을 거듭하다가 충선왕 2년 김해부(金海府)로 만들었는데 조선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조선조 태종 때 도호부(都護府)로 고쳤고 세조 때는 진(鎭)을 설치하였으며 1895년 군(郡)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 주요성씨 : 金, 董, 裵, 宋, 張, 海, 許씨 등
⊙ 파명록(派名錄)
▶ 金寧君派(京派) : 參判公派 · 橫城公派 · 安敬公派 · 石城公派 · 戶參公派 · 參贊公派 · 奉常公派 · 密直使公派 · 文簡公派 · 密直公派 · 平章事公派
▶ 監務公派(四君派) : 生員公鍊派 · 都摠管公派 · 生員公錄派 · 贊成公派 · 尙書公派 · 恭簡公派
▶ 版圖判書公派(三賢派) : 郡守公派 · 執義公派 · 翰林公派 · 進士公派 · 錄事公派 · 進義公派 · 判書公派 · 副護軍公派 · 判書公維公派
▶ 副議軍公巨公派 · 承仕郞公派 · 副正公派(襄毅公派) · 都摠管公派 · 判書公添釰派 · 判典公派 · 判書公不比派 · 左政丞公派 · 崇政公派 · 副護軍天翼派 · 判決事公派 · 進士公虔派 · 忠靖公派 · 都事公派 · 崇政公現派 · 休隱公派 · 長沙君派 · 參奉公麟瑞派 · 大提學公派 · 僉正公派
⊙ 씨족사(氏族史)의 개요
김해김씨는 가락국(駕洛國)의 시조 수로왕(首露王)을 시조로 하는 성씨로 우리나라에서 수가 가장 많은 성씨다.
김해김씨의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이 가락국(駕洛國)을 창건한 것은 서기 42년(후한建武 18년)이다.
수로왕(首露王)은 즉위한 지 6년 뒤 아유타국(阿踰陀國 : 지금의 인도)의 공주 허황옥(許皇玉)을 비(妃)로 맞아 10王子, 2公主를 두었다. 10왕자 중 장자(長子)인 거등왕자(居登王子)가 왕위를 잇고, 둘째 · 셋째 왕자는 모성(母姓)을 따라 허(許)씨로 계승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7왕자는 옥보선인(玉寶仙人)을 따라 가야산(伽倻山)에서 운상원(雲上院)으로 들어가 수도하여 부처가 되었으니, 지금도 경남 하남군(慶南 河南郡)에 칠불사(七佛寺)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거등왕(居登王)으로 이어지는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손들이 김해김씨(金海金氏)를 칭하고 있다. 김해김씨는 역사가 길고 자손이 번성한 만큼 후손들에 이르러 나뉘어진 분파(分派)도 148개에 이른다. 그 중 대표적인 분파는 다음과 같다.
김유신(金庾信)의 직계종파는 고려의 김목경(金牧卿)을 중조로 하는 京派(金寧君派)와 그의 아우 익경(益卿)을 중조로 하는 四君派(監務公派), 김관(金管)을 중조로 하는 三賢派(版圖判書公派)다.
三賢派의 삼현(三賢)은 김극일(金克一), 김일손(金馹孫), 김대유(金大有)를 가리킨다.
수로왕을 1세로 하여 56세조 김유공(金維公)의 후손이 판서공파(判書公派)이고 51세조 김지서(金之瑞)의 후손이 승사랑공파(承仕郞公派), 김평(金平)의 후손이 양의공파(襄毅公派)다.
40세조 김명해(金明海)의 후손에서 김명택(金明澤)의 후손이 판전공파(判典公派), 김불비(金不比)의 후손이 판서공파(判書公派), 김만희(金萬希)의 후손이 좌정승공파(左政丞公派), 김종정(金宗貞)의 후손이 숭정공파(崇政公派), 김천익(金天翼)의 후손이 부호군공파(副護軍公派), 김을동(金乙棟)의 후손이 판결사공파(判決事公派), 김문(金汶)의 후손이 진사공파(進士公派), 김이장(金以章)의 후손이 충정공파(忠靖公派)이다.
31세조인 김상인(金商寅)의 후손은 단계(單系)로 이어지다가 40세에 들어 김상경(金尙慶), 김중경(金重慶)의 두 후손이 있게 되었으나, 김중경(金重慶)의 후손은 없고 김상경(金尙慶)의 후손도 단계(單系)로 이어져 51세조 김운(金芸)의 후손이 유수공파(留守公派)로 분파되었다.
27세조 김진의(金進意)의 후손은 42세로 김시원(金時元)의 두 아들 이후 여러 파로 나뉘어졌다. 57세조 김대진(金大震)의 후손이 운은공파(雲隱公派)이고, 54세조 김세장(金世章)의 여덟 아들의 후손이 8개 파로 나뉘어졌는데, 김탁(金琢)의 후손이 문경공파(文敬公派), 김근(金瑾)의 후손이 부사공파(府使公派), 김관의 후손이 한림공파(翰林公派), 김구(金球)의 후손이 충정공파(忠靖公派), 김연(金璉)의 후손이 도사공파(都事公派), 김현(金現)의 후손이 숭정공파(崇政公派), 김호(金琥)의 후손이 휴은공파(休隱公派), 김선(金璇)의 후손이 장사군파(長沙君派)이다.
56세조 김인서(金麟瑞)의 후손이 참봉공파(參奉公派), 51세조 김득하(金得河)의 후손이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 50세조 김경신(金敬臣)의 후손이 도총관공파(都摠管公派)이다.
22세조 김천여(金天與)의 후손은 단계(單系)로 이어져오다 38세 이후 두 계통으로 후손이 이어지고 있으나, 분파(分派)로는 김덕휴(金德休)의 후손 첨정공파(僉正公派)만이 ‘무오보(戊午譜)’에 보이고 있다.
김무력(金武力)은 진흥왕 14년 백제 東北의 땅을 취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하셨을 때 군주가 되었는데, 관산성(管山城)싸움에서 신주병(新州兵)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성왕이 이끄는 백제군을 크게 물리치는데 기여하였다.
김서현(金舒玄)은 진흥왕(眞興王)의 동생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부인(萬明夫人)과 결혼하였다. 角干에 올라 대양주도독(大梁州都督)을 지냈다. 진평왕(眞平王) 51년(629)에 소판(蘇判)으로 角干 김용춘(金龍春) 등과 함께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고 있었을 때 아들 김유신이 적장을 베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金海金氏의 중시조 金庾信은 구형왕(仇衡王)의 증손자로 신라왕실인 만명부인(萬明夫人)에게서 태어났다. 진평왕 31년 화랑(花郞)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를 거느리면서 심신을 수련했다. 629년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서 낭비성(娘臂城) 전투에 출전하여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압양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다. 선덕여왕(善德女王) 13년 소판(蘇判)이 되어 상장군(上將軍)에 오르고, 백제군(百濟軍)과 여러 번 싸워 이겼으며, 진덕여왕(眞德女王) 1년 반역을 꾀한 비담(毗曇) · 염종(廉宗)의 반군(叛軍)을 토벌하였다. 648년 백제의 대양주(大梁州)를 공격하여 12城을 함락, 이찬(伊湌)이 되어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에 올랐다. 다음 해 침입한 백제군을 도살성(道薩城)에서 격파했고, 654년 王이 후사(後嗣)가 없이 죽자 알천(閼川)과 상의,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했다.
660년(武烈王 7)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당나라 소정방(蘇定方)과 연합, 사비성(泗泌城)을 함락시켜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로써 신라의 삼국통일의 기반을 튼튼히 했다. 문무왕(文武王) 3년 백제의 부흥군을 토벌하고, 667년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실패, 다음해 연합군의 대총관(大摠管)이 되었으나 병으로 출전하지 못했다. 고구려 정벌 후 신라의 최고 위계인 태대각간(太大角干)에 올랐다. 문무왕 13년(673)에 죽었는데, 그 후 160여 년이 지나 흥덕왕(興德王) 10년(835)에 ‘순충장렬 흥덕대왕(純忠壯烈 興德大王)’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김흠순(金欽純)은 김유신의 동생이다.
진평왕 때 화랑이 되고, 무열왕(武烈王) 7년 형 유신과 함께 5만 군사를 거느리고 당군과 호응하여 백제 유민들의 반란을 토벌했다. 668년 대당총관(大幢摠管)으로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참전했고, 다음해 양도(良圖)와 함께 사죄사(謝罪使)로 당나라에 갔다가 다음 해 귀국했다.
김유신은 무열왕 김춘추(金春秋)의 셋째 딸과 결혼하여 5남4녀를 낳았다. 그중 둘째가 유명한 원술(元述)이다.
원술은 전장에서 전세가 불리하자 부하의 권유로 후퇴한 일로 아버지인 김유신과 어머니 만명부인이 만나주지 않자 이에 탄식하며 태백산(太白山)으로 들어갔다.
문무왕 15년(675) 당병이 買蘇川城(楊州)에 쳐들어오니 원술은 지난날의 욕됨을 씻기 위해 다시 출전, 공을 세우고 상을 받았으나,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한 자식임을 한으로 여겨 죽을 때까지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화개(花開)에 식읍(食邑)을 받았다 하는데, 그의 후손이 진주김씨(晋州金氏)로 분적하였다.
김유신을 정점으로 하여 최고의 영화를 누렸던 김해김씨는 그 이후 그만한 가세(家勢)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고려에서는 정승급 15명, 名臣 · 功臣 10여 명과 장군 8명, 提學 11명을 배출하였다.
[출처] 『김해김씨(金海金氏)』5
첫댓글 제게 해당되는 정보라서 관심을 갖고 읽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