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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라중심 원문보기 글쓴이: 47대단군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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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의 역사는 선사시대 신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제단을 꾸미는 데 그림을 장식하거나 제사장(祭祀長)의 얼굴에 색칠을 하는 일 등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단청은 신비감을 주고 잡귀를 쫓는 벽사(邪)의 뜻도 있고 위엄과 권위를 표시하기도 한다. 한국은 삼국시대에 활발하게 유행하였다.
고구려 벽화고분인 쌍영총(雙楹塚)·사신총(四神塚)·강서(江西) 우현리대묘(遇賢里大墓)·안악(安岳) 제2호분 등에 비천(飛天)·연꽃·인동초·구름·불꽃 등 다양한 문양이 그려져 있다. 신라의 솔거(率居)나 일본에 건너가 그림을 그린 백제의 백가(白加)도 모두 화공이었는데, 단청은 화공이 도맡아 하였다.
‘단청’이란 그림을 뜻하기도 하였다. 안압지(雁鴨池) 발굴 때 출토된 통일신라 암막새 기와 밑에 단청의 붓자국이 있는 것도 있었고, 단청할 때 물감을 담은 그릇 등도 출토되었다. 1123년(고려 인종 1) 고려에 와서 본 바를 기록한 송나라 서긍(徐兢)의 《고려도경》에 “궁궐 건물에 난간은 붉은 옻칠을 하고 동화(銅花)를 장식하였으며 단청이 장엄하고 화려하다”라고 하였다.
고려의 단청은 외부의 기둥이나 난간 부분에는 붉은색을 칠하고 그늘진 천장이나 추녀 안은 녹색으로 칠해서 단청의 명암효과를 높였다. 현재 남아 있는 수덕사(修德寺) 대웅전이나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 등 건물의 단청은 녹색이 많아 내부는 차갑고 가라앉은 분위기가 감돈다. 백제의 건축에 사용된 색채의 유무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고분을 통해서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는 공주 송산리(宋山里) 고분벽화이고 다른 하나는 부여 능산리(陵山里) 고분벽화이다.
전자는 전건축(塼建築)으로 진흙을 칠하여 밑바탕을 만든 다음에 주작도(朱雀圖)를 그렸으며, 후자는 돌방무덤[石室墳]으로 돌에 직접 사신도(四神圖)와 비운연화도(飛雲蓮花圖)를 그렸다. 이런 고분벽화에 나타난 사신도와 여기에 칠해진 색채로 보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궁궐건축에 색채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신라의 색채사용에 관한 자료는 고분에서보다 문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삼국사기》 권33 〈옥사조(屋舍條)〉에 따르면 5색이 진골(眞骨)계급부터 사용이 금지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윗계급인 성골(聖骨), 즉 왕궁에서만 5색을 사용하였다는 뜻이다. 이는 조선시대의 단청이 왕궁을 위시한 관아건축에만 사용되고 민간에는 금지되었던 일과 일맥상통한다. 조선시대에는 단청에 등황색을 많이 써서 밝고 화려하며 문양도 다양해진다. 이것은 간결한 고려의 주심포(柱心包) 집에 비하여 복잡한 조선의 다포(多包)집이 장식적으로 흐르는 건축구조와도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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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를 알기 위해서 먼저 귀신(鬼神)의 개념부터 확실하게 세워야겠다. 오늘날 귀신이라면 주로 악귀(惡鬼) ,요괴(妖怪),등으로 해석되고 있는데 이것은 협의(狹義)의 귀(鬼) 나 귀신(鬼神)을 뜻한다. 그
러면 광의(廣義)의 귀신은 무엇인가 광의의 귀신은 귀(鬼)와 신(神) 을 종합한 뜻을 말한다.귀(鬼)는 사람이나 동물이 죽어서 이루어지는 정령(精靈)적 존재이며 귀(鬼)는 선귀(善鬼)와 악귀(惡鬼)로 나누어진다.
악귀(惡鬼)는 귀신.요괴.도깨비 등으로 불리고 사람을 해치는 존재이다 선귀(善鬼)는 복도깨비와 같이 사람에게 복을 주는 귀신 또는 도깨비를 뜻한다. 보통 선귀는 신(神)으로 인식되기도 한다.한편 신(神)은 고대 애니미즘으로서 천신(天神),지신(地神),인신(人神)의 삼신(三神)을 뜻하는데 이 경우에도 선신(善神)과 악신(惡身)으로 갈라진다.천신(天神)으로서의 일(日),월(月),성신(星辰),풍(風),운(蕓),우(雨),뢰(雷)의 제신은 선신(善神)으로 인식되지만 천재를 일으킬 경우에는 악신(惡身)으로 인식된다 풍재(風災),수재(水災),화재(火災)의 삼재(三災)만 생각해 보아도 그것은 확실해진다.
바람과 구름과 비는 인간에게 있어서 생명의 원천으로 인식되겠지만 그것이 지나칠 때는 재앙으로 변하는 것이다. 지신(地神)의 경우도 산신(山神)이나 수신(水神)이나 목신(木神)은 선신(善神)으로 이식되지만 화산이 폭발한다던가 지진이 일어날 적에는 악신(惡身)으로 일변하는 것이다. 원래 지신(地神)은 천지인삼신( 天地人三神)중에서 모든 물질면을 맡아 주시는 선신(善神)이지만 악신(惡身)으로 일변하는 것이다. 전통적 [지신밟기]란 바로 이러한 악신에 대한 답지제마(踏地製魔)의 행위인 것이다. 귀신(鬼神)의 형상(形像) 회남자(淮南子)나 논형 같은 권위 있는 옛 문헌에 의하면 `귀신은 무형무영(無形無影)이라고 했으며 일반적으로도 귀신은 형상이 없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문헌에서 말하는 귀신(鬼神)이란 광의의 귀신이기 때문에 귀(鬼)도 신(神)도 한결같이 형상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민문화(民文化)의 세계에서는 천신(天神) , 지신(地神), 산신(山神), 용신(龍神), 성신(星神), 오방신(五方神), 풍신(風神), 운신(雲神), 우신(雨神), 뇌신(雷神), 등을 위주로 한 모든 구체신(具體神)들의 모습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고 ,
이런 그림들을 우리는 무신도(巫神圖)라고 불러왔다. 한편 중국의 산해경(山海經)이나 일본의 민화를 보면 인면수신(人面獸身), 수면인신(獸面人身), 인면조신(人面鳥身), 인면사신(人面蛇身) 등의 괴이한 형상의 요괴(妖怪) 들의 모습이 요괴도(妖怪圖)라는 이름으로 기발하게 그려져 잇다. 천신(天神), 산신(山神), 성신(星神), 용신(龍神), 오방신(五方神) 등의 신상도(神像圖)는 신선(神仙)이나 미인이나 장군상의 인격신으로 표현되어 있다. 가장 이상적인 사람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 신상도(神像圖)라고 하겠다.
여러 가지 신상도(神像圖)중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을 찾는다면 그것은 아마 산신도(山神圖)일 것이다. 전국 도처에서 발견되는 산신도는 인자하신 할아버지나 미인과 귀여운 호랑이로 구성된 것이 그 특징이다. 산신관은 애니미즘에 의한 산악정령관(山岳精靈觀)과 유명한 사람이 죽어서 산신이 되었다는 귀신관(鬼神觀)의 두 가지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그 형상은 사람의 모습일 수 밖에 없다. 단종(端宗)이 죽어서 태백산 산신이 되었다. 또는 단군이 죽어서 구월산(九月山)산신이 되었다는 등의 역사적 사실이 그러한 관념을 알려준다. 이에 비해서 일본에서의 산신(山神)은 산귀(山鬼)를 뜻하고 있으며 멧돼지나 원숭이나 너구리 같은 산짐승이 신의 모습으로 둔갑했다던 가, 일목독각(一目獨脚)의 요괴(妖怪)로 등장하는 것이 보통이고 그 형상 역시 그러한 요괴(妖怪)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 근세에 한국고유의 장승이 절간 문앞에서 수호신 노릇을 하고 있듯이 풍신(風神)이나 뇌신(雷神)도 부처님 앞에 서서 수호신 노릇을 했던 것이다. 연화(連花)위에 발을 벌리고 서있는 백제의 도깨비 모습이나, 천등(天燈)을 쳐들고 있는 일본의 국보 목조각을 살펴보면 불교이후 의 도깨비상을 해득할 것이다불교는 무자비하게도 도깨비상으로 지옥의 옥졸을 삼았다.
지옥에서 죽은 사람을 때리고 찢는 흉칙한 짓을 도깨비에게 부여하고 불상만 을 거룩하게 쳐올린 것이다. 지옥에 관한 관념은 기독교에서도 강조되었다. 한국에서도 한불교는 감로탱화나 지옥도속에 중국적 옥졸들을 그렸다. 사천 왕에게 밟힌 악귀의 모습도 그렸다. 시신문갈도(施身聞喝圖) 의 야차(夜叉)도 그렸다. 그러나 신교 본연의 요괴도(妖怪圖)란 것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
한국은 요괴학(妖怪學)이나 요괴도(妖怪圖)가 발달되지 못한 점을 자랑 삼아야 한다. 물이 깨끗해서 차도(茶道)가 발달되지 못한 것처럼 공기가 너무 맑아서 귀신들이 붙을 데가 없었던 것 같다. 협의의 귀신은 악귀(惡鬼), 요괴(妖怪)를 뜻하는 것이다. 같은 동양 의 3국이련만 한국민족은 산신(山神)을 신(神), 선신(善神)으로 믿어 왔으며 중국과 일본에서는 한결같이 산의 요귀(妖鬼)로 해석한 것이 틀림없다.
선신(善神)은 대개의 경우 인자하신 인간상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풍운우뢰(風雲雨雷)의 자연신들만은 고대로 올라갈수록 소위 도깨비형 상으로 나타나 있다. 귀신이나 요괴(妖怪)의 형상으로 상식화 되어 있는 도깨비상이 풍신(風神), 운신(雲神), 우신(雨神), 뇌신(雷神)의 신상(神像)으로 나타나 있으니 이 문제는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할 큰 문제이다.
앞서 다루었던 산신(山神)에 있어서도 산해경(山海經) 남산경(南山經)에는 `산신(山神)은 모두 조신용수(鳥身龍首)다' 라고 하였으니 형상은 요괴(妖怪)이지만 신(神)으로 취급되어 있다. 적어도 우리는 신(神)의 모습을 요괴상(妖怪像)으 로 표현하는 고대의 중국전통을 파악하게 되며, 이것은 도깨비의 형상을 논하는 마당에서 매우 중요시되는 점이다. 산해경 (山海經) 그림들 중에서 지금 우리는 도깨비상의 원형을 찾아보고 싶어지지만 산해경의 괴수는 그 태반이 인면(人面)을 가진 새 나 물고기나 용 이나 짐승으로 나타나 있다. 짐승 몸집에 사람의 얼굴을 달아야 신(神)이 된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
도깨비 신상의 기원을 찾아서 다음에는 도 철(도철)의 세계를 더듬어 볼 수 밖에 없다. 도깨비 면상(面相) 의 기원이 도철문에 있다는 점은 거의 정설이 된 일이지만 지금 우리는 도깨비 전신상을 찾고 있는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안휘 부남(阜南)에서 출토된 호준(호준)을 발견 하게 되는데 호면인신(虎面人身)의 도깨비상이다. 다음은 우수신신(牛首人身)의 신상으로 되어 있지만 도철인신상으로 보인다. 매우 희귀한 자료이 지만 적어도 도깨비상이 도철문에서 발생했다는 점은 확실해 진다. 그리고 도깨비란 도상학(圖像學)상으로 신상(神像)이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고대의 신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인면동물신의 요괴(妖怪)적인 신상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약간 시대가 내려오면서 인면동물신은 동물면인신형으로 변하고 그러한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도깨비면인신의 신상이란 점을 찾게 되었다. 좀더 시대가 내려오면서 본격적인 도깨비면인신상이 무르익었는데 그 시기는 중국의 남북조(南北朝)시대이며 한국의 삼국시대 말기, 일본의 헤이안(平安)시대로 보게 된다.
우선 이 시기에 만들어진 도깨비조형물을 개관하면서 그 도상학(圖像學)적 특색을 살펴 보기로 하겠다. 북위(北魏) 원씨묘지석(元氏墓誌石) -원광3년-522A.D에 새겨져 있는 선각화(線刻畵)에는 18점의 도깨비상이 새겨져 있다. 다양한 몸놀림에 하나씩 명칭이 새겨져 있는데 그 문헌적 출처는 아직 다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구도가 세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선각이 섬세하여 남북조(南北朝) 시대가 남긴 명작으로 꼽힌다 .
이 고분에 대해서는 북제(北齊)의 문선(文宣 560A.D) 황제의 왕능이라는 설이 있지만 북조시대의 것이라는 점만은 확실하다. 남북조시대의 도깨비상은 은(慇), 주(周)의 도철도깨비를 전기의 도깨비라고 하면 후기의 도깨비의 원류가 된다. 도철문이 도안화 된 신상(神像)인데 비하여 남북조의 작품은 생동감 넘치는 사실적 표현이라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이 시대는 한국에 있어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시대의 절정기이며 일본의 나라(奈良)시대에 해당된다. 자료 출토에 있어서는 중국측 자료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후기의 도깨비상은 중국의 남북조 스타일을 원류로 삼는다. 그 중에서 이 고분벽화는 채색된 회화 자료로서 높이 평가할 수 밖에 없다. 남북조 시대에 있어서는 남조(南朝)나 북조(北朝)가 한결같이 새로운 도깨비상을 창조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러한 시대적 바람이 조선 삼국에서도 불었을 것이니 그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가 바로 고구려의 벽화이며, 백제의 화상전(畵像塼)이며 신라의 망와(望瓦)라고 하겠다. 고구려 고분벽화로서 중국 남북조 양식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한국측 자료로서 도깨비 전신상이 나타나 있고 채색까지 되어 있어서 좋은 자료가 된다.
특히 도깨비의 얼굴 모습은 중국 고분벽화의 양식 보다도 신라, 고구려의 도깨비 망와 양식에 가깝다고 하겠다. 백제 화상문전의 도깨비상은 1936년 부여(扶餘) 규암리(竅岩里) 언덕에서 출토된 것이며 8종의 문양중의 하나로 나타난 것이다. 중국의 남북조양식을 닮았지만 중국 것이 괴수(怪獸)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비하여 화려한 복장의 당당한 모습을 한 도깨비의 전신상이다.
연화문 위에서 있으니 불교이후의 것이고 부처님과 동등하게 모셔졌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 용(龍)과 봉황 (鳳凰)과 같이 끼어 있으니 벽사진경(벽사진경)의 벽사신으로 모셔진 것이 틀림없다. 석가모니의 전생담 중에서 시신문갈(施身聞喝)의 전생담을 그린 백제 시대의 도깨비상이 일본 나라(奈良)에 있는 호류지(법류지) 소장의 다마무시노즈시에있다.
이러한 그림은 지금도 절간 벽에 잡화라고 불리면서 그려진다. 그러한 잡화의 원류자료로서도 귀중한 자료이며 남북조 양식의 도깨비상으로 그려진 야차도(夜叉圖)이니 만큼 동양 고유의 신상이 불교식 귀신의 모습으로 전입되었다는 점도 주목할만 하다.
여기서 일본말 표현이 가장 깊은 관심을 끄는데 가미(神) ,나리(嗚), 사마( )라는 뜻이고 보림 신울림(신?) 하는 님 이라는 뜻이 된다. 산해경(山海經)에는 용신인면(龍身人面)의 괴물상으로 나타나 있지만 결국 삼국이 다 뇌공(雷公)을 신(神)으로 모셨다는 점은 삼국의 뇌 신신앙(雷神信仰)만 살펴보아도 확실하다.
신으로만 믿고있던 도깨비가 불교전래의 뒤를 따라서 불교전통의 야차(夜叉)나 나찰(羅刹)같은 흉물로 급변하고 사람을 해치고 잡아먹는 악마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런데 동양전통의 특이한 도깨비신상이 야차나 나찰의 흉칙한 모습으로 쓰여졌으니 이것은 동양미술사상 크나 큰 사건이라 하겠다. 세상에는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중국 남북조시대 도깨비상이 불교에서 따온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대로 전기(前期) 도깨비 상이 은(殷)나라때 이루어진 것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전개된 후기 도깨비상이 불교에서 왔다고는 볼 수 없는 일이다.
근세에 한국고유의 장승이 절간 문앞에서 수호신 노릇을 하고 있듯이 풍신(風神)이나 뇌신(雷神)도 부처님 앞에 서서 수호신 노릇을 했던 것이다. 연화(連花)위에 발을 벌리고 서있는 백제의 도깨비 모습이나, 천등(天燈)을 쳐들고 있는 일본의 국보 목조각을 살펴보면 불교이후 의 도깨비상을 해득할 것이다불교는 무자비하게도 도깨비상으로 지옥의 옥졸을 삼았다. 지옥에서 죽은 사람을 때리고 찢는 흉칙한 짓을 도깨비에게 부여하고 불상만 을 거룩하게 쳐올린 것이다.
지옥에 관한 관념은 기독교에서도 강조되었다. 한국에서도 한불교는 감로탱화나 지옥도속에 중국적 옥졸들을 그렸다. 사천 왕에게 밟힌 악귀의 모습도 그렸다. 시신문갈도(施身聞喝圖) 의 야차(夜叉)도 그렸다. 그러나 신교 본연의 요괴도(妖怪圖)란 것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 한국은 요괴학(妖怪學)이나 요괴도(妖怪圖)가 발달되지 못한 점을 자랑 삼아야 한다. 물이 깨끗해서 차도(茶道)가 발달되지 못한 것처럼 공기가 너무 맑아서 귀신들이 붙을 데가 없었던 것 같다. 수면인신(獸面人身)의 장수 도깨비 앞서 우리는 고대의 신(神)의 형상을 인면수신(人面獸神)이나 수면인신(獸面人身)의 괴물상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제 고 대의 성현상(聖賢像)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신(神)의 형상과 비슷하게 괴물로 그려져 있다. 반고(盤古)는 용수인신(龍首人身), 천황씨(天皇氏)는 인수인신(人首鱗身), 지황씨(地皇氏)는 사신여면(蛇身女面), 인 황씨(人皇氏)는 용신 인면(龍身人面), 복희씨(伏犧氏)는 사신인수(蛇身人首), 신농씨(神農氏)는 인신우수(人身牛首)로 기록되고 형상도 그려져 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찾고있는 수면인신(獸面人身)의 성현은 누구인가? 우선 신농신가 인신우수(人身牛首)로 나타나 있고, 치우(蚩尤)의 형상이 귀면인신상(鬼面人身像)으로 그려진 것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술이기(述異記)에 `치우는 동두철액(銅頭鐵額)이고 철석(鐵石)을 먹는다. 귀털은 창날같고 머리에는 뿔이 나 있다' 라 하고 한비자(韓非子)에는 `풍백(風伯)과 우사(雨師)를 거느리고 다니는데 구름이나 안개를 이르킨다.' 고 했다.
우리가 찾고 있는 도깨비상의 장수가 나타난 것이다.
역사상으로 고구려벽 화에 나오는 도깨비상이 연대가 내려 오면서부터 차차 역사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는점을 발견하게 된다. 또 조선조시대의 뇌공(雷公)이 역사(力士) 상으로 변했다는 점은 김덕성의 뇌공도가 잘 알려준다 . 이러한 장수들은 역사(力士)에 잘 나타나 있으니 중국 당나라때 종규 (종규)가 그것이요 관운장(關雲長)이 그것이요. 당장군, 주장군이 그것이다. 신라(新羅)의 비형(鼻荊)이 장수요, 처용(處容)이 장수요, 최영(최영)이 장수요, 임경업(임경업)이 장수이다.
그러면 이러한 벽사신(벽사신)들은 어디서 연원(淵源)되었는가, 바로 치우(蚩尤) 장수였던 것이다. 사기(史記)는 황제(皇帝)가 치우를 탁록(탁록)에서 죽었다고 했지만 다른 문헌들은 더욱 중요한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용어하도(龍魚河圖)에는 동두철액(銅頭鐵額)의 치우장수일당은 다섯 가지 병기를 만들어서 천하를 위협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치우가 죽은 후에 벽 사신(벽사신)으로 모셔진 것이 확실하다.
사기 봉선서에는 장안(長安)에 치우사(蚩尤祠)를 설치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수장현(壽張縣)의 치우사에 관한 기록도 보이고 병기고(兵器庫)에서 치우에 제사 드린 기록이나 치우를 병주(兵主)로 모신 기록도 나온다. 결국 치우는 남북조시대의 민간신앙의 강력한 신앙대상신이 되었던 것이다. 도깨비 신상(神像)을 치우상(蚩尤像)이라고 하였으니 지금 단군(檀君) 학 자들이 도깨비 기와를 보고 치우상이라고 여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뿐이다.
누가 그 칼 만드는 비밀을 가르쳤는가, 일본의 한 대장간에서 봉안하고있는 옛 그림에 도깨비들이 망치를 흔들며 일본도를 다루고 있는 모습을 보면 짐작이 갈 것이다. 도깨비상을 치우상으로 강력하게 주장한 분은 일본 와세다대학의 고스기 가즈오 교수였다.
도깨비 기와 속에는 얼굴모습만 나와있지만 일본 나라(奈良)의 전신도깨비상 덕으로 그 전신이 바로 도깨비상이란 점이 밝혀 졌고, 도깨비상을 가진 옛 장수가 치우(蚩尤)신으로 직통된다.
근세에 이르러 치우장수가 한국의 한웅시대 제14대 자우지천앙(慈于支天王)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치우신(蚩尤神)과 도깨비가 민족의 위대한 수호신이라는 점이 드러났다. 여기서 취급하는 도깨비가 요괴학(妖怪學)에 서 말하는 도깨비가 아니고 벽사신의 신상이라는 뜻에서 `장수도깨비'라고 부르면서 요괴 도깨비와 구별시키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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