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덕 베드로 신부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1요한 1,1-4 요한 20,2-8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요한 13,23). 요한 사도는 제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예수님의 품에 기댈 수 있을 만큼
깊은 사랑을 받은 제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빈 무덤을 향하여
베드로와 함께 달려 먼저 무덤에 다다랐지만 베드로가 올 때까지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요한 사도였다면, 저는 곧바로 무덤에 들어갔을 것 같습니다.
저를 그토록 사랑하신 예수님께서 없어지신 것을 가장 먼저 확인해 보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요한 사도는 왜 베드로를 기다렸을까요?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이 말씀과
뜻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기다렸고,
그가 빈 무덤을 확인한 첫 번째 사람이 되게 하였을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자신이 예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랑을 사도들 안에서
권력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그토록 사랑해 주시는 예수님께서 정말로 바라시는 일,
베드로를 통하여 교회를 세우시려는 그분의 뜻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협력하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시려고 하시지 않았을까?’라고
주님을 원망하거나 시기와 질투로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요한 사도가 보여 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우리도 배우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뜻이 이루어지도록 협력할 줄 아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요한 20,5). 아멘.
대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
**********
정진만 안젤로 신부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1요한 1,1-4 요한 20,2-8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사가가 전하는 첫 번째 부활 이야기입니다.
20장 1절에서 언급된 “주간 첫날 이른 아침”은 안식일 다음 날, 곧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사흘째 되는 날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앞선 수난 이야기와 시간적 간격을 유지하면서
예수님 부활 이야기의 시작을 알려 줍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빈 무덤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을 가장 먼저 보도합니다(20,1-18 참조).
오늘 복음은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빈 무덤에 대하여 증언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두 제자는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베드로보다 다른 제자가 먼저 무덤에 도착하였지만,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는 베드로가 도착하기를 기다렸고, 그에게 빈 무덤을 먼저
확인할 기회를 줍니다. 여기에는 열두 제자 가운데에서 베드로가 자리하는
‘첫 번째’ 위치, 곧 그의 권위와 역할(6,68-69; 21,15-19 참조)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의 첫 번째 부활 이야기에서 무덤에 먼저 도착한 다른 제자의 위치도 지나칠 수
없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20장 8절에서 “보고 믿었다.”라고 표현하면서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를 가시적 현실을 넘어 부활의 초월적인 신비 현상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믿은 첫 번째 사람’으로 밝힙니다.
교회의 전통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를 요한 사도와 같은 인물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복음 속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의 모습을 통하여 요한 사도가 증언한 믿음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에게 좋은 본보기입니다.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
************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1요한 1,1-4 요한 20,2-8
오늘 우리는 요한 사도를 기억합니다. 공관 복음서에 따르면, 요한은 자신의 형인 야고보,
그리고 베드로와 함께 거룩한 변모 사건에서 드러났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겟세마니에서 고뇌하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한 제자였습니다.
넷째 복음서는 성인을 지칭할 때, 요한이라는 이름 대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합니다. 이를 달리 ‘애제자’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그런 특별한 호칭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복음서는 요한 사도가 어떤 이유로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는지 자세히 전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여 보입니다. 그도 예수님을 정말 많이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애제자의 사랑은 예수님 수난의 때에 분명히 드러납니다. 성전 경비병들이 예수님을
결박하여 한나스에게 끌고 갔을 때, 그는 저택의 안뜰까지 들어가는 용기를 보이며
바깥뜰에서 스승과의 관계를 부인하던 베드로와 대조된 모습을 보입니다(18,12-27 참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는 예수님 곁에 남아 있던 유일한 제자였고,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게 됩니다(19,25-27 참조).
특히 오늘 복음에서 그는 베드로와 함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달려가는데,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먼저 무덤에 다다릅니다. 예수님을 향한 애틋한 사랑,
그리고 부활의 현장을 한시라도 빨리 목격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그토록 빨리
달려가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여 봅니다.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은 그만큼 누군가를 또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들 합니다.
혹시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크다고 여겨지지 않는다면, 우리를 향한
예수님 사랑의 크기를 잘 가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그렇다면 우리는 적게 용서받은 사람들일까요?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하여,
먼저 예수님께 얼마나 큰 용서와 사랑을 받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여 봅시다.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