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롭다고 하신 믿음
로마서 4:13-25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사순절 둘째 주일이다. 어제는 대보름이었는데 오곡밥을 먹고, 부럼도 깨물었는가? 오늘 색동교회는 애찬 후에 정월대보름 민속인 윷놀이를 한다. 판을 잘 벌이길 기대한다.
오곡은 모든 곡식을 대표한다. 1년 농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선행 감사행위다. 부럼은 딱딱한 겉껍질을 가진 호두, 땅콩, 잣, 밤을 깨물면서 부스럼이 없고, 이가 튼튼한 무사태평한 한 해를 기원한다.
전통에 따르면 세 집 이상 오곡밥을 얻어먹어야 하는데, 요즘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이웃끼리 정이 돈독하고, 인정과 믿음이 좋았던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이 자랑스럽다.
문수산성교회 시절 유은자 집사님은 항상 정월대보름 음식을 정성껏 장만하였다. 오곡밥은 물론, 나물은 14가지를 준비하였다. 마른 나물 14가지를 하려면 1년 내내 나물을 뜯고 다듬고 말리고 간수하고 우려내고 무치는 수고를 해야 한다. 그때 처음 질경이와 민들레 나물을 먹어 보았다.
심지어 독일에서도 오곡밥을 먹었다. 이민자들은 한국의 명절을 늘 기억하였다. 기회만 생기면 밥을 나누어 먹었는데, 정월대보름 오곡밥도 단골 메뉴다. 한인교회는 밥상공동체였다. 저마다 추억의 밥, 고향의 밥, 그리고 믿음의 밥을 나누어 먹었다.
대보름이 지나면 본격적으로 봄을 맞이한다. 이즈음부터 농부들은 일찍이 농사준비를 한다. 도시에 사는 우리도 365일 날마다 농사와 같은 수고를 한다. 가장 힘든 것은 자식 농사다. 농부이신 하나님도 늘 자식 농사를 고민하신다.
늘 기도한다. 하나님이 내 자녀들을 어떻게 하실지, 간절해진다. 그리고 나 자신도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1)
로마서 4장은 ‘믿음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의’를 주제로 삼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복음의 핵심을 설명한 것이다.
믿음은 무엇인가? 본문에서 바울은 아주 쉽게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믿음을 설명한다. 믿음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17),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18)는 것이다.
오늘 설교 제목인 ‘의롭다고 하신 믿음’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먼저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경우,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에 약속을 주신 것이 아니라, 믿음 때문에 주신 것임을 강조한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13).
바울은 반문한다. 만약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께 의로움을 인정받고, 또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받게 된다면 율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받을 길이 막혀있는 것이 아닌가?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14).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바울은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 그 반대 입장의 개념인 율법을 예로 든다. 율법은 병이 무엇인지, 죄가 무엇인지 구별할 수 있으나 율법으로는 병을 치료하거나, 죄로부터 구원하지는 못한다. 율법은 청진기일 뿐이다. 병의 유무를 알 수 있으나 청진기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
율법의 완성은 선고이고, 심판일 뿐이다. 율법의 범법에는 그리고 진노가 따른다. 이러한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자가 될 수 없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바로 아브라함의 행위, 선행, 공로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2)
로마서는 믿음에 관한 한 대표적 모범사례로 아브라함을 손꼽는다. 아브라함이 보여준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대표적으로 두 가지 보기를 든다. 하나는 ‘떠나라’(창 12:1)이고, 또 하나는 ‘바쳐라’(창 22:2)이다. ‘떠나라’가 자기 조상, 고향, 추억과 같은 과거로부터 단절이라면, ‘바쳐라’는 희망, 기대, 의존과 같은 미래와의 끊어짐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자신의 과거와 또 다가올 미래와 ‘단절’된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구체적인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옳게 보셨다. 그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임을 인정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미덕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후손에 대한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었다는 내용이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19).
물론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도 종종 의심하고, 자기 나름대로 대안을 찾아보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바울이 한 마디로 평가하려는 것은 삶 전체를 통해서이다. 우리의 믿음은 일시적으로, 한때의 모습으로 평가받지 않는다. 인생 전체를 통해 그 진실함이 드러날 것이다.
비록 아브라함의 믿음이 일시적으로 흔들렸고, 불안정함으로 얼룩져 있지만 그의 믿음의 결과를 보라. 온전하였다. 그는 한결같이 하나님을 믿었고, 신뢰하였으며, 약속의 길을 걸어갔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3).
아브라함의 믿음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이나 자기 아내 사라를 볼 때 후손을 얻는다는 것은 상상은 할 수 있으나, 언감생심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17) 하나님을 믿었다. 더 나아가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18)다.
아브라함은 보이는 것을 믿음의 근거로 삼은 것이 아니다. 비록 눈으로 볼 수 없으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실존하시는 분으로, 나와 동행하시는 살아계신 전능하신 분으로 믿었다.
아브라함은 자신도 믿어지지 않은 그 일을 소망하였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런 것이다. 창세기부터 가르치는 믿음이 그것이 아닌가!
누구에게나 인생이란 건축과 같다. 공통적인 것은 무엇을 짓든 반드시 기초 위에 짓는다는 점이다. 바울은 인생의 기초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한다. 그는 아브라함이야말로 ‘믿음 위에 견고한 집을 지은 사람’임을 주장한다(20).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의 이름에 담긴 뜻처럼, 자기 믿음을 계승한 그의 후손들에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16).
3)
집집마다 자식들에게 믿음을 전하려고 마음을 쓴다. 모든 그리스도인 가정의 기도 제목이다. 비록 속이 터지는 일이 많더라도, 자식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부모는 없다.
지난 주간에 만난 장로교회 산업선교회에서 일하는 어느 여자 목사님에게 들은 이야기다.
아들이 군대에 가서 주일 오후면 아들과 통화를 한다. 늘 예배에 다녀왔는지 확인한다.
“아들, 교회 다녀왔니? 오늘 본문이 어디야?”
“에... 욥기인데요.”
“욥기가 어디에 있는데... 구약이야, 신약이야?”
“음... 화면에 있던데요.”
누구나 자녀들의 신앙상태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독일 전 대통령 로하네스 라우는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유명하다. 그가 얼마나 신실했던지 여야를 막론하고 그를 가리켜 라우 수사라고 불렀다.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의 삶의 의지 덕분임을 자녀들에게 말씀하십시오. 여러분의 용기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되었음을 그들에게 말하십시오. 우리는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의 가르침 위에 서있음을 자녀들에게 말하십시오.”(요한네스 라우).
흔히 믿음은 너무나 평이하고, 상식적이어서 이미 다 아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쉽게 예를 들어 믿음이 없이는 기도할 수 없다. 믿음 없이 드리는 기도는 한마디로 공염불일 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라. 내가 기도에 열심을 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들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것이 믿음이기도 하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다. 겉으로는 남들과 비슷한 삶을 살면서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을 바라보며 산다는 일은 얼마나 복 된 일인가.
그리스도인들이 의롭다고 여김을 받을 그 믿음은 무엇인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며,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다. 가장 귀한 생명까지도 나와 같은 죄인을 위해 내주신다는 믿음이다.
우리가 지닌 믿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셔서 자기 몸을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까지 고난 당하셨음을 믿는 믿음이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25).
세상에 종교도 많고, 신도 다양하지만 인간을 위해, 죄인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 일은 십자가 사랑 외에는 찾아 볼 수 없다. 성경이 말하는 단 하나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랑을 신앙고백을 통해 암송할 뿐 아니라, 내 삶 전체를 통해 믿고 증거 한다. 이 믿음 때문에 내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요, 약속의 상속자가 되었다.
그것이 우리 믿음의 전부이다. ‘믿음의 의’의 주체는 내가 아니다. 하나님이 믿어주시는 믿음이요, 그 믿음으로 우리의 믿음이 가능해진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 때문에 희망을 얻으며, 사랑할 수 있다. 믿음은 부정이 만연한 곳에서 긍정을 움켜쥐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은 두려워하면서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을 꿰뚫고 저편에 있는 희망을 잡는 사람이다.
믿음의 사람은 자기 안에 갇혀서 발을 옮기지 못하는 그런 겁쟁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을 가슴에 품고 은혜로 주신 약속을 바라보는 그런 사람이다.
사람은 크거나, 작거나 자신의 일을 도모할 때 자주 주저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을 가져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적어도 주저할 일은 없다.
성경의 주제는 바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이다. 이것은 내 능력이나 내 가능성이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믿어 주시는 일이고, 절대적인 주권으로 나를 새로운 삶의 출발점에 서도록 하시는 일이다.
불신앙은 하나님이 열어 두신 내 삶의 문을 스스로 닫는 사람이다. 인생에서 불평이 많은 사람은 기회의 노크 소리에도 시끄럽다고 귀를 막는 사람이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은 자기 자신의 문이 열려 있음을 안다. 지금 당장은 기회가 막혀 있어도, 장애물이 가로막아도 그는 하나님의 가능성을 믿는다. 그 하나님의 은총에 참여하라. 새로운 삶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기회를 붙잡으라.
하나님의 은혜가 믿음의 사람으로 살고, 또 믿음의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여러분 위에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