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 생존본능에서 문명이 시작되었다면 보고 듣는 모방본능에서 문화는 탄생했다. 생존본능은 육체가 대상과의 직접적 관계를 촉발하지만 모방본능은 몸이 대상과의 간접적 소통에 나선다. 외부로부터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얻어야 살아갈 수 있지만 또한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생각의 사로잡힘이라는 마중물이 있어 삶을 이룬다. 소유의 본능이 생존의 운명이라면 소통의 본능은 삶의 운명이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로 생각하는 사람을 지구상에 최초로 등장시켜 인간 존재를 분열시켰다. 육체는 도구요 생각은 목적이 되어버렸다. 진정한 생각은 정신과 육체의 통합이자 마음과 몸의 합일이겠으나 계몽에 근거하는 삶에 빠져들며 근대 문명인은 몸과 마음이 함께하는 자연적 삶의 양상(樣相)을 벗어나고 말았다. 생각하는 하나의 정신세계 즉 합리적 인본주의 세상을 만들어 몸을 연장이자 도구로 분리시켜버린 것이다. 몸의 성장에 맞추어 마음이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의 서막이다. 정신에 맞추어 육체의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현실의 문제이다. 이런 시행착오에 점점 더 노출되면서 생각은 몸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건전한 마음이 건강한 신체에 배이듯이 올바른 정신은 건강한 육체에 깃든다. 몸의 성장에 맞는 맞춤식 마음의 성숙이 합리적이다. 신체발달이 정신 발달과 함께함이 올바르다. 이런 절대적 시공간에서의 성장과정에 시차적 오류는 치명적이다. 육체와 정신의 활동이 경험적 시공간에서 이루어진다면 몸과 마음의 성숙은 현상적 시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경험을 통한 외부의 자극을 육체적 활동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성장에도 배어들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정신은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이 있지만 마음은 갈고닦는 연마의 행복감이 있다. 정신이 행복하거나 마음이 즐거울 수는 없다. 그것은 악마의 유혹일 뿐이다. 인간의 정신은 이성을 동원하고 인간의 마음은 감성을 동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뒤바뀔 때에 인간의 생각은 분열되고 몸은 열정은 과녁을 빗나간다.
몸과 마음이 함께하는 감정적 주관 세계와 육체와 정신이 함께하는 이성적 객관세계의 연계가 인간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전환시킨다. 즉 감정적 느낌을 이성적 논리와 통합시키는 동화(同化, mimesis) 능력이다. 마음은 현상과의 동조에 정신은 자연과의 동조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자연에 동조된 육체와 육체에 동조된 정신과 정신에 동조된 지성이 인간의 경험적 순리이며 이것은 인간 이성의 논리로서 작동되는 세계라고 한다면 현상에 동조된 마음과 마음에 동조된 감정과 감정에 동조된 무의식의 세계는 인간 감성의 역할로 작용되는 세계라고 여겨진다. 이성의 차가움과 감성의 따듯함이 함께 할 때가 바로 인간적 소통적 순리라 여겨진다. 어느 한곳으로 치우칠 때에 인간은 이념에 빠져들며 자신의 삶은 편향성을 띠게 되고 존재는 균형감각을 잃어간다.
왼손과 오른손이 있듯이 생각하는 인간에게는 이성과 감성 즉 정신과 마음이 함께해야 한다. 정신일도 하사불성이 어느 장군의 사자후이듯이 정신은 자신을 세우는 영역이다. 일체유심조라고 불교에서 선포하듯이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은 서로 간의 소통의 교감 즉 공조하고/ 합일하며/ 동화하는 것이기에 자신을 내리는 영역이다. 그런 감성적 교감과 교류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어미(母)가 있다. 아비에게서 정신의 동화가 이루어진다면 어미에게서 마음의 공조가 이루어지는 것이 세상의 순리라 하겠다. 하다못해 물리적 에너지의 전달 방식에서조차도 상호 동조가 이루어져야 가능해진다. 즉 유선이든 무선이든 동조회로(同調回路, tuned circuit)가 있어야지만 정보 전달이 가능하다. 함께하기 위해서는 공감하는 동조회로가 절대적이다. 감각의 축적이 지식이라는 공조 회로를 만든다면 감정의 누적은 감성이라는 공조 회로 즉 반(反)-지성 회로라 할 절연 회로를 쌓아간다. 즉 절연이 있기에 동조도 가능한 것이 세상사였던 것이다. 모든 입구는 받아들이기도 하지만(open) 차단하는 역할도(close)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완성은 생존이 우선이기에 불가능한 것이 인간의 운명일 뿐이다.
정신의 활동으로서의 문명과 마음의 활동으로서의 문화는 현실 세계와 초월세계를 서로 연계시키고 있다. 문명 세계가 있기에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는 문화의 세계도 가능한 것이다. 정신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물질적 토대 위에서 형성되기에 피를 재생하고 세포를 재생하기 위한 생존의 활동적인 생리현상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 또한 우주로부터 저절로 주어진 육체이기에 거기에서 우러나온 녹말(정신)을 물에 풀어 묵을 쑤면 된다. 마음 또한 피와 살로서 구성된 구조이지만 그 내부 신경들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기질적 감성이라는 대응적 토대 위에서만 활동이 가능하기에 물과 같이 실체 없는 실체인 것이다. 즉 담는 그릇에 따라 무한으로 변형된다.
물(마음)과 녹말(정신)로 먹고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채우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지만 그 작동은 주어진 태생에 따른다. 생각은 내 활동의 영역이자 성취의 영역이기에 내 스스로의 노력의 척도가 되는 내 소유의 인식 영역이 자 어느 누구도 뺏어갈 수 없는 고유의 영역이다. 결과적으로 정신과 마음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로 만드는 도구였던 것이다. 가장 연약한 육체적 존재이지만 생각에 의해 위대해진다는 것이다. 경험 없이 정신이 풍요로울 수는 없으나 마음은 얼마든지 건전한 자력갱생이 가능하다. 몸은 피동적이고 외부 자극적이지만 마음은 자발적이고 내부 쾌감적이다. 결국 존재는 남과여 합작품이며 생각은 정신과 마음의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우주적인 절대적 시공간이 놓여있다.
그러나 근대인은 신체로서의 몸의 중요성보다는 생각으로서의 정신의 중요성 즉 계몽을 강조해왔다. 정신이 건강하면 육체는 저절로 따라온다고 여긴 것이다. 정신이 주인이며 육체는 대상으로 여겼다. 만물의 척도는 인간 정신이었기에 계몽이라는 동조회로를 통해 인간을 더욱더 만물의 척도로 만들어야만 했다. 서구 중세 사회에서 인간의 생각은 하느님이 빛을 비추어주어야지만 작동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육체를 정신의 훼방꾼으로 여겼다. 인간의 의지와 결의는 불필요했으며 모두가 하느님이라는 동조회로에서 소통하고 교감하며 봉건사회를 구성해 안락하게 살았다. 근대는 그런 삶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자 계몽을 불러들여 합리적인 인본주의자가 되었다. 결국 근대도 육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정신에 의한 주체적 인간상의 정립에 몰입한 사회였다.
현대는 그런 근대적 정신에 대한 반란의 세기라 여겨진다. 육체가 먼저이며 정신은 육체에 종속된 영역이 되었다. 정신보다도 마음이 앞서는 시대가 되었다. 육체는 우주로부터 시작되어 내려오는 절대적 영역이었던 것이다. 진정한 초월적 존재는 육체였으며 육체에서 연결된 마음이 절대적 지위를 차지하며 정신은 한낮 그런 초월적 존재의 보조물이자 대응물이었던 것이다. 좋은 것과 싫은 것을 구분하는 마음의 분별력은 육체와 마찬가지로 천부적이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쾌감으로 그것은 절대화되었다. 정신이 아무리 연마를 해도 우주로부터 주어진 육체에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미리 형성된 마음을 넘어설 수도 없다. 즉 인간 지성의 연마를 아무리 해보아도 육체적 유전인자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더 안타까운 것은 몸과 마음은 인간세계에서 차별적이고 위계적이며 차등적인 물리적 존재물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성형을 하고 감성을 발달시켜도 육체적 인간의 한계 내에 갇힐 뿐인 것이다. 몸과 마음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우주적 영역에 동조된 개방회로였던 것이다. 아무리 정신세계에서 다양한 동조회로를 만들어 보았자 결국은 몸과 마음의 개방회로에 포용될 뿐이다. 구태의연한 계몽을 도입하고 과학적 반발을 시도해 보았자 우주에 닿을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세상의 바위를 정신이라는 지성의 화살로 아무리 꿰뚫어 보려고 해도 현실은 현실일 뿐이기에 결국은 심층이 아닌 세상의 표층만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자의식 즉 회의적인 인식만이 메아리쳐 되돌아올 뿐이었다. 과거에는 계몽으로 감추었으나 지금은 계몽도 구태의연해지면서 현실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막을 수도 없기에 외면하려 애쓸 뿐이다. 정신과 육체/ 몸과 마음이 동조되는 합일의 순간만이 인간의 삶에서 중요해졌다. 주어진 육체가 똑같지 않기에 정신 또한 차별적이며 차등적일 뿐이다. 평등한 인간 세계의 창조는 근대 계몽의 일환이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모습이었다. 그런 평등을 주장하고 평화를 말하며 정의를 외친 함성도 결국에는 폐쇄 회로 내에서의 파열음이었을 뿐이다. 육체(정신)는 아무리 외쳐보아야 대답 없는 자연이었던 것이다. 메아리를 듣고 음성으로 착각한 것이 인간의 정신이었을 뿐이다. 몸과 마음은 침묵했다. 어리석게도 몸이 성장하기도 전에 정신으로 마음까지 가혹하게 혹사시킨 죄과까지도 덤터기 쓴 인간은 더욱더 파멸로 내몰리고 있는 시절이다.
인간의 몸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우주적 절대 상황에 놓여있을 뿐이다. 어린 초등학생에게 철학을 가르칠 수 없으며 성교육으로 인간의 생식능력에 대해 가르칠 수는 없다. 인간 성(性)의 영역은 기다림의 세계 즉 마음의 영역이기에 교육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정신 우월의 어리석음이자 지식의 한계이다. 마음의 숙성을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함이다. 초등학생에게 성기의 기능을 교육하고 명칭을 알려줘 부모의 성생활을 적나라하게 교육하는 이유는 잘못된 계몽의 오류일 뿐이다.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생채기를 내어 부모를 더럽다고 욕하게 만들 뿐이다. 옛날 옛날에 아주 오랜 옛날이야기가 정식 교과서로 탈바꿈하는 꼴이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이기에 몸이 혹사당하거나 옷이 찢어질 뿐이다. 인간 경험의 건전함을 무시하는 오만이다. 미리 아는 것은 신의 영역이며 나중에 아는 것만이 인간의 도리이다. 건전한 성생활로 이끌지 못하는 방해꾼이자 구태의연한 어른들의 계몽일 뿐이다. 생리적 본능 세계는 배움의 세계가 아니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섭생(攝生)에 나서면 아침 먹기 전에 대변을 보는 것이 자연의 명령이지 인간의 명령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것이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다. 나이에 맞게 자연이 인도해 주는 신비의 선물이어야 한다.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을 수 있는가를 보여줄 뿐이다. 먼저 아는 것은 정신세계이며 나중에 깨닫는 것은 몸으로서의 경험의 세계라는 깨달음을 터부(taboo) 시 해야 인간의 도리가 살아난다.
몸은 먼저 알 수가 없는 존재이며 정신은 미래까지도 현재에서 상상하는 영역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뒤바꾼 교육은 그야말로 근대 계몽주의를 잘못 이해한 천방지축이다. 하늘에는 방향이 없고 땅에는 기준 축이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을 굳이 설정하려 고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인간의 성장에 맞추어 점진적으로 저절로 깨어나는 영역이 본능적 성의 영역일 뿐이다. 본능을 교육으로 뒤바꿀 수는 없다. 얇은 유리그릇에 강제로 밀어 넣으면 파손될 뿐이다. 알량한 정신으로 간여할만한 영역이 아닌 천부적 영역인 것이다. 잘 타고 있는 장작불을 들쑤시면 들쑤실수록 꺼져갈 뿐이다. 봄이 되어 피어나는 자연의 꽃을 인간이 때도 되지 않은 겨울철에 미리 강제로 피게 할 수는 없다.
한 번 인식된 인간의 인식은 지울 수 없다는 절대적 세계가 몸의 영역이었다는 사실을 무시한 정신승리의 함성이었던 것이다. 정신의 세계에서의 기억은 얼마든지 망각으로 사라질 수 있지만 마음에 새겨진 앙금은 인식되면 지울 수 없다. 그렇기에 몸에의 기억은 자연스러운 영역이 되어야 마땅하다. 사랑하는데 이유가 없듯이 예술품을 관람하는데 미학적 영역이 동원되듯이 무의식적이라고 우리가 말해온 영역이 바로 감정적 영역이며 그것은 인간의 성장에 발맞춘 동조의 영역이라 하겠다. 앎이 고통이라는 인식도 없이 주입식으로 몸에 맞지 않는 교육을 강제하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 파괴이자 자연 질서에 놓여있는 인간의 순리적 삶을 망치는 천방지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