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과 선운사는 여러번 다녀왔습니다. 이번 순례는 도솔암 마애불과 지장보살을 뵙기 위한 목적이었지요. 무엇에 홀린 듯 동선에 포함되었던 산내암자 석상암 미륵입상과 참당암 약사여래불을 놓쳐 버렸습니다. 다시 인연지으려 떠나야겠습니다. 2004년 4월 답사기를 일부 수정하여 올립니다. 사진은 2012년 3월 12일에 찍었습니다. 자료는 선운사 홈페이지, 문화재청,한국전통사찰관광정보, 다음 사이트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도솔산은 선운산(禪雲山)이라고도 하며, 조선 후기 선운사가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기도 하였다. 도솔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선운사는 김제의 금산사와 전북 2대 본사이다.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고승 검단(檢旦, 黔丹)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첫 번째 설은 신라의 진흥왕(재위기간 540∼576)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 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시대적ㆍ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검단선사의 창건설이 정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검단스님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이를 신이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의 창건이다. 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이 지역에는 도적이 많았는데, 검단스님이 불법(佛法)으로 이들을 선량하게 교화시켜 소금을 구워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주었다. 마을사람들은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봄ㆍ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갖다 바치면서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마을이름도 '검단리'라 하였다. 선운사가 위치한 곳이 해안과 그리 멀지 않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염전을 일구었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보아, 염전을 일구어 인근의 재력이 확보되었던 배경 등으로 미루어 검단스님이 사찰을 창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선운사 부도전
선운사 입구 비자나무 숲속에는 역대 선운사 고승들의 부도 20기와 11기의 행적비가 있는 부도밭이 있다. 이곳에는 설파상언(雪坡尙彦), 영호정호(映湖鼎鎬), 운기당(雲起堂) 등 명문이 있는 부도가 13기이며, 조성시기는 대체적으로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걸친다.
백파선사의 대기대용비...본래 비는 박물관에 전시중
2004년 幽玄이 옛님 올린 백파선사에 대한 글을 옮겨보면...
"서산(西山)의 문도 중에서도 가장 번성하였던 편양 언기(鞭羊 彦機)의 문파인 설파 상언(雪坡 尙彦, 1707~1791)대사는 영정조 간에 활발하게 전개된 선교의 연학(硏學) 분위기를 대표하는 고승이다. 서산의 7세손인 설파 대사는 바로 선운사가 있는 무장현 출신으로 19세에 선운사에 출가하여 여러 스승을 찾아 익히면서 언하(言下)에 깨우치지 않음이 없는 영특한 이였다. 특히 화엄교학에 뛰어나 중국 청량 대사의 화엄소초의 내용을 분명히 교정하기도 하여 후학의 길잡이가 되도록 하였다.
이 설파대사의 증손제자가 백파 긍선(白坡 亘璇, 1767~1852)대사이다. 백파대사 역시 무장현 출신으로 12세에 선운사에서 출가하였다. 증손 제자라고 하나 설파대사 만년에 직접 그에게 선지를 익히기도 하였다. 백양산 운문암과 구암사 등에서 선강법회를 크게 열어 선문의 중흥주라 불릴만큼 큰 자취를 남긴 백파대사는 초의선사와 삼종선(三種禪) 등 선문의 요지에 대해 왕복 토론을 벌임으로써 근세 불교계의 가장 치열한 교리 논쟁을 유발시켰다.
이는 생명력을 잃어가는 당시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가한 것이어서 이 논쟁은 이후로도 제자들에 의해 계속 이어졌다.이 토론을 거치면서 급변해가는 당시 세태를 살아가던 승려들은 그 때의 주된 흐름이던 선문의 종지를 근본적으로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백파대사는 또 당대 학예술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와도 두터운 교분을 가졌다. 추사 선생은 초의선사와 더욱 돈독한 우의를 나누었지만 백파대사와도 선지를 조목조목 들어 논박하는 상호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백파대사가 돌아가자 추사 선생은 도우를 보내는 자신의 아픈 심정을 비문으로 짓고 친히 걸작의 글씨를 써서 새기도록 하면서 백파대사와 자신의 토론이 세상 사람들의 말다툼과는 사뭇 다른 진정한 도의 나눔이었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이들을 통해서 볼 때 백파대사는 근대의 거센 파도가 넘실대던 변화의 시대를 살면서 전통 선지를 재정립함으로써 산문을 충실히 지켜 나가고자 애쓴 대종장(大宗匠)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답사를 떠나기 전에 참고하기 위해 읽었던 여러 책에서는 비에 글씨가 추사의 글이 아닌 부분도 있다고 했지만 내눈에 들어올리 만무하고 다만, 소프트 터치로 대기대용(大機大用)의 의미를 알아 보자
"견성 5단계 마지막 단계인 대기대용은 진리를 직접 실생활에 활용하는 법을 말한다. 1단계 만법귀일의 실체를 증명하는 공부와 2단계 진공의 실체를 아는 공부, 3단계 묘유의 용을 아는 공부를 견성이라면 견성후에 깨친 그 자리를 잘 단련하는 것이 4단계 보림하는 공부이다. 5단계 대기대용으로 활용하는 공부는 잘 단련한 진리를 실생활에 직접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기(大機)라 함은 시방세계에 자성의 정력을 나타내며, 유(有)와 무(無)에 사로잡히지 않고, 공(空)과 색(色)에 기울어지지 않고, 동(動)과 정(靜)에 걸리지 않고, 육근(六根)과 육진(六塵)을 초월에서 본분에 안주함을 말한다.대용(大用)이라 함은 대기 그대로 모든 사물에 활용함을 이름이니 원만구족한 자성에서 지공무사한 작용을 말한다."
뭐? 이해하기 어렵다고요?저 역시 오십보백보 입니다.스님네들 견성 성불하는 과정이며 심우도와 연결하여 가벼얍게 지나갑시다.백파와 치열하게 유불선에 관한 논쟁을 벌였던 추사는 제주도 귀양 시에 삶을 관조하는 잣대가 성숙하여 세상을 달리 보게 되었다고들 하잖아요.
추사는 귀양이 풀린 후 돌아가는 길에 백파와 만나기 위하여 장흥(?)에서 만날 약속을 하였으나 불순한 일기탓에 해후를 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더 깊은 내용을 알고픈 분은 유홍준 교수의 완당평전 참조 요망) 세월이 흘러 백파가 세상을 등진 다음에 추사가 백파를 인정(?)하고 글을 남긴 것이 선운사 부도전에 서있는 대기대용비이니 울카페 회원 여러분이 답사시 참고하길 바라며 비문을 옮겨 온다
"우리나라에는 근래에 율사(律師)로서 일가를 이룬 이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만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고로 여기에 율사라고 적은 것이다.
대기대용(大機大用), 이것은 백파가 팔십 평생 가장 힘들인 곳인데 혹자는 기용(機用)과 살활(殺活)을 지리하고 억지스럽다고 하지만 이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무릇 보통 사람들을 대치함에 어느 것이나 살활과 기용 아닌 곳이 없으니 비록 팔만대장경이라고는 하나 어느 것 하나 살활과 기용에서 벗어난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뜻을 모르고 허망되게 살활과 기용을 갖고 백파가 고집했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하루살이가 느티나무를 흔들려는 격인 것이다. 이래서야 어찌 백파를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내가 백파와 더불어 여러 번 왕복서한으로 변증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헛되이 의논하는 것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알고 있을 따름이다.
비록 만 가지 방법으로 입이 쓰도록 사람을 설득하려 해도 모두 깨닫지 못하니 어찌하여 백파를 다시 일으켜 서로 마주보고 한 번 웃어볼 수 있을 것인가! 이제 백파의 비문을 지으면서 만약 대기대용, 이 한 구절을 크고 뚜렷하게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백파비로서 부족하다 할 것이다. 설두, 백암 등 문도들에게 이것을 써주면서 과로(果老)는 다음과 같이 부기하노라.
가난하기는 송곳 꽂을 자리도 없었으나 기상은 수미산을 덮을 만하도다 어버이 섬기기를 부처님 모시듯 하였으니 그 가풍은 정말로 진실하도다 속세의 이름은 긍선이나 그 나머지야 말해 무엇하리오 완당학사 김정희가 찬하고 또 쓰다"
성보박물관
2007년 개관하였다.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이다.주 전시품으로는 백파선사비, 선운사금동지장보살좌상 등 보믈 2점을 비롯 약 160점이 전시되어 있다. 관람요금은 무료이며 개관시간은 오전 9시~오후 5시이다. 월요일은 휴관이며 점심시간은 폐관한다.
어디서 오신 부처님이신지요? 선운사 인근에 있던 불상을 도난 방지를 위해 옮겨온 석불이다. 조선후기에 조성된 미륵불로 전하며 전체적으로 얼굴이 크고 불신이 작게 표현되었다. 민불 느낌이 든다.
천왕문
도솔교를 건너서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에 해당하는 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위층에는 조선시대 명필로 이름을 떨쳤던 원교 이광사가 쓴 '천왕문'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기록에 의하면 천왕문은 1624년 창건된 것으로 전하지만 현재의 문은 1970년에 건립된 것으로 최근 사역을 정비하면서 앞쪽으로 이건되었다. 아래층에는 중앙에 통로를 내고 좌우 협칸에 사천왕상을 봉안하여 천왕문의 성격을 가지게 했는데, 위층에는 범종을 두어 범종루의 역할도 겸하게 하였다.
천왕문 2층 범종루
출처...문화재청
선운사 천왕문 2층에 걸려 있는 조선 후기의 범종이다. 이 범종은 한국 범종의 특징인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이 없는 대신 윗면에 1개의 구멍을 뚫었고, 용뉴는 2마리 용으로 만들었다. 어깨부분에는 2줄의 선을 둘렀는데 선 안쪽으로 명문을 새겼다. 몸체 중앙에는 3개의 돌출된 선을 둘러 위와 아래로 구분해 놓았고, 윗부분에는 연화당초문대로 사각형 유곽대를 만들었으며, 그 안에 가운데가 돌출된 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서 있는 보살을 양각하고, 머리 위로 8개의 작은 원을 만들어 원 안에 범자를 하나씩 새겨 넣었다.
용추는 머리부분이 외방을 향한 쌍두용을 투각하였고, 복잡한 세부처리는 주조한 다음 동편을 잘라 부착시키는 수법을 사용하였다. 이 범종에는 음각된 '茂長縣禪雲寺大鍾重六百五十斤 嘉慶二十三年戊寅九月日 改鑄 都片手 嶺南 權東三 副 李命還…'이라는 명문이 있다. 이를 살펴보면 순조 18년(1818)에 도편수 권동삼과 부편수 이명환에 의해 개주(改鑄)되었으며, 이때 선운사 주지인 처영(處英)스님이 도감으로서 주조를 감독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만세루
정면 9칸 측면 2칸 규모의 강당건물로서, 고려시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19세기 말에 중건된 익공계 구조의 맞배지붕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절의 창건 당시부터 건립되어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현재도 700년이 된 두 개의 아름드리 기둥이 남아 있어 옛 자취를 느끼게 한다. 넓은 평면에 비해 높이가 낮고 비규격적인 누(樓)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 어칸 폭은 양협간에 비해 넓다. 자연석 기단에 기둥은 일부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사용하였고, 자연목을 다듬지 않은 채 껍질만 벗겨 쓰기도 하였다. 어칸의 양쪽을 제외하고는 모두 판벽으로 처리하였으며, 내부의 서쪽 앞 두 칸씩은 칸막이로서 2층 구조를 만들어 종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만세루
대들보 위에는 낮은 동자주를 얹었고 기둥 윗부분에는 작은 나무토막들을 포개 쌓았다. 특히 뒷면이 대웅전과 마주보며 개방된 것은 설법을 위한 강당의 기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전면의 판창을 열면 대웅전의 앞마당에서부터 강당을 포함한 공간이 막힘없이 트이게 되어 통풍과 전망을 아울러 배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바닥은 우물마루로 하였다.
대웅보전은 조선 성종 3년(1472)에 중건하여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 5년(1613)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긴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고, 전체적으로 기둥 옆면 사이의 간격이 넓고 건물의 앞뒤 너비는 좁아 옆으로 길면서도 안정된 외형을 지니고 있다. 다포계, 맞배지붕, 벽의 양 측면에는 풍우를 막기 위해 널판으로 풍판을 대었다. 막돌 허튼 층쌓기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모든 칸에는 빗살 창호를 달았으나 후면에는 중앙 칸에만 창호를 달고 양 측면의 협칸에는 교창을 달았다. 동쪽 면은 모두 벽체로 처리하고 서쪽 면에는 외짝 출입문을 달았다. 내부는 통칸으로서 불벽을 한 줄로 세워 그 앞에 불단을 만들었다.천장에는 사실감이 돋보이는 커다란 운룡문이 그려져 있고, 안쪽 천장에는 우물천장을 설치하여 구름ㆍ학ㆍ연꽃 등으로 장엄하였다. 내부 벽에는 산수ㆍ비천ㆍ나한 등을 벽화로 장식하였고, 닫집과 중앙의 불단 등은 비교적 간략하고 단순한 모습이다. 이 건물은 미술사적으로 조선 후기의 뛰어난 건축기술과 조형미를 지니고 있다.
2기 괘불대. 현재 마모되기는 했으나 옹정육년(雍正六年, 1728년)과 가경삼년(嘉慶三年, 1798년)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팔각원당형 석등. 기단과 하대석이 하나의 돌이다. 하대석에는 보련이 피었고 중대석은 팔각이다. 상대석은 본래 부재가 아닌듯 보인다. 화사석은 결실되었고 옥개석은 남아있다. 고려시대 석등으로 생각된다.
방형의 축대 안에 지대석을 놓고 정사각형의 돌 윗변을 둥글게 처리한 하대석을 얹었다. 기단면석에는 우주를 조각하였다. 갑석은 방형으로 두텁고, 하부는 수평으로 다듬고 중앙에는 1단 받침이 보이고 낙수면 기울기는 희미하다. 몸돌은 한 개 부재로 조성하고 양우주를 모각하였다. 추녀는 수평을 유지한 채 하늘을 향해 약간 반전되어 있고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한 편이다. 전체적으로 탑신의 2층 옥신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고 3층 옥개석 역시 2층에 비해 폭이 좁아져 체감률이 심한 편이며, 3층 이상부터는 동일한 체감률로 이루어져 있다.
6층의 옥개석 위에 노반이 있고 노반 위에 복발이 남아 있으며, 그 위에 팔각의 귀꽃으로 각출된 보개를 얹어 놓았다.
사적기에는 조선 성종 때 행호선사(幸浩禪師)가 홀로 우뚝 솟은 이 9층 석탑을 보고 사찰의 중창을 도모하였다고 적고 있어, 현재의 탑은 성종 이후 3층이 유실된 것으로 추측된다.
자료에는 없지만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로 판단된다.
불단에는 소조 삼존불을 봉안하고 삼존 사이에는 근래에 조성된 보살입상을 협시로 세웠다. 석가모니불이 주존이 아니라 비로자나불이 주존이어서 숨은 내력이 있는 듯 하다. 삼존은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왼쪽에 아미타불과 오른쪽에 약사불을 모셨다. 삼존불상 뒤의 후불벽화는 1688년(숙종 14)에 조성한 것으로, 중앙의 비로자나불회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회상도·약사회상도가 각각 자리 잡고 있다. 천장에는 사실감이 돋보이는 커다란 운룡문이 그려져 있고, 안쪽 천장에는 우물천장을 설치하여 구름ㆍ학ㆍ연꽃 등으로 장엄하였다. 내부 벽에는 산수ㆍ비천ㆍ나한 등을 벽화로 장식하였고, 닫집과 중앙의 불단 등은 비교적 간략하고 단순한 모습이다. 이 건물은 미술사적으로 조선 후기의 뛰어난 건축기술과 조형미를 지니고 있다.
비로자나불회도는 세 폭의 벽화 가운데 중앙 그림으로, 거대한 화면에는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가섭존자와 아난존자, 상단에 사천왕이 배치되었다.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은 화면 아래에서 줄기가 솟아 올라온 연화좌 위에 자리하고 있다.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가진 비로자나불은 소용돌이 모양의 나발(螺髮)에 쌍꺼풀진 눈, 내려온 눈썹이 특징적이다. 색조는 적색ㆍ녹색ㆍ흰색이 주조색이며, 전체적으로 푸른 색조를 띠고 있다.
약사불회도는 약합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며, 상단에 2보살과 4제자가 배치되었다. 약사삼존도 비로자나삼존과 같이 화면 아래에서 줄기가 솟아 올라온 연화좌 위에 자리하고 있다.
아미타불회도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상단에 2보살과 2제자, 팔부중 가운데 2위가 배치되었다. 색채는 적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지만 녹색 계열과 흰색 등이 많이 사용되어 전체적으로 푸른 느낌이 많이 돈다.
대웅보전 독성탱
대웅보전 불단 후벽 백의관음
대웅보전 불단 후벽 금강 역사
동백나무 숲
동백나무숲은 백제 위덕왕 24년(577) 선운사가 세워진 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나무의 평균높이는 약 6m이고 둘레는 30㎝로서, 절 뒷쪽 비스듬한 산 아래에 30m 넓이의 가느다란 띠모양으로 조성되어 있다. 동백나무는 차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ㆍ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란다. 꽃은 이른 봄에 피는데 매우 아름다우며,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春栢)ㆍ추백(秋栢)ㆍ동백(冬栢)으로 부른다. 이 동백나무숲은 아름다운 사찰경관을 돋보이게 하고 있으며, 사찰림으로서 문화적 가치와 동백나무숲으로서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2004년 답사기다. 예상한대로 동백은 지고 푸르른 잎만 보였는데 답사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예쁜 아가씨들이 조잘댄다 "그래도 동백꽃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라고 허허참 내눈엔 왜 안보였지? 그렇지!!! 선운사에 취해서 내가 적녹색약 이란 것을 망각하고 멀리서만 바라보고 동백꽃 군락에 가까히 갈 생각을 않았으니...
선운사 동구...미당 서정주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거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읍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앗습디다
선운사는 동백 그리고 미당 서정주를 떼어 놓고 이야기를 진행할 수 없지 않은가? 비슷비슷한 동백꽃 전설이 있지만 울릉도에 전해오는 전설을 옮겨보면...
"어느 마을에 금슬이 좋은 한쌍의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볼일이 있어서 육지로 가게 되었다. 하루 이틀 지나가면서 남편이 돌아온다던 날이 다가왔다. 그러나 남편이 약속한 날이 지나가고 또 지나가도 배는 오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친 상태에서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남편은 돌아올 줄을 몰랐다. 아내의 간절한 기다림은 어느덧 가슴에 병이 되어 응어리져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내는 자리에 드러 눕게 되었고, 이웃 사람들의 정성어린 간병도 아랑곳 없이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숨을 거두면서 "내가 죽거던 남편이 돌아오는 배가 보이는 곳에 묻어 주세요" 하고는 고요히 눈을 감았다. 마을 사람들도 하도 가여워 죽은 여인의 넋이라도 위로해 주려고 바닷가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장사를 치르고 돌아오니 그 집 앞뜰에 있는 후박나무에 수없이 많은 흑비둘기 떼가 날아 들어 우는데 "아이 답답 열흘만 더 기다리지. 넉넉잡아 온다. 온다. 남편이 온다. 죽은 사람 불쌍해라. 원수야. 원수야. 열흘만 더 일찍 오지 넉넉 잡아서"라고 하는 것처럼 울어대어서 마을 사람들은 기이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날 저녁에 육지에서 남편이 배를 타고 돌아왔다. 남편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아내의 죽음을 듣고는 무덤으로 달려가 목놓아 울었다. "왜 죽었나. 1년도 못참더냐. 열흘만 참았으면 백년해로 하는 것을 원수로다 원수로다 저 한바다 원수로다 원수로다 몸이야 갈지라도 몸이야 갈지라도 넋이야 두고가소. 불쌍하고 가련하지" 하고 통곡하였다. 남편은 아내 생각에 매일같이 무덤에 와서는 한번씩 슬프게 울고는 돌아가고 했는데 하루는 돌아서려니 아내 무덤 위에 전에 보지 못하던 조그마한 나무가 나 있고 그 나뭇가지에는 빨간 꽃이 피어 있었다."
그리고 동백꽃과 공생하는 동박새 이야기도 알고 넘어가자. "이 꽃은 눈이 하얗게 내리는 겨울에도 얼지 않고 피어 있었다. 이 꽃이 지금 울릉도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동백꽃이라고 한다. 동박새. 동백나무의 꽃은 조매화(鳥媒花)입니다. 조매화란 암술과 수술의 꽃가루가 혼인하도록 중매장이 역할을 다른 대부분의 꽃들처럼 벌 나비가 하는 게 아니라 새가 맡아서 하는 꽃을 말하는 것이에요. 동백꽃의 중매장이인 새는 동박새라는 깃털이 아름다운 작은 새입니다. 눈의 둘레가 희다 하여 백안작(白眼雀)이라고도 불리는 동박새는 작은 곤충도 잡아 먹지만 동백나무에 꽃이 피면 그 꿀을 따고, 열매를 맺으면 열매를 먹고 삽니다. 동백나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지요. 동백꽃은 향기가 없는 대신 강한 빛으로 동박새를 불러들여 혼인을 성사시키면서 그 대가로 동박새에게 꿀을 제공하는 거지요"
신석정과 더불어 이곳 출신인 미당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그에 대한 해석은 울카페 회원들의 고유의 해석에 맡겨두고 여기서는 향후 답사시 참고 자료로 활용 목적으로 미당의 생애와 문학 흐름을 옮겨 놓으니 유용하게 소화하시기를 바랍니다.
1915. 5.18.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 마을에서 출생. 호는 미당(未堂:아직 성숙하지 않았다.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다 는 뜻). 다츠시로 시즈오는 그의 창씨개명시 이름. 일제시대 창씨개명해 근대교육을 받은 아버지 덕분에 비교적 유복하게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다. 마을에서 한학을 배우다 줄포공립보통학교 진학 후 졸업,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보결로 입학한 후 2학년때 광주학생운동 1주년 기념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퇴학당하고 1930년 구속됐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기소유예 됨. 편입한 고창고등보통학교에서도 권고 자퇴당하는 등 학교 생활은 평탄치 못했음.
중앙불교전문학원(동국대 전신)수학(1935-1936). 젊은 시절 정신분열증세를 보인 적도 있었으며, 자살 미수사건도 있었음. 1933년 [동아일보]에 시<그 어머니의 부탁>을, [시건설(詩建設)] 7호(1935.10)에 시 <자화상>을 발표하며 등단.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 당선(1936), 김광균, 김달진, 김동리, 오장환, 이용희, 함형수 등과 시전문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 주재. 해방 후 좌우익 대립의 혼란시에 순수문학 또는 순수시라는 개념을 내걸고 우익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1946), 시분과위원장을 역임하며 당시 문단을 주도한 좌파의 계급문학 또는 경향문학에 반대하여 조선문학가동맹과 맞섬. 남조선대(동아대) 창립시 교수(1946), 동아일보 사회부장 및 문화부장, 정부수립후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1948), 조선대 부교수, 서라벌예대(동국대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의 전신)교수, 동국대 교수(1959-1979) 및 종신교수,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창립멤버로 시분과위원장, 1954년 예술원 창립과 함께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고 한국문협 부이사장(1969-1972) 및 이사장(1977), 한국현대시협회장(1970-1974) 역임. 아세아자유문학상(1955), 대한민국 예술원상(1966), 중앙일보 문화대상 본상(1980)수상.
한국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노벨 문학상 후보에 추천(5차례) 됨. 서정주 시전집(2권. 민음사) 출간(1991). 부인 방옥숙(方玉淑)씨 별세(2000.10)이후 곡기를 끊고 맥주로 연명하다 2000.12.24. 13시 서울 강남 삼성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85세). 재미 변호사와 재미 심장 전문의인 승해(升海)와 윤(潤) 두 아들을 둠.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선영에 묻힘. 정부는 12.26 고인에게 금관 문화훈장을 추서함.
3. 활동 및 작품경향
생명파(인생파) 시인으로 사상기조는 영원주의(영생중의), 문화사조상 극정적 낭만주의, 예술관은 심미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전통적 서정세계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토착적인 언어의 시적 세련을 이루었고, 시 형태의 균형과 질서가 내재된 율조로부터 자연스럽게 조성된 점 등이 커다란 문학사적 성과로 평가된다. 생전에 자신의 시세계를 스스로 생명파, 또는 인생파로 규정하고 1949년 「조선명시선」을 편찬하여 ≪시인부락≫과 ≪생리≫의 동인들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면서 이들은 인간 본연성의 회복을 지향하는 휴머니즘을 근간으로 삼고 있다고 말함.
그는 고향의 원초적 서정과 외국의 문학세계의 영향을 받아 30년 대를 풍미한 김기림과 이상의 모더니즘이나 초현실주의를 극복 대상으로 삼는 한편 20년대의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시적 경향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니체로 이어지는 신성과 초인정신에 대한 관심, 보를레르와 이백이 강조했던 인간의 질곡과 자연의 시심, 유.불.선의 동양사상과 샤아머니즘 및 전통정신사상을 두루 섭렵하고 광범위한 문학적 체험을 거쳐 김영랑의 순수시와 우리말의 아름다움에 강한 애착을 보이며 민족전통과 정신의 세계를 형상화 하였다.
첫시집 <화사(1938)> 에서부터 마지막 15번째 시집 <80 소년 떠돌이의 시(1997)> 에 이르기까지 정열적으로 새로운 시세계를 일궈내 해외에 대표 한국시인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시의 학교", "시인 중의 시인", "큰 시인들 다 합쳐도 미당 하나만 못하다", "시의 정부 (政府) " , "한국이라는 부족 언어의 주술사" , "시선(詩仙)"으로 불릴 정도로 한국시의 최고 경지를 일궜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 이는 동국대 및 서라벌예대 교수로 재직하며 배출한 제자 문인들이 현재 문단의 중추를 이루는 등 많은 시인과 문인제자를 양성 한 몫도 크다 하겠다.
등단 이후 60여년간 미발표작 포함 1천편에 가까운 시를 다산(多産)하였는데 이는 국내에 유례가 없고, 외국에서도 독일의 괴테나 헤르만 헤세 정도가 비견될 정도 임. 한국전쟁 후 반공 국시가 더욱 강화되면서 그의 시적 경향이 남한 문학사의 주류로 자리잡았고, 이후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무려 10편 가량의 시가 실리는등 다수의 작품이 교과서에 수록됨으로써 국민의 보편적 정서에도 상당히 깊숙한 영향을 주었으며 한국 문학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설의 김동리와 비견되는 시문학의 교주(敎主)로 ‘미당 사단’이라는 거대 계보가 형성됐으며 이는 교수시절 기른 이원섭, 이제하, 황동규, 고은, 김초혜 등 수많은 제자와 신춘문예등 심사위원으로 등단시킨 문인등이 학계 언론계 및 주류 문단의 중진으로 포진하고 각종 문인협회조직에의 참여와 정권의 비호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룬 결과였다.
일제 말기 징병을 종용하는 글과 친일시를 발표하는등의 친일행적으로 반민족 매국친일파로, 해방 직후 친일파를 대거 중용, 정치기반으로 삼는 동시에 반공을 국시로 한 이승만 정권과의 관계, 80년 신군부 등장 이후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후보의 찬조 연사, 대통령 당선축하 축시헌사, 광주항쟁과 전두환정권 수립 와중에 TV방송에 출연해 행한 전두환 (全斗煥) 군사파쇼정권에 대한 지지 발언등의 정치 참여로 일제 및 독재권력 주변을 맴돌며 훼절한 문인이라는 불명예와 “아부와 굴종”이라는 지탄 및 반민중 반민주 친독재 야합인물로 불리는 오점을 남김. 1992년 월간 ‘시와 시학’에 친일행적 시비와 관련, “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썼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공인함.
- <오장(伍長) 마쓰이 송가(頌歌)> 부분 - <서정주>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귀국대원 귀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 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는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국내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후배들의 따가운 비판 대상이 됐고, 과거의 시 세계도 빛이 바램. 문학교육 현장에서도 부정적 인식이 확산돼 국정교과서에서 그의 시가 잇따라 배제됐으며 검인정 교과서도 일부만이 제한적으로 수록됐다. 이 때문에 자신이 추천한 시인 고은씨 등이 차례로 등을 돌린데 대해 서운함을 털어놓기도 했으며. 그의 와병을 계기로 일부 계간지와 언론이 미당의 부끄러운 과거와 문학과의 상관 관계에 대한 논의를 벌이는 등 그의 평가와 관련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초기 (화사집~해방전)
보들레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악의미를 추구하는 악마적이며 원색적인 시풍을 보임. 첫 시집 [화사집(1938)]은 미당의 이러한 제 1기 시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토속적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 인간의 원죄의식과 원초적인 생명력을 읊으며 자의식과 관능적 욕구에 몸부림 치는 젊음과 원죄적 세계관을 치열하게 드러냈다.
중기 Ⅰ (귀촉도~서정주 문학전집)
귀촉도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西域(서성) 三萬里(삼만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巴蜀(파촉) 三萬里(삼만리).
신이나 삼아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미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은 이 머리털 엮어드릴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 하늘 굽이굽이 은하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인간의 운명적 업고(業苦)에 대한 인식이 동양사상의 영향으로 영겁의 생명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환됨과 동시에 초기 시의 열정이 한 차원 높게 승화됨. [귀촉도(1948)]는 미당의 두 번째 시집으로 표제시에서 부터 동양적인 귀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분열이 아닌 화해를 시적 주제로 함. 이런 변화는 갈등과 화해라는 심리적 변동과, <국화옆에서>, <밀어> 등에서 볼수 있듯이 토착적 정서와 고전적 격조로의 지향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초기시에서 보여준 젊음의 열정이 순화되어 한국의 전통 가락과 한의 세계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서정주시선](1956년 간행)의 <풀리는 한강 가에서>, <상리과원> 등에서 민족의 전통적인 한(恨)과 자연과의 화해를, <학>, <기도> 등 에선 원숙한 자기 통찰과 달관을 보여주는데 이로써 시인은 원죄나 젊음의 방황을 극복하고 낙천적으로 변모한다. 그 낙천성은 한의 극복과 함께 적당한 체념으로서 원만하게 삶을 끌어안으려는 자세를 나타낸다 하겠다.
중기 Ⅱ (신라초~동천)
동천(冬天)
내 마음 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옯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불교와 토착적 전통의 융화를 바탕으로 한 언어의 조탁. 샤머니즘과 유교, 노장사상 등 폭넓은 동양사상을 탐구하며 초기부터 이어져온 윤회 사상과 인연설에도 눈을 돌린다. 미당의 시는 [신라초]에 이르러 새로운 정신적 경지에 도달한다. 그에게 있어 초월적인 비전의 신화적 거점이 되고 있는 신라는 역사적 실체라기보단 인간과 자연이 완전히 일체가 된 상상의 고향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신라초(1961)]에서 불교사상에 기초를 둔 신라의 설화를 제재로, 영원회귀의 이념과 선(禪)의 정서를 부활시켰으며 생명의 근원적.윤회적 탐구로 나가가려는 그의 노력이 신라의 불교적 세계관으로 천착되어 나타난다. 시집 [동천](1969)에서는 불교의 상징세계에 대한 관심이 엿보임과 동시에 종교나 세계관의 차원을 넘어 사람뿐 아니라 귀신은 물론 전 우주와 공감할 수 있는 시적 깊이와 폭을 지니게 된다.
후기 (질마재신화 이후) 1970년대 고향 질마재의 유년 시절로 회귀하여 또 다른 시 세계를 개척한다. [질마재 신화(神話)](1975)에서 시인은 전통적인 ‘이야기꾼’으로 변모하여 촌락 사회의 일상에서 우리 고유의 전통을 발굴, 질펀한 토속어로 흥미진지하게 이야기함으로써 우리의 이러저러한 삶을 신화적 단계로 끌어올리는 탁월한 능력을 보임. 1977년 이후 킬리만자로에서 남태평양의 조그만 섬까지 세계 곳곳을 떠돌며 그곳의 풍물과 사상, 종교, 철학 등을 시로 담는 한편 1980년대 정치적 굴곡 속에서도 끊임없이 시를 창작한다.
말 기 만년의 삶을 왕성한 시작으로 보내며 노익장을 과시한 시인은 세계 여행의 체험과 자연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1990년 ‘산시(山詩)’ 창작에 착수하여 세계의 산 이름을 소재로 산의 상징과 의미 그리고 이미지를 형상화한 시집 [세계의 산 시](1990), [늙은 떠돌이의 시](1993년), [80 소년 떠돌이 시](1997년)를 선보이며 청년기부터 간직해온 신화적 상상력을 세계 각국의 지리와 민화 전설로 까지 지평을 넓히는 등 세계 여행 중에 바라본 남의 세계마저도 우리의 신화체계 속에 간단없이 용해시키는 경지에 까지 이르게 된다.
영산전에 봉안된 목조삼존상으로서, 석가모니불 좌상을 주존으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 입상이 양쪽에서 협시하고 있다. 석가여래좌상은 머리가 크고 얼굴은 방형에 가깝다. 삼도가 좁게 표현되어 있고, 법의는 통견이며 군의가 표현되어 있다. 수인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서 손 등을 위로 하여 중지를 무릎에 접하고 있고, 왼손은 손 등을 밑으로 하여 제2지와 무지를 맞대고 있다. 양 협시보살은 화려하게 장식된 보관을 쓰고 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다.
명부전 앞 석조물. 특별한 용도를 확인하지 못하겠다.
관음전
관음전은 대웅보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대웅보전과 영산전 사이의 요사채를 관음전으로 사용하다가 이를 허물고 1990년 지금의 자리에 신축하였다. 그러나 선운사사적기에 1474년 관음전을 완공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정유재란으로 폐허가 된 이후 중창을 하면서 1705년에도 관음전을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부터 부속전각으로 존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문화재청
예전답사에서는 관음전에서 뵌 기억이 남아 있는데, 지금은 문 닫힌 성보박물관에 봉안된 것 같다.
조선 초기의 금동지장보살좌상이다. 머리는 고려시대 지장보살상에서 폭넓게 나타나는 두건을 쓴 모습이며, 두건을 묶은 좁은 띠가 이마를 두른 후 귀를 덮고 양 가슴부분까지 내려와 있다. 풍만한 얼굴에 조그마한 아래턱 주위로 살집이 많은 이중턱을 이루어 후덕한 인상을 주며, 목에는 굵게 주름진 삼도가 표현되어 있다. 하체는 무릎 높이가 낮아서 상체에 비해 빈약한 편이고, 결가부좌한 다리는 옷에 덮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까지 들어서 엄지와 넷째손가락을 맞댈 듯 굽혔고, 왼손은 아랫배에 붙여서 엄지와 중지를 약간 구부렸는데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에서 끈으로 매듭지은 독특한 치레장식이 특징적인데, 이는 고승의 진영이나 불ㆍ보살상에서 보이는 형식이기도 하다. 겉옷 안에는 수평으로 가로질러 가슴까지 올라온 군의(裙衣)를 띠매듭으로 단정하게 동여매었다. 이 보살상은 선운사 도솔암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 후기의 선운사지장보살좌상(禪雲寺地藏菩薩坐像, 보물 제280호)과 목걸이 장식이나 밋밋한 가슴표현 등이 유사하지만, 머리가 크고 하체가 빈약하여 신체비례가 부자연스러운 점, 목이 짧고 어깨가 올라가 움츠린 듯한 자세, 간략한 장식과 형식적인 옷주름 등은 고려 보살상의 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조선 초기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지장보살상은 일제강점기에 도난을 당한 적이 있는데, 이때 영험함을 보인 사실로 인해 더욱 널리 추앙받고 있다. 1936년 어느 여름에 일본인 2명과 우리나라 사람 1명이 공모하여 보살상을 훔쳐간 뒤, 거금을 받고 매매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지장보살상이 영이(靈異)를 나타내기 시작하여, 소장자의 꿈에 수시로 나타나서 "나는 본래 전라도 고창 도솔산에 있었다. 어서 그곳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하였다. 소장자는 다소 이상한 꿈으로만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이후로 병이 들고 가세가 점점 기울게 되자 꺼림칙한 마음에 보살상을 다른 이에게 넘겨 버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지장보살이 소장자의 꿈에 나타났으나 그 역시 이를 무시하였고,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게 되자 다시 다른 이에게 넘기게 되었다.
그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이 보살상을 소장한 사람들이 겪은 일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소장하게 된 사람이 이러한 사실을 고창경찰서에 신고하여 모셔갈 것을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당시 선운사 스님들과 경찰들이 일본 히로시마로 가서 모셔오게 되었는데, 이때가 도난당한 지 2년여 만인 1938년 11월이었다. 당시 잃어버린 보살상을 다시 모시고 온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찍은 사진에도 사건에 대한 개요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주지는 '이우운'으로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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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답사기는 이렇게 끝내었다. "미당과 동백꽃,추사와 백파대사 대기대용 비를 언급하고 나서는 도대체 글을 쓰기가 싫어진다. 본래 여행기,답사기라는 거창한 타이틀 보다는 다녀온 곳의 감흥과 느낌을 노트에 일기체로 정리하였었다. 하지만 사이버에 올리는 글은 많은 사람이 읽고 있다는 중압감과 선운사의 진면목을 답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일사천리로 달리던 물길이 맴돌고 있다. 답사시 기록했던 내용을 다이어리에서 들추어 보아도 절집내음은 흔적도 없고 본류를 벗어난 잡다한 찌꺼기만 가득하여 과연 내가 기록한 내용인지 조차 스스로 자문 해 볼 지경이다.
선운사는 철원의 심원사,남해 용문사와 함께 3대 지장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도솔암은 지명으로 미루어 미륵신앙이 짙게 드리우진 가람이며, 천지인의 삼장 사찰이지만 정리를 하려해도 실마리를 잡을 수 없다. 답사시 기록한 다이어리에도 화엄사찰의 진입공간,천왕문과 종루의 공존,백제계열 평지가람의 특징인 단층 만세루, 한쪽이 허한 가람배치... 등이 나열되어 있어도 연결되지 않는다. 나의 게으른 성정 보다는 마음에 자리잡은 안타까움 때문이라 자위해보지만 편치 않다.
도솔암에 들리지 못했으니... 구층탑이 멸실되어 육층탑으로 남아 있는 대웅전 앞 석탑 기단부의 안상 이야기, 대웅전 안에 석가모니불이 아닌 지권인 수인의 비로자나불이 주존불로 모셔진 숨은 내력, 그건 모두 우수마발에 불과하지 않을까? 죽은 글을 올리는 것 보다는 훗날 살아있는 글을 남기기위해 선운사 답사기는 미완으로 남겨야겠다."
2012년에도 미완으로 남겨 둘렵니다.
2012.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