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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과 서사의 황홀한 포옹
허상문
별이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길을 떠날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독일의 비평가 게오르그 루카치가 문화의 전체구조가 완결되었느냐 아니면 문제적이냐에 따라 서사문학의 성격을 고찰하기 위해서 묘사하던 이 시기는,
자아와 세계가 서로 화합을 하던 서정의 시대였다. 그러나 기술과 자본이 지배하는 삶의 상황 속에서 자아와 세계의 불화와 분열은 가속화되기 시작했고 서정의 시대는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문학 장르는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인 자아와 자아를 둘러싼 세계와의 관련 양상에 따라 구분되어 왔다.
문학에 있어서의 서정성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거리가 압축되면서 자아와 세계가 융합되는 것이 그 특징이었다.
따라서 서정적인 문학작품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결합된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 양자의 분리는 힘들다. 마찬가지로 서정적 문학은 인간 의식과 세상이 융합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어 자아와 세계는 즉자적으로 결합된 상태로 나타나게 된다. 헤겔이, 서정적인 것은 인간의 내면의식이 대상을 통해 외면화된 주관적인 정신활동이라고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서사문학은 역사발전에 따라 자아와 세계,
주체와 객체가 서사적 거리에 의해 분리되고 대립하면서 등장하게 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데카르트의 ‘성찰’ 이후로 인간의 이성이 세계를 지배하면서 주체와 객체 사이의 서사적 대립이 이루어지게 되고 그 결과물로 등장한 것이 산문문학이다. 자아는 주체의 관점에서 세계를 하나의 객체로서 형상화하게 되며,
특히 주체의 입장에서 객체를 동일화하려는 것이 서사성의 특징이다.
엄격히 말해 근대는 자아와 세계의 조화로운 화합을 그리는 서정문학이 불가능한 시대였다.
그러나 자아와 세계의 분열이 심해질수록 역설적으로 인간의 내면의식 속에는 주체와 객체가 화합했던 삶에 대한 원초적이고도 낭만적인 그리움과 동경이 더욱 강렬하게 자리하게 된다. 문학에 있어서의 서정과 서사의 대립에 내재한 여러 사회적·문화적 요인을 여기서 더욱 상론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우리 문학의 지난 상황을 간략히 되돌아볼 때에도 이 같은 현상은 어느 정도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98, 90년대라는 치열한 시대를 관통했던 우리 문학의 공과功過에 대해 평가할 때에도, 문학의 서정과 서사 혹은 내용과 형식이라는 근대적 이분법의 한계에 사로잡힌 채 이 시기의 문학을 바라보는 시선이 널리 퍼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이 시기의 문학의 과오에 대해 자기반성하는 다양한 문학적 현상들이 보여주었듯이,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는 세상을 온몸으로 느끼며 우리의 문학은 사회와 역사에 대한 무거운 짐을 덜어내고 싶어 했고, 보다 가벼워진 몸으로 새로운 문학에 대한 갈증과 욕망을 발산하고자 했다. 놀라운 속도로 발전해가는 과학기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새로운 담론이 이전의 이분법적으로 분열된 문학의 자리를 대신했고,
특히 서사의 논리에 몰입된 사회적·역사적 상상력이나 리얼리즘에 관한 논의는 낡은 것으로 거의 용도폐기당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후기자본주의사회는 전지구적으로 세력을 확장해 누구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고, 개인의 욕망에 관한 수많은 담론들은 보다 자유롭고 다양한 새로운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최근의 문학적 담론 역시 이러한 추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여러 가지의 현상으로 반증되어 진다.
오늘날 우리는 지구화,
세계화를 넘어 책상머리에 앉아 세상의 모든 정보와 지식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고 얻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많은 작가들 또한 민족,
이념, 지역이 사라진 디아스포라의 시대에서 ‘지금-이곳’을 살아가는 주체와 객체로서의 경계인이자 이방인으로 존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같은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작가들은 상실된 원초적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동경과 같은 서정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더 나아가 작가들은 어느 특정 문학의 경향이나 이념에 빠져드는 일에서 벗어나서 문학 속에 함유될 수 있는 공통분모를 형성하고 있는 ‘그 무엇’의 관점으로 이 시대와 삶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지만,
지금 우리 시대의 많은 작가들에게서 문학은 오아시스 없는 삭막하고 건너기 힘든 사막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들의 미래에 대한 환상도 디스토피아에 가깝다. 그들이 이 사막을 통과하는 방법은 제각각 나름대로의 문학관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어느 한 편의 일시적 유행과 경향을 추종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문학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작가들은 서정과 서사의 황홀한 포옹을 기다리며 오늘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다.
김월미의 <잊어야 하는 말>은 서사 상실시대에서의 말의 의미와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작품이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말은 인간의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밝음과 어둠을 가져오는 가장 중요한 일상적 도구이다. 그리하여 간단한 한마디의 말로 타인에게 치유 불가능한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하고, 단 몇 마디로 바위 같은 마음을 움직여 호의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다음의 인용에서도 읽을 수 있듯이, ‘말[言語]’에 대한 작가의 인식은 예사롭지 않다.
생각 없이 버릇처럼 우리가 뱉어버린 말. 그저 산이고, 바다며, 꽃이고, 최고라고 하는 그 모두는, 사물과 생각을 일컫는 ‘말[言語]’일 뿐. 결코 그 말이 사물, 생각 그 자체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산을 바다를 알고 말하는 걸까? 최고가 무얼 의미하는 걸까,
또 얼마만큼이 최저일까, 그것들은 단지 입에서 나와 사라지는 말임을 알고 우리는
그 말의 장난에 흔들리지 말고 사람을 느껴야 한다.
-김월미, <잊어야 하는 말>에서
서구사회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글보다는 말이 우위에 있다는 ‘말중심주의’를 삶의 진리로 생각해왔다.
플라톤 이래 서구인들은 글을 말보다는 하위 개념으로 생각하였다.
말이 로고스라면,
글(문자)은 기호라고 인식했다. 왜냐하면 말은 화자의 현전 속에서,
즉 화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가운데서 화자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직접적인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리다 같은 철학자는 이 같은 말중심주의는 해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해체론이라는 이름으로 말과 글의 중심 찾기를 했다. 실제 글의 의미는 다른 것과의 비교나 해석을 통해서 항상 타자의 흔적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임에 반해, 말은 타자의 흔적 없이 자기 스스로의 절대적인 진리를 구축하려는 경향이 있다.
<잊어야 하는 말>에서도 작가는 “단지 입에서 나와 사라지는 말임을 알고 우리는 그 말의 장난에 흔들리지 말고 사람을 느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그 중요성이 강조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실제로 우리가 말을 할 때, 그 말들이 반드시 발화자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소한 것이 아니라 말의 힘은 오히려 더욱 근본적으로 우리의 사고나 문화 전반에 침투해서 커다랗게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자전적 소설 ≪말≫에서 말의 습득이 얼마나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진행되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어릴 때 아버지가 전사하여서 외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서 양육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언어를 배우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말을 하도록 배우는 것이 아니라, 즉 자신의 생각이나 욕망을 표현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좋아하는 말을 사용하게 되는지를 배웠다고 술회한다.
그만큼 우리들의 언어는 세상에 대한 개인적 인지 기능은 물론 그 사회적 기능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래서 우리는<잊어야 하는 말>에서 작가가 이야기하듯 “조금 알고 조금 젖어들어 조금 심취하면 다 아는 것처럼 말을 앞세운 자기 주장만으로 내 인생관, 내 종교관만 옳고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생각해보면, 우리들이 이 세상의 여러 유혹에 빠지거나 미혹하게 되는 원인들은 모두 말에서 시작되는 것인지 모른다.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은 노아의 방주를 짜고도 남을 홍수를 이루고 있지만, 이 말들의 절반만이라도 ‘언어의 감옥’에 가둘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훨씬 덜 불행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난무하는 말 속에서도 결혼 때 맹세했던 소중한 말들조차도 모두 잊어버린 채 살고 있다.
다시 한 번 데리다를 빌려 이야기하면,
목소리로 표현되는 말은 단순한 표시가 아니라, ‘나’라는 주체와 ‘지금-이곳’이라는 개념에 기초한 일종의 몸짓이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가 기승을 부리는 이 시대에 김월미의 <잊어야 하는 말>은 말의 사용에 대한 소중한 경고의 의미를 던져 주고 있다.
여승동의 <화중행畵中行>은 그림 속의 풍경과 실제 삶의 풍경이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줌으로써, ‘풍경 속 세상’과 ‘세상 속 풍경’을 묘사해주는 범상찮은 수필이다. <화중행畵中行>에는 다양한 풍경에 대한 묘사와 그에 대한 성찰의 언어로 가득하다. 이를테면 풍경에 대한 묘사의 한 대목을 보자.
눈으로 보이는 풍경은 질펀하다가도 가파르고, 넉넉하다가도 난데없이 헐떡이는 모습으로 변하기도 하지만, 소리로 들리는 풍경은 가끔씩 소란스럽기는
해도, 대체로 느리게, 혹은 빠르게, 보챌 뿐 금방 숨 넘어갈듯 채근하지는 아니한다. 소리 속의 풍경은 졸졸거리며 느긋하고,
감미롭고도 고요한 물결의 세상이 된다.
-여승동, <화중행畵中行>에서
화자에게 눈으로 보이는 풍경과 귀로 들리는 풍경은 유기적으로 하나가 되어 눈으로 들어오는 시각적인 모습과 귀로 들어오는 청각적인 음률을 띠고 있다. 여기서 화자가 눈과 귀를 통하여 세상과 풍경을 향수享受한다는 것은 생명적인 가치를 띤 성질,
더 나아가 우리 몸에 대해 어떤 감각을 유지하면서 실존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계속해서 말한다. “눈으로 마주치는 긴장된 풍경들을 나지막한 소리로 달래고 읊조리며,
소리의 끝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나 꿈결같은 안식으로 잦아든다. 그림 속에서 일어나,
종일토록 걷다가,
지친 몸으로 그림 속으로 다시 돌아와 잠이 들고,
그림 속에서 그림 같은 꿈을 꾸고 그림 같은 잠꼬대를 한다.” 여기서 작가가 반복된 그림의 이미지를 통하여 그려내는 체험의 풍경은 메를로 퐁티가 말하는 “풍경이 내 안에서 그 자체를 생각하고, 나는 그것의 의식이다.” 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메를로퐁티는 인간이 사물의 진리를 포착하기 위해 일상성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단지 인간적인 사색만이 근본적인 지각에 도달할 수 있으며, 자연은 인간정신의 사유를 통해서만 그 자의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화중행畵中行>에서 작가의 사유는 더욱 확장된다.
작중의 화자는 풍경이라는 창을 통해 바깥세상을 바라다보는 데만 익숙한 우리들에게, 풍경이라는 창을 통해 그 속에 담긴 내면세계의 의미까지를 탐색하고 있다. 이를테면 작가는 바깥세상의 창을 통해 이웃과 세상의 의미를 생각한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그림 안에서, 언어의 구름에 갇혀서 먹고 자고, 울고 웃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토라지고 그리워하며 하루 삼시 세끼의 기쁨과 슬픔을 씹고 마시고 삼키며 살아가는 것이다.” 풍경이라는 창은 안에서 밖으로 혹은 밖에서 안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지점에 위치하여 끈끈한 세상살이의 인연을 만들어낸다. 그림 속의 풍경은 나의 것인 동시에 이웃의 것이기도 하다.
사람의 삶이란 본질적으로 어느 정도는 유사하고 그 속에 담긴 살아가는 이야기들도 보편적인 것들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 속에서는 수많은 기쁨과 슬픔,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인연이 만들어진다.
하나, 이 모든 것이 그림 속의 풍경임을
설사 안다 하더라도 우리들은 끝내 그곳을 벗어날 수는 없다. 다름 아니라, 그곳이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이기 때문이며, 태어나서 지금껏 오로지 그곳에서만이 길들여져 살아온
우리들만의 세상이기 때문이며, 아무리 달아나려고 해도 달아날 수없는 그림 속의 숱한 만남과 인연의 구덩이들이기
때문이다.
-여승동, <화중행畵中行>에서
작가에게 그림 속 풍경은 바로 우리가 빠져나오려고 애쓰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포획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의 유일한 집이며, 땅이며, 하늘”이고,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이다. 작가는 풍경을 통하여 우리의 삶과 작가 자신의 내면을 객관화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생애의 끝자락마저도 또 하나의 풍경이 될 터인즉.
그것은 더 큰 그림 속으로 나비처럼 날아 들어가는 일이라서, 모든 존재는 비로소 영원한 미로 속의 그림 같은 여행길에 오르는 것이 아닐까 짐작하여 보는 것이다.”
메를로 퐁티는, 우리가 풍경의 창을 통해서 세계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걷다보면 새로운 땅과 집과 하늘이 나타날 것이며,
그 속에서는 철학적인 새로운 삶의 세계가 전개될 것이라고 했다. 여승동의 <화중행畵中行>은 풍경의 안과 밖을 통한 ‘세상 마주보기'를 함으로써 풍경에 담긴 외면적 서사의 세계를 내면적 서정으로 조화시켜낸 흔치 않은 수필이다.
오기환의 <죄송열차>는 과학기술시대의 인간의 운명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주지하듯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은 과학기술시대의 산물이다. 급격히 발전해온 과학적 원리가 산업기술에 적용됨으로써,
생산과 경제를 크게 성장시켜 인간생활을 한없이 풍요롭고 편리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무제한의 과학기술 우선 풍조는 인류생존에 필요한 여러 기능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와서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위협하고 허다한 사회적·윤리적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죄송열차>에서 전자시대에 살아가는 화자는 아날로그시대 때의 여러 가지 모습이 이제는 아련한 향수로 남는다. 편지지를 펼 때 버스럭거리는 소리, 책을 넘길 때 스르륵 책장 넘어가는 소리, 향긋한 종이 냄새는 모두 화자에게 다른 감각을 제공하며,
e북을 읽거나 인터넷을 하거나 스마트폰을 두드리는 일과는 바꿀 수 없는 가치와 즐거움을 준다. 마찬가지로 서해안 여행 중에 방문한 “배터리가 다된 시계처럼” 세월을 멈춘 듯싶은 마을 식당에서의 여유로움은 도시의 번잡한 식당에서는 전혀 찾을 수 없는 모습이다.
현대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체제는 효율적 운영을 필요로 하므로 인간이 사회의 부품이 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사라지는 현상을 낳고 있다.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오직 공리적 효용가치만이 강조되는 잣대에 의해서 인간이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적 믿음만 강조할 뿐 그에 대한 책임은 회피하고 있다. 인간의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 ‘희망의 원리’가 아니라, ‘책임의 윈리’를 강조한 한스 요나스는 인간이 살고 있는 시대에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오직 인간뿐임을 역설한다. 인간의 자유가 기술을 통해 실현가능하고 기술에 의한 환경파괴는 불가피하다는 근대적 사유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결국 인간은 파멸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외면적인 삶의 양태에서와 마찬가지로 글 읽기라는 정신적 행위에서도 사람들은 오직 정보와 지식만을 얻고자 하는 수단적 가치에만 빠져 있다.
단순히 지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책읽기만 중요하게 여긴 나머지, 독서 그 자체의 즐거움의 기능은 과학기술시대에서는 상실되어 가는 것이다.
전자책 시대가 도래되었다고 외쳐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시대는 사람이 책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 오직
정보와 지식뿐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그건 오해다.
독일 평론가 발터 벤야민은 어린 시절 책읽기의 황홀함을 “책은 읽는 것이 아니다. 행간에 머무르고 거주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책읽기란 글자의 의미를 해석하고 지식을 얻는 것보다 즐거움과 행복을 찾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을 것 같다.
-오기환, <죄송열차>에서
위 인용에서 작가가 시사하듯, 오늘날과 같이 무한한 과학 발전에 우쭐해하며 이제 우리는 책읽기의 즐거움과 행복이 완전히 상실된 시대에 살고 있다. 보르헤스는 ≪바벨의 도서관≫에서, ‘바벨의 도서관’은 ‘혼돈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은유라고 표현한 바 있다. 말하자면 보르헤스에게 도서관은 우주, 영원, 인류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암호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 과학기술시대에서 우리는 벤야민이 이야기하는 ‘행간에 머무르고 거주하는’ 황홀함이나, 우주와 세상에 대한 신비를 찾기 위한 ‘책읽기의 즐거움’을 잃어 가고 있다.
이미영의 <자장가 가수>는 어머니가 작가에게 불러주던, 그리고 이제는 작가 자신이 아이에게 불러주는 자장가에 얽힌 에피소드로 시작된다. <자장가 가수>를 읽으면서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도 아련히 떠오르는 들릴 듯 말 듯 읊조리던 어머니의 자장가 소리, 그때의 그리운 냄새,
그리고 포근한 분위기는 일상생활에서 지치고 고달픈 우리를 편안하게 잠 길로 인도한다.
그야말로 어느 동요에 나오는 대로 우리들의 어린 시절,
“엄마의 팔베개는 꿈나라로 가는 무지개다리”이었다.
<자장가 가수>에서 작가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자장가의 일차적 함의는 자장가를 통한 향수와 동경이라는 서정에의 기억이지만, 그 속에 담긴 우리 시대 어머니들의 고달픈 삶의 서사를 간과해서는 안 될 듯하다. 다섯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자장가 소리는 화자의 귀에까지 차례가 오지 않는다. 엄마의 자장가는 “자장 자장으로 시작해서 세상의 잠 잘 자는 온갖 아기들이 등장하는 자작곡”이지만, 엄마도 그랬듯이 마찬가지로 화자도 아기를 곤히 재우려는 마음보다 하루 종일 피곤했던 몸을 어서 쉬게 하고 싶은 바람이 더 간절했다. 중학교 음악시간에는 “나는 꼭 모차르트나 슈베르트의 자장가를 불러주는 어여쁜 엄마가 되겠다고 남몰래 다짐”도 했지만, 이제는 아이들이 제일 사랑스러워 보일 때는 대낮이라도 이불 속에서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들려줄 때였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의 고통과 곤궁함을 다 잠재워주는 것도 어머니의 자장가이다. 어머니가 우리에게 불러주던 자장가를 이제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불러주고,
그 자장가는 삶의 모든 고달픔마저 함께 풀어 주는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자장가를 불러달라고 몇 번이나 머리를 가슴팍으로 밀어 넣는 일이 생긴다. 처음에는 남편의 이런 행위가 아이들이 밤늦게나 되어야 학교에서 돌아오다 보니 밤 시간이 여유롭게 느껴져 하는 장난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을 더해 갈수록 화자는 “이제라도 그에게 제대로 된 자장가를 불러 주고 싶다. 단발머리 소녀를 환상으로 데려다 주었던 빈 소년합창단의 연주 소리가 다시 꿈틀거리며 심장을 뛰게 한다.”라고 느끼게 된다.
우리가 만나 보낸 시간을
정성스레 엮어 또 다른 자작곡을 만들어 내도 상관없다.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려가며 서운했던 마음을 달래주고
싶다. 대문 밖 세상의 고달픔을 조금이라도 씻어줄 수 있다면 다시 목쉰 자장가 가수가 되어도 좋다.
기꺼이 한 사람을 위한 연주를 준비하려 한다.
-이미영, <자장가 가수>에서
세상에 대한 미움도 아픔도 없었던 천진난만하던 그 시절에 듣던 어머니의 자장가는 그냥 잠들기 위한 노래에 불과했지만, 어머니의 자장가를 들을 수 없는 어느 날부터 우리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아픔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아닌가. 그리고 누군가가 미워지고 마음이 아플 때, 어머니의 자장가를 들으면 우리들의 마음에 평화와 사랑이 샘솟는 것은 아닌가. 자장가는 그 듣던 때의 순수함으로 인해 모든 것을 용서하고 감싸 안는 위안이다.
우리가 어머니를 부르는 건 곧 참회이지만, 어머니의 자장가를 듣는 건 곧 구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화자는 남편의 “대문 밖 세상의 고달픔을 조금이라도 씻어줄 수 있다면 다시 목쉰 자장가 가수가 되어도 좋다.”라고 다짐한다.
대문 밖 세상이 피곤하고 고달픈 밤에는 모두 어린아이가 되어 그 옛날과 같이 어머니의 품속에서 촉촉한 자장가를 들어볼 일이다.
이미영의 <자장가 가수>는 자장가를 통하여 우리들에게서 잊어져 가는 서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서정이란 어제의 서정을 새롭게 부활시킬 때,
진정한 의미로 진화될 수 있다는 것을<자장가 가수>는 일러준다.
허상문 ---------------------------------------
문학평론가, 영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문학평론집: ≪문학과 변증법적 상상력≫,
≪현대문학비평론≫, 영화평론집: ≪우리 시대 최고의 영화≫, 산문집: ≪시베리아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실크로드의 지평에 서서≫,
≪바람의 풍경≫ 등 다수의 저서가 있음.
ㅡ 수필과비평 2013년 2월호, 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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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엄마에게서 듣던 자장가, 내가 아이에게 들려두던 자장가, 그리고 남편에게 들려주는 자장가, 지평의 확장이며 대상의 다변화. 시간을 초원한, 어찌됐든 변하는 것이고 변해야한다. 그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