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동(大禾洞)
대전광역시 대덕구의 남서쪽에 있는 행정동.
북쪽으로 당산(137.4m) 너머 읍내동과 접경을 이루고, 서북쪽에 갑천이 흘러 유성구의 원촌동·도룡동과 자연 경계를 이루며, 동쪽으로 중리동·회덕2동과 인접해 있고, 남쪽으로 오정동, 서쪽에 대전천과 유등천이 합류하면서 서구의 둔산3동, 유성구 도룡동과 자연 경계를 이루는 대덕구의 서남쪽 지역이다.
원래 조선 시대의 회덕현 현내면에 속했다. '호구총수'(회덕)에 '대화리(大禾里)'라는 지명이 확인된다. 이 일대의 토질이 매우 좋아 벼 재배가 잘 되기 때문에 대화(大禾)라는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구만리(九萬里:구만이)·율사동(栗寺洞:밤절)·법동(法洞) 일부 지역과 서면의 구만리(九萬里)를 병합하여 대화리(大禾里)라고 하여 대전군 내남면에 편입되었다.
- 1935년에 대전읍이 대전부로 승격되면서 신설된 대덕군 회덕면에 편입되었다가
- 1963년에 대전시에 편입되어 리를 동으로 고쳐 대화동이라고 하고, 오정동에 통합되었다.
-1971년에 북부출장소의 관할 구역이 되고,
-1977년 구제 실시로 동구에 편입되었으며,
-1983년에 오정동에서 분동되고,
-1989년에 직할시 승격에 따라 대전직할시 대덕구가 설치되면서 신설된 대덕구에 편입되었다.
-1995년 대전광역시 대덕구 대화동이 되었다.
행정동인 대화동은 행정동명과 법정동명이 같다.
'여지도서'(회덕)에 '대화소제(大禾小堤)'라는 작은 저수지가 확인되며 "둘레가 6백 16척이고 높이가 3척이다."라고 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회덕)에 '대화리(大禾里)'라는 지명과 함께 '황수'라는 우리말 지명이 병기되어 있어 대화리가 원래 황수 일대를 지칭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자료에 '대화리에 읍호정(揖灝亭)이라는 정자가 있고 송이창(宋爾昌, 1561-1627)이 지은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송이창은 김계휘, 송익필, 이이의 제자이고 조선 현종 때 명현 동춘당 송준길의 아버지이다. 송이창이 현감을 지내다가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 폐모·시제사건에 실망하고 귀향하여 이 정자를 짓고 운둔생활을 하였다. 읍호정 기문(記文)은 송준길의 죽마고우였던 우암 송시열이 썼는데 그 의미를 요약하면 "갑천의 맑은 물과 넓은 들판을 보면서 세속의 생각에서 탈출할 만하다."는 뜻이라 전한다. 갑천이 내려다보이는 구릉 위에 읍호초정이 있었다. 이 외에도 육각정(六角亭), 백록정(白걨亭) 등 정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서쪽 갑천변에 육각정이 있었고, 이 정자 뒤 높다란 암벽에 조선시대의 학자 우암 송시열이 쓴 '선암(船岩)' 두 자가 새겨져 있다. 아들인 동춘 송준길이 후진 교육을 위한 강론의 도장으로 삼았다고 한다. 대화동 동남쪽으로 조선 시대 이래 은진 송씨의 종족 마을인 송촌동이 인접해 있는데, 이들에게 갑천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대화동 일대가 정자 입지로 선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거에 비해 임야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으나, 1970년 이후 대전 제1·제2산업단지가 조성됨으로서 임야가 약 14%, 공장 부지가 약 40%를 차지하고 있다. 대전 제1산업단지와 제2산업단지가 소재한다. 자연 마을로는 구마니(구만리) · 안구마니 · 마근골 · 말랭이 · 무다리 · 밤절골 · 황수 등이 있었다. 면적 3.16㎢, 인구 1만 739명(2008)이다.
대화파출소·대화소방파출소·대화우체국·근로자종합복지관 등의 공공기관이 있으며, 경부선 철도의 대전조차장역이 있다. 경부선 철도와 주요 간선도로인 동쪽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17번 국도가 있다.
대화동(大化洞)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의 남부에 있는 법정동이자 행정동.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고양군 사포면 관할이었다. 지금의 대화동(大化洞)은 성저리와 대화리로 구분되어 있었고 여러 마을이 존재하였다.
-1914년에 김포군(金浦郡) 군내면(郡內面) 걸포리(傑浦里)의 일부를 병합하고 성저 · 백암 · 김서장촌 등의 여러 마을이 합쳐지면서 송산면(松山面)과 사포면이 통합되어 신설된 경기도 고양군 송포면(松浦面) 대화리가 되었다. 동 이름은 1914년 김동·장촌 등 여러 개의 자연마을을 합쳐 크게 된 법정리라고 하여 대화리(大化里)라고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이후 송포읍 대화리로 바뀌었고
-1992년 고양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송포동과 대화동이 구분되었고,
-1996년 고양시에 구제(區制)가 실시되면서 일산구 관할이 되었다.
-2005년 일산구가 분구됨에 따라 고양시 일산서구에 속하게 되었다.
행정동명과 법정동명이 같다.
'고양군지'에 따르면 조선 시대에는 고봉현(高峰縣) 사포면(巳浦面)에 속해 있었고 이후 고양군 사포면으로 변경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사포면은 군의 서쪽으로 30리 떨어진 지점부터 40리 지점까지의 구간이며, 들판에는 고토성(古土城)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화동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사포로 표기되어 있듯이, 대화동은 원래 '뱀개'라고 불리던 마을이었다. 뱀개로 불린 유래는 한강제방을 쌓기 전에 홍수가 나면 강원도에서부터 뱀이 떼를 지어 한강을 타고 이곳으로 떠밀려왔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또는 마을 고갯마루에 서당이 있어 배움고개로 불리다가 배움개 · 뱀개 · 뱅개로 변화하였다는 설이 있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인 장성마을과 성저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 3.78㎢이다.
성저공원과 대화공원, 장촌공원 등 주변에 녹지와 휴식 공간이 많아 생활 환경이 쾌적하다.
현재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성저마을은 옛날 성저리(城底里) 지역이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광활한 한강유역 평야를 장악하기 위하여 현재의 행주산성 서북쪽 야산지대에 토성(土城)을 쌓았다. 그 성의 아래쪽에 형성된 마을이라고 하여 성저리라고 불리게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멱절리·장성마을·성뜰·구석말·가와지 등이 있다. 먹절은 산에 곽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스님이 메기를 잡아먹은 후에 절이 망하게 되어 그 절을 멱절, 절이 있는 동네를 멱절리라 하였다. 장성마을은 6·25 전쟁으로 인해 장단군 지역에서 남하한 이주민들이 처음으로 거주했던 곳으로 피난민 수용소가 마을 이름이 되었다.
지하철 3호선의 종점인 대화역, 일산신도시의 대화 마을, 대화학교길, 대화수로길 등으로 지명이 사용되고 있다.
대화역, 고양종합운동장, 한국국제전시장, 고양시 농수산물 도매시장 등이 있으며, 지하철 일산선의 시발점이다. 그 밖에 대화로, 호수로가 자유로와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