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안경
최 태 호
기남이논 산골에 사는 아이입니다. 날마다 고개를 넘어 학교에 다닙니다. 이웃동네 심부름을 갈 때도, 논밭에 일하러 가신 아버지한테 점심을 갖다드릴 때도, 기남이는 고개를 넘는 것이었읍니다. 이럴 때마다 기남이는 나무를 보고, 풀밭에 앉아도 보고 하였읍니다. 산에는 언제나 향긋한 냄새가 흘렀읍니다.
날마다 보는 산이지만, 기남이는 칼이 이야기라도 하고 싶도록 산이 좋아보였읍니다. 그래서 가끔,
“얘들아.”
하고 산을 향하여 외쳐봅니다. 그러면,
“얘들아.”
하고 산이 대답합니다.
“나하고 놀자.”
하면,
“나하고 놀자.”
하고 대답합니다.
기남이는 정말 산속의 아이였읍니다.
겨울입니다. 새하얀 눈이 산을 덮었읍니다. 나무라는 나무는 모두 잎이 떨어져서 벌거숭이가 되었읍니다. 풀잎은 하나도 보이지 않읍니다. 찬바람이 욍욍 불어습니다. 벌거숭이 나무들은 하늘로 뻗친 가지를 움추리지도 못하고, 잉잉 울고만 있읍니다.
“봄, 여름, 가을에는 그렇게도 보기좋고, 아름답던 나무들이------”
기남이는 쓸쓸하게 서 있는 냐무들을 보고 생각하였읍니다.
“뻐꾸기가 옳고 다람쥐가 재주를 넘던 나무들이, 이렇게 쓸쓸해질 수가 있나.”
그러나 이제는 뻐꾸기소리 대신에 바람소리만 들리고, 다람쥐 대신에 떨어지다 남은 가랑잎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뿐입니다. 차디찬 눈만이, 마치 크레용 칠을 하지 않은 도화지처럼 하얗게 나무를 둘러쌌읍니다.
“가없어라. 이게 도화지라면 내가 크레용 칠을 막 해서, 나뭇잎도 그리고, 꽃도 그리고, 풀도 잔뜩 그릴 텐데------ 참 뻐꾸기소리는 어떻게 그리나?”
기남이는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기남아!”
별안간 누가 부릅니다. 언제 왔는지 하얀 옷을 입은 노인 한 분이 흰눈 위에 앉아 있읍니다. 얼굴도 하얗고, 수염도 하얘서 보이지 않았나 봅니다.
“왜 그러셔요?”
“너 이 산을 크레용으로 울긋불긋 칠해보고 싶지?”
“예, 할아버지, 그건 어떻게 아셔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누구셔요?”
기남이는 이상한 할아버지가 제 생각을 어떻게 알까, 암만 생각해봐도 모를 일입니다.
“나 말이냐? 나는 이 산을 하얗게 만든 눈이야, 네가 생각하는 도화지 할아버지야.”
“예, 할아버지가 바로 이 산을 하얗게 만드셨군요. 할아버지 난 하얀 산은 싫어요. 빨리 저 나무를 파랗게 해주셔요. 풀도 나게 해주셔요.”
“그래라, 내 네가 원하는 크레용을 줄 테니, 마음대로 그려보려므나.”
할아버지는 커다란 크레용갑을 기남이에게 주셨읍니다. 기남이는 어찌 기쁜지, 그 크레용 갑을 받아가지고 제 생각하는 대로 크레용 칠을 하였읍니다. 나뭇잎을 그렸읍니다. 꽃을 그렸읍니다. 풀도 그렸읍니다. 하얀 도화지논 금방 아름다운 색으로 잔뜩 칠해졌읍니다.
“옳다! 이만하면 내가 좋아하는 산이 되었다. 인제 뻐꾸기도 울고 다람쥐도 놀러 나오겠지.”
기남이는 혼자 좋아서 싱글벙글 하였읍니다. 그러나 웬일일까요? 도화지에는 나뭇잎이 파랗고 꽃도 피고, 풀이 많이 나서 예쁜 옷을 입었는데, 기남이가 좋
아하는 산 냄새가 도무지 나지 않았읍니다. 뻐꾸기소리도 들리지 않고, 다람쥐
도 놀러오지 않습니다.
“하하하!”
이때 별안간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리며, 나무그늘에서 외투를 입고, 털모자를
쓴 사람이 나타났읍니다.
“기남아, 난 네가 좋아하는 나무 아저씨야. 네가 너무 쓸쓸하다고, 옷을 많이
입혀주어서 고맙다.”
나무 아저씨는 친절하게 말했읍니다.
“그런데 우리 나무들은 크레용으로 예쁜 옷을 만들지 못해. 그리고 꽃 아가씨
도, 풀 도련님도 크레용을 가지고는 예쁜 옷을 입게 하지 못한단다. 그래서 우리들은 지금 옷을 만들고 었는 중이야. 내, 이 안경을 네게 줄 테니, 잘 들여다보아라.”
나무 아저씨는 주머니에서 조그만 안경을 하나 꺼내주셨읍니다. 기남이는 그 안경을 받아서 썼읍니다. 이것 보셔요.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여태 기남이가
열심히 그린 그림은 어느 틈에 금방 지워지고 도로 하얀 도화지에 이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쓸쓸하게 서 있지 않아요? 눈 할아버지도 간 곳이 없고, 나무 아저씨도 보이지 않았읍니다. 기남이는 안경을 쓰고 산을 두리번 두리번 바라보았읍니다.
“뚝학쭉딱, 영차영차.”
어디선지 집이라도 짓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립니다. 노랫소리도 들립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그것은 모두 나무와 눈에 덮인 땅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였읍니다. 기남이는 하도 이상해서 나무 앞으로 바싹 다가가서, 그 소리를 들었읍니다. 말라죽은 것과 같은 나무 껍데기 속에서는 아까 그 나무 아저씨가 물을 빨아올리느라고 야단들입니다. 나뭇가지에서는 봄에 틀 움을 만드느라고 법석입니다. 기남이는 눈을 헤치고 땅을 파보았읍니다. 땅속에서도 떨어진 꽃씨가 금방이라도 싹이 터져나올 듯이 준비를 하고 있었읍니다. 풀은 말라버린 잎속에서 새싹을 준비하고 있읍니다. 오랫동안 보지 못하던 벌레들까지 모두 땅속에서 살고 있읍니다. .
“야, 너희들 모두 여기 있구나! 얼른 나와서 우리 재미있게 놀자.”
기남이는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질렀읍니다. .
“그런데 얘들아, 뻐꾸기는 어디 갔니?”
“빼꾸기가 어디 가긴 어디로 가? 산에 있지!
어머니가 웃으시며 말씀하십니다. 기남이는 꿈을 꾼 것이었읍니다.
“어머니, 그 안경도 어디 갔어?”
“얘는 또, 무슨 안경이 어디 갔다고 그러니?”
“저 이상한 안경 말이어요.”
기남이는 아직도 꿈속에 있나봅니다.
“어머니, 저 산에 갔더니 눈이 하얗게 쌓였어요. 그런데……”
기남이는 어머니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읍니다.
“얘가 겨울 동안 산에 가서 놀지 못하더니, 꿈을 다 꾸었구나?”
어머니는 웃으시며 말씀하셨읍니다.
“그것 참, 재미있는 꿈이다. 그렇지만 그 이상한 안경은 누구든지 다 가지고 있는 거야. 정신을 차려서 잘 보면, 이상한 안경을 쓴 것처럼 나무와 풀이 일하는 모양도 볼 수도 있고, 이야기도 할 수 있단다.”
고, 말씀하시었읍니다.
정말 지금은 겨울이 아닙니다. 벌써 이른 봄입니다. 기남이는 오늘도 고개를넘어 학교에 갔다 돌아옵니다. 기남이는 나무도 살펴보고, 풀도 살펴봅니다. 나무에는 파릇파릇 새움이 나오고 풀 아기들도 갸옷이 귀여운 손을 내밀고 있읍니다.
“푸드둥.”
꿩 한 마리가 날아올랐읍니다.
이제 곧 예쁜 꽃들이 피고 아름다운 새들이 노래하는 시절이 올 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