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몸속엔
붉은 고무함지와 벤자민 가로수 그늘,
포도송이 같은 오후의 정적,
링거 꽂은 팔로 모기를 쫓고 있는 사내,
말라리아 예방주사를 맞은 적 없는 세 아이들,
산호로 둘러싸인 섬,
흰자위 없는,
눈알들뿐인 세상의 포도넝쿨
그녀의 포도는 악으로 가득 차 있다
한때는 사랑과 연민도 들어 있었는데
그 불투명 사라지면서, 다 보였다
눈물 그득한지, 아니면
핏물이 고여 있는지
고무함지 놓여 있는 그녀의 가로수 그늘 지날 때
포도는 암호다 붉은
고무함지엔 포도넝쿨이 없고
뿌리도 없다 아, 아무 것도 없이
그냥 지겨운 부패, 사실은 그게 생이고
당신인가
그런 당신이 포도를 이해하려면
태양 먼저 공부해야 한다
포도를 맛보려면
공기 먼저 호흡해야 한다
태양은 건널목 건너에 있고
공기는 저 밀림 너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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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밑 세상
마루 밑에서 산다
누구 한번 들여다봐 주는 일도 없이
개는 마루 밑에 혼자서 산다
빛이 없어서 미안하다
마루 밑 세상
흙먼지와 고독
밤새 혼자서 이를 갈다가
잠이라도 청해 들면
개는 무슨 꿈을 거기서 꾸는가
어떻게 고쳐볼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개꿈이라도 꾸며 사는가
원천적 고독과
능동이 거세된 삶의 고통으로
개는 마루 밑에서 밤을 지샌다
마루 밑 세상
빛이 없으므로
개의 눈빛과 살의만 번뜩거린다
어둠이 계속되고 있을 때
마룻장 사이에서 차갑게 새어나오는
개의 신음소리를 우리는 듣고
오싹해진다
개는 마루 밑 저의 세계를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가 밤새 살아 있는 개와 다시 만날 때
개는 이미 마루 밖의 세상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빛이 없어서 미안하다
고요한 마루 밑 세상
저 혼자 다스려가는
오래 누적된 흙먼지와
천성적인 고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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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이름
한 마리의 개가 태어난다
두 마리의 개가 태어난다
세 마리의 개가 태어난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의 세계 속에서
마루 밑에서
애견센터에서
개의 집에서
더럽고 음울한 어미개의 자궁 안에서
못된 과거를 가진 개가 태어난다
태어나지 않아도 무방한 개가 태어날 때
죽지 않아도 좋은 개 한 마리가 죽는다 어딘가에서
살아남아야 할 개 두 마리가 죽어간다
태어난 개의 이름이 지어지고
죽은 개의 이름이 지워진다
죽은 개에게 씌워졌던 의무감이 사라진다
살아서 고독했던 개는 죽어서도 고독해
산 것 같지 않게 살았던 개는 죽어도
도무지 죽은 것 같지가 않아
살 것 같지 않은 한 마리의 개가 태어난다
개처럼 살다 죽을 두 마리의 개가 태어난다
언젠가는 어떻게든 죽어야 할 개들이
그래도 살기 위하여
악착스레 태어난다
태어난다 태어난다 태어난다
촉발적으로
마구잡이로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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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준 / 1963년 정선 출생. 1990년 《문학사상》시 당선,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집 『개』,『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