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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영적 장자여! 主信感을 가지고 살아가라!”
+ 본 문 : 출애굽기 4장 10절 - 17절 (구약성경 86쪽)
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아멘!
서로 인사하겠습니다. / “잘 되고 있습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스무 살을 갓 넘어선 한 청년이, 어느 날 부모님에게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아버지, 제 인생을 찾아 떠나려고 합니다.” 아버지가 묻습니다. “네 인생이란 게 도대체 뭐냐?”
“저는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돈도 많이 벌고 싶습니다. 멋진 여자 만나 세계를 여행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아들의 손을 꽉 잡았습니다. “아버지, 왜 이러세요. 제 앞길을 막지 마세요.”
아버지 말했습니다. “아들아, 어서 앞장서라. 나도 같이 떠나자. 그런 세상 구경이나 한번 하고 죽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엔 언제나 힘든 일이 있고, 문제도 참 많습니다.
오죽 했으면 인생이 참 많이 힘들다는 것을 안 아버지가 “마냥 행복하고, 돈 많이 벌어, 멋진 여자랑,
맘껏 세계 여행이나 다니는 그런 세상이 있으면 나도 가겠다.” 고 아들 손목을 잡고 나섰겠습니까?
여러분! 그런 세상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 고난 중에도 행복이 있고 고통 속에도 의미가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세상만사가 힘들고 어렵게 보이지만, 그중에도 보람이 있고 소망이 있음을 말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모든 일들에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있고 뜻이 있습니다.
문제는 열등감입니다. 내 인생의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뜻을 가로막고 나서는 것이 바로 열등감입니다.
리더십 학자 죤 맥스웰이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어떤 복면 쓴 사람이 자신의 가는 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습니다. 계속 진로를 방해하고 괴롭히길래 복면을 벗겨보니 바로 자기 자신이더랍니다.
바로 이 복면이 열등감이요. 내 인생의 성장과 진로를 가로막는 방해꾼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열등감은 만인의 공통지병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 98% 정도가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데, 나머지 2%의 사람도,
정도의 문제이지 열등감은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나는 열등감이 아니라 우월감이 있다.” 고,
그러나 우리는 이걸 알아야 합니다. 우월감이란 것도, 열등감의 공격적인 형태일 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열등감이 심한 사람은 사람들을 모든 것을 흑백으로 구분합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키 큰사람 키 작은 사람,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예쁜 사람 안 예쁜 사람, 돈이 많은 사람 없는 사람,
이렇게 모든 것을 흑백으로 구분하는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에겐 쉽게,
마음을 주고 편하게 다가가지만, 반대 부류의 사람들에겐 심한 적대감 혹은 불편한 마음을 느낍니다.
실제 있었던 임상입니다. 남편을 미워하고 심지어 적대감을 가지고 살던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자기 안에 뭔가 모르는 분노가 늘 자리 잡고 있었고, 가끔은 불안증, 심한 고통까지 느껴 병원에 가보지만,
원인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신경증이라는 진단만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치유수양회에 참석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진단 받은 결과는, 아들을 기다리던 집에서 딸로 태어난 그는 늘 무시를 당합니다.
그는 딸이라는 것 때문에 가족들에게 늘 무시를 당하자, 가족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남자처럼 행동하고,
남자를 이기기 위해 억척스럽게 공부를 했고, 「남자 그리고 여자라는 이분법」 을 갖게 된 것입니다.
“남자는 나쁘고 여자는 억울하다.” 그래서 남편조차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적대감의 대상인 남자로 보았습니다.
어쩌다 남편이 무심코 “여자가, 아내가” 라는 말을 하는 날이면, 그 가정은 전쟁터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그가 교회의 치유수양회에서 남자에 대한 거부감, 상처, 여자 콤플렉스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모든 열등감에서 해방되었음을 간증했습니다. “이제 나는 여자이기에 행복합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열등감이 무엇일까요? “자신을 남보다 못한 무가치한 인간으로 평가하는 감정이나 삶의 태도” 입니다.
예를 들면, 어릴 때부터 “개땡땡” 이라는 욕을 들으며 자란 한 사람이 정신병원에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그래. 요즘 어떤 생각이 자주 드나요?” 그러자 그가 「나는 진짜 개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요. 언제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나요?”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강아지 때부터요.」
이렇게 자기 자신을 남보다 못한 무가치한 인간, 심지어 짐승과도 같다는 감정이나 삶의 태도가 열등감입니다.
왜 이런 열등감이 생겼을까요? 죄악 된 세상에서 살다보니, 자존감을 잃어버림으로 생긴 게 열등감입니다.
바로 이 열등감은 만인간의 약점이요. 불치의 병입니다. 잘생긴 사람도 열등감이 있습니다.
여러분! 대게 성형수술을 많이 하는 사람이 못생긴 사람이 아니라, 그만하면 괜찮은 사람이 더 많이 한답니다.
그리고 평소 자신만만하고 완벽해 보이던 똑똑한 사람도, 어떤 문제에 실패하게 되면 열등감 증세를 보입니다.
여러분! 바보가 자살하는 것 보셨습니까? 아닙니다. 괜찮은 사람이 열등감이 병이 되어 자살을 합니다.
부족함이 없는 에덴동산에 살았던 아담과 하와도,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해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잖아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열등의식이 하나 있는데, 바로 ‘작다.’ 고 하는 것입니다.
땅덩어리도 작고, 덩치도 그리 크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열등의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삼천리금수강산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나라 땅을 몇 리로 계산한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작으니까 어지간하면, 거기다 대자를 갖다 붙여야 됩니다. 큰 대자 ‘대~용’
우리나라에 있는 다리는 크든 작든 대부분 ‘대교’ 라고 부릅니다. 한강대교, 완도대교, 진도대교, 등등.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유명하고 큰 다리가 있는데, 금문대교라 하지 않고 그냥 금문교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 이름이 대한민국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월드컵 응원할 때 ‘대~ 한민국’ 대자에 엑센트를 붙입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는 열등감이 없을까요? 예수를 믿으면 열등감이 깨끗이 사라지게 되던가요?
아닙니다. 교회는 어쩌면 열등감을 가진 사람이 더 많습니다. 사실 열등감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곳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보면 교회 안에 와서도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이 쓰고 다니는 가면들이 있습니다.
① “감투 가면” 이 있습니다. 교회의 직분을 섬김의 도구가 아닌, 계급으로 생각하는 것이 감투가면입니다.
그래서 장로 안수집사 권사가 되면, 그때부터 목에 힘을 주면서 교회의 주인 노릇을 하려고 들이 댑니다.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열등감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사람이, 직분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② “큰 교회 가면” 이 있습니다. 이 가면을 쓰게 되면, 그 교회 목사와 성도는 성도 수가 많은 것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대부분의 교인들이 많은 성도들의 그늘에 숨어, 무사역 무관심 무책임한 신앙생활을 합니다.
작은 교회는 예배에 누가 안 나왔는지 다 알거든요. 그런데 우리교회도 크지 않지만 확인이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큰 교회는 어떻겠습니까? 예배에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알 수도 없고, 나무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그늘 밑에 숨어 살면서도, 큰 교회에 다닌다는 것을 자랑하고 자부심을 가집니다.
③ “예언자 가면” 이 있습니다. 자기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험담하는 것입니다.
입만 벌리면 교회가 잘못됐고, 목사가 잘못됐고, 누가 잘못됐다고 비판합니다. 이게 예언자 가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솔직하게 지금 여러분은 어떤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 시간 자신의 열등감을 발견하고, 그것을 십자가 밑으로 가져오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맡겨버리십시오.
외모 열등감, 직업 열등감, 학벌 열등감, 경제적 열등감, 모두 십자가 밑으로 가져오세요. 맡겨버리세요.
십자가 밑에 맡기고 살아야 될 그 열등감을 내가 끌어안고 살면, 내 안에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가장 좋아해야 할 자기 자신을 자기가 가장 싫어하게 됩니다. 남들이 자신을 무시하면 몹시 화를 내면서도,
사실은 자기가 자기를 더 무시합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길을 스스로 망쳐놓는 가장 큰 방해꾼이 자신이 됩니다.
여러분! 이처럼 내가 나를 싫어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나를 만든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 이루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창조계획을 불평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섭리를 원망하는 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열등감을 십자가 밑에 던져버리고,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자존감이 생깁니다.
세상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을 씁니다.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해야 됩니다. 세상에서는 건강한 사람을 씁니다.
질병과 장애가 없어야 됩니다. 세상에서는 인물이 좋아야 합니다. 그래서 얼굴 인테리어를 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전과자를 쓰지 않습니다. 쓰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멀리합니다. 그래서 흠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며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다 해결해 주리라.”
지나간 역사 속에서 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 열등감을 축복의 기회로,
성공의 기회로, 자기 성숙의 기회로, 더 많은 열매를 맺는 사역자들이 된 많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루즈벨트는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소아마비를 앓은 장애인으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를 세계 경제 대공황을 극복한, 위대한 미국의 경제 대통령으로 기억할 뿐입니다.
베토벤은 청각장애자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베토벤을 청각장애자가 아닌, 위대한 작곡가로 기억할 뿐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무학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기억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남북통일을 이루고 흑인을 해방시킨 대통령, 유모어가 풍부한 대통령으로 기억할 뿐입니다.
죤 번연은 감옥에서 평생을 보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천로역정의 저자로 기억할 뿐입니다.
아인슈타인, 에디슨을 지진아로 기억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최대의 과학자로 발명가로 기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들인 저와 여러분들은, 결단코 열등한 조건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의 열등감을 主信感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감이라고 말합니다. 自信感의 뜻은 무업입니까?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자기 확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主信感이라고 말합니다. 主信感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으로 믿는 주님확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자기 확신인 자신감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으로 믿는 주님 확신인, 主信感으로 살아가시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아멘입니까?
오늘 본문은 모세의 소명 사건입니다. 모세는 성경 상 수많은 인물 가운데 최고의 인물입니다.
그도 한때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헤어나지 못하고, 몹시도 괴로워하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애굽 궁전에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 주먹 한 번 잘못 휘둘러서 살인죄를 범하고 도망자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갔고, 40년이 넘도록 경제적인 자립도 못해 처가살이로 얹혀서 살아야 했습니다.
살인자, 도망자, 가족부양도 못하는 무능력자,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인도하라 하십니다.
그래서 모세는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1)
극심한 열등감에 빠져 있었던 모세는 “내가 누구이기에?” 나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거절합니다.
그렇게 열등감에 사로잡힌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뭐라 말씀합니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3: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므로 열등감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으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아멘!
그런데 열등감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모세를 보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세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하는데도 “누가 나 같은 사람을 믿고 따라 오겠습니까?”
살인자, 도망자, 가족부양도 못하는 무능력자인 나 같은 사람을, 누가 믿고 따라 오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있는 자, 너를 택한 나 여호와 하나님이 너를 보냈다 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등감은 모세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집니다. “내겐 마른 막대기가 전부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래 맞다. 너는 네 손에 든 마른 막대기 같이 아무 쓸모없는 존재다.
그러나 내가 너를 붙들면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이 터져 생수가 쏟아지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질 것이다.”
이쯤하면 모세의 열등감도 항복할 것 같은데, 지긋지긋한 모세의 열등감이 또 변명합니다.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여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모세의 변명처럼 지도자가 무능하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 결정적인 열등감 가질 만한 약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뭐라 말씀합니까? “입은 누가 만들었느냐? 그 입에 내가 능력을 부어주겠다.” 아멘!
“그래서 말 잘 하는 아론은 물론, 너의 부족함을 돕기 위해 동서남북에서 너를 돕는 사람들을 보내주겠다.”
그런데도 모세가 하나님의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이 정도 변명과 거절을 보면, 모세가 얼마나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진 사람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그래 관둬라. 너 아니라도 얼마든지 쓸 사람 있다. 그만 했으면 알아들어야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모세를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한번 선택하시면,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도 우리가 순종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 손을 묶어서라도, 내 발을 꺾어서라도 끌고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만 순종해버려야 합니다.
성경에 사울이란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이 나옵니다. 구약의 사울과 신약의 사울입니다.
구약의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입니다. 그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외모와 훤칠한 키를 가졌습니다.
처음에는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왕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린 다윗 앞에 열등감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시기 질투로 시간과 능력을 모두 낭비하고, 왕의 행복도 잃어버린 채 자살로 자신의 생을 마감합니다.
신약의 사울은 바울입니다. 그는 큰 키도 아니었고, 잘 생긴 얼굴도 아니었고, 몸이 건강하지도 못했습니다.
걸핏하면 매 맞고 감옥에 갇히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 때문에 항상 기뻐하였고, 늘 행복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그의 기쁨과 행복은, 예수님의 십자가 자랑에 있었고, 자신의 약함을 자랑함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여러분! 모두 다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입니까?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면 기쁨 충만해지고, 행복해집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의 쓰레기 같은 열등감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고, 주님을 믿는 主信感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의 약점과 열등감을 들고 와 긍정적 인생관, 아름다운 자존감, 성도의 主信感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예배시간은 여러분의 약점과 열등감을 긍정적 인생관, 자존감, 성도의 主信感으로 바꾸는 시간이며,
그래서 교회와 목회자인 저의 사명은 여러분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면서,
기쁨이 충만해지고 행복해지도록, 긍정적 인생관, 자존감, 성도의 主信感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예배를 통해 열등감 대신 성공적인 자화상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보십시오. 갈릴리 어부였던 시몬이 예수 앞에 신앙고백을 했을 때, 베드로 - 반석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걸핏하면 넘어지고 깨지고 망가지던 시몬이, 새 이름을 받은 후부터 주님을 믿는 主信感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복음 사명을 위해 달려가다가,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하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예배를 드리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면서,
기쁨이 충만해지고 행복해지도록, 긍정적 인생관, 행복한 자존감, 성도의 主信感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리라.(습 3:17)
너의 부모는 너를 버려도 나를 너를 영접하리라.(시27:10) / 너는 내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다.
너는 나의 사랑받는 자녀요. 내가 기뻐하는 아들이다. 그래서 나는 너의 필요를 채울 것이니라.
너는 내게 절대적 가치가 있는 너무나 귀한 천국의 보화이니라.” 아멘! 할렐루야!
이 주님의 음성을 여러분 자신을 향하여 늘 선포하십시오. 그리고 사탄 마귀에게도 큰소리로 선포하십시오.
나아가서 세상에서도 선포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이웃에게도 자나 깨나 항상 이 음성을 선포하십시오.
♬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 이미 우리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열등한 조건이 있다하여도, 절대로 저와 여러분을 버리시지 아니십니다.
그리고 내게 약점이 있다고 나를 싫어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님은 받아주십니다. 아멘!
이 주님을 믿는 主信感을 가지게 되면, 내게 주어진 환경 또한 있는 모습 그대로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내 남편 내 아내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던 사람이, 내 남편이 최고 내 아내가 최고라고 말하게 됩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한을 풀 듯, 한풀이식 자녀교육을 하던 열등감도 눈 녹듯이 다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녀의 장점은 물론 약점까지도 다 이해하고, 자녀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열등감 때문에 교회의 약점과 허물만 보이던 사람이, 主信感을 회복하고 나면 내 교회가 최고라고 말합니다.
결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자 헛된 몸부림도 하지 않습니다.
나는 70억 인구 가운데, 아니 이 땅에 왔다가 간 600억 인구 가운데 유일한 하나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主信感을 회복하고 나면, 늘 비판적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좋은 점만 보고 많이 칭찬합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나의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 행복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믿는 믿음 - 主信感으로 살아가시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 - 主信感으로 다른 사람의 장점을 찾아 인정하고, 많이 칭찬하며 살아가십시오.
주님을 믿는 믿음 - 主信感으로 모든 일의 좋은 점만 보십시오. 그리고 “잘 되었다” 고 말하십시오.
주님을 믿는 믿음 - 主信感으로 늘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온화하고 부드러운 얼굴로 사십시오.
주님을 믿는 믿음 - 主信感으로 먼저 자기를 용서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도 용서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열등감!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열등감을 넘어 주님이 주신 믿음 - 主信感으로 사십시오.
그래서 내 안의 열등감을 오히려 축복으로 바꾸어 버리십시오. 내 안의 열등감을 성공으로 바꾸어 버리십시오.
내 안의 열등감을 성숙의 기회로 바꾸어 버리십시오.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삶으로 바꾸어 버리십시오.
그래서 우리 믿음의 가족 여러분 모두, 항상 밝고, 자신감이 넘치고, 오직 주님을 믿는 主信感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당당하게! 복의 근원 복덩어리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