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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하늘에 속한 사람들 – 형제들의집 원문보기 글쓴이: 험블러
성경적인 복음과 신약교회 진리 회복을 위한
현재 한국 교회의 복음을 진단한다(3)
들어가면서
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거듭난 신앙을 갖는 일은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이다. 따라서 전도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사역)은 무엇인지 가능한 한 충분히 증거하고, 구도자는 복음을 말씀으로 여유 있게 상고함으로써 자신의 영혼 구원에 관한 문제를 깊이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갈등과 번뇌 이후에, 자신의 영혼 속에 서광으로 비춰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움틀 때, 성령에 의한 중생의 역사는 꽃필 수 있게 된다.
성령으로 중생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늘나라 가기에 충분하지만,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전부는 아니다. 이렇게 중생이 이루어진 한 영혼 속에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자기가 지은 많은 죄로부터의 구원(칭의), 육신 속에 내재하는 죄로부터의 구원(성화), 그리고 장차 저지를 죄로부터의 구원(영화)으로 완성된다. 이렇듯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게 만들고,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가운데 자라도록 한다.
거듭난 신앙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우리 영혼의 거듭남은 무척 중요하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거듭남을 그저 자기 개선이나 자기 변혁의 일종으로 잘못 이해하거나 오용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영혼의 거듭남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해리 아이언사이드는 영혼의 거듭남과 그 거듭남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엄청난 영적 실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복음을 믿는 순간, 그 사람은 거듭나게 되고 새 생명과 새 성품을 얻게 된다. 이 새로운 성품은 죄를 미워하고 거룩함을 사랑한다. 당신이 예수께로 와서 그분을 의뢰할 때, 이 진리를 깨닫지 않았는가? 당신은 한때 즐겨 행하던 악한 것들을 이제는 미워하고 거부하지 않는가? 당신은 마음에서 새롭게 솟아나는 선에 대한 갈망과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과 의에 대한 목마름을 보고 있지 않은가? 이 모든 것이 새 성품의 증거이다. 그리고 당신이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날마다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당신을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이며 새로운 성품을 소유하게 된다. 이 새 성품은 죄를 미워하며, 그로부터 그의 소원과 생각을 지배하여 죄는 역겨운 것이 된다. 그는 과거의 어리석음과 죄악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고 거룩함을 소망하게 된다. 성령의 능력으로 그의 삶의 방향은 변하게 된다. 그는 의로움을 연습하면서 종종 실패를 경험하기도 하지만, 결국 모든 삶의 방향은 변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기쁨이요, 희락이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생활의 소중함을 점점 알아가게 됨에 따라 은혜와 지식 가운데 성장하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더해져 자기로 하여금 순종의 길을 걷도록 하심을 깨닫게 된다. 그의 새 성품은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이 참 기쁨임을 알게 되어, 죄가 자신의 삶과 성품에서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다.”
- 해리 A. 아이언사이드, 완전한 확신
이렇게 우리 영혼이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경험했다면, 우리는 새로운 출생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본성(성품)을 받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갓난아기로 자라가야 하며(벧전 2:1,2)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영적인 성인)에 이르도록 자라가야 한다(엡 4:13). 이러한 영적 성장과 성숙의 중간단계에 하나님 은혜의 선물이자 영적 축복인, 해방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영적 해방의 은혜를 통해 우리는 죄, 육신,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하게 되고(롬 6, 7장 참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룸으로써,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사는 삶을 시작하게 된다(롬 8장 참조).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로마서 8장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더 이상 육신으로 살지 않고, 더 이상 어린아이로 살지 않고, 아들의 영을 받아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며, 열매 맺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갈 4:5-7, 롬 8:14). 따라서 넉넉히 이기는 신앙으로 사는(롬 8:37)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이다.
안이한 신앙(Easy Believism)
하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에 널리 퍼진 미신 가운데 하나는 복음을 쉽게 믿도록 고안한 신앙, 곧 안이한 신앙(easy believism)이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과의 관계에 터 잡고 있지만, 안이한 신앙에는 인격적인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한 알의 만병통치약처럼 패키지화하여, 그저 한 번만 꿀꺽 삼키면 만사형통하는 것처럼 제시한다. 그저 단순히 믿기만 하면 된다는 복음, 즉 회개도 없고 복종도 없고 헌신도 없고 변화된 삶도 없는 복음, 이것이 안이한 신앙이다.
이처럼 안이한 신앙은 대담하게도, ‘지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나중에’ 주님으로 모시라고 제안한다. 하지만, 성경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10)라고 말씀하시며 또한, 예수님을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both Lord and Christ)가 되게“(행 2:36) 하셨다고 말한다. 성경은 결코 구주(the Savior)와 주(the Lord)를 분리하지 않는다.
따라서 안이한 신앙 신봉자들은 분명히 성령님의 사역과 역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거나 아예 성령님을 무시한다. 한 영혼 속에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일에 성령의 자리가 없다. 이러한 구원은 가짜이다. 거듭남은 진정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이다. 성령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게 일하실지를 주권적으로 선택하신다(요 3:6, 8). 요한복음 16장을 보면 성령님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요 16:8) 영혼을 책망하신다. 성령님께서 일하신 결과는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처럼 “저희가…마음에 찔려…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하면서 영혼의 탄식과 고뇌에 빠지게 된다. 이처럼 영혼이 각성하는 분명한 증거가 보일 때에야 비로소 복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영혼은 시냇물을 찾아 헤매던 목마른 사슴처럼 복음을 마실 것이다.
값싼 은혜
영혼 속에 회개의 증거가 없는데도 은혜의 복음을 제시하는 것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며,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는 꼴이다(마 7:6). 이렇게 하는 것은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대로 은혜를 값싼 것으로 취급하는 일이다. 그는 이를 값싼 은혜라 칭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값싼 은혜는 시장에서 행상인들이 파는 싸구려 물건 같은 은혜를 의미한다. 값싼 은혜는 죄악의 고통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죄 사함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에게 베푸는 은혜이다. 값싼 은혜는 회개 없는 죄 사함, 교회의 훈련이 없는 세례, 죄에 대한 자백이 없는 성찬, 인격적인 신앙이 없는 죄 사함을 선포하는 것이다. 값싼 은혜는 제자도가 없는 은혜, 십자가가 없는 은혜, 살아계시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이다”.
- 디트리히 본회퍼, 제자도의 댓가
복음 전도자들은 하나님의 값진 은혜를 값싼 은혜로 전락시켜선 안 된다. 우리에게는 그럴 권리나 권한이 없으며 오히려 은혜의 복음을 통해서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해야 한다(딛 2:10-14).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선포하라.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고, 은혜가 그 영혼 속에서 일하게 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광채를 발할 것이며,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부끄러워하게 되고, 우리를 대신하여 당신 몸을 내어주신 그 은혜 앞에 엎드릴 것이며, 모든 불법에서 구속함을 받고, 깨끗해져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복음 전도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영혼 구령에 동역하면, 그 역사에서 성령님과 동역하게 될 것이다.
주권적 구원(Lordship Salvation)
안이한 신앙의 극단적 반대쪽에는 주권적 구원이 있다. 주권적 구원이란 반드시 죄인들이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주권에 복종해야 함을 전제한다. 한편, 참된 그리스도인이 주권적 구원에 호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주권적 구원론이란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본성(성품) 한 가지만을 가지고 있다는 ‘단일 본성주의’를 근간으로 세워진 신학이론이기에 주의가 필요하다. 이러한 주권적 구원론의 선봉에 서 있는 존 맥아더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거듭날 때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새로운 본성이 옛 본성 위에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옛 본성을 대치하는 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완전히 새로운 인격으로 바뀐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서로 다른 두 가지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성경적 표현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본성, 곧 이 한 가지 본성만을 가지고 있다. 옛 자아는 죽었고, 새로운 자아가 산다. 그 둘은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신자들이 옛 본성과 새로운 본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라고 생각한다. 신자들은 이중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더 이상 옛 본성이란 없다.”
- 존 맥아더, 에베소서 강해 및 Free from Sin에서 발췌
존 맥아더의 표현을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영적이며(따라서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란 거듭난 일이 없는 죄인을 뿐이다.) 옛 본성 따위는 없기에, 자연스럽게 성화가 이루어지고 따라서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끝까지 (자신의) 믿음과 (자신의) 거룩함을 지켜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구도자 자신이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힘으로 구원을 이룸으로써만 가능하다(존 맥아더, 역사하는 믿음, 죠이선교회, (230-232p 참조).
우리는 어떤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오늘날 현대 교회에는 참으로 다양한 형태의 복음이 난무하고 있다. 서로 정통적인 복음이라고 아우성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어떤 복음을 전할 것인가? 20세기 선지자로 불린 A. W. 토저는 신약성서의 그리스도를 대체할 다른 예수의 출현을 예고하면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리스도의 개념을 든든히 붙잡아야 하며, 성경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삶에서 유일무이한 우리 주님 예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의탁하는 일은 지적이며 의지적이고 감정적이다. 신자는 예수가 주님과 구주이심을 지적으로 확신하고, 자신의 의지를 드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분을 따르며 곧 자신의 마음을 그분과의 아름답고 달콤한 교제에 드리게 된다. 우리는 이제 그분의 친구를 우리의 친구로, 그분의 적을 우리의 적으로, 그분의 길을 우리의 길로, 그분의 거절을 우리의 거절로, 그분의 십자가를 우리의 십자가로, 그분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으로, 그분의 미래를 우리의 미래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구도자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권면할 때 하는 말이라면, 반드시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깊은 영적 어려움에 봉착할지도 모른다.”
- A.W. 토저,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규장
우리는 성경적인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동안 복음을 전했고 지금도 자주 전한다 해도 과연 그 복음이 성경에서 말하는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어쩌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머리와 가슴을 비성경적인 복음으로 채운 채 영원한 지옥 불 못에 떨어질지 생각해보라. 이는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누구에게 책임을 물으실까? 혹시 무수한 영혼을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했노라고 자랑하는 복음 전도자, 당신은 아닐까?
나가면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우리를 지옥 가지 않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더 큰 은혜 속으로 거듭난 신자를 이끌어간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갓난아기를 대량생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고 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는 성경적인 복음의 길은 도외시해왔다. 이제라도 성경적인 복음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생산하는 복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위대한 복음의 역사가 불 일듯 일어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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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하늘에 속한 사람들 – 형제들의집 원문보기 글쓴이: 험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