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이 있으면 ‘을질’도 있습니다.
‘질(質)’은 ‘사물의 가치나 속성, 등급 따위의 총체’를 나타내는 말인데 여기에 ‘갑’과 ‘을’이 붙어 뜻을 다르게 하고 있습니다.
“갑질”은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가 상대방에게 오만무례하게 행동하거나 이래라저래라 하며 제멋대로 구는 짓’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을질”은 ‘정도, 지위, 수준 따위가 상대보다 아래에 있는 자가 상대를 호령하거나 자신의 방침에 따르게 하는 짓’이라고 설명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갑질’이라는 말에는 열을 올리지만 ‘을질’에 대해서는 상당히 감싸는 분위기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을질’도 존재합니다. 아니, 요즘에는 ‘을질’이 대세인 같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은 검찰이 '법인카드 의혹'과 관련 이재명 전 대표 부부를 소환조사하는 것과 관련 "정권의 위기 때마다 이 전 대표를 제물 삼는 윤석열 대통령과 정치검찰, 정권 수호를 위한 '방탄수사'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고 합니다.
민주당 검찰독재정치탄압위원회는 7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지난 4일 수원지검이 이 전 대표에게 출석요구서를 보냈다. 배우자까지 부부 모두를 소환했다"며, "검찰이 이 전 대표에게 출석요구서를 보낸 것은 민주당이 국회 본회의에서 순직해병 특검법을 통과시키던 그날, 비위 검사들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제출한 직후의 일"이라며 "윤 대통령과 검찰이 궁지에 몰리자 이 전 대표 수사로 국면을 전환하고 위기를 탈출해 보겠다는 비겁하고 무도한 습성을 또다시 드러낸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지금 이재명 대표를 ‘을’이라고 볼 사람은 대한민국에 없을 겁니다. ‘을’이 아니면 ‘갑’입니다. 그럼 여기서 검찰이 ‘갑’일까요?
이재명 대표가 ‘을’이라고 하면 검찰이 ‘갑’일 것이고, 검찰이 ‘갑’이면 이재명 대표가 ‘을’입니다.
<최근 충남도의회에서 상정이 보류된 ‘충남교육청 을질 방지 조례안’이 논란이다.
이 조례안은 을질을 정당한 업무지시나 요구 등을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하거나, 정당한 지시를 하는 교직원의 행위를 갑질 또는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부당하게 함으로써 상대방(갑)에게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하는 행위로 정의한다.
이를 추진한 것으로 알려진 충남교육청은 ‘출근은 내맘, 퇴근은 칼’ ‘상사는 직원을 귀찮게 해!’ ‘내 일은 남 일, 남 일은 남 일’ ‘기한은 있으나 마나’ 등을 ‘을의 갑질(역갑질)’ 유형으로 들었다. 전교조 등 진보단체는 “이 조례안은 을의 지위에 있는 노동자들을 입틀막하고 갑질을 보호한다”며 완전 폐기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 대목에서 요즘 유행어인 ‘제가요? 이걸요? 왜요?’가 떠오른다. 이 ‘3요’는 꼰대 상급자의 갑질에 대한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동시에 무책임한 하급자의 을질에 대한 우리 사회의 냉소다. 곳곳에서 갑질 논란이 불거지는 게 일상이 됐다면 이제 을질 논란도 만만치 않다.
갑질과 을질은 권력과 지위의 차이에서 비롯된 불공정한 행태라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갑질은 주로 직장 내 상사와 부하 직원, 고객과 서비스 제공자 등 권력 관계가 명확할 때 나타난다. 그 관계를 뒤집어 을의 탈을 쓰고 갑에게 누명을 씌워 괴롭히면 을질이 된다.
‘을의 가면’의 저자 서유정은 진짜 피해자들은 가해자가 합의금을 제안해도 가해자와 관련된 돈조차 거부하거나, 받기를 결심해도 가해자의 이름이 자신의 계좌에 찍히는 것조차 싫어 본인이 선택한 다른 기관에 기부할 것을 요구한다고 전한다. 반면 을의 탈을 쓰고 을질을 하는 이들은 과도한 배상을 요구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이 시대의 갑질 문화는 을질 문화라는 새로운 괴물을 잉태했다. 갑질을 일삼는 자들의 가장 큰 동조자는 갑질 앞에서 냉소와 침묵으로 일관하는 이들이다. 반대로 을질을 일삼는 자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피해자 코스프레다. 종종 2차 가해 프레임도 한 세트가 된다.
액면만 놓고 보면 갑질과 을질은 서로 적대적이지만 실제로는 묘하게 공생한다. 갑질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커질수록 을질은 번창한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갑질하던 사람일수록 을이 되면 을질을 하고, 을질하던 사람일수록 갑이 되면 갑질을 한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두 개 이상의 양자가 있는 상자의 뚜껑을 열고 상태를 직접 관측하기 전까지 각 양자의 위치와 속도는 다양한 가능성의 중첩 상태에 놓여 있다.
마찬가지로 사건이 터져 실제 관찰이 이뤄지기 전까지 갑질과 을질은 확률적으로 동시에 존재한다. 최근 또 다른 논란이 된 유소년 얼차려 훈련방식이나 피해 학생 부모의 과도한 합의금 요구에 갑질과 을질이 중첩돼 있다.
갑질이든 을질이든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와 배려가 없는 내로남불의 정신 승리다. 그래서 진정으로 갑질이나 을질이 있었는지 밝히기 어렵다.
‘모두 거짓말을 한다’의 저자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는 사람들의 진심을 그렇게 알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구글 트렌드 분석을 통해 밝혀낸다. 객관적 사실을 놓고 자신에게 유리한 해석과 진술만 하는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라쇼몽 효과’라고 한다.
한 사무라이의 죽음을 둘러싼 네 명의 진술이 모두 엇갈리는 상황을 풍자한 일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50년작 영화 ‘라쇼몽’에서 유래됐다.
갑질과 을질에 대한 당대 최고의 일갈은 『개소리에 대하여(On Bullshit)』다. 이 책의 저자 해리 프랭크퍼트 미국 프린스턴대 철학과 교수는 개소리꾼은 진실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이익에 따라 개소리를 지껄일 뿐이라고 꾸짖는다.
그는 단순한 거짓말보다 개소리가 더 해롭다고 본다. “우리가 객관적 실재에 접근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방법이 있다”는 믿음과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사심 없이 노력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우리의 확신을 무너트리기 때문이다.
2019년 시행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갑질에 새로운 법적 지위를 부여했듯, 사회의 통념이 허락하는 범위 밖의 이익을 얻기 위해 무분별하게 행해지는 을질에도 법적 지위를 부여할 때가 됐다.>국민일보. 구민교(서울대 교수·행정대학원)
출처 : 국민일보. 오피니언 [국민논단], 갑질과 을질의 적대적 공생관계
요즘은 ‘개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마 본인들은 절대 자신이 ‘개’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입으로는 ‘개소리’를 내는 것 같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갑질’을 응징하고, ‘을’을 보호한다고 ‘을지위원회’를 만들었다는 사람도 스스로 ‘갑’이 되었으니 ‘을’을 응징할 ‘을질’규제는 절대 찬성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정하기 싫을지도 모르지만 모든 사회는 갑과 을로 구성이 됩니다. 심지어 부부사이도 갑과 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것을 서로 인지하고 인정하느냐의 문제이지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갑과 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갑질’만 비난할 것이 아니라 ‘을질’에 대한 책임도 물어야하고 응징할 수 있는 법을 만드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