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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8. 묵상글 ( 연중 제15주일 화요일. - 기쁨이 충만한 날.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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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8. 연중 제15주일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쁨이 충만한 날
수험생이 시험을 치르는 날은 긴장된 날입니다. 그렇지만 동안의 수고와 땀의 결과를 대면하는 날이기에 기대되고 기쁨이 충만한 날입니다. 자신의 현주소를 볼 수 있는 날이기 때문에 새로운 희망을 간직한 날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에 심판 날이 다가온다는 것은 기쁨인 동시에 두려움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기대가 됩니다. 열심히 노력하였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았다고 자부하는 이에게는 충만한 행복을 누리는 때입니다. 구원의 날이요,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감사하는 날이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심판의 날이 두렵습니다. 살아온 지난날이 허물로 누벼놓은 날이요, 부족함이 드러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믿는 이들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허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해주시고 자비와 용서로 함께해 주시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에제키엘서에 보면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그렇게 하여 죄가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여라”(에제18,30).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마다 걸어온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 아니 지금, 이 순간에 어떤 길을 걸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자칫 잘 살아왔다고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될 때 그 인생이 올가미에 걸려들게 되고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과거는 올가미가 아니라 새 삶의 디딤돌이어야 합니다. 과거에 매이지 말고 지금 여기서 새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 과거를 들추어내며 무어라 하든지 내가 주님 앞에 허물을 고백하고 용서받았으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코라진, 벳싸이다, 가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열심히 활동하신 지역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은총을 거부하였고 결단의 시간을 낭비하였습니다. 은총을 아무리 많이 주어도 간수 하지 않으면 불행합니다. 반면에 티로와 시돈, 소돔은 이방인 도시로써 교만과 사치스러운 부의 표본이 된 곳으로 퇴폐와 음란, 악의 도시로 알려진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더 큰 구원의 희망이 있었습니다. 허물과 연약함에 대한 인정과 새 삶에 대한 희망이 꿈틀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기적이 그곳에 있었더라면 그들은 분명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은총이 아무리 많아도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언제나 깨어 준비하는 삶이 요구됩니다.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교만의 죄입니다.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고 스스로 잘났다고 하는 죄는 하느님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좋든 나쁘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코헬12,14). 고 하셨으니 마음을 다잡아 오늘을 충실히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불 속에 던지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니만큼 알곡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먼저 자신을 잘 살핀다면 심판은 기쁨이요, 곧 하늘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갖고 심판을 맞이하십시오. 허물과 죄, 부족함에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나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지 않기를 다짐하며 이날을 봉헌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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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8. 연중 제15주일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매일 Smile합시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오늘은 너무 늦잠을 잤습니다.
그래서 강론을 올리지 말까 생각하다가
오래전에 인터넷에서 본 재미있고 의미 있는 말이 생각나
그것을 그대로 옮기는 것으로 대신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See
Miracle
In
Life
Every day.
매일의 삶에서 기적을 보라는 말인데,
각 단어의 앞 글자를 연결하면 ‘smile’이 되잖습니까?
그러니까 매일의 삶에서 기적을 보면
매일 ‘Smile’하게 된다는 말이 되고
매일 웃으면 매일 행복하게 된다는 말이 되겠지요.
진정 우리는 매일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매일 해가 뜨는 것이 기적이 아닌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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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8. 연중 제15주일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2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가파르나움을 꾸짖으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티로나 시돈처럼 바알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혹은 소돔처럼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또는 단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도시들이 질책과 경고를 받은 직접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를 오늘 <복음>의 시작에서는 이렇게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으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20)
그렇습니다. 단지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가장 많은 기적을 보았는데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곧 그들이 회개하지 않은 것은 기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영적 무지로 가려져 있는 어리석음과 굳어진 완고함이었습니다. ‘회개’(슈브, 메타노이아)란 베풀어진 사랑을 빗나갔음을 깨닫고, 그 사랑으로 바퀴를 돌리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영적 무지의 어리석음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돌아온 탕자이야기’에서, 특은을 받고도 받은 줄도 모르고 죄지은 줄도 모르기에 돌아오지도 않은 큰아들과 같습니다. 또한 파라오처럼, 많은 기적으로 자꾸자꾸 체험시켜주건만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함과 고집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오늘 우리가 하느님과 공동체로부터 많은 사랑과 특은을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영적무지로 어리석고 완고하고 고집스런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 이야기”(루카 12,41-48)의 말씀이 가슴을 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바로 제가 당신의 뜻을 알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요, 많이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주저하고 망설이며, 이기심과 자애심과 편리와 안주에 사로잡혀 깊이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도시들을 경고하신 것은 그들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한 애타는 사랑의 호소였습니다. 멸망으로 빠져드는 그들에 대한 동정과 애도의 한탄이요 경고였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애타는 호소를 들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도 주님께서 저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은, 저희에게 그 사랑을 주신 까닭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제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저에게 그만큼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전부를 건네주신 우리 주님께 우리도 전부를 건네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20)
주님!
당신의 꾸짖음이 사랑임을 알게 하소서.
사랑을 받고 또 받으면서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함은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어리석음에 눈이 가려 마음이 비뚤어지고 변덕스런 까닭입니다.
당신이 많은 사랑을 요구하심은 그토록 많은 사랑을 주셨음임을 알게 하소서.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밑에 모으듯 품으신 그 크신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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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8. 연중 제15주일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 중에 미술관을 가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습니다. 성지순례 일정이 빠듯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성지순례 중에는 피렌체에서 미술관 방문이 있었습니다. 저는 미술관 방문에서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수태고지’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림을 해설하는 분은 수태고지의 그림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성모님의 오른 팔이 왼 팔에 비해서 더 길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모님의 무릎이 유난히 두껍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성모님이 읽는 성경의 탁자가 너무 멀리 있다는 것입니다. 미술을 전공하는 분들이 오랜 시간 연구를 했지만 그 이유를 몰랐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그 문제를 풀었는데 그것은 ‘관점’의 차이였습니다. 성모님의 수태고지 그림을 정면에서 보면 이해할 수가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의 수태고지 그림을 옆에서 보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되었습니다. 옆에서 보니 성모님의 오른 팔도 왼팔과 균형이 맞았습니다. 옆에서 보니 성모님의 무릎이 균형이 맞았습니다. 옆에서 보니 성모님이 읽는 성경의 탁자가 성모님과 가까이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철저히 보는 사람의 관점에서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은 제대의 높은 곳에 있었기에 옆으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을 때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근대과학 혁명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바로 관점의 차이였습니다.
생각해 보니 신앙은 관점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은 세상 사람들이 보는 삶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앙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생각해 보니 예수님의 삶은 관점이 달랐습니다. 첫 번째는 ‘안식일’에 대한 관점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의 규정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하는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두 번째는 ‘자리’에 대한 관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원했습니다. 높은 자리는 성공과 부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 중에 요한과 야고보도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늘 ‘낮은 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베들레헴의 구유에 태어나신 것도 낮은 자리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 너희가 잔치에 초대 받거든 낮은 자리에 앉도록 하여라. 세 번째는 ‘재물’에 대한 관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을 많이 모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하늘에 쌓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쌓아야 할 재물은 ‘자비, 나눔, 겸손, 희생’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가장 가난하고, 굶주리고, 헐벗고, 병든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인들이 ‘관점’을 바꾸는 출발은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루가복음 15장에서 ‘회개’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의 비유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성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욱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니 우리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온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허물과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죄가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다면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점은 생각으로만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관점이 바뀌면 행동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이 변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꾸짖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강력한 요청입니다. 진흙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은 피어납니다. 알이 깨어지는 아픔이 없이 병아리는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힘들고 어려운 일은 있었습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절망하는 것도 우리의 선택이고, 장애물을 넘어서는 용기를 가지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갖는 것도 우리의 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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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8. 연중 제15주일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하느님
하느님께는 늘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지금(now)을, 새로움(new)을 뜻합니다. 지금의 하느님, 새로움의 하느님입니다. 요즘 불길하고 우울한 뉴스가 가득합니다. 무엇보다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입니다. 국내의 홍수 피해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천재에 인재까기 겹처 정말 회개하여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전세계 덮친 폭염, 홍수”라는 1면 톱기가 내용 일부를 소개합니다.
-지난 주말 한국에서 폭우로 40명이 희생된 가운데 미국 북동부 펜실베이니이아주 돌발 폭우로 5명이 목숨을 잃었다. 동시에 미국 남서부엔 폭염이 덮져 데그밸리의 기온이 50도를 넘어서며 종전 지구 최고 기온 기록 경신을 앞두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48도가 넘는 폭염이 예고되며 유럽 최고 기온도 곧 다시 쓰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웃 중국과 일본도 폭염과 홍수에 몸살을 앓고 있다.
지구 온난화가 폭염 및 극단 기후의 배후로 지목되는 가운데 온실가스 최대 배출국인 미국과 중국이 기후 관련 논의에 나섰지만 실질적 합의가 도출될 것이라는 기대는 크지 않다.-
국내외가 총체적 난국입니다. 공동의 집인 지구가 인간의 무지와 탐욕으로 인해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자연 재해 앞에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지요. 홍수 및 산사태로 인해 초토화되는 현실 앞에 망연자실한 사람들입니다. 피해는 언제나 가난하고 힘없는 민초인 사람들이 우선입니다. 어떻게? 뾰족한 답이 없어 보입니다. 답은 단 하나, 회개뿐입니다. 말로만, 마음만으로의 회개가 아니라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생활방식의 변화입니다. 개인의 노력은 물론 정책이 수반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참 격렬합니다. 오늘날 세상에 오셔도 주님의 반응은 똑같을 것입니다. 예나 이제나 참 벗어나기 힘든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돌아오는 철저한 회개만이 무지에 대한 답임을 오늘 복음이 가르쳐줍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회개했을 것이다...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대로 오늘의 하느님을 잊은 무지한 이들을 향한 불행 선언같습니다. “행복하여라” 많이도 반복됐던 행복선언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불행선언입니다. 불행도, 행복도 선택입니다. 언젠가 그날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을 선택하는 것이요 지체없는 회개의 실행입니다. 예수님께서 활약하시며 세고을에 많은 기적들을 베푸셨는데 그 기적들이 궁극으로 목표했던 바는 무지한 사람들의 회개였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뿐입니다.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없이는 온유와 겸손도 자비와 지혜도 없습니다. 도대체 하느님이 아니곤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의 복음 선포와 더불어 늘 강조하신 것도 회개였습니다. 하느님안 제자리로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는 게 회개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개의 여정과 함께 가는 예닮의 여정입니다. 회개의 여정을 통해 날로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무지에서 벗어나 참나의 행복한 자유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회개의 여정을 통한 참자유요 참행복입니다.
회개의 여정을 사는 이에겐 늘 새로운 시작이 있을뿐입니다. 바로 이점을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배웁니다. 창세기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어제 부터 제1독서는 탈출기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하느님의 결의가 우리에게는 용기와 힘이 됩니다. 좌절함이나 절망함이 없이 늘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하느님이야말로 우리 회개의 여정에 최고의 참 좋은 동반자가 됩니다.
모세를 통해 다시 시작하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통해 회개를 촉구하셨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시며 우리의 평생 동반자가 되고 계십니다. 모세를 준비시키는 심모원려의 하느님의 지혜와 겸손, 끝없는 인내와 기다림이 놀랍습니다.
참으로 회개의 여정에 기도와 회개와 더불어 날로 깊어지는 믿음임을 배웁니다. 야곱을 수련시키고, 이어 요셉을 치열히 수련시킨 하느님은 모세를 수련시킴으로 구원역사를 시작합니다. 모세의 탄생과정과 성장과정이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섬세한 개입을 통해 이뤄집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절망은 없음을 배우고 깨닫게 됩니다. 파라오의 딸, 공주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되었을 때, 공주는 그 아이를 아들로 삼고,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하면서 그 이름을 모세라 합니다. 새삼 세례성사로 물에서 건져 낸 우리들 하나하나 역시 모세임을 깨닫습니다.
모세야말로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겪으며 혹독한 수련을 겪으셨던 예수님이요, 예수님에 앞서 하느님의 도구로 선택된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하느님을 수련장으로 하여 기나긴 회개의 여정에, 수련에 돌입합니다. 여전히 인생 광야에서 회개의 여정중 평생 수련자들인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수련장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선언하신 임마누엘 예수님이십니다.
오늘도 친히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오시는 주 예수님은 우리의 수련장이 되시어 회개의 여정중 늘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주십니다. 저절로 나오는 행복선언입니다.
“행복하여라, 예수님을 수련장으로 모시고 평생 회개의 수련자로 사는, 회개의 여정중인 사람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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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8. 연중 제15주일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삶은 비누와 같다. 삶은 비누와 같다. 삶은 비누와 같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비누는 처음에 새것을 뜯어서 사용하면 잘 닳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그 속도가 빨라집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다는 말이지요. 이와 비슷한 말이 있는데요. 나이 곱하기 2가 바로 삶의 속도라는 말입니다.
20살이면 40킬로미터로 달리는 것이고 50대면 100킬로미터로 달린다는 말이지요. 점점 더 빨라진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빨라지면, 눈에 보일 정도로 빨라지면 우리는 살아온 날들을 후회하거나 아쉬워할지도 모릅니다. 조금 더 잘할 걸, 조금 더 열심히 살 걸 하는 후회 말입니다.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것은 지금을 더욱 충실히 사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카파르나움을 보고는 이러한 마음으로 질타하십니다. 주님은 카파르나움에서 많은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이방인의 도시인 띠로와 시돈보다 더욱 많은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카파르나움 그곳은 주님의 제2의 고향입니다. 베드로의 집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신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자주 가시던 회당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제2의 고향을 보고 주님은 시돈과 띠로가 구원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기적을 보여주셨음에도 카파르나움은 그 위용만을 믿고 하느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사셨던 곳은 카파르나움입니다. 그리고 지금 사시는 곳은 우리입니다. 그러니 카파르나움을 우리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를 통해 활동하시고 우리와 함께 복음을 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카파르나움이 풍요로웠던 것처럼 우리도 풍요롭습니다.
다만 한가지 우리는 카파르나움이 선택한 길을 선택하지 않고 하느님 앞에 늘 겸손한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경외심
얼마 전 강화에 있는 한 사찰의 낙조대에 올라갔습니다.
물론 그 시간은 낙조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숨이 조금 차올 정도로 오르고 올랐더니
어느 순간 낙조대에 다다랐습니다.
그리고 숨을 돌리며 고개를 들었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어 냈습니다.
낙조가 아니었음에도 충분히 탄성이 새어나왔습니다.
세 살을 창조하신 분의 신비가
그대로 저의 눈을 통해 마음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섬 강화도였습니다.
그때 조금 이해가 갔습니다.
처음 우주로 나가 지구의 푸르고 아름다운 모습을 본
사람들의 마음을 말입니다.
그것은 눈물을 쏟아내는 탄성과 주님에 대한 경외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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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8. 연중 제15주일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마귀는 사람의 약한 부분을 공격해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게으름을 이용해서, “지금은 쉴 때야. 이렇게 피곤한데 어떻게 기도해? 내일부터 열심히 기도하면 되지.”라는 식으로 유혹합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음식이나 술로 혹은 성적인 유혹으로 공격하기도 합니다.
솔직히 저는 술에 대한 유혹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술을 원래 그리 좋아하지 않기에 맥주 한 캔도 혼자서는 마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부분에서는 마귀의 유혹이 없습니다.
마귀는 그 사람의 약한 부분만을 이용해서 유혹합니다. 이 약한 부분의 타격은 대단하지요. 삶 전체를 흔들 수 있는 큰 충격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준비가 필요합니다. 운동선수가 매일 훈련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시합을 대비해서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입니다. 군인들이 평소에 열심히 훈련하는 이유 역시 적의 침략의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까?
마귀의 유혹도 언제 어디서 올지 모릅니다. 기습 공격일 수도 있고 또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공격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악을 경계하는 것과 동시에 기도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악을 잘 경계하고 있습니까? 죄로 쉽게 넘어갈 수 있게 아무런 경계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또 기도는 어떠합니까? 이 중요한 것을 ‘다음에’라는 말로 계속 미루고 있었던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 카파르나움아,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라고 불행선언을 하십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이중에서 카파르나움은 육로와 수로의 교차점을 이루고 상업이 번창하던 상업 도시였고, 코라진과 벳사이다는 카파르나움의 위성도시쯤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왕래가 많던 곳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도시들은 율법교사들의 종교 교육이 가장 성행하던 종교도시가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넘치던 곳, 또 많은 율법교사가 있어서 종교적으로도 하느님께 가깝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기적이라는 표징을 그렇게 많이 보여줬으나 계속된 의심과 세속적인 판단으로 예수님을 반대합니다. 즉, 그들은 전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있는 풍요로운 곳에 마귀의 유혹이 없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이곳 역시 마귀의 유혹은 있었습니다. 이 유혹은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계속됩니다. 따라서 철저히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마음에 담고, 주님과의 대화라는 기도를 통해 철저하게 무장해야 합니다. 마귀의 공격을 거뜬하게 물리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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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한 목적이 있는 사람은 가장 험난한 길에서 조차도 앞으로 나아가고, 아무런 목적이 없는 사람은 가장 순탄한 길에서 조차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토머스 카알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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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8. 연중 제15주일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삶, 기적과 회개>
삶이란
기적이요
회개입니다
당신께서 나를
있게 하시니
기적이요
내가 당신 뜻대로
바로 있으니
회개입니다
삶이란
기적이요
회개입니다
당신께서 나에게
스미어 오시니
기적이요
내가 당신을
정성스레 품으니
회개입니다
삶이란
기적이요
회개입니다
당신께서 나와
늘 함께하시니
기적이요
내가 당신과
오롯이 함께하니
회개입니다
삶이란
기적이요
회개입니다
당신께서 나를
살게 하시니
기적이요
내가 당신을 닮아
올곧게 사니
회개입니다
삶이란
기적이요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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