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을 세우다
현상연
싱크대 서랍 속 무쇠 칼 녹슬고 있다
습한 계절을 물고 있던 탓인지
붉은 게으름 들쓰고
무뎌진 칼끝은 나를 향해 있다
숫돌에 물 먹이며
녹슨 기억 벗겨본다
칼날이 숫돌을 먹고
무심한 손길은 세월을 먹고
날 세운다는 것은
응어리진 시간을 부단하게
갈아대는 일이다
그건 아마도 부패 된 부위를 도려내기 위한
내 푸른 날의 각오를 벼리는 일이며
더디 넘겨지는 시퍼런 날의 페이지를 넘기는 일이다
칼을 벼리며 이순의 내 삶도 담금질 한다
----현상연 시집, {울음, 태우다}에서
이 세상의 삶은 근본적으로 싸움이며, 그 무슨 일이든지간에 싸움으로 그 끝을 맺게 되어 있다. ‘가위, 바위, 보’도 싸움으로 되어 있고, 술래잡기도 싸움으로 되어 있다. 축구경기도 싸움으로 되어 있고, 야구 경기도 싸움으로 되어 있다. 모든 싸움에는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으로서의 전략과 전술이 작용을 하고 있고, 그 결과는 ‘승자독식구조’에 의해서 모든 일이 끝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최동원은 대한민국 최고의 강속구 투수였고, 어쩌다가 안타나 홈런을 맞으면 그 다음 타순 때 똑같은 강속구를 던지며 그 타자를 공포에 떨게 했던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언제, 어느 때 가장 즐겁고 기쁘게 생각하는가? 그것은 자기 자신의 강력한 적을 단번에 제압했을 때이고, 모든 황제는 천하무적의 상승장군이 그 관을 뒤집어 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 나아갈 때는 총과 칼을 들고 나가야 되고, 그 모든 적들을 단번에 베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공격본능은 세계정복운동의 원동력이 되고, 방어본능은 외부의 적을 물리치고 영원한 제국을 건설하는 힘이 된다. 모든 학문과 예술도 힘과 힘이 맞부딪치는 장소이며, 천하제일의 검객은 여행을 할 때에도, 산책을 할 때에도,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도, 저녁에 잠들기 전에도 총검술을 연마하며, 그처럼 오랜 천하태평의 시절에도 자기 자신을 공격함으로써 “무쇠 칼”을 천하제일의 명검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천하제일의 명검도 사용하지 않으면 녹이 슬고, 녹이 슬면 그 칼도 쓸모가 없어진다. 현상연 시인의 [날을 세우다]는 ‘절차탁마의 시학’이며, 녹슨 칼을 벼리면서 자기 자신의 무책임과 게으름을 반성하고, 이처럼 ‘언어의 칼’로 ‘절차탁마의 시학’을 완성해 놓고 있는 것이다. “날 세운다는 것은/ 응어리진 시간을 부단하게/ 갈아대는 일이”고, 그것은 “아마도 부패된 부위를 도려내기 위한/ 내 푸른 날의 각오를 벼리는 일”일 것이다.
내 푸른 날의 각오----. 우리 시인들은 늘, 항상 “칼을 벼리며 이순의 내 삶도 담금질 한다”라는 시구에서처럼, 근본에 힘을 써야 하고, 근본에 힘을 써야 만인지상의 황제, 즉, 영원한 시인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이순의 삶을 담금질하며, 제일급의 시인의 길을 가고 있는 현상연 시인의 언어에 천하무적의 시퍼런 칼날이 번뜩인다.
남북통일처럼 쉽고 간단한 일도 없고, 해마다 노벨상을 타는 것처럼 쉽고 간단한 일도 없다. 부정부패를 대청소하고 부의 대물림을 뿌리뽑는 것처럼 쉽고 간단한 일도 없고, 기초생활질서를 확립하고 일등국가를 만드는 것처럼 쉽고 간단한 일도 없다.
모든 선진국가는 정의가 살아 있는 나라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마저도 가장 쉽고 간단하게 실천하는 나라라고 할 수가 있다.
당신이 나폴레옹 황제나 알렉산더 대왕이 되면 되는 것이고, 당신이 소크라테스나 마르크스가 되면 되는 것이다.
당신이 호머나 셰익스피어가 되면 되는 것이고, 당신이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되면 되는 것이다.
내 푸른 날의 각오는 공자이고 맹자이며, 내 푸른 날의 각오는 뉴턴이고 아인시타인이다.
세계적인 고전을 읽고 전인류의 스승들의 지혜를 배우며, 자기 자신을 높이 높이 끌어올리면 되는 것이다.
현상연 시집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