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넬리오는 251년에 로마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노바시아누스 이단에 맞서 열심히 싸웠고 치프리아노의 도움으로 자신의 권위를 강화할 수 있었다.
갈로 황제는 그에게 유배형을 내렸다.
고르넬리오는 253년 치비타베키아(Civitavecchia) 근교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나중에 그의 유해는 로마로 옮겨져 갈리스토 묘지에 안장되었다.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심했기 때문에 파비아노 성인의 순교 이후 14개월 동안 교황이 없었다.
그 기간 동안 사제단이 교회를 다스렸다.
고르넬리오의 친구인 치프리아노는, 고르넬리오가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판단에 따라, 대부분 성직자의 증언에 따라, 신자들의 투표로써, 원로 사제들과 선한 사람들의 동의로써 교황에 선출되었다."고 적고 있다.
교황으로서 2년간의 재임 기간 중 고르네리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박해 시기에 배교했던 그리스도인을 다시 받아들이는 것과 고해 성사에 관한 것이었다.
극단적인 두가지 견해로 결국 둘 다 단죄받게 되었다.
아프리카의 대주교인 치프리아노는 배교자는 주교의 결정에 따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자신의 주장을 확립시키려고 교황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고르넬리오는 로마 주교의 반대 의견에 부딪혔다.
그가 교황으로 선출된 이후 노바시아노(교회를 다스리던 사람 중의 한 사람)라는 한 사제가 로마의 주교가 되어 그와 맞서 대항했다.
그가 바로 최초의 대립 교황이다.
그는 교회가 배교자뿐 아니라 살인,간통,간음,축첩 등의 죄를 지은 자들까지도 용서해 줄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을 부인했다.
노바시아니즘이 비록 몇 세기 동안 지속되기는 하였지만,
고르넬리오는 노바시아니즘을 배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특히 아프리카의 치프리아노)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그는 251년 로마에서 주교회의를 열고 배교자들도 관례적인 '참회의 처방’으로써 교회에 되돌아 올 수 있다고 지시했다.
고르넬리오와 치프리아노의 우정은 치프리아노의 반대자 가운데 한 사람이 치프리아노를 고발했을 때 얼마 동안 긴장 상태에 있었으나 문제는 해결되었다.
고르넬리오 문서는 3세기 중엽의 교회 조직의 범위를 보여 준다.
그 문서에 의하면 46명의 사제와 7명의 부제, 7명의 차부제가 있었으며 그리스도인의 수는 약 5만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고르넬리오는 오늘날 치비타 베키아라고 하는 곳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고생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났다.
Cornelio는 고대 로마 가족의 이름이며 전투 경적(battle horn)이라는 뜻이다.
교회사에는 있을 수 있는 모든 오류가 수시로 제창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거의 사실인 것 같다.
3세기에는 우리가 별로 고려하지 않던 문제 하나가 해결되었다.
그것은 성찬의 전례 전에 고해를 한다는 것과 대죄를 범한 후에 교회와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르넬리오와 치프리아노 같은 사람은 엄격주의와 방임주의의 양극단 사이에서 중용의 길을 발견함으로써
교회를 도운 하느님의 도구였다.
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지혜와 경험으로 새로운 경험을 평가하고,
그리스도께서 시작한 것을 계속 지키면서 영원히 살아 있는 교회 전통의 흐름을 지켜온 사람들이다. (롤리너)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며 교회의 으뜸도 하나이다.
이 으뜸 주교좌는 본래 주님의 권위로 베드로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제단이나 다른 제관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제도를 무시하고 자신의 격정이나 무모함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짓이고 속된 것이며 독성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성 치프리아노, '가톨릭 교회의 일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