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으로 세운 탑
산길을 걷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풍경을 만날 때가 있다. 이름난 문화재도 아니고, 화려한 조형물도 아니다. 숲 가장자리에서 오래된 가마솥들이 차곡차곡 쌓여 하나의 탑을 이루고 있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오래 바라볼수록 눈길을 떼기 어려웠다. 사람의 손때가 묻은 생활의 도구가 세월을 품은 철학으로 다시 태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가마솥은 한때 생명을 키우던 그릇이었다. 쌀을 안치고, 물을 붓고, 장작불을 지펴 밥을 짓던 곳이다. 허기를 달래고 가족을 모으던 가장 따뜻한 공간이었다. 한 솥의 밥에는 어머니의 땀과 아버지의 노동, 아이들의 웃음이 함께 끓어올랐다. 그래서 가마솥은 단순한 살림살이가 아니라 한 집안의 시간을 담는 그릇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가마솥은 부엌에서 사라졌다. 전기밥솥이 그 자리를 대신했고, 장작 연기는 추억 속으로 물러났다. 쓰임을 다한 솥들은 녹이 슬고 빗물을 머금으며 한쪽에 놓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버려지지 않았다. 누군가의 손길로 하나하나 포개져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밥을 짓던 솥은 이제 사람들의 마음을 데우는 탑이 되었다.
탑은 위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가장 아래 놓인 하나가 모든 무게를 받아 낼 때 비로소 다음 것이 올라간다. 맨 아래의 솥은 가장 크고 묵직하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떠받친다. 삶도 그렇다. 눈에 띄는 성과보다 보이지 않는 기초가 더 중요하다. 묵묵히 견디는 사람이 있어 가정이 지켜지고, 말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있어 공동체가 흔들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높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성공, 더 큰 이름을 꿈꾼다. 하지만 탑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높이는 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완성된다고. 기초가 약하면 화려한 꼭대기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뿌리가 깊은 나무가 바람을 이기듯, 삶도 단단한 바탕이 있을 때 흔들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탑이 아름다운 이유는 모두가 비어 있기 때문이다. 솥은 속이 비어 있을 때 제 역할을 한다. 무엇인가를 가득 채우기 위해 먼저 자신을 비워 둔다. 사람의 마음도 다르지 않다. 욕심과 고집으로 가득 차 있으면 새로운 생각도, 따뜻한 말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비움은 잃는 일이 아니라 받아들일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우리는 채우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비우는 일에는 서툴다.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많은 것을 이루려 애쓴다. 그러나 자연은 늘 반대의 진리를 보여 준다. 나무는 낡은 잎을 떨군 뒤 새순을 틔우고, 강은 흘러보내기에 썩지 않는다. 숨도 내쉬어야 다시 들이마실 수 있다. 삶은 채움과 비움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건강해진다.
가마솥마다 남아 있는 녹은 시간의 흔적이다. 누군가는 낡음이라 말하겠지만, 나는 살아온 날들의 훈장처럼 보였다. 수없이 불을 견디고, 밥을 짓고, 계절을 건너온 기억이 그 안에 스며 있다. 사람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이 삶의 연륜을 말해 주듯, 녹슨 솥도 자신의 시간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었다.
탑은 서두르지 않는다. 돌 하나를 얹듯, 솥 하나를 올리듯 천천히 완성된다. 인생도 그렇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사람은 없다. 하루의 선택이 모여 습관이 되고, 습관이 성품이 되며, 성품이 한 사람의 인생을 세운다. 작은 친절 하나, 따뜻한 말 한마디, 정직한 행동 하나가 쌓여 결국 한 사람의 품격이 된다.
문득 내 삶에는 어떤 탑이 쌓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성공이라는 이름의 돌만 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욕심이라는 무게를 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높은 탑보다 오래가는 탑이 더 아름답고, 화려한 탑보다 단단한 탑이 더 귀하다.
산속에서 만난 이 탑은 화려한 장식 하나 없이 깊은 울림을 남겼다. 오래된 가마솥들은 이제 더 이상 밥을 짓지 않지만,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끓여 주고 있었다. 무엇을 더 쌓을 것인가보다 무엇을 비울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라고, 삶의 높이는 욕심이 아니라 겸손에서 시작된다고 조용히 말해 주고 있었다.
돌이 아니라 가마솥으로 세운 탑이기에 더욱 따뜻했다. 사람을 먹여 살리던 그릇이 이제는 사람의 마음을 일깨우는 스승이 되었기 때문이다. 비움으로 세워진 탑은 산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욕심을 덜어 내고 배려를 한 겹씩 쌓아 갈 때, 우리 마음속에도 세월이 무너뜨릴 수 없는 탑 하나가 조용히 세워지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