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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사상(開化思想)
낡은 사상과 풍속들을 허물어 버리고 새로운 문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사상이다.
開 : 열 개
化 : 될 화
思 : 생각 사
想 : 생각 상
개화(開化)라는 용어는 본래 주역(周易)에서의 개물성무 화민성속(開物成務 化民成俗)에서 취한 용어로, 모든 사물의 지극한 곳까지 궁구(窮究), 경영하여 일신(日新)하고 또 일신해서 새로운 것으로 백성을 변하게 하여 풍속을 이룬다는 뜻이다.
개화사상은 조선 후기에 서양 문물을 수용하여 자주적인 근대화와 변혁을 추구한 사상이다. 19세기 흥선 대원군이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는데, 일부에서는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여 서양과 통상하고 이들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통상 개화론이 대두되었다.
이 시기는 안으로는 봉건사회의 낡은 틀을 부수고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가 일고 있었고 밖으로는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위협이 높아지고 있었다.
개화사상은 이러한 국내의 봉건적 모순을 자각하고 세계 역사발전의 방향에 따라서 내외정치를 개혁하려던 개혁사상이었다. 개화사상은 19세기 중엽의 민족적 위기를 당해 나라와 백성을 자주적으로 근대화하고 변혁해서 진보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한국의 개화사상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계승하고, 중국으로부터 들여 온 신서(新書) 등의 도움을 받아, 1853∼1860년대에 오경석(吳慶錫), 박규수(朴珪壽), 유홍기(劉鴻基) 등에 의해 형성되었다.
한국의 개화사상 형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한 최초의 선구자는 중인 출신 역관(譯官) 오경석이었다. 그는 가학(家學)으로 북학파 박제가(朴齊家)의 실학과 김정희(金正喜)와 이상적(李尙迪)의 금석학과 서화를 수학하였다.
그리고 그는 23세 때인 1853년에 중국에 파견되는 조선사신단의 역관으로 북경에 가서 2년 동안 체류하면서, 열강에 의해 붕괴되어 가는 중국의 실상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중국이 당면하고 있는 현재의 위기는 곧 조선에도 불어닥칠 것이라 여겼다.
오경석은 북경에서 장지동(張之洞), 오대징(吳大澂) 등의 중국 동남 지방 출신의 애국 청년들과 널리 교제해 자기의 견문을 넓혔다. 오경석은 귀국할 즈음에 중국 인사들이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소개하고 서양 세력의 침입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신서(新書)들을 구입해 왔다.
그 후 그는 13차례나 북경을 오가면서 해국도지(海國圖志), 영환지략(瀛環志略), 박물신편(博物新編), 월비기략(粵匪紀略), 북요휘편(北徼彙編), 양수기제조법(揚水機製造法), 지리문답(地理問答), 해국승유초(海國勝遊草), 천외귀범초(天外歸帆草), 중서문견록(中西聞見錄) 등을 비롯해 수백 권의 신서들과 서양의 새로운 과학에 의거해 제작한 세계지도와 육대주의 지도를 비롯해서 자명종 등 다수의 서양 문물을 구입해 가지고 돌아왔다.
오경석은 안으로는 박제가의 실학을 계승해 발전시키고 밖으로는 자신이 구입해 온 신서들을 연구해, 1853∼1859년 동안에 처음으로 한국의 개화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1860년 영, 불연합군의 북경점령 사건이 발생하자 친우 유홍기에게 신서들을 주며 나라를 구할 방법을 연구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로써 유홍기도 오경석의 견문과 새 사상을 듣고 신서들을 연구해 개화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박규수는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의 손자로서, 1860년 영, 불연합군의 북경점령 사건이 발생하자 조선왕조가 중국에 파견하는 위문사절단의 부사(副使) 자격으로 북경과 열하에 갔다가, 서양 열강에게 침략 당해 붕괴되어 가는 중국의 실상을 관찰하고 민족적 위기를 의식해, 해국도지, 영환지략 등 신서들을 구입해 가지고 귀국하였다.
그는 신서들을 연구하고, 또 1866년 평안도관찰사로 재임 당시에 제너럴셔만호 사건을 치르자, 기선장치(汽船裝置)와 병기를 건져내어 군기고(軍器庫)에 넣고 연구, 관찰하는 등 서양 문물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1860년대에 개화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오경석과 유홍기는 1866년 제너럴셔만호 사건과 병인양요(丙寅洋擾)의 충격을 받고 조선의 민족적 위기가 더욱 급박하게 되었다고 판단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한 혁신 정치의 주체 세력 형성의 방안을 토론하였다.
중인 신분이었던 그들은 당시의 사회 신분제 도하에서는 정치를 주도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으므로, 우선 신분상으로 정치 담당층인 양반 신분 중에서 서울 북촌(양반 거주 지역)의 가장 영민한 자제들을 선발해, 그들이 형성한 개화사상을 교육시키고 발전시켜 정치 세력으로서의 개화당을 형성, 혁신의 기운을 일으키고, 그들로 하여금 혁신 정치를 펴게 해서 나라를 구하게 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오경석과 유홍기는 박규수가 1869년 6월 한성판윤 겸 형조판서로 임명되어 상경하자, 그를 찾아가 북촌의 영민한 양반 자제들을 발탁해 개화사상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방안을 제시하고 동의를 얻어냈다. 그 결과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 등 3인의 개화사상의 비조(鼻祖)는 1869년 후반기에 개화사상의 동지로서 완전히 합류하게 되었다.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에 의해 형성된 개화사상은 아직 충분히 발전된 것은 아니었다. 오경석은 개화사상의 가장 중심적 요점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① 조선왕조의 사회와 민족은 곧 닥쳐올 서양 세력의 침입으로 민족적 대위기에 직면해 있다.
② 이러한 민족적 대위기 속에서 조선왕조의 정치는 부패해 있고 조선의 사회와 경제와 기술은 매우 낙후되어 이러한 대위기를 타개해 나갈 수 없다.
③ 이러한 민족적 대위기를 타개하려면 국정 전반에 걸친 일대 혁신을 일으켜야 한다.
④ 나라를 구하는 일대 혁신은 반드시 자주 독립적으로 단행되어야지 자기 나라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청국에 의뢰해서는 안 된다.
⑤ 나라의 일대 혁신을 일으키려면 이를 담당할 새로운 혁신적 정치 세력을 형성해야 한다.
⑥ 조선은 세계 대세에 보조를 같이 하는 근대국가를 수립해야 한다.
⑦ 조선도 서양과 같이 철과 석탄을 이용하는 공장과 산업을 일으켜야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다.
⑧ 조선도 하루속히 서양의 선진 과학기술을 도입해 채용해야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다.
⑨ 조선은 양반 신분제도를 폐지해 능력 있는 인재를 모두 관직에 채용해야 한다.
⑩ 조선도 군함을 구비하고 국방을 근대적으로 튼튼히 해 나라를 자기의 힘으로 방위해야 한다.
⑪ 조선은 종래의 쇄국 정책을 탈피해 자주적 개국을 단행해서 세계 각국과 통상도 하고 서양의 선진 물품도 채용해야 나라를 부강하게 발전시켜 나라를 구할 수 있다.
⑫ 세계 각국과의 통상은 조선이 손실을 입지 않는 균형 무역을 해야 하고, 조선의 금,은과 외국의 물품을 교역해 금,은을 외국에 누출시키거나 조선이 수출보다 수입을 많이 해 손실을 입어서 그 대가로 금,은을 외국에 내보내서는 국가경제가 빈곤하게 된다.
이러한 개화사상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들리지만 당시 지배적 사상이었던 위정척사 사상과는 판이한 사상이었으며, 1860년대의 상황에서는 참으로 획기적인 새로운 사상이었다.
개화사상의 선각자들이 1869년 후반에 합류한 후, 개화사상의 세 비조 중 신분과 지위의 관계로 박규수의 주도하에 1870년경부터 북촌의 양반 자제들 중에서 김옥균(金玉均), 박영교(朴泳敎), 김윤식(金允植), 유길준(兪吉濬),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 영민한 청년들을 발탁해, 개화사상의 교육을 시작한 것이 초기 개화파 형성의 계기가 되었다.
특히, 김옥균은 22세 때인 1872년에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1874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관도에 나간 시기부터 적극적으로 동지들을 모으기 시작해, 정치적 결사로서의 개화당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김옥균 등은 양반 출신은 물론, 중인, 평민, 군인, 승려, 상인 등 신분과 계급을 초월해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개항을 하였을 당시 어린 청년들로 형성된 개화당은 별다른 정치적 활동을 할 처지가 못되었다.
개항 후 조선왕조 정부가 세계의 정세를 아는 신지식을 가진 관료들을 필요로 하게 되자, 정부 조직에 중견 관료로 진출해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개화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초기 개화파는 1879년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에 파견해 서양 문물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 중국에 영선사(領選使)를 파견해, 서양 문물의 도입과 일본, 중국의 근대화 운동을 관찰하였으며, 그밖에 수많은 자주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초기 개화파 중의 급진파(개화당)는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후 청나라가 군사를 서울에 진주시켜 조선을 실질적으로 속방화하려 하고, 그들의 개화 운동을 조선의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라 하여 탄압하자, 1884년 양력 12월 4일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 이에 대항하고 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하려 하였다.
1874∼1884년의 초기 개화파의 사상은 1860년대 형성기의 개화사상보다는 훨씬 발전되어 전개된 것이었다.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우선 정치적으로 서양의 입헌군주제와 공화제를 군민동치(君民同治)와 합중공화(合衆共和)라는 이름으로 정확히 이해하여 소개하고, 조선왕조의 경우에 전제 군주제를 개혁하여 입헌군주제를 수립할 것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서세동점으로 말미암아 조성된 민족적 위기 속에서 전제군주제의 취약성과 입헌군주제의 강점을 잘 알고 있었다.
예컨대 초기 개화파의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 제10호(1884.3.3)에서 구미입헌정체(歐米立憲政體)는 민선(民選)을 본(本)으로 삼고 오직 민의(民意)에 따르므로, 나라에 현자(賢者)로서 의원(議員)이 되지 않는 자가 없고, 나아가 그 재상(宰相)이 되지 않는 자가 없게 된다. 따라서 소인(小人)이 군주를 불의(不義)에 빠뜨리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게 된다. 이것 역시 입헌 정체의 첫째의 이익이다고 입헌 정체의 장점을 강조하였다.
갑신정변 당시 발표된 혁신정강 제13조와 제14조에서 군주의 권한을 근본적으로 제한하고 내각제도(內閣制度)를 수립하여 정치의 중요 사항을 어전 회의가 아니라 국왕이 참석하지 않는 내각 회의에서 토의, 결정하는 제도를 수립하고, 내각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정령(政令)으로 공포하여 실시할 것을 선언한 것은 전제군주제의 입헌군주제로의 개혁의 시작을 나타낸 것이었다.
또한, 초기 개화사상은 국가(國家)와 국권(國權)의 근대적 개념을 확립하고 완전 자주독립(自主獨立)의 절대적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883년 유길준(俞吉濬)이 쓴 국권(國權)이라는 논문에서 국가에 대해 한 민족의 인민이 한 토지를 점거해 역사를 같이하고 습속을 같이해 문물과 언어에 이르러 같지 않음이 없고 동일한 군주를 섬기며 동일한 정부를 준승(遵承)하는 것을 말해 국가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국가에는 국권이 있음을 명확히 하고 국권의 내용으로, ① 자보권(自保權; 伸枉權, 報應權, 揷理權, 宣戰 및 決和權) ② 독립권 ③ 호산권(護産權) ④ 입법권 ⑤ 교린파사(交隣派使) 및 통상권(通商權) ⑥ 강화(講和) 및 결약권(結約權) ⑦ 중립권(中立權) 등을 들었다.
유길준의 이러한 국가(國家)와 국권(國權)의 개념은 1883년경에 초기 개화사 상이 매우 근대적인 국가와 국권의 개념을 정립해 근대국가 건설을 추구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초기 개화파의 지도자인 김옥균은 이러한 국가와 국권의 개념을 가지고, 1883년경에 국가로서의 조선의 급무는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전개된 중국의 속방화 정책을 분쇄하고 조선을 완전 자주독립 국가[獨全自主之國]로 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초기 개화사상은 사회 신분제도의 즉각적이고도 완전한 폐지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김옥균은 우리 나라 중고시대(中古時代)에는 공업과 물산이 중국과 일본보다 으뜸으로 발달한 시대가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대부분 폐절하게 된 원인은 양반 신분제도에서 있다 하면서, ① 백성이 재화 하나를 생산해 내면 양반이 이를 횡탈해 가고 ② 백성이 수고롭게 애써서 극소량의 자본을 축적하면 양반이 이를 약탈해 가져가 버리므로 ③ 백성에 의한 공업의 제품 생산도 불가능하게 되고 ④ 백성의 자본축적도 불가능하게 되며 ⑤ 백성이 자력(自力)으로 자립적 생산을 하여 생활하고자 하면 양반 관리배가 그 이(利)를 빼앗아 갈 뿐 아니라 이에 불복할 때에는 귀중한 생명을 잃을 염려가 있기 때문에 ⑥ 백성들은 농업과 상업과 공업의 산업들을 포기해 위험을 면하려고 하므로 산업이 발전하지 못하고 놀고 먹는 사람만 늘어 국력이 쇠퇴하게 되었다고 분석하였다. 그리고 양반 신분제도의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김옥균의 이러한 사상은 양반 신분제도가 산업 발전과 자본축적에 대한 가장 큰 질곡이므로 이를 단칼에 폐지해야 한다는 매우 근대적이고 시민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서재필이 갑신정변 때 김옥균의 사상이 조선의 완전 자주 독립 국가 실현과 함께 귀족 타파에 있었다고 회고한데서도 잘 나타나 있다.
초기 개화파가 갑신정변 때 혁신정강 제2조에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권을 제정하고 사람의 능력으로써 관(官)을 택하게 하지 관으로써 사람을 택하게 하지 않을 것을 공포한 것은 이러한 사상적 배경 위에서 ① 양반 신분 폐지에 의한 인민 평등권의 제정, ② 문벌의 폐지, ③ 능력에 의거한 인재의 등용을 선언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초기 개화사상은 갑신정변 이전에 근대 국민 국가 건설의 기초로서의 근대 상공업 건설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김옥균은 공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부국(富國)의 기초가 된다고 강조하고, 철공업, 기계공업, 조선공업 등의 건설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공업을 발전시켜 우리가 부(富)해지고자 하면 부해질 수 있고 강해지고자 하면 강해질 수 있으며, 그리하여 나아가면 선진 열강과 경쟁할 수 있고 물러서도 스스로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박영효(朴泳孝)도 공업과 상업을 일으키고 원리와 기술을 배워 익히게 하라고 주장하였다. 유길준(俞吉濬)도 오늘날 우리 나라의 부국강병이 모두 상공업에 달려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런데 초기 개화파가 말한 공업은 공장제도(工場制度)의 공업을 가리킨 것이었다.
초기 개화사상은 상공업 이외에 농업의 근대적 개발도 강조하였다. 그런데 특징적인 것은 농업에 양잠(養蠶)과 목축업(牧畜業)의 광범위한 도입을 강조하고, 영농법과 농기구의 개량을 강조한 점이었다.
또한 초기 개화사상은 근대 산업 경제의 확립과 관련하여 광업의 개발을 매우 강조하였다. 김옥균(金玉均)은 금, 은, 석탄, 철광의 개발을 강조했으며, 박영효도 금, 은, 동, 철, 석탄광의 개발을 주장하였다. 특히 양진화(梁鎭華)는 석탄광의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런데 초기 개화사상의 광업개발론에서 특징적인 것은 기계를 사용한 광업 개발을 주장한 점이었다. 김원제(金源濟)는 광업 개발을 시급히 추진하되 기계로써 인력을 대치해 생산비를 절감하면, 3년이 지나지 않아서 채광이 반드시 성하게 되고 나라의 부강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광물의 용도에 대해서도, 양진화는 증기기관의 동력의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석탄광의 개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초기 개화사상은 교통과 통신의 근대화도 매우 강조하였는데, 주로 ①철도 부설, ②기선의 도입에 의한 해운, ③도로 건설, ④전신에 의한 근대적인 통신의 건설이 강조되었다.
초기 개화사상은 이러한 근대적 산업 경제 건설을 회사(會社) 제도를 도입해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성순보(漢城旬報) 제3호(1883.10.21)에 수록된 초기 개화파의 논문인 회사설(會社說)은 회사가 제도적으로 서양 제국의 부강의 기초라고 지적하고, 조선도 회사 제도를 도입해서 민간 자본을 회사에 동원해 업종별로 이를 전문화시키자고 강조하였다.
그들은 회사의 종류의 예로 철도회사, 선박회사, 제조업회사, 토지개량회사 등을 들었다. 그리고 회사 조직의 다섯 가지 원칙과 주식의 모집, 역원의 선출, 회사의 운영과 공개, 주식의 매매와 증권의 가격 변동, 주식회사로부터 합자회사로의 전환 방법 등을 해설하고, 민간 회사의 설립을 적극 권장하였다.
유길준도 회사규칙(會社規則, 1882)을 써서, 회사를 조직해 운영하는 25개조의 원리를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초기 개화사상이 자본주의 산업 경제 건설을 사상적 특징의 하나로 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초기 개화사상은 이밖에도 신식 학교를 많이 설립해 국민들에게 신교육을 실시해서 신지식과 과학기술을 교육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학문도 중국의 고전과 한자 공부에 치중하지 말고 조선의 역사와 문물을 연구하고 공부하며, 국문(당시의 용어로 언문)을 채용해 민지를 개발시키는 것이 개화의 요무(要務)라고 강조하였다.
또한, 열강의 침략에 의해 조성된 민족적 위기 속에서 국가의 독립을 지키려면 자주무력(自主武力)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①신식 육군의 창설과 확대, ②군함의 도입에 의한 해안 방비, ③신식 해군의 창설, ④사관학교의 설립, ⑤병기 공장의 설립을 주장하였다.
초기 개화파들이 이러한 개화사상을 실천하려고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뒤에 개화사상은 1896∼1898년 독립협회에 의해 계승되어 한 단계 더 발전해 전개되었다. 즉 독립협회의 개화사상은 후기 개화사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독립협회의 후기 개화사상의 초기 개화사상과 다른 가장 발전된 부분은 자유 민권 사상(自由民權思想), 즉 민주주의 사상이 체계적으로 정립되어 민족주의 사상과 결합된 곳에 있었다.
특징으로서는 다음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국민 자유권 사상(國民自由權思想)을 체계적으로 정립해 ①생명과 재산의 자유권 ②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권을 주장하고 발전시켰다.
둘째, 국민 평등권 사상(國民平等權思想)을 발전시켜, ①사회 신분제도 폐지론뿐 아니라 ②남녀평등론을 체계적으로 정립, 발전시켜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권 운동이 대두하게 되었다.
셋째,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며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국민 주권 사상(國民主權思想)을 정립하였다. 독립협회는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고 관리는 백성의 종이나 사환이다고 국민들을 계몽했는데, 이러한 주장은 19세기말의 한국 국민과 관리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넷째, 국민 주권론에 기초해 국민 참정권 사상(國民參政權思想)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국민의 직접적인 참정을 제도화하자고 주장하였다. 독립협회는 당시 지방행정의 문란과 농민의 동요에 대해서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주인인 농민들에게 참정권(參政權)을 주어 일반 선거 제도에 의해서 지방관을 지방 인민의 투표에 의해 선출하게 하자고 제안하였다.
국민의 투표를 통한 선거 제도에 의해 관찰사, 군수 등 지방 행정관을 선출하려는 사상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독립협회는 국민 참정권 사상을 중앙 정치에도 적용해 의회 설립을 주장하였다.
독립협회의 의회 설립론은 종래 정부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어 있던 중추원을 먼저 상원(上院)으로 개편하는 형식으로 입안되어, 1898년 11월 4일 역사상 최초의 의회 설립 법인 중추원신관제가 공포되기까지 하였다.
이 때 공포된 의회의 권한은, ①입법권, ②조약비준권, ③의정부에서 의결하고 상주하는 일체 사항에 대한 동의권, ④칙명을 받고 의정부에서 자순(諮詢)하는 사항에 대한 동의권, ⑤의정부의 임시 건의에 자순하는 사항, ⑥중추원에서 임시 건의하는 사항, ⑦인민의 헌의사상 등의 심의 결정권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입법권 이외에도 내각의 모든 결정이 의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도록 규정되어 있어서, 근대 의회의 모든 권한을 갖춘 것이었다. 독립협회의 의회 설립 운동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지만, 개화사상이 후기의 독립협회에서 크게 발전되어 전개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개화사상의 본질적 성격은 자주 부강한 근대 국민 국가 건설을 추구한 사상이 핵심적인 것이었다. 개화사상은 정치체제로서는 전제 군주제를 입헌군주제 또는 공화제로 개혁해, 국민 참정에 의한 민주 체제를 수립하고, 경제적으로는 서양의 선진 과학기술을 도입, 채용해 공장제도와 회사제도에 의한 자본주의적 근대 상공업을 개발하고 근대산업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양반 신분제도를 폐지해 국민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함으로써, 인재를 능력에 따라 뽑아 쓰고 국민의 힘을 민족의 방위와 발전에 효과적으로 동원해, 자유로운 시민사회를 수립하려는 사상이었다.
그것은 또한 문화적으로는 종래 중국의 경서(經書), 사서(史書), 시문(詩文) 중심의 교육을 근본적으로 개혁해 국민 중심의 근대적 과학 문화를 수립하고, 이를 위해 신식 학교를 널리 설립해 국민들에게 신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한자 문화권에서 탈피해 세계 각 지역의 문화와 모두 교류하면서 조선의 역사와 언어와 문자와 예술을 발전시키려는 사상이었다.
또한, 군사적으로는 나라의 자주독립을 지킬 수 있는 자주 무력을 양성하면서 군함을 도입해 해안을 방위하고, 구식 군대를 신식 군대로 개편하며, 근대적 병기로 무장시킴으로써 열강의 침략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자력(自力)에 의해 실질적으로 방위하려는 사상이었다. 즉, 완전 독립한 입헌 정체의 근대 국민 국가, 시민사회, 자본주의 경제의 추구가 개화사상의 본질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개화사상의 내용은 당시 조선왕조 사회가 당면했던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고 자주 부강한 근대 국민 국가를 건설해, 나라의 자주독립과 발전을 실현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개화사상의 영향은 상대적으로 매우 취약하였다. 초기 개화사상은 아직도 주로 양반 출신과 중인 출신의 소수의 청년 지식인들만이 갖고 있던 사상이었으며, 국민들에게의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때문에 초기 개화파는 청국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크게 침해하자 먼저 정권을 장악해 정부의 권력으로 개화사상에 의거한 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하려고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정변의 수행조차도 개화파의 힘이 부족해 일본 공사관의 일본군을 차용해서 부족한 힘을 보충하려다가, 이것이 도리어 정변 실패 주요인의 하나가 된 형편이었다.
초기 개화사상의 영향은 갑신정변 시기가 아니라, 10년 후에 이르러서 온건 개화파들이 집권해 갑오경장(甲午更張)을 실시할 때 비로소 개혁 정책의 정립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후기 개화사상인 독립협회의 사상도 당시에는 전면적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주로 도시민과 청년층에게 영향을 끼쳐 그들과 결합한 정도였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개화사상의 형성과 발전의 영향으로 개화 정책이 부분적으로 채택되기도 하고 대소규모의 개화 운동이 전개되기도 해, 1904년까지 자주 근대화가 부분적으로 시행된 것이었다.
개화사상은 1905년 일제의 을사조약(乙巳條約) 강요에 의해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전후에는 국권 회복의 일차적 목표와 관련해 개화사상은 애국계몽사상과 운동으로 전환되어 전개되었다.
개화사상(開化思想)
19세기 중엽 이후의 근대 국가, 사회 건설을 지향하던 부르주아 개혁사상을 말한다.
개요
이 시기는 안으로는 봉건사회의 낡은 틀을 부수고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가 일고 있었고 밖으로는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위협이 높아지고 있었다.
개화사상은 이러한 국내의 봉건적 모순을 자각하고 세계 역사발전의 방향에 따라서 내외정치를 개혁하려던 개혁사상이었다.
형성
초기 개화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조선 후기 북학파의 거두였던 박지원(朴趾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와 중인 출신의 오경석(吳慶錫), 유홍기(劉鴻基; 일명 유대치)였다.
박규수는 이미 자신이 체득한 북학의 학풍에다가 북경사신으로 청을 오가면서 경험한 새로운 문물에 대한 견문을 덧붙여 초기 개화사상의 형성에 매개역할을 하였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였던 1860년 이후 두 차례 북경에 가서 본, 자본주의 열강의 각축장이 된 청의 현실, 그리고 자신이 평안도관찰사 시절인 1866년(고종 3) 직접 경험한 제너럴셔먼호 사건 등은 그로 하여금 조선의 문호개방을 통한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쇄국정치가 기승을 부리던 대원군 집권기여서 자신의 뜻을 실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서울로 돌아온 1869년 이후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오경석, 유홍기 등과 함께 양반 자제 가운데 젊고 유능한 청년들을 모아 중국을 통해서 익힌 견문과 서구문물을 소개한 신서(新書)를 가르쳤다.
한편 중인 출신이던 통역관 오경석은 1850년대부터 사신을 따라 13차례나 톈진, 베이징 등지를 오가면서 중국에 유입된 서구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또한 서양문물을 소개한 신서 즉 해국도지(海國圖志), 영환지략(瀛環志略), 만국공보(萬國公報) 등을 수집하여 국내에 가지고 왔다.
오경석은 중국을 드나드는 과정에서 자연히 시대에 뒤떨어진 조선 봉건사회를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동지이자 친구인 유홍기에게 중국에서 가져온 신서와 보고들은 견문을 전하며 연구할 것을 권하였다. 그뒤 두 사람은 사상적 동지로서 결합, 서로 만나면 조선의 형세가 실로 바람 앞의 등불임을 탄식하고 언젠가는 '일대혁신'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들이 생각한 조선의 일대혁신이란 문호를 개방하여 세계의 추세에 적응하는 정치적 혁신을 꾀하고 서구의 선진문화를 도입하고 상공업을 발전시켜 나라의 부국강병을 꾀하려는 부르주아적 개혁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은 중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일대혁신을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그 대안으로서 우선 동지를 북촌(당시 서울에 있던 고관양반들의 집단거주지)의 자제 가운데서 구하여 혁신적 기운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당시 이들이 지목한 구체적 대상은 김옥균(안동김씨 부사 김병기의 양자), 박영효(판서 박원양의 아들이자 철종의 사위), 박영교(박영효의 동생), 서광범(참판 서상익의 아들), 서재필(서광범의 조카), 김윤식, 김홍집, 홍영식, 유길준, 어윤중 등이었다.
유홍기는 오경석이 국내에 가져온 신서를 이들에게 전하고 천하대세와 조선 개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에 의해서 싹트기 시작한 개화사상은 이들 청년지식인들에 의해 더욱 풍부해지고 발전하였다. 따라서 개화사상은 1870년대를 전후하여 형성, 발전되었고, 이를 통해서 조선의 일대 혁신을 실현하려는 정치세력으로서 개화파도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김옥균을 비롯한 청년지식인들은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의 사상적 영향 아래 신서를 통해서 세계정세의 흐름, 서구사회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여 조선사회의 개혁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개화파의 주된 관심은 서구사회나 일본사회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데 있었다. 이들은 특히 1876년 개항을 계기로 일본과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자연히 일본이 근대화를 이룬 계기가 된 메이지[明治] 유신을 주목하게 되었다. 구미 열강의 사정을 아는 데도, 메이지 유신 이래 짧은 기간에 근대적 발전을 이룩한 경험을 알기 위해서도 개화파는 일본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그리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그 밖의 양반 출신의 청년관리와 유홍기를 비롯한 일부 중인 출신의 선진적 지식인은 개항 이후 민씨정권의 개화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조선의 급속한 개화를 위해 활동하였다.
이들은 점차 김옥균을 중심으로 결집, 조선 봉건정부 안에서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해 나갔다. 그런데 이들 개화파는 개화의 방법과 청, 일에 대한 외교문제를 둘러싸고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나뉘었다.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의 온건개화파는 민씨일파와의 타협 아래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서양의 근대적 과학기술문명만을 받아들여 점진적으로 개혁을 하자는 입장이었다.
또한 청과의 외교도 종래대로 사대외교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의 급진개화파는 서양의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서양의 근대적인 사상, 제도까지도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수구반동적인 민씨일파는 타협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이었다. 이런점에서 급진개화파에게는 민씨정권을 지원하던 청과의 사대외교 청산문제는 개화 실현의 관건적 문제였다.
그런데 1882년 군인폭동(임오군란)을 계기로 민씨 정권이 친청정책을 강화하고 그나마 실시하였던 개화정책에서 후퇴하게 되자 개화파는 정변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1884년 5월 안남문제를 두고 청, 불전쟁이 발생하여 서울에 주둔했던 청군의 일부가 철수하고 그에 따라 일본이 개화파에 접근하자, 개화파는 1884년 10월 정변(갑신정변)을 꾀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변은 청과 민씨정권에 대한 과소평가, 일본의 배신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그들의 개혁사상의 한계로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내용과 성격
개화파가 지향하던 개화사상과 그 구체적 내용은 그들이 정변에 성공 뒤 구성한 새로운 정부의 신정강에서 잘 드러난다.
신정강의 내용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김옥균이 남긴 갑신일록(甲申日錄)의 정강을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1884년 10월 19일 개화파가 앞으로 단행할 개혁정치의 골간을 밝힌 14항목의 정강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청에의 조공하례를 폐지할 것, 문벌을 폐지하고 백성의 평등권을 제정하고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 전국의 지조법을 개혁하고 간리를 근절하고 빈민을 구제하여 국가재정을 충실히 할 것, 일체의 국가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하고 그밖의 재정 관청은 폐지할 것, 대신과 참찬은 날을 정하여 의정부에서 회의를 하고 정령을 의정 집행할 것,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하도록 할 것 등이다.
따라서 신정강에 표현된 개혁파의 개혁구상은, 대외적으로는 청에 대한 사대외교의 폐지, 사회신분적으로는 문벌의 폐지와 인민의 평등, 재능에 따른 인재등용과 같은 인민의 자유와 평등 보장, 그리고 왕실과 국가재정의 분리를 통한 국가재정의 일원화, 국왕전정의 폐지와 내각회의의 권한 확대를 통한 입헌군주제의 실현 등의 정치개혁을 추구하였다.
특히 급진개화파는 당시 반봉건문제의 해결을 위한 관건적 문제이던 봉건적 토지소유문제를 지조법 개정으로 대응함으로써 자신들의 개혁의 방향과 성격을 보다 분명히 하였다. 당시 해체되고 있던 봉건적 토지소유문제를 어떤 형태로 개혁하는가 하는 문제는 조선사회가 근대적 사회로 나아가는 데 있어 핵심이었다.
이런점에서 개화파는 지주제를 그대로 인정한 위에서 세제개혁의 차원에서만 토지문제를 해결하려 함으로써 지주를 새로이 전개될 근대사회의 건설주체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즉 이들은 구래의 지주적 토지소유를 기본적으로 유지하면서 이를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시켜 나갈 구상이었다.
개화사상의 이러한 측면은 위정척사파와는 질적으로 다른 진보성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 문제에 가장 철저한 이해관계를 가진 민중의 이해를 대변하지 못함으로써 정변이 실패하는 역사적 한계를 갖게 하였다.
또한 지주적 토지소유를 옹호하는 개화사상의 이러한 측면은, 당시 지주제의 존속을 바탕으로 하는 조선사회의 식민지화를 획책하던 구미 열강과 투쟁할 내적 근거를 박약하게 하였다. 때문에 개화파는 서구의 근대문물을 받아들이면서도 구미 열강의 본질인 제국주의적 침략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녔다.
정변이 일본을 이용하려던 개화파의 주관적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본의 배반으로 실패한 것은 결국 침략자의 본질을 원조자로 잘못 인식한 데 있었다.
개화사상은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적인 국가와 사회의 건설을 지향하던 부르주아적 개혁사상이었고, 또한 당시 세계발전의 역사적 추이를 인식한 선진적인 사상이었다. 그러나 개화파의 대다수가 양반관료이자 대지주 출신이라는 계급적 제한성은 지주적 입장을 옹호하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구하게 하였고, 그들이 개혁의 모델로 삼은 일본과 구미열강의 침략성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한 한계를 가졌다.
정변이 실패한 뒤 급진개화파는 사라졌지만, 개화사상이 지향한 개혁의 방향과 한계는 근본적인 변화없이 갑오개혁과 그후의 독립협회파로 이어졌다.
개화파(開化派)
개화파를 형성하는 데 계기가 된 사람은 북학파의 거두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인 박규수(朴珪壽)와 중인 출신인 오경석(吳慶錫), 유홍기(劉鴻基:일명 유대치)였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 사건에 대한 조선왕조의 위문사절단의 부사(副使)로 청에 갔던 박규수는 구미 열강의 침략으로 피폐해진 청의 현실을 보고 위기의식 속에서 조선의 문호개방을 통한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한편 역관으로서 전후 13차례나 중국을 다녀왔던 오경석은 구미 열강의 침략과 그에 따른 중국의 현실을 보면서 시대에 뒤떨어진 조선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 그는 서양문물을 소개한 중국의 신서(新書)인 해국도지(海國圖志), 영환지략(瀛環之略), 이언(易言) 등을 국내에 가져와 연구하였다.
그는 자신의 친구인 유홍기에게 그것을 전하고 연구를 권한 뒤, 두 사람은 조선 형세의 위태함을 깨닫고 일대혁신의 필요성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은 중인 출신이기 때문에 혁신의 주체를 북촌(서울의 고관양반의 집단거주지)에 있는 젊은 양반자제 가운데서 구하여 혁신의 기운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이들이 주목한 북촌의 양반자제는 김옥균(안동김씨 부사 김병기의 양자), 박영효(판서 원양의 아들이자 철종의 부마), 박영교(박영효의 동생), 서광범(참판 서상익의 아들), 서재필(서광범의 조카), 김윤식, 김홍집, 홍영식, 유길준, 어윤중 등이었다. 이들은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과 함께 신서를 익히면서 개화사상과 개화파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개화파는 1876년 개항을 계기로 민씨 정권이 중국의 양무개혁론을 모방, 체제유지의 차원에서 추진한 개화정책에 참여하면서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충의계(忠義契)를 조직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또한 개혁의 수단으로서 당시 서구문물에 관심을 표명하던 고종을 개명화시켜 평화적인 개혁을 추구하려 하였다.
특히 1880년과 1881년의 일본 수신사와 신사유람단 그리고 청의 개화문명을 배워오기 위한 영선사 등의 파견은 개화파가 세계정세의 흐름과 새로운 서구문명을 직접 확인하고 배우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와 함께 개화파는 양반의 자제뿐만 아니라 광범한 층의 청년들을 모아 외국에 유학보내어 근대적 제도와 문물을 배우게 하였다.
이들은 일본의 군사사관학교와 경응의숙(慶應義孰) 등에 유학하여 근대적인 군사학과 학문, 사상을 배웠다. 박영효는 1883년 8월 박문국을 설치하여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행, 나라 안팎의 정세는 물론 구미의 입헌군주제와 삼권분립의 우월성을 소개 선전하였다. 이런 속에서 개화파는 점차 조선 개혁의 모델로서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주목하게 되었다.
개화파의 활동은 점차 정부 안에서 친청수구적인 민씨정권과 마찰하는 가운데 그 안에서도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로 분화되었다. 그것은 개화의 방법과 청에 대한 외교대책의 차이 때문이었다.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의 온건개화파는 부국강병을 위한 개화정책을 실시하되 민씨일파와의 타협 아래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개화의 방법도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서양의 근대적인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점진적으로 수행하고, 청과는 종래대로 사대외교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온건개화파의 이러한 개혁입장은 당시 청의 양무론적 개혁을 모방한 동도서기론적(東道西器論的) 입장이었다.
반면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의 급진개화파는 서양의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사상과 제도까지 수용해야 하고 민씨일파와는 타협이 아니라 타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개혁의 관건적 문제로서 민씨일파를 지원하던 청에 대한 사대관계의 종식을 우선과제로 삼았다.
이런 점에서 급진개화파를 이후에 개화독립당이라고도 하였다. 급진개화파의 개혁구상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한 변법적(變法的) 개화의 입장이었다.
급진개화파는 1884년 5월 안남문제를 두고 청, 프전쟁이 일어나고 서울에 있던 청군의 일부가 철수하는 정세변화를 이용하여 정변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당시 조선 침략의 강화를 위해 접근하던 일본의 도움을 약속받고 10월 마침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신정부를 구성하고 그들의 개혁이상을 담은 신정강을 발표, 위로부터의 부르주아적 개혁을 단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민씨일파의 요청을 받은 청군의 무력간섭과 일본의 배반으로 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홍영식, 박영교 등은 청군에 의해 살해되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함으로써 급진개화파는 몰락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