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아이돌 소동파 全民偶像苏东坡
발표시간: 2020-09-15 출처: 미술보 소스: 이페어케이
출처: 미술신문
9월 초에 시작하여 아름답다술권의 가장 눈길을 끄는 뉴스는 소식 주제서화 특전이 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문화전 앞이 조수처럼 비치고, 빅데이터가 하늘을 찌를 듯이 전방위적이다.위치가 나타나, 엄숙하게 일파만파로 번졌다.전 국민의 동파풍.고전문학과 예술의 구름 끝에 서 있지만 정치인 문학가 시인 서예가 소동파로 국민 우상이 됐다.
소식 《치평첩》 권수소식 지혜의 실간가
전람회가 전 사회의 관심과 인기를 얻게 된 것은, 기원이다.소동파의 생생한 입체 형상.그는 우선 지혜로운 실무자였고, 그에 따라 민중의 복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문학예술 이외의 창조적 재능이 드러나 재미있었다.30대와 50대는 항저우(杭州)로 옮겨 서호(西湖)에서 잘 알려진 소제(蘇祭)를 준설하고, 3개의 석탑으로 구역을 나눠 백성들에게 마름모리를 심어주고, 경호목어(耕湖)를 농업생산으로 발전시키면서 서호의 후속통도 유지하였다.그는 천 년 뒤 서호(西湖)에서 다스리는 반생(反生) 경관으로 삼담인월이 실수로 위안화까지 찍혔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역병이 유행하자 그는 전문적으로 환자, 특히 가난한 환자들을 모아 자신이 세운 안락한 방에서 집중적으로 치료하고, 또 처방전 사용과 치료절차에 대해 규범화하여 방제의 효율을 높였는데, 마치 사람들이 마치 병원의 그림자를 보는 것처럼 병원의 모태가 되었다.항저우에서 임기를 시작한 지 5년밖에 안 됐는데, 이 도시는 천 년 동안이나 버텼다.강남에서 가장 지명도와 명망이 높은 도시인 그는 소식의 점석성금(點石成金)을 필두로 항저우(杭州)에서 아름다운 시골에 건설된 고전판이라고 할 수 있으며, 녹수청산이 가져다 준 녹색재산을 천 년 동안 흘러가게 한다.
임서주지주, 황하에게 이렇게 큰 재앙을 내리니,직접 진두지휘를 했고, 그동안 둑에 살면서 집에 돌아오지 않고 백성을 이끌었다.황하수(黃江水) 환치기를 마치고 난 후 황루진수(黃樓鎭水)를 지어서, 성루에 앉아 술자리를 베풀어 백성을 위로하고, 온 성안의 만인이 빈 골목에 와서 축하하고, 백성과 동락하며, 군중의 적극성을 동원할 줄 아는 부모관과 지도자의 모습을 드러내었다.겨울에는 서민들이 땔감을 구하기가 어려워 서주의 지리적 조건과 사료에 따라 탐사를 시켜 백토진이라는 고산에서 석탄과 유사한 석탄광을 찾아내고 연료 수요를 해결했다.
소식 황주한식첩이 황주를 폄하받던 시절, 다른 우매한 이유와 달리 아이를 죽이거나 유기하는 폐습이 있었으며, 소식이 전해지자 과감히 구아회를 설립하고, 그 곳에서 자선을 베풀어 위망을 가진 사람을 회장으로 모시고, 자기가 앞장서서 기부금을 모금하여 포목 등 생활용품을 구입하고, 각 마을에 가난한 임산부들을 찾아가 구휼을 청하고, 봉사를 지내며, 구원을 청하였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보면 소식이 일반 고대 지식인들과는 달리 '학이우즉사(學以权力上游上游士)'이며, 오로지 권력과 상위에 매달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거묘당(居廟堂)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인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일생을 바쳤으며, 이를 얻지 못하면 강호로 물러났다.소식은 그렇지 않다. 그는 진정 백성의 고락을 제 탓으로 하고, 백성의 낙을 제 것으로 여겼다.
소식 도해첩 소동파는 벼슬을 위해 일임한 조복(造福) 측의 사료도 풍부하여, 사회 통치에 있어서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능력을 알 수 있으며, 기상지리천문천문약금융경제 등 자연과학 분야에 재주가 뛰어난 학자형전문가형 지도자이다.그의 시정은 권력에 안주하지 않는 운명적 관임의 절반인 중국이 창조정신에 찬 실천가, 실행가를 백성에게 보내는 등 서민에게 다급하게 대할 수 있는 장기적이고 탁월한 안목을 보여줌으로써 현지 주민들과 함께 연구를 진행해 왔고, 지제가 효과적인 방안을 마련해 번번이 성공했다고 한다면 과연 그가 평생 지방관들이 국민의 복을 받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맛있는 음식의 달인
소식은 재임 중 민간인을 위해 한 짓이 유일무이했고, 송 신종은 '천하의 귀재'라고 했고, 임어당은 그를 '생기가 넘치고 원기왕성하다'고 평한 것은 정확할 뿐 지방 관리에서 보여준 지혜는 흥미로운 영혼을 보여준다.이 재미있는 영혼은 특히 그의 음식 취미에 나타나 있다.일찍이 고향 미주에 있을 때, 그는 자신이 직접 요리해서 양쯔강 물고기를 삶고, 생선찌개를 요리하고, 그 다음에 지인들을 불러 함께 맛보곤 했는데, 친구들은 모두 맛있다고 하지 않았다.동파육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천하에 고기찜의 돼지고기를 만드는 노하우를 익혔다.미식은 그의 여가 취미에 불과한데, 그는 여가 시간을 이용하여 자신을 미식의 달인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정치가와 문학가의 별종이라 할 수 있는데, 탐식계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그래, 초나라. 황주에 처음 왔을 때, 봐.창장에 가서 죽연산을 잘 돌면 어미순 향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고 값싼 현지 돼지고기와 풍부한 죽순 자원을 활용해 죽순찜 돼지고기를 개발했다.멥쌀은 현지 부자들에게만 먹일 수 있는데 콩과 거친 밀을 함께 끓여 단맛의 '얼홍밥'을 만들어 백성들의 배를 불렸다.상주(常州)에 있을 때 모험적인 복어고기를 맛보기 위해 독성을 무시하다가, 후에 관이 혜주(惠州)로 옮겨가서, 하루에 여지를 300개 먹었는데 '더 기쁜 복어'를 먹으며 복어를 잊지 않고, 그릇에 든 것을 먹으며 "둘을 보고 셋을 보라"고 하니, 얼마나 전형적인 먹방인가!담주에서는 사람들이 먹지 않는 굴과 술을 끓여 먹어본 적이 없는 맛있는 굴을 먹어치운다.곤약과 갈대백미를 원료로 '옥가루 수프' '고란국'을 만들어 '용연과 흡사', '색깔이 절묘하다'고 했다.
소식 복분자첩은 '채갱부', '돼지고기시', '콩죽', '늙은 식욕부' 등 음식에 대한 그의 충분한 표현으로 오늘날의 요리책과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동파음식'이라는 이름을 붙여 요리책의 우수성을 과시하고 있다.
미주는 물론 황주 때 밀주, 영남에서는 만가춘, 죽엽주, 송화주는 무슨 계화주가 있었기에 성공적이진 않았지만 즐거웠다.음식과 술을 나눌 수 없고, 술과 시를 나눌 수 없는 그의 문학상의 큰 업적은, 누가 말하겠는가.부침을 무릅쓰고 나온 것은?오늘 그의 고향에서 동파로 명명된 주류회사는 아직도 주력 제품인 소식주를 잘 팔리고 있다.만약 오늘날의 상업시대에 살고 있다면, 나는 그가 반드시 가볍게 식품 집단을 건설하여, 지방 미식 브랜드를 만들어 지역 경제 발전을 이룩하고, 문화를 결합하여 경제 연극을 공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식 다첩을 홀짝이며 먹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도철대잔치가 아니라 임금의 미약함에 따른 현실적 생존의 필요를 해결하는 것이자, 마음의 실의에 빠져 괴로워하며 즐기는 방식인지, 아니면 동란연대와 생산력 저하 속에서 백성을 돕는 포만책인지, 마지막에는 미뢰에 대한 만족이다.다만 구설의 욕망에서 우러나온 안식의 활달함이야말로 소식만의 모습이다.소식의 남다른 유래는 뼛속부터 음식과 사회관리뿐 아니라 단양생 연구, 집짓기 연구, 제지제묵 연구 등 거대한 문학적, 서예적 성취가 그의 접지, 삶의 일면을 덮고 있다는 점이다.'노부담발소년광'에서 '돌아가도 비바람도 없이 맑음'으로 이어지는 그의 일생은 소동파에게 장난을 쳤고, 20대 후반에 입사하자마자 어머니를 만나 돌아가야 했다가 돌아가야 했다.철종은 어려서 세상 물정을 잘 몰라서 당쟁으로부터 그를 보호할 수 없었다.한림원 학사병부예부 상서가 종말이 아니라 각지의 비직(低職)거의 평생을 좌천당하고 난장판 안에서 허황된 꿈을 꾸었다.
만능형 인재
소식조상에는 샤오캉의 집이었는데, 그가 어렸을 때, 그의 할아버지가 술 한 잔과 남장을 하며 풍류를 즐겼고, 기근 시에도 수만 섬의 곡식을 창고에 넣어서 구휼하였다고 한다.아버지의 사상적 독립성이 강했던 것은 어린 시절 귀동냥과 유전자 유전이 그의 활달한 성격을 키워주었기에 가능했고, '병성 고치기 어려운 낙천파, 비천민인의 도덕가'는 태생적으로 보였다.그가 천갈궁에서 태어났다고 자조하였으니 본래는 우환을 충분히 겪어야 할 것이다.그래서 '죽장망발이 말을 이긴다.송대(宋代)가 해남(海南)을 극형에 버금가는 중징계라고 폄하한 것은 당시로서는 바다를 건너는 것이 드물었고, 게다가 섬은 습기(潮湿瘴)가 많아 생존에 불리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어디든지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으로 수레가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길을 나섰다.
소식 북유첩은 비록 몸이 불계지주 같지만 만경파에서 자유를 얻었고, 풍부한 좌천경력에서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는 일반 중국 지식인들처럼 온갖 근심을 다 느끼고 돌아가지 않았어.그의 소탈은 마중나와 도연명, 그들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나왔고, 불공평과 시련에 빙그레 웃으며 실의에 대한 슬픔 대신 활달함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는 여전히 행운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제국 중심부처럼 넓은 대지에 공을 세우지 않고도 스스로를 윗목의 홀과 아랫목의 주방으로 만드는 만능형 인재로서의 창의력과 생명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인간과 둘 다 있을 수 없는 인간"이라는 그의 전설은 송의 침울하고 잔혹한 천년사를 코믹하게 장식한 듯하다.그의 흥미진진한 영혼과 인격적 매력을 바탕으로 선비, 문예대카, 일자무식인 촌고모야노, 그를 우러러보며 절을 한다.1101년, 66세의 소식이 상주(常州)에서 선종(善死)하자, 온 성읍이 교서를 하며 "사민(士民)은 철인의 시름(萎萎)을 아끼고, 여야가 한 번 살펴본다"고 탄식하였다.황주, 혜주, 담주는 퇴임할 때마다 천 만 명이 배웅했고, 구양수는 그가 새로 쓴 글을 받아서 종일 즐거웠을 때 신종 황제가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지 않을 때마다 소식의 글을 읽고 있었다.왕공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누가 그를 전 국민의 우상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소식 고목괴석도는 누구나 마음속에 소동파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소동파의 호기, 기개, 용기, 정기가 이미 우리 민족의 혈액에 녹아든 것처럼 이러한 기질은 그에게서 태생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전시 주제에 언급된 바와 같이, 풍류는 그가 후세에 남긴 인상이다.소탈, 힘든 날들을 시와 먼 곳으로 보내고 역사의 수레바퀴가 물결치는 와중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나아가는 생존의 몸부림 속에서 그 고사를 돌아보는 것이 오늘의 후손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