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16
3월1일[사순 제1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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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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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m-yAPuPGnAM (임시백 치백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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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에게는 또 다른 항일운동, 또 다른 31운동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또다시 31절입니다. 혹독하고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시절 하루하루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던 이 땅의 백성들에게 이건 정말 아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그 누구로부터 지배되지 말아야 할 자주 독립 국가임을 만천하에 선포한 중요하고 의미 있는 날입니다.
은혜롭게도 저희 공동체 지척 거리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독립운동가의 생가가 있어 자주 들르는 편입니다. 33인 대표이며, 31운동의 효력이 미미해지자 제2의 31운동까지 기획한 옥파 이종일 선생님(1858-1925)이십니다.
이분은 1894년 보성학교 교장에 취임한 이후 전국 각지의 7개 학교 교장을 역임하였습니다. 1898년에는 한국최초의 한글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였습니다.
31운동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직접 독립선언문을 인쇄를 주도하고 낭독했습니다. 또한 당시는 물론 지금도 어마어마한 양인 자주독립선언문 3만 5천부를 인쇄해 배포하였습니다.
너무도 당연히 일제 총독부의 눈에 그는 존재 자체로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습니다. 31운동을 주도한 죄목으로 이종일 선생님은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은 후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 정도 고생했으면 심신도 완전히 망가졌겠다, 만사 제쳐놓고 휴양이라도 하면 좋았을 텐데, 이종일 선생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이 지경인데, 어찌 내 한 몸만 걱정하겠냐며 또다시 독립운동을 기획합니다.
31운동 3주년인 1922년 3월 1일에 맞춰 주도면밀하게 행사를 준비하고 유인물을 인쇄하여 준비를 마쳤으나 누군가의 밀고로 수포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한평생을 한결같이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하던 이종일 선생님의 황혼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 못지않게 무척이나 서글픕니다.
정처 없이 그리고 기약 없이 떠돌던 그의 육신은 1925년 8월 31일 꿈에 그리던 고향 태안이 아니라, 물설고낯선 땅, 경성 종로 평동 으슥한 뒷골목 거적 대기 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사인은 영양실조였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거저 이룩된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이종일 선생님을 비롯한 수많은 물방울들이 모이고 모여 큰 물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해 대한독립이 완성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또 다른 항일운동, 제2의 31운동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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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qOF9nOTTH4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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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3요소와 그 순서의 중요성>
슈퍼맨이 될 수 있음에도 슈퍼맨이 되기를 스스로 거부한 소년의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더 보이’(2019)입니다. 한 아이가 어떻게 좋은 부모 밑에서 사악해지는지 그린 영화입니다. 영화는 미국 중부의 작은 도시에서 살고 있는 버트가 12살 생일을 맞이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버트는 어릴 적부터 가족의 노력과 사랑을 받아 건강하게 자란 아이입니다. 그러나 생일을 맞이한 이후부터 갑자기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되면서 그의 성격과 행동이 변해가기 시작합니다. 그는 부모보다 엄청난 능력을 지닌 자신이 부모의 아들일 리 없다고 의심하게 됩니다.
아이는 자꾸 자신이 부모의 자녀가 아니라 우주에서 날아온 슈퍼맨과 같은 존재라고 믿어갑니다. 그리고 점점 더 부모의 말보다는 자신이 타고 왔다고 믿어지는 우주선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바로 지구를 차지하라는 목소리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점점 자신의 능력을 통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부모는 걱정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랑합니다. 그럴수록 아이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세상에 악영향을 미칠 그를 제거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의 힘은 너무 세졌습니다. 영화의 결말에서는 버트는 부모의 대항을 뚫고 이웃 마을로 가게 되는데, 그 마을에서 버트는 더 많은 인간들을 공격하고 마을을 파괴합니다. 마지막에 버트의 아버지는 그를 정지하고자 하는데 실패하고, 버트는 아버지와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한 어머니를 살해하고 인간들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이 영화는 아이가 사춘기 때 빗나가게 되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처음엔 부모가 자신의 출처일 수 없다고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사춘기 아이들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아이는 하느님에게서 왔습니다. 부모가 아이의 영혼까지 넣어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인정하지 않게 되자 아이는 더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게 됩니다. 그러자 자신을 부모라 믿게 할 수 있는 음식과 희생 또한 무의미하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배의 3요소를 발견하게 됩니다. ‘봉헌-말씀-성체’입니다. 봉헌은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아이는 먼저 부모를 자기 창조자로 고백해야 합니다. 성막으로 치자면 뜰에서 이것이 이루어집니다. 제물을 봉헌함으로써 우리는 주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우리 자신을 피조물로 인정합니다. 그러면 그분께서 말씀을 해 주십니다. 이것이 성막의 성소에서 이루어집니다. 그곳에서 봉헌되는 빵은 곧 하느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부모를 인정하지 않는 아이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는 아이는 부모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 순서를 어긴다면 부모를 스승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무언가 배우겠다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말씀 다음이 성체입니다. 성체는 표징입니다. 하느님께 배우려 하지 않으며 믿음만 요구하는 것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부모 앞에서 잔소리 말고 밥이나 차리라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예배의 순서를 어기는 세대가 악한 세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을 거치지 않고 표징만을 원하는 이들을 악하다고 하십니다. 이들을 심판할 이들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찾아온 남방 여왕과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미사를 드릴 때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합니다. 말씀의 전례가 바로 설교입니다. 그리고 성찬의 전례는 표징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회개를 위한 지혜를 주고 성찬의 전례는 믿음을 줍니다.
요한 복음에서 첫 표징은 카나의 혼인잔치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을 본 제자들은 믿었다고 합니다. 이 믿음은 말씀만으로는 불가능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하느님처럼 신성을 가지게 되었음을 믿을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성체 이전에 말씀의 전례가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전례 이전에 봉헌이 있습니다.
요즘은 누가 봐도 봉헌과 말씀이 약해졌습니다. 봉헌을 통해 하느님이 주님임을 인정하지 않고 강론이 길면 빨리 성체만 영하고 집으로 가고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예배의 순서를 어기는 게 악한 것입니다. 부모를 인정하는 봉헌이 없으면 말씀이 약해지고 말씀이 약해지면 부모의 가르침은 거부하면서 밥만 먹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표징인 성체 성사도 소용없게 됩니다. 우리는 예배의 순서를 잘 지켜서 악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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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초등학교 다닐 때입니다. 학교에서는 가끔 ‘환경미화 운동’을 하였습니다. 교실에서 환경미화는 당연히 교실 뒤편에 있는 ‘게시판’의 정리입니다. 게시판에 그림을 붙이기도 하고, 예쁜 글씨로 제목을 붙이기도 하고, 각종 도표를 만들어서 붙였습니다. 나무로 된 마룻바닥은 초를 가지고 닦았습니다. 초등학교 때의 환경미화는 주로 교실 청소였습니다. 들과 산은 굳이 미화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식목일이면 나무를 심기는 했지만 개울에서는 물장구를 치고 놀 수 있었고, 산에는 도토리, 밤이 있었습니다. 동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고, 당연히 수돗물을 마셨습니다. 등산객들이 그리 많지도 않았지만 산에서 밥을 해먹고, 고기를 구워먹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산에서 식사는 극히 제한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우물은 사라진 지 오래 되었고, 수돗물을 마시는 가정도 거의 없습니다.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물을 팔아먹었다는 이야기는 전설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불과 한 세대 사이에 우리의 자연환경은 많이 변했습니다. 우리가 오염시킨 강과 바다 그리고 공기는 이제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태워버린 석유와 석탄은 ‘기후변화, 지구온난화’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쌓아올린 문명이라는 탑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우리가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우리가 계속 자연을 파괴하면 그래서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자연은 우리가 예측하기 힘든 방법으로 되갚아 줄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는 인간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는 ‘표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꿀벌의 개체수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연 생태계에 큰 영향을 주는 현상입니다. 꿀벌에 의지해서 번식하는 식물의 감소를 가져오고, 그런 식물을 먹고 번식하는 초식동물의 감소를 가져오고, 생태계의 붕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기록적인 한파, 극심한 가뭄, 녹아내리는 빙하는 자연이 우리에게 보내는 표징입니다.
한 소녀가 더 이상 우리의 지구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 소녀의 이름은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위기는 너무 심각해서 인류가 실존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 문명의 종말을 초래할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집에 불이 난 것처럼 행동하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불이 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번도 위기로 취급된 적이 없는 즉각적인 전대미문의 위기를 맞고 있지만, 우리 지도자들은 모두 어린애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상상할 수도 없을 만한 거액의 돈을 벌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미래는 팔려 나갔습니다. 하늘처럼 무한하고 한번 뿐인 이 세상이라는 말을 여러분이 할 때마다 우리의 미래는 도난당했습니다. 어른들은 우리에게 미래는 기대할 만한 것이라고 말했잖습니까? 여러분들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에게 헛된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레타 툰베리는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변화를 일으키기에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사순시기에 우리는 ‘절제와 극기’를 이야기합니다. 어떤 분들은 사순시기 동안 금주와 금연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사순시기 동안 성경 필사를 하기도 합니다. 2023년 사순시기에는 우리의 지구를 위해서, 우리의 후손을 위해서 자연을 아끼고 보호하는 절제와 극기의 삶을 실천하면 어떨까요? “저희가 절제하고 극기하며 선행을 실천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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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29-32: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기적에 대한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신다. 그리고는 요나의 기적 하나만 주시겠다고 한다. 요나의 기적을 보여주시겠다는 이 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요나가 기적적으로 살아서 니네베에 나타났던 것처럼, 예수님도 기적적으로 부활하여 종말론적 사람의 아들로 나타나는 표징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왜 예수님은 그들이 요구하는 기적을 거절하셨을까?
요나의 표징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된 수난과 부활을 나타낸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생명이 주어지겠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요나의 표징이 이렇게 니네베 사람들에게 두 가지 면으로 도움이 되었다. 만일 그들이 요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요나처럼 산 채로 저승에 갔을 테지만, 회개했기 때문에 요나처럼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즉 주님도 사람들은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 살거나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 죽는다는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31절) 이 여왕은 교회의 모습이다. 남방 여왕이 솔로몬에게 왔듯이 교회는 주님께 왔고, 지나가 버리고 말 세상의 지혜와 죽을 수밖에 없는 임금을 보고자 했던 남방 여왕이 회당을 단죄한다면 영원한 지혜와 영원히 사시는 임금을 사모하는 교회는 얼마나 무섭게 이 믿지 않는 세대를 단죄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예수님은 역사상의 인물인 시바의 여왕과 니네베 사람들을 예를 들어 정신을 차리라고 경고하신다. 솔로몬 왕 때, 스바의 여왕은 하느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솔로몬의 소문을 듣고는 먼 길을 여행하여 지혜를 배우고자 찾아왔으며,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한번 듣고 즉시 왕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단식재계를 했었음을 상기시켜 주신다.
스바의 여왕이나,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께 선택받은 백성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었다. 이 이방인들이 솔로몬의 지혜와 요나의 설교를 경청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던 하느님께 선택받았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보다, 요나보다 더 훌륭한 현자이며 예언자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일깨워 주신다.
예수님의 이 경고는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무서운 말씀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바라고 하느님께 청해야 할 기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 변화되는 기적이다. 이 세상이 모두 변화되고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다 해도 그 기적을 알아볼 수 있도록 내 눈이 바뀌지 않으면 그것은 기적이 있지만, 기적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면서 기적을 볼 수 없다면 그 기적은 항상 없는 것이다. 이제 바로 내가 사랑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나 자신으로 변화될 수 있는 기적을 청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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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요나의 표징>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
여기서 ‘이 세대’는,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하면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구원의 길’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모든 시대의 ‘안 믿는 사람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늘날의 안 믿는 사람들도 해당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에 살아 계시는 분이고, 성경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는, 즉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고, 구원의 반대쪽으로만 가기 때문에 ‘악한 세대’입니다.
그들이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겉으로는 표징을 보여 주면 믿겠다는 태도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아니고, 자기들이 안 믿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태도입니다.
그들은 표징이 없어서 예수님을 못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했기 때문에 표징을 보여 주어도 표징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따로 보여 줄 표징은 없습니다. (안 믿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을 믿게 만들기 위한 표징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표징도 보여 주지 않고서 무조건 당신을 믿으라고 윽박지르신 것은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충분히 표징을 보여 주셨고, 그래서 그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빵의 기적’ 후에,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이 듣기가 거북하다면서 많은 사람들이 떠나버렸을 때(요한 6,66),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똑같이 체험했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똑같이 들었으면서도, 왜 누구는 안 믿고 떠나버리고, 누구는 믿고 예수님 곁에 남아 있었을까? 그것은 이해력의 차이가 아니라 ‘희망’의 차이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만 희망한 사람은 예수님을 떠났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희망한 사람은 예수님 곁에 남았습니다. 오늘날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복만 바라는 사람은 예수님을 안 믿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사람만 끝까지 남아 있게 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랠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
이 말은, 예수님을 안 믿고 있던 제자들이 기적 덕분에 비로소 믿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보고 자신들의 믿음이 옳았음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기적을 제자들만 본 것은 아닙니다. 일꾼들이 현장에서 직접 보았습니다.
과방장과 신랑은 기적은 못 보았지만 ‘기적의 술’을 맛보았습니다. 복음서 저자가 제자들의 믿음에 대해서만 말한 것은, 일꾼들과 과방장과 신랑은 예수님을 안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왜 그런 차이가 생겼을까? 제자들은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을 바라보았는데, 일꾼들과 과방장과 신랑은 예수님을 보지 않고 포도주만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빵의 기적’에서도,예수님을 보지 않고 빵만 본 사람들은 떠나버렸고, 빵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본 제자들은 남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요나 예언자의 표징’이라는 말은,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다가 살아난 일을(요나 2,1.11) 가리키는 말이고,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신 말입니다.
그래서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나의 죽음과 부활은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표징이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들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위대한 표징은 ‘부활’입니다.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고 바탕입니다. 그렇지만 부활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천 년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믿을 수가 없어서 못 믿는 것인지, 믿기 싫어서 안 믿는 것인지...>
부활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믿게 만들기 위한 어떤 물적 증거 같은 것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는 사도들의 증언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자신들의 증언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모두 순교했다는 사실이 증거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표징’이라는 말은 표지판 같은 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믿으면 살고 안 믿으면 멸망하는,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에 서 있는 도로 표지판.
<‘요나 예언자의 표징’이라는 말을, 요나의 멸망 선포를 듣고서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한 일을(요나 3,5-10) 가리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너희가 할 일은 표징을 요구하는 일이 아니라 회개하는 일이다.”, 또는 “표징만 요구하지 말고 회개부터 하여라.”라는 뜻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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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오늘 복음은 조금은 불편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미 루카 복음사가는 ‘세대’라는 표현으로 예수님 말씀에 귀 기울이지 못하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7,31; 9,41 참조). 특별히 이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지는 않으면서 기적만을 찾는 당시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에게 요나가 본보기가 됩니다.
제1독서에서 전하는 것처럼 요나 예언자가 니네베에서 하였던 일은 아주 간단합니다. 니네베 사람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이 선포에 임금을 비롯하여 모든 이가 자신의 행실을 뉘우치면서 악한 길에서 돌아서고 하느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하느님 말씀과 선포에 있습니다. 그는 어떤 놀라운 일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충실하게 선포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스스로 회개합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은 요나 예언자와 비교됩니다. 사람의 아들에게도 중요한 것은, 요나처럼 먼저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강조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 그 어느 기적이나 표징보다 중요하며, 그 바탕에는 예수님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자리합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보고 놀라워하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의 회개와 진정한 변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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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최현욱 베네딕토 신부님]
오래된 일입니다만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을 때,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열흘이 넘도록 물도 마시지 못한 채로 견디다가 극적으로 구조되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살아난 사람들을 보고 뭐라고 했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기적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무너진 건물에 깔려 죽지 않은 것도 기적이고, 오랜 시간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살아남았다는 것도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기적들이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고 계십니까? 그 기적은 바로 여러분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백화점에 드나들어도 그 백화점들이 무너지지도 않았고, 백화점이 무너지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백화점이 무너져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친 가운데 몇 사람이 살아난 것을 두고 기적이라고 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백화점을 드나들어도 한 사람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다는 것은 더 큰 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현재 살고 있는 김해에 몇 해 전에 중국에서 오던 비행기가 떨어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중에서 살아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비행기가 산에 추락했는데 그 상황에서도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기적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살아난 것을 두고 기적이라고 한다면, 비행기가 추락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다니고 있다는 것은 더 큰 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본다면 우리 주위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하루의 모든 시간이 기적으로 채워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별 탈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기적인 것입니다. 단지 우리들이 그 기적을 볼 수 있는 눈이 없다는 것이 문제지만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특별한 표징, 즉 기적을 바라고 예수님께 요구하지만 예수님이 보여줄 수 있는 기적은 요나의 기적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나의 기적은 어떤 기적이었습니까?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네베가 온갖 죄악으로 물들어 있을 때, 하느님은 요나에게 니네베로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예언서 3장 4절)
즉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니네베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전해야 했던 것입니다. 요나는 원수와 같은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삶을 고침으로써 하느님의 심판을 면하게 되는 것이 싫어서 달아납니다. 하지만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결국 니네베로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속으로는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요나의 바람과는 달리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임금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 옷을 입고 하느님께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용서해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한 재앙을 거두십니다.
이렇게 요나의 기적은 바로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가던 길을 버리고 새로운 길, 즉 하느님이 바라시는 길로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기적을 바라고 있습니까? 하느님께 어떤 기적이 자신에게 일어나길 청하고 있습니까? 어떤 신비한 현상이나 특별한 사건이 자신에게 일어나길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지만 우리들이 청해야 할 기적은 바로 요나의 기적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회개입니다. 바로 나 자신의 변화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변할 때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이 바라시는 길로 방향을 바꿀 때,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기적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통해 하느님께 항상 감사드리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에게 일어나야 할 참다운 기적인 것입니다.
사순 시기는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은총의 시기입니다. 이 은총의 시기에 여러분 모두가 자신의 변화를 통해 매 순간 기적을 체험하면서 기쁘게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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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이정호 요아킴 신부님]
<들음>
통계에 보면 남자들은 평균적으로 하루에 7천 단어를 이야기하고 여자들은 3만 단어를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여자들이 말하기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가 봅니다.
말의 양만이 아니라 어떻게 말하는지도 다르다고 합니다. 남자들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데 비해 여자들은 설명하고 묘사하는 어휘를 많이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워합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듣는 것 같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 실망하고 분노하고 외면합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을 때 거짓이라 여기고 무시하며 한편으로 밀쳐둡니다.
그러나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알아듣고 싶어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그러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남다른 길을 요구합니다.
내가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좀 더 다른 방식으로 나아가도록 요구합니다. 낯선 방식이 두렵고 불안하여 우리는 알아듣기 어렵다고 외면합니다.
그래서 뚜렷한 표징을 요구하며 말씀을 뒷받침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말씀을 들었고 마음 안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두려움이 말씀을 가로막지 않도록 용기를 냅시다. 믿음은 두려움을 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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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표징을 바라는 그대에게>
루카 11,29-32 (요나의 표징)
그때에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표징을 바라는 그대에게>
마음을 열면
느껴지리니
마음을 여시게나
눈을 뜨면
보이리니
눈을 뜨시게나
귀를 열면
들리리니
귀를 여시게나
손을 내밀면
잡히리니
손을 내미시게나
발을 내딛으면
다가오리니
발을 내딛으시게나
참으로 살아있으면
늘 품으리니
참으로 사시게나
그리하여
바로 그대가
바라는 표징이 되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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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을 열어라>
누구나 소망을 지니고 그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으면 여한이 없을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루고 나면 언제 그랬는가 싶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한번 깨우침을 얻었다든지 소망을 이루었으면 그 감사함을 오래도록 지켜야 하는데 마음 같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화장실 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다릅니다.” 한결같은 마음을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그들이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기적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11,29) 하고 말씀하시며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귀를 막고 있는 사람에게는 천둥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아무리 표징을 보여줘도 마음을 닫아건 사람에게는 쓸모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쇠귀에 경 읽기입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다’ 는 말을 생각해 봅니다.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는 정성을 들이지 않고 딴 곳에만 마음을 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군중이 그랬습니다. 참된 신앙과 회개에는 무관심한 채 표징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통하여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시고, 당신의 권능을 일깨워 주심으로써 새 삶으로 인도하려 했지만, 사람들은 그것에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다만 육체적인 치유와 기적이 최고였습니다. 솔로몬을 능가하는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는 귀한 은총 가운데 살면서도 그분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표징을 일으킬 수가 없으셨습니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미사참례를 하여 성체를 모시면서도 예수님께서 보여주고 가르치신 삶을 살기를 다짐하기보다는 이상한 현상이나 신비로운 표징에 더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모실 수 있다는 것이 표징 중의 표징이요, 기적중의 기적이지만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두를 주시지만 우리는 그저 밀떡 하나 받아먹는 것으로 만족하니 주님의 역사하심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으로 준비하지 않은 나를 보지 못하고 더 큰 것을 요구하기에 급급해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번 사순절에는 더 큰 것을 바라기에 앞서 지금 내가 주님 앞에 서 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기적은 내가 지금 살아있음이 기적입니다. 많은 실수와 잘못, 허물에도 불구하고 심판을 이기 자비에 힘입어 이렇게 살아있음이 사랑이신 주님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쫓기보다 내 삶의 자리를 표징의 자리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영성체로 모실 수 있음을 기뻐하며 우리도 주님처럼 이웃을 위한 빵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빵을 먹을 때마다 생명의 양식이 되어주신 주님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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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형제님을 만났는데, 하느님께서 자기 청원을 전혀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하십니다. 정말 열심히 되풀이해서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기도의 내용을 여쭤보니,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높은 지위를 탐한 것도 아닌데, 사랑의 마음을 달라는 청원을 들어주시지 않을 수 있냐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님께서는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고, 그와 함께 있는 것조차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미움의 마음이 가득하니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마음을 청했던 것인데, 그 마음이 도저히 생기지 않으니 하느님께서 혹시 사랑의 실천을 원하시지 않는 것은 아닐까 의심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분의 청원을 전혀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청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실성을 헤어린 뒤의 일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그 목적을 달성할 힘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는, 입으로 내뱉는 말로써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바람이 얼마나 진실한지에 따라 판단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청원이 들어져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체험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기 청원이 이루어졌는가를 떠올리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나의 성실성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실성을 가지고 노력할 때, 하느님께 드린 청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즉, 하느님의 표징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의 성실성이 우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향해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계속해서 표징을 보여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래야 믿을 수 있다고, 그래야 당신을 따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많은 표징을 보여주었습니다. 빵의 기적도 있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또 마귀도 쫓아내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당신의 표징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럼에도 믿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자신의 성실성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성실성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표징만 보여달라고 청했던 것입니다.
많은 청원 기도를 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 자기 성실성을 드러낼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표징은 자기 성실성에서 환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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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완고한 마음, 간절하지 않은 마음>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점은 요나 얘기라는 점입니다.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에게 줄 표징은 요나의 표징밖에 없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여기서 요나의 표징이란 어떤 의미인지 봐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표현을 하십니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표징이란 하느님의 표징이고,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신다는 표시거나 하느님 친히 그렇게 하셨다는 표시입니다.
옛날에 우리는 ‘그 개망나니가 사람 됐다.’라는 표현을 가끔 썼습니다. 망나니란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온갖 못된 짓을 다 하는 사람을 일컫지요.
그런데 그 개망나니가 개과천선했다면 분명 어떤 곡절이 꼭 있었을 거라고 궁금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그를 바뀌게 한 것임이 드러나면 사람들에게 그 개망나니는 하느님의 표징이 되겠지요.
아무튼,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은 요나가 바뀐 것, 곧 회개할 것 같지 않은 요나가 회개한 것은 니네베 사람을 회개하게 합니다.
요나가 그렇게 고집부리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사실을 니네베 사람들이 알기에 그런 그가 자기처럼 죽지 않으려면 회개하라고 하는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던 거지요.
이렇게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가 하느님의 표징이 되어 회개했는데 이스라엘인들이 요나보다 더 큰 표징인 주님을 보고도 회개치 않고 다른 표징을 요구하니 주님께서는 그들이 악하다고 하시며 당신 외에 다른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주님 당시의 이스라엘인들은 악합니다. 그리고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불행한 족속입니다.
왜 악합니까?
우선 그들은 표징을 요청하지 않고 요구합니다. 겸손하게 청하지 않고 교만하게 요구하는 겁니다.
하느님 사랑이 그리 간절하지 않거나 하느님 나라가 달갑지 않은 것입니다.
능력이 있으면 한 번 설득해보라는 식이고, 나의 이 완고한 마음을 깰 수 있으며 깨고 돌릴 수 있으면 한번 돌려보라는 식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완고한 마음과 간절하지 않은 마음 소유자가 나는 아닌지 니네베 사람보다 더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닌지 돌아보는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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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30)
<나도 표징이 되자!>
오늘 복음(루카11,29-32)은 '요나의 표징'입니다. '표징의 사전적 의미'는 '밖으로 드러나는 특징이나 상징으로써 본질적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을 말합니다. '성경 안에서의 의미'는 '계시 곧 하느님의 뜻을 전달해 주는 매체'를 말합니다.
'요나의 표징', 곧 요나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니네베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주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내렸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3,1-2.4)
'요나가 전하는 표징'을 보고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합니다.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마침내는 니네베 임금까지 회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이렇게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시고,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회개의 기적'입니다.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표징', 곧 '당신의 성탄(육화)과 땀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은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생각과 말과 행위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3월의 첫 날'을 맞이했습니다. 오늘은 104년 전 일제 식민 통치에 항거했던 날을 기념하는 '삼일절'입니다. 유관순 열사 등 수많은 열사들이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지금 우리 안에는 삼일절 정신을 잊고 '친일(親日)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삼일절을 맞이하여, 우리 대한민국이 회개했으면 좋겠습니다. 대통령이 회개하고, 국회의원이 회개하고, 나아가 우리 모두가 회개했으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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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AoCSB3M8N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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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표징이 될 것이다."(루카 11, 30)
반가운
3월의
첫날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다리던 봄이
우리에게
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중요한
표징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어떤 것으로도
가려질 수 없는
예수님의
뜨거운 삶이
우리의 참된
표징입니다.
뜨거운 표징을
먹으며 살아가는
우리 삶의
여정입니다.
표징의 여정은
사람을 품고
사람을 용서하는
회개의 여정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표징이 열리면
하느님의 나라가
열립니다.
표징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줍니다.
올바른
표징은 생활로
드러납니다.
표징이 끊어지면
회개도
끊어집니다.
표징의 사람은
다름 아닌
회개의 사람입니다.
회개로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반성없는 표징은
우리의 신앙을
주저앉게
만듭니다.
십자가에서
더 깊어지는
예수님의
표징입니다.
표징으로
사는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은총의
사순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십자가에서
뜨거운 피가
떨어져 내립니다.
뜨거운 표징
뜨거운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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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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