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24일(목)
생명의 삶 Q.T. 묵상 - [다른 사람이 복 받는 것을 함께 기뻐할 수 있나요]
●성경본문 : 누가복음 15:11~32
앞서 두 비유 즉 잃은 양 비유와 드라크마 비유는 세리와 죄인들도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존재임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탕자의 비유 역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시각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두 아들’을 제시함으로써 둘째 아들에 해당하는 ‘세리와 죄인들’이 유대 사회 가운데 무시해도 좋을 소수가 아님을 밝히십니다(11).
유대인이 보기에 둘째 아들의 모습은 극도로 혐오스럽습니다.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죽기를 바랐다는 것이고(12), 율법규정에서 벗어나 맘대로 살려고 먼 곳, 즉 이방인의 땅으로 갔습니다(13).
게다가 돼지 치는 일을 하고 그 사료까지 먹었다는 것은 유대인들로서는 구역질이 날 만한 일입니다(15~16).
그런데 둘째 아들은 집으로 돌아가 ‘품꾼의 하나’ 즉 가족의 ‘주변인’으로라도 살아야겠다고 생각을 갖습니다(19).
이는 세리와 죄인들의 자의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죄인으로 여기고 있었고, 유대인 사회의 ‘가족’에 포함될 수 없기에 주변인의 위치라도 얻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여전히 아들로 인정합니다.
아버지에게서는 그 아들을 향한 혐오가 전혀 보이지 않고, 오직 긍휼만이 보일 뿐입니다.
경건한 유대인들로서는 돼지를 치고 돼지 먹이를 먹던 자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행동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지만, 아버지는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20).
둘째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의 아들, 즉 가족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하지만(21), 아버지는 그의 지위를 회복시킵니다(22~23).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은 그들을 결코 혐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긍휼을 베푸신다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사실 부모의 마음을 조금만 이해한다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이 얼마나 귀한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24).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그들을 향한 혐오를 긍휼로 바꾸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맏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비유합니다.
그는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는 믿음직한 모습으로 묘사됩니다(25).
아버지는 화가 난 큰아들을 위해 직접 나와서 권하는데, 이는 두 아들을 똑같이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28).
그러나 큰아들은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한 채, “내게는 염소 새끼도 주지 않았나이다”라고 불평합니다(29).
그러나 아버지가 보기에 큰아들은 이미 아버지의 것을 모두 가지고 있는 기득권자입니다(31).
아버지 곁에 머물면서 아버지 집에서 나오는 각종 혜택을 누리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동생을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말하는데(32), 이 말을 통해 예수님은 사회 지도층이자 기득권을 누리고 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당연히 소외 계층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누리는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은 당연하고, 다른 사람이 뭔가를 더 누리면 불공평하다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만이, 자기가 받은 복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이 복 받는 것을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기본은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채워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