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덕 베드로 신부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1요한 1,5―2,2 마태오 2,13-18
동방 박사들이 찾아왔을 때, 헤로데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마태 2,4).
그는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구세주로 오신 그분을 경배하러 동방 박사들과 함께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탄생이 그에게는 위협으로 느껴졌고, 결국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는 비극적인 일을 벌입니다.
헤로데가 이러한 선택을 한 이유는 자신의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질 하느님의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 그것들이 그에게는 ‘하느님’이고 ‘구원’이었습니다.
헤로데는 하느님을 ‘주님’으로 섬기지 못하는 사람의 최후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6,24).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하느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주님’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진짜 주님’은 누구이신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를 멈추게도 하고 움직이게도 하는 것, 절대로 빼앗기지 않도록 노력하게도 하고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게도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의 실제 ‘주님’이십니다.
헤로데에게 그 주님은 ‘자신의 왕권’이었습니다.
“헤로데는 ……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2,16-17). 아멘.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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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1요한 1,5―2,2 마태오 2,13-18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00년 전입니다. 헤로데 왕은 동방박사들이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새로이 태어났다는 ‘메시아’의 소식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헤로데는 보고를 받은 후에 이렇게 결정을 내렸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2살 이하의 어린아이는 모두 죽여라.’
동방박사에게 ‘메시아가 태어난 곳을 알려 주시면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라고 했던 말과는
전혀 다른 결정을 내렸습니다.
헤로데의 결정으로 예루살렘에는 아이를 잃은 부모님들의 통곡소리가 가득했습니다.
이제 막 아이를 출산한 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요셉과 함께 이집트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마태오는 이런 일들이 성경에 예언된 사건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사후약방문’이었을지 모릅니다.
만일 헤로데가 2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모두 왕궁으로 초대했으면 어땠을까요?
그래서 성대한 잔치를 열어주었으면 어땠을까요?
그러면 마태오 복음사가는 또 다른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하느님의 구원이 시작되었다고
했을지 모릅니다.
몇 년 전 10월 29일에 158명이 숨지는 ‘참사’가 있었습니다.
사고의 책임자를 찾아서 문책하는 것도 참사의 수습방법입니다.
다시는 그런 참사가 생기지 않도록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을 세우는 것도 참사의 수습방법입니다.
특별수사본부가 엄정하게 수사를 하는 것도 참사의 수습방법입니다.
국회에서 국정조사를 통해서 진상을 밝히는 것도 참사의 수습방법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가슴에 품고 하늘나라로 떠나보내야 했던 유족들의 아픔 마음과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그분들의 슬픔을 위로하면 좋겠습니다. 참사의 책임규명과 진상규명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린 유족들의 슬픔을 대신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공감하고, 함께 위로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언젠가 역사는 그날의 사건을 기억하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날의 아픔을 우리는 함께 공감했다. 비록 슬픔이 컸지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어떤 분이 고통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고통은 우리의 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아이가 뜨거운 것을 못 느낀다면,
아이가 추위를 못 느낀다면, 아이가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이는 어른으로 성장하기 전에 신체장애를 얻을 것입니다.
고통은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몸을 위험으로부터 피하게 만들어 줍니다.
고통은 소중함을 알게 합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자녀들을 더욱 소중하게 여깁니다.
이는 출산의 고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가에게는 자신의 쓴 작품들이 무척 소중할 것입니다. 그런 작품을 쓰기 위해서
수많은 날을 고민하고 갈등했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공동체를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소방공무원이 위험을 무릅쓰고 불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태석 신부님께서 저 멀리 아프리카에 가서 모든 것을 내어 주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도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인생이 기쁨과 즐거움만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탄의 기쁨은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인생의 전부도 아닙니다.
그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축복을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이
참된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철저한 섬김이요, 나눔이었습니다.
권력을 지녔지만 사용하지 않았고, 섬김을 받을 수 있었지만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할 길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주님!
세상을 떠난 무고한 사람, 억울한 사람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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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형 미카엘 신부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1요한 1,5―2,2 마태오 2,13-18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성탄의 신비
우리는 스테파노를 그리스도교의 첫 순교자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이에 앞선 30여 년 전에도
순교 사건이 있었지요. 바로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죄 없는 아기들의 순교입니다.
이 아기들은 비록 자기 의지로 신앙을 고백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죽임을 당했고,
또 무죄한 어린양의 수난과 죽음을 어느 모로 미리 증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하는 이름 없는 증거자들이
많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죽어가는 낙태아들,
나자렛 성가정이 이집트로 피신했던 것처럼 생존을 위해 삶의 터전을 찾아다니는 난민들,
그저 가난에 찌들어 재난 같은 일상을 매일 버텨내는 사람들,
그리고 쉴 새 없이 파괴되는 하느님의 피조물 안에서 무죄한 순교자들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모든 이가 엘리야처럼 하늘로 오르기를 바랄 때,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어 내려오셨고,
그것도 기대하던 힘센 군주의 모습이 아니라, 구유에 태어난 미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탄의 신비는 세상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형제자매들이 주인공이 되는 세상을
꿈꾸게 합니다.
성탄 안에서 당신을 낮추신 하느님의 어리석음을 묵상하며,
작은 이들을 더 존중하고 배려하는 그런 세상을 주님과 함께 꿈꾸고 싶습니다.
글라렛선교수도회 박재형 미카엘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