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양업 토마스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집회서 3,2-6.12-14 콜로새 3,12-21 루카 2,41-52
머무르고 싶고, 가고 싶은 ‘거룩한’ 집 ‘성가정’
힘이 빠지고 지쳤을 때 어떤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여러 생각이 들겠지만 많은 경우에
그리고 저의 경우에도 ‘집’ 생각이 먼저 떠오릅니다.
힘들면 입버릇처럼 한숨과 함께 “아! 집에 가고 싶다.” 혹은 “아! 집에 가야지,”라는 말이,
크게 의식하지 않아도 뱉어집니다.
집이라는 곳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또 나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 내가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입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집에서 멀리 떠나고자 하는 상황과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 중에 그런 경험이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우리가 잘 아는 루카 복음에 등장하는
‘돌아온 둘째 아들’도 그러했습니다.
삶의 끝자락을 마주하는 듯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떠올렸던 곳이 ‘아버지께서 계신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소년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집’에 오래도록 머무르고
싶으셨나 봅니다. 결국 ‘집’이란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
가장 가고 싶은 곳입니다. 우리가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그 ‘집’과 ‘뜰’을 ‘가정(家庭)’이라 부릅니다.
머무르고 싶고, 가고 싶은 집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오늘 제1독서와 제2독서에서 전해
들었습니다. 먼저 제1독서의 집회서는 부모를 공경하라 가르칩니다.
그리고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가정의 각 구성원들에게 당부합니다.
독서의 말씀들은 표현에 있어서 지금 시대와 꼭 맞아 떨어지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뜻은 어느 시대와 세대를 막 론하고 이루어야 할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한 주간을 ‘가정 성화 주간’으로 지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고자 기도하고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나자렛의 가정이 ‘거룩한 가정’인 성가정인 이유는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들 모두가 서로 공경하고 사랑하며, 머무르고 싶은 집,
가고 싶은 집을 이루려 노력하셨고, 그것을 이루어내셨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거룩함’이란 그저 멀리 있어 가까이 갈 수 없고,
우리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편히 머무를 수 있고, 편히 갈 수 있고, 언제나 가까이. 함께 하고 싶은 것이
‘거룩함’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한 주간 ‘거룩한 우리 집’을 이루도록 기도하고 노력 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거룩한 우리 본당’을 이루도록 기도하고 힘써야 하겠습니다.
◾ 나의 아버지의 집에
(엔 토이스 투 파트로스 무 ἐν τοῖς τοῦ πατρός μου )
그리스말 본문에는 ‘집’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직역하자면,
‘나의 아버지의 그것들 안에’인데, 보통 ‘그것들’을 ‘집’이나 ‘일들’정도로 번역합니다.
집이든, 일이든,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과의 내적 일치 안에 계신다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은 늘 아버지의 자리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역시 매사에 하느님의 마음으로, 하느님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대구대교구 송양업 토마스 신부
2024년 1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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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정 바오로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집회서 3,2-6.12-14 콜로새 3,12-21 루카 2,41-52
성가정, 세상의 작은 교회
성탄 후 첫 주일이자 2024년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 교회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지내며 가정의 참 의미에 대해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잃어버린 예수님을 사흘이나 지나서야 되찾으신 후,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보고서도 그저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묵상하는 모습, 바로 여기에 성가정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각자가 개인화 되어가고 있는
상황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위로의 안식처가 되어야 하는 가정이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불편한 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때에 가정의 본질적 가치를 되새겨보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든,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고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든
상관없이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해주는 관계는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이러한 조건 없는 사랑의 관계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잘 드러내 줍니다.
가정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를 경험하는 장이자 세상의 작은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정이 보여 준 성가정의 참 의미를 깊고 넓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족 모두가 세례를 받고 주일미사에 충실히 참여한다고 해서 성가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녀, 배우자, 부모를 대할 때 자신의 바람과 기대를 투영하는 대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야말로
성가정을 이루는 기초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가정을 이루지 못한 이들, 혹은 가정에서 배제된 이들에게도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저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타국에서 지내다 보니,
자신의 가족처럼 따뜻하게 맞아주고 신경 써주는 현지인들의 배려가 얼마나 큰 위로와 감동을
주는지 체험하곤 합니다.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 초대되어 베풀어지는 따뜻한 식사 한 끼는, 지치고 경직된 마음을 모두
녹여주고 충만한 마음으로 일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곤 했습니다.
언어와 문화, 생김새가 다름에도 얼마든지 한 가족이 될 수 있음을 직접 느끼는 체험이었습니다.
이렇게 기꺼이 이웃에게 가족이 되어줄 수 있는 열린 성가정은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 곳곳에 전해주는 복음 선포의 출발점이 됩니다.
성가정 축일과 가정 성화 주간을 맞아 여러분의 모든 가정이 주님의 충만한 축복 속에서,
하느님을 중심에 모시는 가정, 다른 이들에게도 손을 내밀어주는 열린 가정이 되기를 빕니다.
광주대교구 김의정 바오로 신부
2024년 1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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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덕 베드로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집회서 3,2-6.12-14 콜로새 3,12-21 루카 2,41-52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머니 마리아는 미혼모였습니다. 양아버지였던 요셉과 혼인한 뒤, 당시 임금이 아이를
죽이려 하자 이를 피하여 이집트로 갔다가 나자렛으로 돌아오는 떠돌이 생활을 합니다.
아들 예수는 성인이 되어서도 일은커녕 어부들과 떠돌아다니다가 어느 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우리가 성가정이라고 부르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가정은, 실상 행복한 가정이나
기쁨이 흘러넘치는 가정, 또는 자녀들이 성공해서 부모에게 자랑거리가 되는
가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가정을 본받으려 합니다. 성가정의 중심에 하느님께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믿음’(루카 1,38 참조)을 가지셨고,
요셉 성인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마태 1,24; 2,13-15.19-23 참조)으로 살았으며,
예수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필리 2,8)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부모에게도 순종하셨고, 성모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이해하기 어려우실
때조차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습니다(루카 2,51 참조).
오늘날 많은 가정이 사랑을 잃고 가족들은 외로워합니다. 가정이 하느님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순종, 마음속에 간직함,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기도.
이것이 가정이 성화되는 길이고, 외로움과 서로에 대한 무관심에서 빠져 나오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2,51). 아멘.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
매일미사 2024년 12월 29일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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