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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조지 에드워드 포먼 George Edward Foreman |
출생 | 1949년 1월 10일 (75세) |
미국 텍사스 주 마셜 | |
국적 | 미국 |
신체 | 키 191cm[1] / 체중 118kg / 리치 199cm |
전적 | 76승 (68KO)[4]5패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금메달 |
체급 | 헤비급 |
별명 | Big |
링크 |
3.1. 초창기3.2. 리즈시절: 선샤인 쇼다운(Sunshine Showdown
3.4. 은퇴하고 목사가 되다
4. 늦은 나이에 복귀
미국의 전설적인 권투 선수, 사업가, 개신교 목사.
현역 시절, 엄청난 신체능력을 자랑한 헤비급 복서로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며,
프로로 전향한 뒤 통산 76승 5패 68KO, WBC, WBA, IBF 통합 세계 챔피언을 두 번이나 차지하고
은퇴한 뒤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차 은퇴 때 심장마비를 겪긴 했지만, 복싱 커리어 내내 큰 부상으로 경기를 오래 쉰 적도 거의 없고,
10년 동안 복싱을 쉬다가 돌아온 40대에도 120kg에 육박하는 몸으로 전성기 못지않은 위력적인 펀치를 발휘,
상대 복서들을 눕히며 챔피언에 또다시 등극하고 은퇴했다.
게다가 은퇴한 후 현재까지도 후유증 그런 거 없이 건강하다.
2. 어린 시절
어머니는 전남편 포먼과 별거하는 사이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져 포먼을 임신해서 출산했다.
그러므로 포먼이라는 성은 어머니의 남편의 성이고 친부의 성은 아니다.
몇몇 복서들처럼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세월을 보냈고 어린 시절을 문제아로 보냈다.
제대로 3끼를 먹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빈곤했다.
포먼은 집안사정이 가난하고 휴스턴에서도 가장 거칠고 위험한 지역에서 자라난 탓에
각종 폭행, 범죄 등을 서슴치 않는 양아치가 되었다.
그는 다니던 학교도 자퇴하고 시간을 허비하며 살았는데, 17세가 되던 해 포먼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도둑질을 하고 경찰에게 며칠을 쫓겨다니게 된다.
빈집의 찬장 옆에 웅크려 숨고, 온몸에 진흙을 발라가며 숨고, 어렵게 돌아온 자신의 집에서 또 숨는 등
어마어마한 고생을 하게 된 포먼은 "내가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는 거지?
내 인생을 바꾸고 싶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던 중 당시 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의 서민 교육정책인 직업학교 광고가 TV에 나왔는데
미식축구 선수 짐 브라운의 훈련 광고를 보게 되었는데,
그 광고에서 나오는 대사는 "당신의 삶을 바꿀 기회입니다."였고 포먼은 그 광고를 본 즉시 직업학교에 지원했다.
직업학교를 다니면 집을 떠나야 했기에 어머니도 포먼도 조금 고민했지만,
나쁜 패거리들과 어울리지 않아도 됐기에 어머니가 사인을 해주었다고 한다.
제대로 글과 공부를 배우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하면서 여러 고민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이 직업학교에서도 특유의 거친 문제아 기질은 남아 있어서 툭하면 시비에 휘말렸다.
그러자 친구 중 한 명이 "조지, 니가 그렇게 터프하다면 복싱을 해보는 게 어떻니?"라고 말하며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다.
원래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한 데다 힘이 장사였고,
191cm인 남다른 신체조건 때문에 미식축구 선수도 고려했으나 최종적으로 복싱 선수가 되었다.
아마추어로 시작하여 총 전적 22승 4패로,
만 19세의 나이에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통상적인 아마추어 복서들은 경기 일정이 굉장히 빡빡한 탓에 체력도 비축할 겸 정교한 유효타로 포인트를 쌓는 경우가 많은데, 포먼은 그냥 프로 복서들과 다를 바 없이 KO를 노리는 특유의 붕붕 펀치를 휘두르며 올림픽 금메달까지 수집했다.
그가 어마어마한 피지컬을 타고난 데다 복싱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기술적인 정교함까지 완성한 천재형 복서였음이 세상에 알려진 순간이었다.
3. 초기 프로 경력 초창기
1969년 프로에 데뷔하였고, 그 다음부터 무패를 자랑하였다.
이렇게 한동안 계속 무패 행진을 계속했고 대부분의 승리를 KO로 장식하여,
1972년까지 32전 32승 29 KO라는 사기적인 실력을 보여주었고, 그 KO도 모두 3회 이내로 장식하는 무시무시한 복서였다.
3.2. 리즈시절: 선샤인 쇼다운(Sunshine Showdown)
당시 헤비급에는 전설적인 조 프레이저와 무하마드 알리가 활동하고 있었고,
프레이저는 당시 WBA, WBC 통합 챔피언이었다.
프레이저는 아무도 못 이긴다는 무하마드 알리를 판정으로 이겼고, 당시 무패(29전 29승)를 자랑하고 있었다.
포먼의 신체조건이 월등히 우세하였으나, 대부분 프레이저의 승리를 점쳤다.
포먼과 프레이저의 대결을 선샤인 쇼다운이라고 하는데, 1973년 1월 22일 자메이카에서 열렸다.
포먼은 프레이저를 시작부터 무지막지하게 두들겨서 1회에 3번, 2회에 3번의 다운을 빼앗았고,
프레이저의 상태를 본 주심은 경기를 중지시키고 TKO를 선언하였다.
포먼은 챔피언이 되었고, 첫 번째 방어전에서 호세 로만을 1회 2분 만에 KO로 이기기도 했다.
이는 마이크 타이슨 때까지 깨지지 않는 기록이었다.
두 번째 상대는 전해에 무하마드 알리와 1승 1패의 호각을 이뤘던 켄 노턴이었다.
이 방어전에서도 포먼은 2회 KO로 이겼다. 이때까지 전적은 40전 40승 37KO(92.5%).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의 대결은 수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복싱 역사상 최고의 경기라 불리는 세기의 대결이다.
1974년 10월 30일 자이르에서 열린 이 대결은 The Rumble in the Jungle(정글의 대소동)이라고 불린다.
이때 포먼에게 불운이 닥쳤는데, 훈련하다가 눈 위가 찢어진 것이었다.
이것 때문에 경기를 한 달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부상 때문에 훈련량이 부족해졌다.
다시 상처가 날까봐 스파링을 중지했기 때문이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알리는 예상과는 달리 맹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포먼은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고, 2회부터는 포먼이 공세를 취했다.
그래서 알리는 빠른 스피드로 파워풀하지만 느린 포먼의 펀치를 피하는 전법을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링 로프의 반동을 이용한 일명 rope-a-dope 수비와 지능적인 클린치로 포먼의 포화를 피해갔다.
그리하여 포먼은 알리에게 특유의 살인 펀치를 제대로 맞출 수가 없었고,
이렇게 연장전이 되자 점점 피로해지기 시작했다.
포먼은 대부분 3회 이내에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이런 지구전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포먼이 힘이 빠지자 알리는 맹공격을 하다가 8회 포먼에게 결정타를 날려 KO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것은 포먼의 첫 번째 패배가 되었다.
이후 설욕전을 바랐으나 기회가 오지 않았고, 아예 알리의 전기 영화 촬영장에 난입해서 육두문자를 날리고,
자신이 건재하다는 걸 알리기 위해 하루에 프로 경력이 있는 복서 5명과 3라운드 경기를 가지는 등 기행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떻게 회복해서 1977년 1월 22일에 페드로 아고스토와 경기를 가졌고
그 경기에서 이긴 후 2달 만인 그해 3월 17일에 다시 지미 영과 맞붙지만,
포먼이 방심한 건지 너무 쉽게 펀치를 허용하는 등 좋지 않은 퍼포먼스를 보이며 12라운드 경기 후 판정패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경기 후 탈의실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거의 죽을 뻔한 경험을 하였는데, 이것이 포먼의 인생을 크게 바꾼다.
무하마드 알리를 다룬 2001년작 영화 <알리(Ali)>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이 조지 포먼과 알리의 대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3.4. 은퇴하고 목사가 되었다
이 심장마비를 일으켰을 때 포먼은 가사 상태에서
임사 체험을 하고 기적적으로 수술이 성공해서 살아남은 뒤로는 매우 열렬한 개신교 신자가 된다.
그의 간증에 따르면,
그때 저승사자에게 붙들려 지옥으로 끌려가던 중 하나님에게 자신을 살려줄 것을 애걸하였더니
하나님이 나타나서 그를 구해줬다는 것.
그의 이러한 신앙 체험은 지극히 무뚝뚝하던 그의 성격을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매우 활달하고 유머러스하게 바꿔 버린다.
그 전까지 종교와는 거리가 멀었던 포먼은 이때부터 열심한 개신교 신앙활동을 하다 전도사가 되었다.
그리고 전도사에 그치지 않고 목사 안수까지 받으며 여러 지역에서 목회 활동을 하는 한편,
전국적인 크리스토교 관련 방송에 나와서 자주 간증을 하기도 했다.
포먼은 그동안 모은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전도 활동과 청소년 센터 건립 등
신앙활동에 모조리 다 내놓았으며 거리에 버려져 자연스럽게 불량배가 되고 갱단에 들어가기가 좋은 환경에 놓인 청소년들을 보살피는 일을 했다. 그런데 결국 그런 활동을 하다가 변호사가 가장 비참한 복서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할 정도로 거의 파산 직전에 이르렀고
그를 계기로 자선 활동에 필요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현역 복귀를 결심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전성기를 진작에 지나버린 38세였다.
4. 늦은 나이에 복귀
초창기 포먼의 외모와 복싱계 내에서의 이미지는 아무런 캐릭터성도 없는
스트리트 파이터 1의 미국 스테이지 복서 마이크, 또는 록키 3에 나온 클러버 랭과 비슷하다.
대중적인 인지도는 상당하지만 강타자라는 것 이외에는 개성이 다소 부족한 선수.
반면 복귀 후 포먼은 대머리에 약간 배나온 겉으로만 보면 우스꽝스러운 모습에다, 전까지 무표정과 달리 항상 웃는 표정이라 이는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와 같은 느낌이 생겨 복귀 전과는 확연히 다른 링 캐릭터를 지니게 되었다.
1987년 복귀한 그는 당시 무적의 챔피언인 마이크 타이슨과 상대하기를 바랐으나, 타이틀 매치를 위한 지명전을 위해서는 승수를 쌓아야 하는 것이 복싱계의 룰이라서 처음에는 잔챙이 복서들과 대결을 하여 승수를 쌓았다.
하지만 다른 인터뷰 영상에 의하면 복서로 활동할 나이가 아닌지라 대성하지 못할 거라고 프로모터들이 생각했기에 초기에 그를 매치업하지 않았었다고 한다(언론도 초기엔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일부 프로모터들이 젊은 시절 막나가던 포먼을 싫어했었기 때문이기도 한데, 실제로 아무리 한물간 복귀 선수라도 한시대를 풍미한 전 챔프가 몇몇 큰 선수와 다수의 작은 선수들을 상대로 20전 연속 전승을 달릴 동안 제대로 된 프로모터도 흥행작업도 붙이지 않았다는 건 비정상이다. 실제로 당시 힘있던 프로모터 밥 애런은 포먼의 전성기를 직접 겪은 세대이고 포먼에 대해 안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대전을 추천하지 않았으며, 참다 못한 포먼이 직접 찾아가서 과거에 대해 반성하고 부탁을 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메치업을 잡을 수 있었다. 복싱이든 MMA든 격투기 무대는 올림픽이 아닌 사기업들이 주선하는 흥행쇼이므로 발생하는 뒷사정이다.
포먼은 10년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원래부터 뛰어났던 피지컬과 70년대 레전드들과 치고받은 가락만으로도 젊은 잔챙이들을 상대로 또다시 연승행진을 기록하였다. 처음에는 코웃음치던 전문가들도 포먼의 연승이 계속되자 다시 주목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젊었을 때 무표정했고, 대중을 기피하는 성격이 전도사로 일하는 동안 180도로 변화, 대중친화적인 성격으로 바뀌어 거침없는 도전정신과 친근한 표정으로 호감을 주는 인물이 되었다.
이 이미지 변화 덕에 많은 CF에 출연했고 상당한 돈을 모았다.
이 과정에서 상대한 복서들은 세계 타이틀 수준과는 거리가 있었고 각국 챔피언 출신이나 대륙 챔피언 출신, WBF 등 마이너 기구 챔피언 출신 정도였지만, 철저히 무명 복서들하고만 경기를 가진 것은 아니고, WBC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출신의 J. B. 윌리엄슨이라든지, 백인의 희망이라 불리던 강타자 제리 쿠니[16] 등 일부 유명 선수들도 KO로 압살해버리는 등 전설의 복서다운 실력을 보여주었으며, 복귀 후 타이틀 도전 직전까지 20회가 넘게 가진 경기를 전승한 것도 모자라서 판정승 1회, 기권승 1회를 빼면 그의 전성기 시절과 비슷하게 모조리 KO승이다.
재미있게도, 복귀 전 젊은 시절과 비교해서 캐릭터가 변화하면서 경기 스타일도 조금 변했다. 물론 힘과 체격을 바탕으로 일격필살로 상대를 요단강 건너게 하는 것은 동일했으나, 경험과 여유가 생기면서 라운드 운영을 잘 하게 됐고,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상대에게도 무자비하게 확인사살 펀치를 날리던 젊은 시절과는 달리 상대방이 그로기 상태에 빠지면 더 때리지 않고 자비롭게 조용히 코너로 물러서는 신사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더 인기를 끌었다. 물론 이게 더 무서워 보인다는 의견도 있었다.
아래 영상은 1990년 1월 15일에 열린 제리 쿠니와의 경기. 당시 조지 포먼은 41세, 제리 쿠니는 33세였으며 쿠니는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해버렸다. 어딘지 조급해 보이는 쿠니에 비해, 경쾌한 풋워크는 없지만 웬만한 공격은 막거나 흘려버리며 여유 있게 강펀치로 대미지를 누적시키는 포먼을 볼 수 있다. 뚜벅뚜벅 걸어오다가 어퍼컷과 스트레이트 연속기로 쿠니를 컨버스에 처박아버리는 마지막 KO 장면은 공포심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날아가는 마우스피스만 봐도 저 펀치가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아래는 마이크 제이미슨과의 경기 장면 중 하나. 더킹으로 피했음에도 순식간에 반대쪽 주먹으로 어퍼를 날리는 노련함을 엿볼수 있으며, 그냥 한 대 툭 친 것으로 보이는데도 몸을 가누지 못하는 재미슨과 저 멀리 날아가는 마우스피스가 킬포인트.[ 이때 포먼은 자애롭게도 펀치를 멈추고 마우스 프로텍터를 다시 끼울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이런 뛰어난 연승 행진을 벌였는데도 타이틀전을 갖기까지 뚜렷한 프로모션을 받지 못하고 20회가 넘는 경기를 가지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는 점이 당시 그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아쉬울 따름이였다.
4.2. 챔피언 재등극
포먼은 계속 승리를 거듭하여 타이틀 도전권을 땄고, 1991년 만 42세의 나이로 27세의 헤비급 챔피언 에반더 홀리필드와 타이틀 매치를 벌였다. 물리적으로는 포먼이 나이 때문에 이기기 힘든 경기였다. 그럼에도 12라운드까지 가는 저력을 보여주었고, 아깝게 판정패했다.
홀리필드전에서는 확실히 잘 싸우기는 했지만 유효타 수가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나고 홀리필드의 지속적인 교묘한 반칙을 눈감아주는 편파판정 등 이기기는 어려운 경기였다. 심판 전원일치 판정패.
그래도 홀리필드 전에서 여전한 실력을 증명했기 때문에, 각종 방송활동(복싱 해설가, TV 쇼, 시트콤, 광고 촬영) 제안이 들어왔고 선수 생활과 겸업하면서 계속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세계 타이틀 도전 기회를 얻어 WBO 챔피언이던 토미 모리슨과 경기를 가졌지만 또다시 판정패를 당했다. 선수생활과 방송 활동을 겸업하면서 포먼의 준비가 부족했고, 모리슨의 치고 빠지는 전략이 제대로 통했기 때문.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포먼이 복싱 커리어를 마무리 지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후엔 방송활동을 대폭 줄이고 훈련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결국 1994년 45세의 나이로, 에반더 홀리필드를 꺾고 당시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던 마이클 무어러를 상대로 헤비급 챔피언이 될 사실상의 마지막 기회를 얻게 되었다.
여기서 포먼의 택한 전략은 오로지 KO를 노리는 것이었다. 9라운드까지 마이클 무어러에게 수많은 유효타를 맞으며 점수상으로는 밀리고 있었던 상황에서, 무어러가 승리를 확신했던지 좀 더 공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라운드에서 그 동안 잘 보여주지 않았던 오른쪽 스트레이트를 적중시키기 위해 왼쪽 훅을 대여섯번 정도 날려 무어러의 움직임을 제약하고, 기어이 오른쪽 스트레이트를 적중시키면서 무어러를 KO로 제압한다.[21] 젊은 시절의 조지 포먼보다 경기 운영 면에서 크게 노련해졌음이 드러난 경기. 여담으로 무어러가 도대체 왜 저런 가벼운 펀치에 대짜로 뻗어버린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을텐데, 다른 각도에서 슬로우 모션으로 보면 포먼이 툭툭 때린 원 투가 꽂힐 때마다 다른 선수들의 풀스윙 훅이 꽂힌 것마냥 무어러의 머리 전체가 휙휙 돌아간다. 45세라도 포먼의 파워는 무시무시했던 것이다. 게다가 무어러는 턱이 약한 편이었는데 이것이 치명적이었다.
사실 경기 내용, 점수 면에선 무어러가 크게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무어러가 7라운드 들어서면서부터 전략을 바꾸어 포먼을 KO시킬 작정으로 압박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실제로 라이트를 연속으로 두 번을 제대로 맞히기도 했고,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은 포먼의 사기적인 맷집. 홀리필드도 '무어러가 포먼을 만만히 본 거지, 직전에 포먼이랑 붙었던 나도 17번의 펀치를 맞혔지만 그는 멀쩡히 서 있었어.' 라고 명백한 무어러의 실수를 지적했다. 10라운드 시작 직전 휴식 타임에서 무어러의 세컨 테디 애틀러스가 '포먼의 앞에 얼쩡거리지 말고 제발 움직여라, 포먼이 잽 뒤에 한 방을 숨기고 있으니 위험하다' 라고 갈구듯이 조언을 했지만 왠지 무어러는 이를 듣지 않았다.
결국 운명의 10라운드에 포먼의 레프트훅 헛방 작전에 말려든 무어러는 그가 내지른 원투에 맞아 순간 반응속도를 잃어버렸고, 곧바로 다시 들어온 원투에 제대로 턱이 돌아가 나가떨어지고 만다.
이렇게 조지 포먼은 IBF, WBA 헤비급 챔피언을 따냈다. 이전까지만 해도 무어러는 무패의 복서였다. 그리고 이 때 포먼이 입은 트렁크는 바로 20년 전 알리와 싸울 때 입었던 것이었다.
4.3. 재은퇴
포먼은 다시 마이크 타이슨과의 대결을 원했으나, 성사되지 않았고, 토니 터커와의 방어전과 IBF 1차 방어전 상대였던 액설 슐츠와의 재대결을 포기하면서 WBA, IBF 타이틀을 반납한다. 이후 IBA, WBU 등의 마이너 타이틀을 지키며 크로퍼드 그림즐리, 루 사바레세 등 젊은 선수들을 꺾고, 1997년 섀넌 브릭스[24]와 대결하였으나, 12라운드까지 가는 끝에 판정패했다. 이 판정에 대해서 여러가지 말이 많았으나, 포먼은 이 경기를 끝으로 다시 은퇴하였다. 당시 나이는 48세.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소 증명했다. 1999년에 다시 복귀한다는 떡밥을 던지며 80년대 초반의 강펀처였던 래리 홈즈와 대결을 추진하였으나,
결국 대전료 차이로 무산되었다.
5. 은퇴 후
이후 요리기구 및 주방용품을 사업을 하던 러셀 홉스 사에 고용되어서 그의 이름이 붙은 브랜드가 나왔고,[26] 노익장과 상술한 개신교도가 된 이후의 행동들과 바뀐 성격으로 인하여 이미지가 굉장히 좋아졌기 때문에 대중들의 인기를 얻어 매우 성공했다. 특히 이 요리 기구들이 기름기를 쪽 빼주어 건강에 좋다는 홍보가 매우 효과가 좋았다. 실제로 그와 동시대의 전설적인 복서인 무하마드 알리는 펀치 드렁크 증세와 파킨슨병으로, 조 프레이저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음을 상기한다면, 그는 멀쩡한데다가 은퇴 후 돈도 복서 때보다 더 많이 벌었으니, 그야말로 복 받은 노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두 번째 패배를 안겨 준 지미 영도 펀치 드렁크+약물중독으로 고생하다 향년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다양하게 얻은 명예와 이미지 덕분에 이런 사업들도 할 수 있었고, 여기에 포먼 본인도 사업가적인 면모가 꽤 있어서
복서 시절에 얻은 재산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재산이 불어났다.
현재까지도 조지 포먼은 복서 재산 통계에서 넘사벽 복싱재벌 플로이드 메이웨더 바로 아래 2위로 거의 항상 꼽힌다.
거기다가 이미지까지 좋으니 정말 모든 걸 갖추고 있다.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이미지를 남겼기 때문에 성공학 강사로 뛰기도 하고, TV에도 자주 나온다.
자식들을 12명이나 키웠다고 하는데, 한 여자가 모두 낳은 게 아니라
입양한 자식과 배다른 자식들을 포함한 수라고.
재미있는 점은 아들들의 이름을 모두 조지로 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5명의 아들들이 순서대로 조지 주니어부터 조지 6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딸들의 이름도 조지로 하고 싶었지만 그건 좀 심한 것 같아서(...) 다른 이름으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조지 포먼 3세는 복서로 데뷔해서 16전 16승 15KO라는 좋은 성적을 내고 사실상 은퇴했다.
딸인 프리다 포먼도 미들급 여자 복서로 활동하여 6전 5승 1패 3ko라는 좋은 성적을 내고 은퇴. 조지 포먼은 프리다가 복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계속 은퇴를 권했다고 한다. 프리다는 안타깝게도 2019년 3월 42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때는 무하마드 알리가 자신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사이가 안 좋았으나
2000년대 초반의 인터뷰에서는 같이 행사에도 참여한 적 있다며 "알리에게 유감 없다"고 밝혔다.
NBC에서 제작하는 꽃보다 할배의 미국판 리메이크(2014년 9월 tvN 정식 라이선스)인 "Better Late Than Never"에 출연하게 되었다. 30일간 촬영된 총 6화 분량의 에피소드 중 1개 분량을 촬영하기 위해 한국도 방문했다. 에피소드 내내 적응력이 매우 빠르고 사람 좋은 캐릭터로 나오는데, 윌리엄 샤트너가 위에 나온 조지 포먼 그릴 드립을 치는 게 깨알같다.
자타가 공인하는 자동차광이다. 페라리, 람보르기니 할 것 없이 억소리 나는 슈퍼카의 오너로 유명하다. 하지만 의외로 본인이 가장 아끼는 차는 1977년형 폭스바겐 비틀로, 본인의 첫 차라고 한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했다.
UFC 파이터 데릭 루이스가 포먼에게 복싱을 배웠다고 한다.
더 마스크드 싱어시즌 8에 "파리지옥"이란 가명으로 출연했다.
6. 첫 번째 조지 vs 두 번째 조지
원래 조지 포먼은 대중을 기피하는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사람이었고,
시합에선 비틀거리는 상대도 죽일 듯이 달려들어 두들겨 팰 만큼 냉혹했다.
그러나 두 번째 조지는 한층 여유를 가진 채 농담도 자주 하고 항상 웃고 긍정적인 이야기들을 했으며,
그로기인 상대는 더 때리지 않는 매너를 보여준다.
복서로서도 더욱 발전했다. 첫 번째 조지 시절, 포먼은 강력한 펀치력 덕분에 3라운드보다 길게 가는 시합이 별로 없었다.
때문에 속으로는 거만했지만 링에 올랐을 때 감정적으로 불안했고, 힘으로 상대를 두들겨 패는 것만 생각하는 단순한 복서였다.
무하마드 알리 전에서 알리가 로프에 기대서 도발하자 바디가 비어있음에도 알리의 얼굴에 큰 펀치를 날려 한 방에 눕히려고 들었고, 심지어 펀치의 강약조차 조절하지 않아 자기 체력을 혼자 다 깎아먹고 나이 든 알리보다 먼저 체력이 고갈되었다.
즉 첫 번째 조지는 선택받은 피지컬과 펀치력에 비해 멘탈과 경기 운영력이 약한 것이 분명한 단점이다.
두 번째 조지 시절엔 대부분을 3라운드 내로 끝장내는 건 여전했지만 40세가 넘은 나이에도 운영과 페이스 조절 능력을 향상시켜 12살 어린 챔피언 에반더 홀리필드를 상대로 12라운드 판정까지 끌고 갔고, 15살이나 어린 마이클 무어러를 상대로는 10라운드에서 눕혀 챔피언이 되기까지 했다! 나이가 들었으니 펀치력이나 반응속도, 스태미너는 줄었겠지만애초에 줄어도 괴물의 신체능력이다., 정신적으로 훨씬 안정되고 여유가 생기면서 스태미나 관리능력, 끈기, 시합 운영 측면에서 발전한 게 훨씬 크게 작용했던 것. 무어러전에서는 한방을 노리는 척 크게 레프트훅을 두어 번 날리는 심리전을 걸어 무어러의 회피할 방향을 제약한 다음 침착하게 턱을 계속 때려 K.O를 따냈다. 알리전에서 상대가 열어놓은 바디조차 때릴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경기 운영이 천지 차이 수준으로 발전한 것.
이와 같은 이유로 포먼 스스로 '두 번째 포먼은 두뇌까지 씁니다. 첫 번째 포먼이 틈을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 쓰러뜨릴 겁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두 번째 포먼이 이깁니다.'고 했으며 거의 모든 전문가들도 '한 방만을 노리는 슬러거 일변도에서 각종 올라운드 테크닉을 구사하게 된 두 번째 조지가 이긴다.'고 인정한다. 또 '두 번째 조지가 선샤인 쇼다운에서 알리와 붙었으면 게임은 달라졌을지 모른다'고 평할만큼 두 번째 조지는 복서의 완성도로도 높이 평가받는다.비록 젊을 때보다 순발력이나 체력, 맷집 같은 피지컬적인 면모가 많이 녹슬었어도, 그 녹슨 피지컬이 동시대의 복서들과 견줄정도였으며 거기에 경험이 쌓이고 멘탈이 튼튼해진 조지 포먼은 링 캐릭터에서나 권투에서나 훨씬 나은 복서가 되었다.
스포츠는 피지컬이 깡패라 아무리 멘탈이나 완성도가 다소 늦게 완성된다고 해도 커리어에서 전기 vs 후기를 나누면 전기가 비교적 강하게 평가되는 편이다. 그러나 전기 포먼이 워낙 경기시간이 짧아서 퍼포먼스를 평가할 시간이 적었다는 점과 더불어, 10년간의 공백이 오히려 몸에 휴식을 주어 커리어의 연장에 도움을 주었고 그만큼 자기 상황을 잘 알고 플레이스타일의 변화를 성공적으로 가져간 것이 후기 포먼이 높은 평가를 받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오직 순수하게 펀치를 내지르고 상대 공격에 버티는 능력을 본다면 20대 초반이 40세 당시보다 월등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경기 운영력이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할 수 없기에 후기 포먼이 높이 평가받는 것이다. 피지컬로만 따지면 역대급 괴물이었던 포먼이 전성기가 지난데다 공백도 있던 무하마드 알리에게 지는 것이 말이 안되고, 실제로 포먼은 지고 나서도 납득하기 어렵단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알리는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포먼을 때려눕힐 수 있었다. 즉, 만약 전기 포먼과 후기 포먼이 영혼의 맞다이(...)를 뜬다면 당연히 피지컬에서 앞서는 전기 포먼이 백프로 이기겠지만, 본인이 스스로 밝힌 것처럼 후기 포먼은 신중하게 기다리면서 멧돼지같이 돌진하는 전기 포먼이 지쳐 빈틈을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때려눕힐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분야는 다르지만 같은 운동선수인 숀 마이클스와도 많이 비교된다.
마이클스도 은퇴 중 갱생하여 재데뷔했던 시절이 인성이든 실력이든 더 높게 평가되기도 하는 인물인지라.
7. 파이팅 스타일
급이 다른 펀치력을 지닌, 역대 최강의 슬러거중 한명이다.
복싱 역사상 최고의 하드펀처 중 하나로 헤비급에는 어니 셰이버스, 소니 리스턴, 켄 노턴 등
복싱 역사에 이름을 날린 쟁쟁한 슬러거들이 많지만, 사상 최강을 논할 때 조지 포먼은 반드시 거론된다.
의외로 포먼은 전성기 때 체중이 별로 안 나가는데, 98~100kg 정도로 시합을 치렀다.
하지만 우월한 체구에 맷집까지 사기적인 강골인데다 막강한 근육을 탑재한 슈퍼 하드 펀처라서
그냥 대충 팔힘으로 툭툭 치는 거 같은데 상대가 픽픽 쓰러지고 몸이 붕 뜨며 마우스피스가 날아가는 것을 보면 기가 찰 정도다.
KO 장면 모음 영상을 보면 심지어 상대방이 포먼의 공격을 가드했는데도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다운되는 장면도 있다.
그야말로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거구 괴물 복서인 셈.
무지막지한 덩치에서 나오는 파워와 사정거리가 너무 엄청나서 테크닉 의존도가 매우 낮은 복서라고 착각할 수 있다.
실제로 영상을 보면 얼핏 보기에도 그냥 펀치를 내지르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비록 테크닉이 당대의 복서들과 비교했을 때 섬세하지는 않았어도, 펀치의 정확도와 타점, 회수율 등도 파괴력 못지않게 가공할 수준이었다. 즉, 필요가 없어서 화려한 기교를 쓰지는 않았지만 내지르는 한 방 한 방의 정확도와 정교함만큼은 최상급이었다는 의미.
체구나 파워를 타고난 슬러거들은 많지만 그만의 정교함도 최강 슬러거로 등극한 중요한 요인이다. 사실 내지르는 펀치도 매우 교과서적인 힙드라이브와 체중 이동을 통해 몰아치는 것으로 피지컬 못지않게 기초 역시 탄탄했던 복서.
펀치력만으로는 어니 셰이버스가 포먼 이상이라는 말이 많다.
그러나 셰이버스는 파워는 정말 강하지만 크게 한 방을 노리는 선수라 그 한 방이 들어갈 때 무지막지하지 경기 운영이 뛰어난 선수는 아니다. 또 포먼과 달리 팔을 비교적 크게 휘둘러서 지르는 스타일이라 펀치가 빗나가거나 카운터를 얻어맞는 경우도 많았다. 요컨대 복서로서의 완성도는 물론 전적에서도 둘은 넘사벽 차이가 있다. 셰이버스는 한 번도 챔피언이 된 적이 없다. 다시 말해 파괴력 자체는 셰이버스가 포먼보다 위지만, 시합 운영, 기술, 체력, 맷집 등 다른 부분에서 크게 밀린다. 종합적인 강력함을 따지면 포먼에 미치지 못한다는 소리. 쉽게 야구로 비유하자면 어니 셰이버스는 170KM를 던지지만 체력이 떨어지고 제구가 좋지 않은 투수, 포먼은 165KM를 던지지만 제구와 구종, 체력까지 좋아 완성도가 높은 투수라고 할 수 있다.
포먼의 파워는 선천적으로 타고났지만, 경험과 노력도 뒷받침이 되었다. 그는 복싱 역사에 남을 하드펀처 소니 리스턴의 스파링 파트너였기에 가공할 잽과 숏펀치들을 배웠다. 포먼의 잽에 턱을 맞은 선수들은 고개가 돌아갈 정도였으니 파워도 리스턴과 비슷했다.
그러다 보니 특히 상성으로까지 밀리는 스워머 스타일, 즉 조 프레이저, 마이크 타이슨 같이 맷집이나 스피드, 수비력을 내세워 파고드는 복서들은 아예 상대가 안 됐다.
저 프레이저 전의 임팩트는 실로 대단해서, 20년 가까이 지나서 아직 살아있을 때의 커스 다마토가 마이크 타이슨을 지도할 때 타이슨은 이 포먼 vs 프레이저의 명경기를 평소에도 분석차원에서 즐겨 보았다. 이때 다마토는 "너나 프레이저처럼 짧고 탄탄한 체격의 스워머에게 있어 포먼과 싸우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다. 포먼을 상대할 수 있는 건 키가 크고 리치가 긴, 계속 물러서면서 아웃복싱을 펼칠 수 있는 상대이다."라고 조언해 줬다고 한다.
물론 커스 다마토는 1985년 11월에 죽었고 포먼은 1987년 중반에 복귀했으니, 자신의 제자와 포먼이 싸울 수도 있으리란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타이슨이 제임스 더글러스에게 패배하자 재기전 상대로 포먼이 물망에 올랐다! 당시 타이슨은 네임밸류의 회복이 필요했고 포먼은 타이슨과 싸우고 싶어 안달난 상태였으므로 권투 프로모터인 돈 킹이 매치를 제안했으나, 타이슨은 죽은 코치의 조언이 생각나서인지 포먼과의 매치를 거절했다고 한다.
사실 무자비한 공격력과 우월한 피지컬이 강조되지만, 전성기 당시 경기 운영 능력도 괜찮은 편이다. 프레이저 전에는 체격도 큰 그가 무자비하게 패버리는 것이 눈에 띄지만, 잘 보면 인파이팅을 하려는 프레이저를 주먹으로 치거나 (반칙이 안 될 정도로만) 슬쩍 밀거나 스탭을 밟아서 계속 거리를 어느 정도 두는 걸 알 수 있다. 스워머인 프레이저가 안쪽으로 들어오는 걸 막은 것. 프레이저도 당대 최고의 복서였는데 그렇게까지 속수무책 당한 건 (물론 피지컬과 상성이 절대적이지만) 포먼의 전략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절대 피지컬만 믿고 미련하게 주먹만 휘두르는 파이터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한 방 한 방이 살인적인데 경기운영도 지독히 무자비해서 크로스 암 가드를 올려 상대의 펀치를 막고 워킹 스텝으로 압박하다가 오른손 한방으로 끝내는 패턴을 갖고 있었다. 전성기인 20대에는 가장 무식하게 상대방을 패는 선수라고 알려졌다. 포먼은 선수 시절에는 KO를 바로 앞둔 그로기인 상대도 무지막지하게 패는 잔인함으로 유명했고, 대중을 기피하며 항상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여 인기 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물론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중년의 포먼은 그로기 상태의 상대를 자비롭게 기다려 주는 선수로 변했다.
그는 당대의 라이벌 조 프레이저와는 두 번 싸워 모두 이겼으나,
무하마드 알리에게는 아래 언급된 부상이란 불운과 알리의 기가 막힌 운영에 걸려들어 한 번 패했다. 알리와 재대결을 원했으나, 이후 무명인 지미 영에게 패하자 권투계를 은퇴했다.
후술하겠지만, 이때 급성 심장마비로 사망할 뻔했다.
그 이후에는 죽다 살아나면서 깨달음을 얻었는지 종교에 귀의하여 개신교 목사 안수까지 받아 종교인으로 지내다가,
1980년대 말에 다시 40대 복서로 복귀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프로 복싱이 장난이냐며 그의 도전이 무모하다고 평가했지만,
조지 포먼은 그런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20~30대 팔팔한 젊은 복서들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소 증명했다.
중년 포먼 스타일은 젊을 때와 파이팅 스타일이 다소 달라졌는데, 상대에게 무자비하게 큰 펀치를 계속 휘두르던 과거와 달리 침착하게 잽과 스트레이트를 효율적으로 쓰며 경기 지구력이 상승했다. 순발력과 스피드가 떨어졌지만 특유의 크랩 가드를 함으로써 이를 보완하기도 했다. 비록 콤비네이션 펀치는 젊을 때보다 못하게 됐지만, 20kg 가까이 증량된 몸에서 나온 단발 펀치는 오히려 파워가 배가됐다.
그리고 마침내 45세의 나이에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다시 따내는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다.
오늘날에도 조지 포먼이 유명한 것은 초창기 활동시절 보다는 1차 은퇴후 복귀한 40대 복서 포먼이 활약한 영향이 더 크다.
여담으로 그는 복귀하면서, 또 그후에도 마이크 타이슨과 대결하기를 여러차례 희망했으나,
타이슨이 철창 신세를 지고, 그 외 여러 이유로 결국 이 대결이 성사하지는 못했다.
지금도 "둘이 붙었으면 어땠을까?"라며 많은 복싱팬들이 궁금해하는 부분. 결국 1997년을 끝으로 복싱계를 떠난다.
2차 은퇴 후에는 종교인은 물론 사업가로서 면모를 과시하여 크게 돈을 벌었고, 성공학 강사로도 유명하다. 물론 목회 활동도 계속 했고 방송 출연도 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포먼의 전성기는 헤비급의 전성기로 조지 포먼은 이 시대를 수놓은 전설적인 복서들과 자웅을 겨루던 레전드 복서 중 하나였다. 권투 전문 잡지인 미국의 링 매거진이 선정한 역사상 펀치가 가장 강력한 복서 100명 중 당당히 9위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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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2일 토요일
‘KO 머신’으로 불렸던 미국의 복서 조지 포먼이 7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21일 미 TMZ 등은 유족이 발표한 성명서를 인용해 이날 그가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유족은 “그는 독실한 설교자이자 헌신적인 남편, 사랑하는 아버지, 자랑스러운 증조부였다. 그는 신앙, 겸손, 목적의식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라며
“인도주의자이자 올림픽 선수,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그는 깊은 존경을 받았다”고 했다. 이어 “그는 자신의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었고, 규율과 신념을 지닌 사람이었다.
가족을 위해 자신의 유산을 보호하려 끊임없이 싸웠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넘치는 사랑과 기도에 감사드린다.
축복을 받은 한 남자의 특별한 삶을 기리기 위해,
우리의 사생활을 존중해주기를 부탁드린다”고 덧붙였다.
매체는 “포먼은 두 번 헤비급 챔피언에 오른 인물로,
역대 가장 중요한 복싱 대회에 참가했다”고 전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인 포먼은
1973년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조 프레이저를 물리치고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는 이듬해 자이르에서 무함마드 알리와 맞붙어 권좌를 물려줄 때까지
40연승의 무패 행진을 달렸다.
이 경기에 대해 매체는 “이 경기는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는 복싱 경기 중 하나”라며
“‘정글 속의 난투’라는 별칭이 붙었을 정도”라고 했다.
포먼은 1977년 글러브를 벗고 은퇴를 선언했으며,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신에게 바치고 휴스턴 지역 교회에서 설교했다.
그러던 그는 은퇴 10여 년 만인 1988년 40세의 나이로 링에 복귀했으며,
1994년 45세의 나이로 헤비급 최고령 챔피언으로 등극했다.
포먼은 1997년 76승 5패(68KO)의 전적을 뒤로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김가연 조선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