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철 바오로 신부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1요한 2,12-17 루카 2,36-40
이탈리아로 유학 간 첫 학기에 유독 어려운 과목이 있었습니다.
‘기업 윤리’라는 과목이었는데, 언어도 문제였지만 토론 수업이라 도무지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수업 시간마다 교수님께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번번이 한마디 말도 못하고, 그저 멋쩍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학기가 끝날 때쯤 되자 교수님도 답답하셨는지 이렇게 놀리셨습니다.
“자네는 성탄 방학이 되면 시칠리아섬의 작은 본당으로 봉사하러 갈 것이네.
가서 고해성사도 주고, 성탄 밤 미사 강론을 할 텐데, 신자들 앞에서 떠듬거리며
‘오늘 밤은 성탄입니다.’ 하고 한마디만 하면 신자들이 박수를 치고 난리가 날 것일세.”
‘아니 내 나이가 몇인데, 신부인 나를 다른 학생들 앞에서 놀리다니.’
하는 생각이 들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거리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그날은 영성 지도를 받는 날이었는데, 지도 신부님을 만나자마자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을
큰 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참을 듣고 있던 신부님은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바오로, 이 일로 배운 게 있어?”
“네. 저는 가르치는 사람이 되면 절대로 학생을 놀리지 않겠습니다.”
“그래. 또 배울 게 있어?” 생각을 좀 하다가
“제가 이탈리아 말을 잘 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 언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그래. 또?” “네, 이젠 없습니다.” “그럼, 잊어버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또 흥분하여 “아니 어떻게 잊습니까?
제가 이런 취급을 당하는 게 말이 됩니까?” 하며 씩씩거렸습니다.
제 얼굴을 쳐다보던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바오로, 너 지금 기도할 수 있어?” “아니, 지금 기도가 중요합니까? 그 교수가 저를
놀렸다니까요?” 그러자 그 신부님은 “바오로, 하느님이 중요해? 그 교수가 중요해?
지금 네 마음을 온통 그 교수의 말에 빼앗겼잖아!
하느님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너의 마음을 그 말에 빼앗겨 하느님은 안 계시잖아!
바오로, 단 1초라도 네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세상 것에 빼앗기지 마!”
이 말을 듣는 순간 홍두깨로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날마다 기도와 단식에 전념하고 성전에 나가 하느님을 섬긴 한나처럼,
단 1초라도 하느님이 아닌 세상 것에 우리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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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1요한 2,12-17 루카 2,36-40
아무것도 너를
미드라쉬라는 유대교 문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다윗 왕이 어느 날 보석 세공인을 불러 자신을 위해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라고 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답니다.
"내가 큰 승리를 거둬 환희를 주체하지 못할 때 감정을 다스릴 수 있고. 반대로 절망에 빠졌을 때
다시 힘을 북돋워 줄 수 있는 글귀 하나를 반지에 새겨 넣어라."
보석 세공인은 며칠동안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지만 이런 양극의 상황을 동시에 만족시켜줄
촌철살인의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며칠을 끙끙대던 세공인은 결국 지혜롭다고
소문이 나 있는 왕자 솔로몬을 찾아가서 해답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솔로몬이 세공인에게 알려준 문구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
솔로몬 왕자가 말했답니다.
"왕이 승리에 도취한 순간 그 글귀를 보면 자만심이 금방 가라앉을 것이고,
절망 중에 그 글을 보면 이내 큰 용기를 얻어 항상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오늘 미드라쉬에 나오는 이 얘기를 길게 소개한 이유는 오늘 서간에서 세상 것들과
세상 것들에 대한 욕망은 지나간다고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것들은 본래 지나가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이니 그 욕망도 지나가고
사라질 것이며, 욕망에 따른 근심과 걱정도 지나가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지나가고 사라질 때 우리는 허무감에 빠져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것이 사라질 때 영원하신 하느님이 우리에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구름이 걷혀야 해가 나타나듯 세상 것들과 욕망이 사라져야
영원하신 하느님이 드러나고 하느님 갈망이 생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두 성인의 뛰어난 권고를 마음에 새깁시다.
하나는 성녀 대 데레사의 기도입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다른 하나는 프란치스코의 권고입니다.
"우리는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최고선이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홀로 선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양순하시고
달고 달콤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도 바라지도 말며
다른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하지도 만족하지도 맙시다.“
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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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 바오로 신부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1요한 2,12-17 루카 2,36-40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일생을 하느님께 바친 한 여인을 만납니다.
바로 예언자 한나입니다.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들어오자..."(루카 2,27)
오늘 대목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시메온이 아기와 그 부모를 맞아 하느님을 찬미하여 마리아께 예언을 하지요.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루카 2,38)
마침 그때 한나도 성전에 들어가 아기 예수님을 뵙니다.
그녀가 얼마나 기뻤을지 상상해 봅니다. 그녀야말로 하느님께 일생을 건 여인이니까요.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7).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이후 그녀는 세상에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성전 안, 하느님 앞을 지키며 머무릅니다.
그녀의 단식은 세상의 죄에 대한 보속이고, 그녀의 기도는 우선, 하느님과의 사랑,
그리고 세상을 위한 전구와 중재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가야할 길을 단도직입적으로 제시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1요한 2,15).
여기서 말하는 "세상"을 성과 속의 대립 개념으로 보아서는 곤란합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좋고 아름다우며
그 본성상 선한 하느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지금 서간의 저자가 말하는 "세상"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좋은 본성을 왜곡하고
해치는 악의 힘을 가리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려는 영혼을 유혹하고 무너뜨려 결국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만들 뿐만 아니라 대적하게까지 만드는 어둠의 권세입니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1요한 2,15).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무도 한 번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지요.
선과 악, 하느님과 베엘제불, 빛과 어둠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사랑"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고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복음 장면으로 돌아갑니다.
그날 그 축복 넘치는 장소 안에 있던 인물 중, "세상"에 한눈이 팔린 이가 있었던가요?
시메온과 한나, 요셉과 마리아, 네 명의 공동 주인공들은 오직 한 분 아기 예수님께
온전히 몰입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 여기에 오기까지의 그들의 삶이
오직 살아계신 하느님을 향했었기에 이 엄청난 축복의 증인이 된 것이지요.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육의 욕망, 눈의 욕망,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세상 것입니다.
거기에 몰두하며 살아가는 이에게는 메시아가 눈 앞에 나타나셔도 아무 관심
없을 것이니 그저 놓치고 말 것이고, 어쩌면 놓쳤다는 사실조차 모를 겁니다.
오늘 성전에 머물러 하느님을 섬기던 노인과 예수님의 만남은
그들이 바쳐온 사랑과 섬김에 대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미 주님 곁에서 영원을 살던 그들의 행복은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곳마다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갈수록 한나의 삶에 끌립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삶!"
멋지지 않나요?
하느님 현존 안에 머무르며 세상의 죄를 보속하고, 하느님과 사랑을 나누며,
세상의 아픔을 그분의 발치께로 보듬어 올리는 기도를 밤낮없이 지속하는 삶.
깨어 있어도 잠을 잘 때에도 오로지 하느님께만 몰두하니 주님께서는 구원의 현장을
그의 앞에서 감추실 수 없을 겁니다. 신비는 그에게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삶의 형태로 살아가건, 어떤 처지이건 영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출발은 우리 사랑의 저울 추를 세상 쪽에서 하느님 쪽으로 조금씩 옮기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Shall we start?
시작할가요?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