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카오스모스(대지와 영토)
하늘은 길고 땅은 영원하다
하늘과 땅이 길고 영원한 것은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므로
능히 오래 사는 것이다
지식인은 몸을 뒤에 둠으로
몸이 앞서게 되고
그 몸의 외연을 사유함으로
몸이 존재하게 된다
이는 결국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능히 사사로움을 이룬다
들뢰즈는 가타리와 함께 쓴 그들의 마지막 공저인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 사유하는 근대적 사유방법을 폐기하고 노마돌로지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대지와 영토의 관계”로 사유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노마드의 몸이 기관들 없는 몸인 동시에 기관들로 가득찬 몸인 것과 마찬가지로 노마드가 살고 있는 땅도 대지인 동시에 영토이다. 따라서 들뢰즈가 말하는 대지는 지구의 기관들 없는 몸이고, 영토는 지구의 기관들로 가득찬 몸이다. 들뢰즈가 제시하는 대지와 영토의 관계로 사유할 때, 우리는 비로소 나 자신을 비롯한 삶의 터전을 객관적으로 사유하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대지의 “몸은 풍경을 반복한다. 몸은 상호형성의 원천이며 서로 서로를 창조한다. 우리의 몸은 이 초록의 지구에서 이전에는 결코 경험하지 못한 변화들에 접하면서 대지의 순환하고 있는 몸, 무시무시한 민중의 이동, 재빠른 세기의 전환으로 각인되어 있다.” 이처럼 대지와 영토의 관계로 사유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영토들과 그 영토들로부터 탈 영토화하는 대지의 순환하고 있는 몸을 동시에 사유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 사유하는 것은 플라톤을 부활시킨 데카르트 이후의 서구적 근대의 국가철학과 공자를 부활시킨 주자 이후의 동아시아적 유교의 국가철학이다.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상호 이동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사유의 주체와 객체를 나, 가족, 사회, 국가, 인간 등등의 영토로 상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르씨시스트적인 사유의 방법은 서구의 근대적 국가철학과 동아시아의 유교적 국가철학의 핵심이다. 따라서 서구의 이질적인 문명이 도래하면서 중국과 조선에서 이루어진 근대화 과정은 과거 500여년 동안에 만들어진 나, 가족, 사회, 국가, 그리고 인간 중심적인 유교적 국가철학의 사유방법은 깨어지기 시작하면서 전통적인 도가와 불가의 노마돌로지적인 사유의 방법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동학혁명으로 절정에 오른 동학의 등장이다.
그러나 근대 이전의 일본은 당시의 중국이나 조선과는 달리 유교의 국가철학에 의하여 완전히 영토화되지 않았다. 일본에 유교의 국가철학이 전래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 퇴계 이황의 저서들이 일본에 밀반출되면서 일어난 일이다. 그 당시까지 일본은 도가의 지식과 불가의 지식이 결합된 노마돌로지의 사유가 지식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의 근대화는 중국과 조선의 상황과는 달리 서구의 근대 국가철학과 유교적 국가철학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서구적 근대화에 힘입은 중국과 조선의 새로운 노마돌로지적 사유의 돌파구는 서구 근대 국가철학과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들어간 유교적 국가철학이 결합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하여 차단되어 버린다. 오늘날, 중국이나 북한과는 달리 우리 남한 사회에서 유교적 국가철학이 부활하고 있는 것은 서구 근대 국가철학의 모델로 작용하고 있는 미국이나 동아시아의 유교적 국가철학의 새로운 토대를 세운 일본의 근대를 모델로 하는 근대적인 사회와 국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3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가장 영토화되지 않았던 일본이 가장 먼저 재 영토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중국 중심의 유교적 국가철학의 영토로부터 탈 영토화하여 대지로 나아가는 시간적 량이 중국과 조선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짧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지와 영토의 관계에서 바라본 동아시아의 근대적 풍경은 오늘날 전지구적 탈근대의 풍경으로 반복되고 있다.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도가적 지식과 불가적 지식의 노마돌로지에 의하여 중국과 조선의 유교적 국가철학이 깨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서구의 근대 국가철학은 전지구적인 후기 근대의 혼돈의 상황 속에서 지리적 변방에 자리잡고 있는 노마돌로지의 사유에 의하여 깨어지기 시작하고 있다. 서구적 근대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확산 속에서 지금까지 사유의 주체로 작용했던 나, 가족, 사회, 국가, 그리고 인간 중심적인 사유의 방법이 궁극적으로 서구, 백인, 남성 중심주의라는 철학적 사유의 파시즘이라는 것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저항적 사유로 등장하는 것이 탈 식민주의, 페미니즘, 그리고 생태주의이다. 서구의 근대 국가철학이 지니고 있는 지배와 식민의 주체인 서구, 남성, 인간의 측면에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피지배자와 피식민자의 입장인 비 서구와 여성, 그리고 자연 생태계라는 타자의 측면에서 사유하자는 것이 탈 식민주의, 페미니즘, 그리고 생태주의의 본연적 사유방식이다.
그러나 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남아메리카의 몇몇 나라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신생 독립국들은 비록 서구라는 다른 종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났지만 동일한 종족의 더 강력한 폭력의 지배체제가 강화되었고, 미국이나 유럽의 페미니즘은 인디안, 흑인, 그리고 아시아 여성들로부터 백인 여성들만을 위한 페미니즘이라고 비난받고 있다. 그리고 근대 산업 자본주의화 과정 속에서 인간 중심주의의 이익과 자본의 사유로 이루어진 자연 생태계의 파괴는 자연 생태계의 측면에서 사유하는 새로운 생태계의 복원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산업 부국이나 자본을 향유하고 있는 자들의 생활환경 개선이라는 확대된 인간중심주의의 환경논리로만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근대 국가철학의 대안으로 등장한 탈 식민주의, 페미니즘, 그리고 생태주의가 궁극적으로 주체와 객체의 관계에서 사유하는 근대 국가철학의 사유방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지와 영토의 관계로 사유한다는 것은 나, 가족, 사회, 국가, 그리고 우주라는 절대적 주체의 유기체적 존재를 긍정하는 코스모스라는 본질주의적 사유방식도 아니고, 이러한 절대적 주체의 유기체적 존재를 부정하는 카오스(혼돈, 혹은 암흑)라는 비 본질주의적 사유방식도 아니다. 대지와 영토의 관계로 사유한다는 것은 본질주의와 비 본질주의라는 이분법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본질주의와 비 본질주의가 대지와 영토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는, 즉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혼재되어 있는 카오스모스의 생성과정을 사유하는 방식이다. 대지란 모든 물질과 마찬가지로 단지 생산하려는 욕망을 지닌 수많은 다양체들이 다양한 관게의 선분으로 뒤엉켜 있는, 그래서 생산하는 욕망이 또 다른 생산하는 욕망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생산적 관계 이외의 어떠한 영토의 성격으로도 규정되지 않은 기관들 없는 몸이다. 영토란 단지 기관들 없는 몸의 표피를 에워싸고 있는 가죽의 덮개일 뿐이다.
산이나 계곡에 있는 돌이나 나무의 몸처럼 유아의 어린이나 소녀의 몸은 대지와 같은 기관들 없는 몸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원에 있는 돌이나 나무,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남성이나 여성의 영토화된 대지의 이미지만을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물질적 존재는 대지와 영토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2001년 9월 11일 폭파된 뉴욕 맨하튼의 WTC 빌딩의 영토처럼 모든 가족, 사회, 국가의 영토는 어느 순간에 대지로 되돌아간다. 따라서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모든 영토는 순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영원한 것은 기관들 없는 몸인 대지이다. 나, 가족, 사회, 국가, 그리고 우주는 순간적으로 우리의 눈과 인식의 영역에 포착된 영토라는 이미지일 뿐이다. 따라서 대지와 영토의 관계를 사유한다는 것은 근원적으로 대지를 사유하는 것이고, 현재의 영토로부터 탈 영토화하여 대지로 나아가서 또 다른 영토로 재 영토화 되는 생명의 순환과정, 즉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다.
대지는 하늘과 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하늘이 수컷이고 땅이 암컷이라고 하는 이유는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대지 또한 수컷과 암컷의 관계로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지를 구성하고 있는 “하늘은 길고 땅은 영원하다.” 즉, 대지의 속성은 순간 순간 형성되는 영토를 지속하고 연장하고자 하는 하늘의 영토성과 그러한 하늘이 탈 영토화하여 또 다른 영토로 재 영토화하고자 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포용하는 땅이 지니고 있는 기관들 없는 몸의 생명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하늘과 땅이 길고 영원한 것은/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므로/ 능히 오래 사는 것이다”처럼 하늘과 땅으로 구성된 대지를 땅이라는 기관들 없는 몸의 생명성으로 인식하는 것은 순간 순간의 영토로 구성되는 하늘이라는 수컷의 영토성으로부터 탈 영토화하는 것이 대지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늘과 땅이 서로 “능히 사는 것”은 영토화 된 기관들로 가득 찬 몸 스스로 사는 것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서로의 상호관계에 의하여 생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초원이나 사막의 신기루가 보여주는 것처럼 궁극적으로 하늘과 땅의 구분은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과 땅으로 구분하는 것은 대지의 생명성이 잉태되는 관계를 사유하기 위하여 억지로 남성성과 여성성의 이름을 붙인 것일 뿐이다.
그러나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모든 생명의 물체는 끊임없이 수컷인 하늘을 닮아 자신이 순간 순간 지니고 있는 생명의 영토를 영원히 지속시키고자 한다. 나무는 나무이고자 하고, 바람은 바람이고자 하며, 남성은 남성이고자 하고, 여성은 여성이고자 한다. 따라서 자연의 생태계 속에서 생명의 영토를 지속시켜, 마침내 죽어가고 있는 모든 물체를 탈 영토화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재 영토화하는 과정을 돕는 것은 땅이다. 땅의 이미지를 어머니 대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모든 생명의 물체가 고정된 영토화 속에서 죽어 가는 것을 대지가 탈 영토화시켜 새로운 삶으로 재 영토화시키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고 폭풍우가 쳐도 휘거나 흔들리지 않는 나무는 부러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대지, 혹은 어머니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오늘날의 예술가적 지식인, 즉 전제군주 시대의 성인이다. 전제군주나 전제군주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현인(오늘날의 법률가나 기능적 지식인)이 스스로 지배와 권력을 좇고, 이들을 존경하고 숭상하는 일반인들이 스스로 종속과 식민의 노예로 전락하는 반면에 예술가적 지식인인 성인은 이들로 하여금 지배와 종속, 혹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사는 방법을 제공하는 대지나 어머니의 역할로 삶의 즐거움을 누린다. 따라서 예술은 근원적으로 노마돌로지이고, 예술가는 근원적으로 노마돌로지의 지식인이다. 노자가 성인이라고 부르는 노마돌로지의 지식인은 대지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므로/ 능히 오래 사는 것이다.”
지식인이 “스스로 살지 않는 방법은 자신의 몸을 항상 미완의 상태에 머물러 두게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몸을 내세워 교수, 변호사, 시인, 소설가 등등으로 자신의 몸을 기관화 한다. 그러나 지식인은 스스로 몸을 내세워 기관화하지 않고, 노동자 되기, 여성 되기, 동물 되기 등등을 수행하면서 노동자, 여성, 동물 등등으로 하여금 전제군주나 현인, 혹은 남성이나 인간에 의하여 강요된 종속과 식민의 노예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새로운 몸의 생성으로 거듭나도록 돕는다. “그러므로 지식인은 (몸을 내세워 현재의 사회체제에 의해 규정되는 교수, 변호사, 시인, 소설가 등등으로 자신의 몸을 기관화하지 않고) 몸을 뒤에 둠으로/ 몸이 (미래의 생성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면서) 앞서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인은 근원적으로 기관들 없는 몸이 현재의 지배와 종속의 구조 속에서 어떻게 기관들로 가득 찬 몸으로 영토화 되었는가를 사유하여 그 영토로부터 탈 영토화 할 수 있는 “그 몸의 외연을 사유함으로/ 몸이 존재하게 된다.” 즉, 현재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므로” 항상 미래의 생성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또한 미래의 생성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능히 오래 사는 것이다.” “이는 결국 (현재로 규정되는)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능히 (미래의) 사사로움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