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離別)의 노래
1952년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 피난지 대구의 교회에서
朴木月을 따르던 두 자매가 있었다.
자매가 모두 그의 시를 좋아하여 자주 찾아왔다.
언니가 깊은 감정으로 다가오자 목월은 거절한 후 서울로 상경한다
그녀는 결국 단념하고 좋은 남자를 찾아 떠난다.
1953년 7월 휴전이 성립되었다.
박목월은 가족보다 먼저 서울로 올라왔다. 언니는 포기하고 결혼했으나,
동생은 사랑의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명문여대를 다니던 그 동생은 목월을 포기하지 못한 나머지
목월을 찾아 사랑의 감정을 고백한다. 1954년 초봄부터,
두 사람이 서울의 밤거리를 함께 거니는 날이 많아졌다.
목월은 그 여대생과 사랑에 빠진 나머지 가정과 명예,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라는 자리도 버리고
빈손으로 홀련히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종적을 감추었다.
40을 바라보는 나이에 박목월은 서울에서 자취를 감추고
그녀와 함께 제주도로 떠나 동거하기 시작했다.
얼마 뒤 시간이 지나고 박목월의 아내 유익순은 남편이 제주도에
살림차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남편을 찾아나섰다.
제주 생활이 넉 달째 접어들었고,
추운 겨울 날 부인 유익순 여사가 제주에 나타났다.
그러한 유익순 여사 앞에서 그녀는 “사모님!”하고 울었다
막상 두 남녀를 마주하게 되자 목월의 처는
“힘들고 어렵지 않느냐” 하면서
돈 봉투와 추운 겨울을 지내라고 겨울 옷을 내밀고 서울로 올라왔다.
목월과 그 여인은 그 모습에 감동하고 가슴이 아파 그 사랑을 끝내고
헤어지기로 한 후, 목월이 서울로 떠나기 전날 밤 이 시를 지어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그때 그 시가 바로 이 노래다.
이별(離別)의 노래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 아 ~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한 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 ~ 아 ~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아 ~ 아 ~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金聖泰가 박목월의 시에 곡을 붙였다.
그렇게 가곡 이별의 노래가 세상에 나왔다.
노래마다 사연이 있다. 아픔과 고통속에서 진주가 생성되듯 오늘
우리네 삶 또한 성숙하고 가치 있는 삶들이 생성되고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박동규(박목월의 아들)의 어머니
내가 영리하고 똑똑하다는 우리 어머니!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6.25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지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 삼 형제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1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 주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 놓고 잤다.
어머니는 밤이면 가마니 위에 누운 우리들 얼굴에 이슬이 내릴까 봐
보자기를 씌워 주셨다.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개천에 가서 작은
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 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3일째 되는 날, 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우리가)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 다른 데 가서 자라!''고 하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를 껴안고 슬피 우시더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 날 새벽 어머니는 우리들이 신주처럼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 들어 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다.
30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게!''하였다.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 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다.
뒤에 따라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나, 외길이라서 그냥 그를 따라갔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 봐 ''아저씨, 여기 내려 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 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그냥 따라와!'' 하고는 가 버렸다.
나는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망설였다. 청년을 따라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 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 ''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마디가 ''쌀자루는 어디 갔니?''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더니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 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 하시며 우셨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 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 하시면서 우셨다.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아들'
이라고 칭찬해 주시더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때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 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시던 칭찬의 말 한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헌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신 박동규 님의 글입니다.
이 글 속의 ''어머니'' 는
시인 박목월 님의 아내십니다.
절박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야단이 아니라 칭찬을 해 줄 수 있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칭찬
한 마디가 우리 아이들의 인생을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리라 믿습니다.
오늘따라 어머님을 불러보고 싶네요
어머니!!
얼마나 아프셨는지요?
첫댓글
절박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야단이 아니라
칭찬을 해 줄 수 있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칭찬 한 마디가 우리 아이들의 인생을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리라 믿습니다.
오늘따라 어머님을 불러보고 싶네요
이곳에 머무는 모든 분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강같이 흘러 넘치게 하소서!!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고운 발자취~~
감사드리며
늘 행복하소서
또 읽어도 감동입니다
고운 발자취!
감사합니다
늘 행복하소서~~
완연한 봄바람의
상쾌한 아침에 어울리는
좋은 음악과
봄꽃으로
희망의
한 주일을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한 주일 되세요~!
아름다운 배려감사합니다
늘 행복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