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전입’으로 인한 법원의 선거무효 판결에 따라 오는 10월 25일 치러지는 서울 동대문을 국회의원 재선거에 민주노동당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지난 6월 5일과 8일, 민주노동당 동대문·중랑지부와 중앙당 상무집행위원회는 “재선거에 적극 참여한다”고 결정하고 6월 안에 지구당 창당과 후보선출 작업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민주노동당의 이 같은 결정이 눈길을 끄는 것은, 상대후보가 이른바 386세대 정치인의 대표주자 중 한 사람인 허인회 현 민주당 동대문을 지구당위원장(36,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이 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지난 총선에서 김영구 한나라당 전 의원에게 3표 차이로 ‘석패’를 당했던 허 위원장은 이미 재출마를 공언한 상태고 중앙당 쪽에서도 그의 출마에 이견을 달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수혈론’(혹은 활용론)을 내건 기성정당 소속의 386 정치인이 민주노동당 후보와 정면대결을 펼치는 것은 이번 선거가 처음이 될 전망이다. 지난 총선에서 이러한 대결구도가 펼쳐지지 않았던 것은, 민주노동당 측이 나름의 ‘현실적 판단’을 하면서 ‘정공법’보다는 일종의 ‘우회전술’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최기영 민주노동당 기획국장(35)의 말이다.
“우리 당은 기성정당 내 386세대나 ‘개혁성향’의 정치인들을 애초부터 신뢰하지 않았지만, 그나마 상대적으로 나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동안 정면대결을 피하려고 했다. 지난 총선 때 정범구 후보(현 의원)를 고려해 고양시 일산갑에 출마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우리가 출마했더라면 정 의원은 낙선했을 것이다.”
◆ 민주노동당 출마하면 당선 어렵다 ◆
그렇다면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측은 왜 그 ‘현실적 판단’을 고려하지 않는 걸까. 최 국장의 말을 더 들어보자.
“세 가지가 있다. 더 이상 강조할 필요도 없겠지만, 먼저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국정혼란과 경제파탄을 불러일으킨 김대중 정부를 심판하기 위해서다. 두 번째는 개혁을 촉구하는 목소리는커녕, 최근 김민석 의원의 모습처럼 동교동계의 품안에서 자기 명망성 유지에만 급급한 ‘사이비’ 386 정치인들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또 하나, 상가임대차보호법과 이자제한법 등 그동안 우리가 노력해 온 정책들을 부각시키면서 대안정당, ‘제3의 정치세력’으로서의 이미지를 확실히 굳히고자 하는 목적도 있다.”
물론 이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두 번째 내용이다. 혹 민주노동당 후보의 출마로 인해 기성정당 내 386후보가 낙선하더라도 전혀 상관하지 않겠다는 공개적인 선언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충분히 가능한, 아니 거의 확실한 시나리오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의 서울지역 평균득표율이 6%(지역구 당 평균득표수 5천5백75표)를 넘는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3표 차로 낙선했던 허인회 위원장에겐 엄청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지난 4·26 기초단체장 재·보궐선거 참패에서 나타났듯 ‘민심’은 현 정부·여당에게 등을 돌려버린 게 현실이다.
허인회 위원장도 민주노동당 측의 출마가 ‘악재’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민주노동당과 지지기반이 겹치는 상황이다. 그쪽이 출마하면 당선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허 위원장은 민주노동당 측을 만나 ‘정책연합’을 적극 설득하겠다는 입장이다.
“민주노동당 측의 386 정치인 비판에 대해서는 적극 공감하고, 나 자신도 깊이 반성하고 있다. 현 정부에 신자유주의적 요소가 있다는 점도 인정하며 나 역시 그에 비판적이다. 이번 선거에 당선되고자 하는 이유 중 하나도 그 요소를 수정하는 데 힘을 쏟아보기 위해서다. 그동안 난 진보진영의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고, 마찬가지로 민주노동당도 앞으로 함께 손을 잡고 가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내 의지를 알아줬으면 좋겠다.”
덧붙여 허 위원장은 “현재 사회복지와 한반도평화를 방해하고 있는 한나라당에게 패배할 수는 없지 않느냐”며 “민주노동당이 민주당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데 힘을 쏟기보다는 반동으로의 회귀를 노리는 한나라당에 대항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 386정치인의 낙선, 개의치 않아 ◆
그러나 허 위원장의 ‘정책연합’ 제의에 대한 민주노동당 측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최기영 국장은 “허인회씨가 진보운동 진영과 친화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 온 점은 인정한다”면서도 “그러나 정책연합은 사실상 실현 불가능한 제안”이라고 말했다.
“민주노동당의 선거연합에 대한 방침 중의 하나는 특정지역 단위에서의 연합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국적인 연합만이 우리의 고려 대상이며 이후 지방선거, 대선까지도 연합한다는 약속이 있어야 한다. 만일 허인회씨가 민주노동당에 입당하거나, 김대중 대통령이 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기조를 철회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우리 당과 연합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또한 “한나라당에 먼저 대항하자”는 허씨의 주장에 대해서도 “의미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나 역시 전대협 사무국장 출신의 386세대 중 한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허인회씨에게 개인적으로 아쉽고 미안한 점이 있긴 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차이는 별 의미가 없다. 오십보백보다. 그 때문에 허인회씨가 낙선되더라도 우린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출마로 인해 민주당 후보가 낙선한다면 엄청난 일 아닌가. 우리가 캐스팅보트를 쥐고 당락을 좌우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 주면, 민주노동당이 급속히 성장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러한 상황이 벌어졌을까. 아무래도 허인회 위원장 자신도 인정한 것처럼 “386 정치인에 대한 실망감”이 오늘날의 ‘피할 수 없는 대결구도’를 만들었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내년 지자체 선거, 대선, 나아가 다음 총선에서도 계속될 전망이다. 최기영 국장은 “이제는 보수정당의 개혁적 강화를 명분으로 진행됐던 ‘수혈론’의 시대를 완전히 마감할 때”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