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식 토마스 신부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1요한 3,22―4,6 마태오 4,12-17.23-25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예수님께서는 가장 보잘것없는 땅,
거칠고 척박한 땅으로 가십니다. 즈불룬과 납탈리,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지역은
이스라엘에서 소외된 이들의 자리이며, 가난과 고통의 땅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목동들과 동방 박사들에게 당신을 보여 주셨듯이, 이제 가장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회개와 하늘 나라를 선포하시며,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은
당신 삶으로 온전히 드러나는 덕목입니다.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화해하고, 내 주변의 이웃을
돕는 것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이 행동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 배워 그분을 따르는 방법입니다.
오늘 독서인 요한 1서의 저자는 주님의 계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이미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머무르실 것입니다.
사랑과 반대되는 삶에서 벗어나고자 회개하여 복음을 믿고, 이웃을 사랑하며 ‘이미’ 와 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늘 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신앙인들의 행복입니다.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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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1요한 3,22―4,6 마태오 4,12-17.23-25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초기 교회는 구약의 사상에서 오는 갈등이 컸다고 하겠습니다.
거기에다가 구약에 없었던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정의가 또한 큰 분수령이었습니다.
유일신이었던 구약의 신관(神觀)은 사람들에게 무리가 없는데, 삼위일체로서의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큰 결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요한 서간의 이러한 배경에서 거짓 예언자의 가르침과 구분하려는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한 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영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적’의 영입니다.”(1요한 3,2-3)
이렇게 초대 신앙의 공동체는 서로 갈라지는 위험을 안고 있었지만 요한 서간 저자는 이런 문제를
잘 지적하며 세상에 속하는 것을 말하는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지 않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이 죽고 나서 공적으로 당신의 소명을 펼치십니다.
마태오는 주님의 복음 선포의 시작을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여
주님 안에서 그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5-16)
주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십니다.
마태오는 주님 소명의 내용을 간략하지만 전체적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아로서의 첫발을 내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어둠이라면 무엇일까요? 바로 육신의 병이지요.
건강할 때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큰 병이나 큰 상처를 받으면 먼저 두려움이 앞서고 실망 또한
큰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큰 어둠이라면 죽음이지요. 이 어둠도 우리에게는 고통도 주지만
두려움도 줍니다. 그리고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은 바로 죄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 두려움뿐 아니라 죽음을 체험하지요.
예수님께서는 바로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육신의 병에서 허덕이는
이들에게 치유의 손길을 뻗으십니다. 그리고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 자신의 생명을 바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복음을 들을 뿐 아니라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 중풍병자들은 주님을 뵙고 치유가 됩니다.
예언자의 말대로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큰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즈불룬과 납탈리는 갈릴리 부근에 있는 지방입니다. 열두 지파들이 가나안의 정복 후에
여호수아에 의해서 분배받았던 관할 지역은 그대로 지파들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갈릴래아 지방은 이래저래 천덕꾸러기입니다. 우선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이고
북부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서 점령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이 이교 문화와 종교까지도
강요당했기 때문에 ‘순수성이 떨어진다’라고 유다로부터 배타적인 대접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예언자는 그런 분위기에서 즈불룬과 납탈리를 추겨 세우며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이 천대를 받았으나 앞으로는 바다로 가는 길과
요르간 건너편과 이민족들의 지역이 영화롭게 되리이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8,23-9,1)
아시리아의 지배가 끝나고 남유다도 바빌론에게 지배당하고 유배의 땅으로 끌려 갔다 왔습니다.
그런데도 유다는 북부 이스라엘 대한 감정이 풀리지 않고 계속 배타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북부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 사이에는 끊임없는 갈등과 골이 깊은 감정이 배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유다가 생각하는 것을 넘어 포용하고
이방인의 세계에게 까지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와서 마태오는 과거의 감정을 딛고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이 선포되고 있음을
알리고있습니다. 과거에 예언자도 이루지 못했던 소명을 이제 예수님 시대에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패쇄적이고 배타적인 구원관을 허물고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의 대상을 넓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유다 지역과 예루살렘과 요르단 건너편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계시는 갈릴래아로 모이는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조건은 이제까지의 불의에서 벗어나 ‘회개’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당면한 문제는 예수님에 대하 그릇된 가르침에서 올바로 그들을 잡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둘러싸고 아예 부활을 부정하거나, 주님의 가르침은 받아들이지만
육신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단으로 흐르는 부류가 있었던 것입니다.
새해에는 죄인 편에 계시는 주님과 함께 하며, ‘있는 사람’, ‘편한 사람’, 내게 이로운 사람‘ 편에
서지 말고, 우리를 힘들게 하고 꼴 보기 싫은 사람, 소외된 이웃을 사랑해야 되겠지요.
조급하고 인색한 세상 뜻대로 살지 말고 주님의 뜻대로 살며 매사 ‘그러려니’하며 긍정적이고
넉넉한 마음으로 새해에는 주님께서 가신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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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1요한 3,22―4,6 마태오 4,12-17.23-25
내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을 공현하는
어제 아기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공현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어른이 되시어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공현하십니다. 어제는 아기이기에 스스로 찾아온 이들에게 공현하신
주님이 이제는 어른이 되어 스스로 찾지 않는 이들까지 찾아가 공현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공현하신다는 것의 뜻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공현하신다는 것입니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까? 연세 서른이 되기까지 은거하시다가 이제 연세 충만하니
공적으로 드러낸다는 뜻입니까?
우리 전례에는 이런 뜻이 분명 있습니다. 오늘의 전례는 어른이 되어 본격 등장하신 주님이
이사야가 이방인의 빛으로 오실 분으로 예언한 바로 그분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례가 예수님의 등장을 주님의 공현으로 얘기하는 것이지
주님께서 당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셨을 거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실제로 당신의 등장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려고 하셨지요.
그래서 오늘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함으로써 이사야 예언대로 어둠 속
이방인들에게 빛이 떠올랐다고 한 다음 바로 이어서 예수님의 첫 번째 선포 내용을 전하는데
그것이 바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알지요. 오늘 복음 바로 앞에서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악마의 유혹을 받으시는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드러내고자 하셨다면
그 기적을 행하셨겠지요?
그러니까 오늘 복음의 얘기는 주님께서 신성을 드러내라는 유혹을 물리치고 난 뒤에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당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사람들이 알게 하겠다는, 다시 말해서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시겠다는 선언인 겁니다.
제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요즘 새롭게 시도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이 새로운 방식은 주님의 기도를 아무 생각 없이 건성으로 바치지 않기 위한 면도 있지만,
저를 드러내고 제 마음대로 하려는 저를 경계하며 동시에 진정 하느님 이름이 거룩히 빛내고,
하느님 뜻을 이루는 제가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도입한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거룩히 빛나시며'를 바칠 때 '빛나소서!', '빛나소서!'를
몇 번 반복해서 외치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소서'를 바칠 때
'제 안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제 안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반복합니다.
특히 아버지의 나라가 거룩히 빛나시기를 빌 때 저는 제 사랑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을
경계하며 이렇게 바치곤 합니다.
제게 사랑이 있다면 제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을 공현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제 사랑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제 사랑에 고마워하기를 바라기 때문이고, 그와 내가 같이
하느님 사랑의 햇빛을 쬐기보다는 나의 사랑에 그를 머물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반대가 되어야 하겠지요.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느님 사랑 안에
우리가 같이 머무는 것,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이 우리 안에 머무시게 해야겠지요.
그래서 오늘 서간도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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