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떠오르는 태양, 구로교당~!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³о 개인 여행기 스크랩 천산남로 6일차. 7월 23일 금요일(쿠처에서 쿠얼러로)
윤상현 추천 0 조회 116 10.10.07 09: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6일차. 7월 23일 금요일

카메라의 메모리카드 용량이 부족한 걱정을 덜었다. 비싼 독방을 쓰고 있는 박사장님의 방에 따로 컴퓨터가 있었다. 어제 밤늦게 맥주 한 잔 나누면서 씽글 룸에는 컴이 따로 준비되어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그렇지 않으면 근처의 PC방을 찾아가거나 후런트에 가서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판이었다. 따로 준비했던 USB 메모리 스틱에 이제까지의 촬영 분을 몽땅 옮겨놓고 나니 창고에 쌀가마를 들인 듯 넉넉하다.

아침 식사 후 처음으로 빛을 본 봉지 커피가 효력을 발휘하였다. 달달하며 고소한 향이 그리운 맛이 되어 새로운 활력소(活力素)가 된다. 사막에서와는 달리 하늘엔 낀 무거운 구름은 비를 담고 있다. 그 사이사이로 언 듯 보이는 푸른 기운이 아득하게 깊다. 호텔에서 ‘천산 신비 대협곡(天山神秘大峽谷)’까지는 지척(咫尺)인데도 한 시간 반 거리란다. 반도(半島)의 좁은 땅 안에 평생을 갇혀 살다보니 어쩌다 한 번 씩 대륙을 여행하게 되면 그 스케일에 번번이 질리곤 한다. 그래도 이제는 어느 정도 이골이 났는지 웬만한 거리에는 그저 담담할 따름이다.

천산 산맥의 언저리를 차지한 이곳 오아시스 ‘쿠처(庫車)’는 기원전 1~2세기부터 ‘구자(龜玆)’란 이름으로 등장하여 줄곧 이렇게 불리다가 원나라 때 ‘곡선(曲先)´이나 ´고선(苦先)’같은 이름이 생겼고, 청나라 때 지금의 지명을 갖게 되었다. 서역 36개국 중 9대국의 하나로서 오아시스 육로의 지정학적 요지(要地)에 자리 잡은 까닭에 중국의 역대 왕조는 시종일관(始終一貫) 이곳을 중시해 왔는데 흉노(匈奴)가 이 지대를 위협하자 중국은 기원전 60년에 쿠차 동쪽으로 350리 떨어진, 현재 신강성 윤대(輪臺) 부근에 있는 오루성(烏壘城)에 첫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설치해 흉노의 내침(來侵)에 대비했다한다.

무엇보다도 이곳은 역사책을 통하여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인 대(大) 불교학자 구마라습(鳩摩羅什)의 출생지이다. 이 사람은 산스크리트어 불교경전을 한문(漢文)으로 번역한 4대 역경가(譯經家)들 가운데 가장 정평(定評)이 나 있는 사람으로서, 불교의 종교사상과 철학사상이 중국에 전파된 것은 대부분 그의 노력에 힘입은 바다. 나 또한 불자(佛子)의 한사람으로서 먼 길을 돌아 이곳에 이르렀으니 어찌 감회가 남다르지 않으랴.

쿠처향(庫車鄕)의 외곽을 돌아 시내를 빠져나가니 백양나무 가로수가 나타나는 지점부터 시골길이 시작된다. 20여 미터가 훌쩍 넘는 백양나무는 척박한 사막 환경에서 오아시스가 준 선물이다. 바람과 모래를 막아주고 그늘을 제공하여 사람이 살 수 있게 해주니 사막의 한 상징(象徵)이라 하겠다. 멀리 천산(天山)의 장쾌한 능선이 눈에 든다. 저 산릉(山陵)은 평균해발이 4,000m에 달하며 남북너비 100-400km에 동서 길이 1,700km를 자랑하는 아시아 최장(最長)의 산맥(山脈)이다. 첫날 우무무치 상공에서 내려다보았던 산줄기는 남쪽으로 나란히 펼쳐진 사막(沙漠)으로 인하여 그 산맥의 형태가 너무도 명확하였다.

고갯마루에 올라 잠깐 쉴 겸 조망하노라니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보이지 않는, 문자 그대로 붉게 메마른 민둥산이다. 온 산에 담뿍 담긴 쇳기운이 한포기 풀에게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카슈카르에서의 검붉음과는 또 다른 빛이다. 하지만 저 메마르고 황량한 산줄기 아래 너른 계곡은 남쪽의 곤륜산에서처럼 천산(天山)의 만년설이 녹아내려 넓은 물줄기를 이루었고 그 곁의 모래톱에는 녹색의 초본(草本)과 관목(灌木)들이 다투어 서 있어 극단(極端)의 대비(對比)를 보인다.

이 계곡의 완만한 경사를 따라 내려가기 삼십 여분, 한 굽이 돌아드니 덩그러니 ‘천산신비대협곡(天山神秘大峽谷)’의 표석이 서있고 그 뒤로 좁고 긴 계곡을 이룬 곳에는 온통 빨간 바위산들이 지금 막 붉은 물감 속에서 뛰쳐나온 듯이 사납게 솟았다. 그 붉은 사암의 협곡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오던 길의 놀라운 경관들도 이제는 오히려 시시하다. 어귀에서부터 계곡 안쪽을 따라 군데군데 하얀 꽃 더미가 구름처럼 피어있어 메마른 바위산에 점점(點點)이 축복(祝福)이 되었다. 사막 안에서 ‘호양나무’와 함께 보았던 ‘홍류나무’도 눈에 띤다. 싸리나무를 닮은 이것은 자주색 꽃 역시 그와 비슷한 형상을 하였다.

협곡 내부로 들어서니 그 넓이는 더욱 좁아지고 위로 솟은 봉우리는 안쪽으로 휘어져있어 아찔한 것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려 나를 덮칠 것 만 같다. 총 5km에 달하는 이 계곡의 너비는 가장 넓은 곳은 53m이지만 가장 좁은 곳은 40cm에 불과하니 한 사람이 빠져나가기도 힘들 정도다.

굽이굽이 그늘 짙은 안쪽으로 태양의 방향을 따라서 붉은 빛도 종류를 달리한다. 선홍색, 암홍색, 적갈색, 등등 다양한 붉음의 향연이다. 이로 인해 이곳이 ‘홍산협곡(紅山峽谷)’으로도 불리는 것이리라. 골자기를 따라서 곳곳의 높은 곳에 대피소를 마련해두었다. 드물기는 하지만 십리 밖에서 폭우가 내리는 경우도 있단다. 바위지형인 까닭에 스며들지 못한 빗물이 좁은 계곡을 물길 삼아 삽시간에 흘러들게 되면 목숨이 위험하리라.

몸을 비틀어야 만이 통과할 수 있는 좁을 골을 지나 서자 앞의 벼랑이 장벽처럼 막아선다. 더 이상의 진입은 무리다 싶다. 경치에 취하여 허적허적 걷다보니 무릎도 아파오는데다가 빠듯한 일정 탓에 안내인과 약속한 시한(時限)도 이미 넘겼다. 계곡의 끝까지 닿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다.

발길을 되돌리자 또 하나의 장관이 나타난다. 방금 왔던 길이지만 이미 같은 모습이 아니다. 잠깐 사이에 방향을 달리한 태양 빛이 또 다른 풍광을 선사한다. 주름진 바윗돌이 더욱 풍성해져 암탉의 넉넉한 깃털 같은지라 마치 내 자신이 어미 닭의 품 안에 스며든 병아리인 듯 마음자리가 푸근하다.

다시 한 시간 여(餘)를 달려 키질 천불동을 향한다. 아까보다는 훨씬 밝아진 하늘이 되면서 안계(眼界)가 트이니 멀리 천산의 설봉이 눈에 든다. 화성(火星)의 표면을 방불(彷佛)케 하는 거친 벌판을 가로질러, 구절양장(九折羊腸) 고갯길을 내려가니 저 아래 낮은 곳에 또 하나의 오아시스가 자리했다. 멀리서 봐도 기다란 물줄기에 눈이 시린데 우쭐대는 백양나무의 시원함이 보태어져 무채색으로 건조한 주위의 풍경(風景)과 극한(極限)의 대조(對照)를 이룬다.

오아시스에 들어서니 맨 먼저 ‘구마라습’의 동상이 걸터앉은 자세로 맞이해준다. 오늘날 이 지역은 거의 이슬람화 되었지만 ‘구마라습’이 활동하던 4세기 무렵은 불법(佛法)이 세상을 이끌던 시절이고 여기 천불동은 그것을 기념하는 유적인 것이다. 왼편 건조한 황토 절벽 중간에 벌집처럼 많은 동굴이 보이니 바로 ‘키질 천불동’이다. 천불동이라 함은 많은 부처를 모셔놓은 동굴이니 수없이 많은 석굴암을 한 곳에 모아놓은 형상이다.

한족(韓族)인 현지 안내인에게 이끌려 입장을 한다. 무단 촬영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의미에서 소지한 카메라를 입구에 마련된 상자에 보관한단다. 높아진 태양을 머리에 이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노라니 무르팍이 뻑뻑하다. 일반에게 공개된 몇 안 되는 동굴에 들어서니 밖에서와는 달리 뜨거운 느낌이 전혀 없다. 역시 건조한 날씨라서 그늘에만 들어서면 시원한 것이다. 유적의 상황에 대한 현지 안내인의 중국어 해설을 우리 가이드가 통역해주는데 둘이 싸인이 잘 맞지 않아 전달하는 것이 어설프다. 열심히는 하려하는데 뭔가 부족한 모습이다. 우리의 어린 가이드는 아직 경험이 일천(日淺)해서 그런 건지 유적(遺跡)에 대한 지식이 해박(該博)하지 못하다. 결국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도리어 손님들이 설명하는 형국이 되었다.

이곳 천불동의 복원에 선구자 역할을 했던 한락연(韓樂然)씨를 말하지 않을 수 없겠다. 그는 조선족 출신의 화가로서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항일운동에 나섰다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유럽의 인상주의적 화풍을 익힌 그는 귀국 후 화가로 활동하면서도 항일운동을 이어가다가 어려움을 겪던 중, 이곳 키질 천불동의 가치와 아름다움에 매료돼 실크로드 미술에 대한 연구와 키질 천불동 벽화 모사, 발굴 작업 등에 선구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곳에 대한 예술적 연구가 한참 더 늦어졌을 것이다.

이런 그를 기념하여 석굴의 한편을 비워 작은 기념관을 꾸며놓았다. 벽면에는 생전에 그가 직접 써 둔 자신의 활동 내력이 음각(陰刻)되었고 여러 개 이젤 위에는 그의 사진과 함께 주변 풍경을 직접 그린 수채화가 가지런히 놓였다. 1947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생을 마친 그의 자취를 마주하고 있노라니 마음 한 구석이 아릿하다.

동굴 안의 불상들은 이미 도굴되어 거의 그 흔적이 미미하고 벽화들마저 대개 뜯겨지고 훼손돼 겨우 흔적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고고학을 빙자한 유럽의 약탈자들이 숱한 유물을 우선 도굴했고, 심지어는 회벽 위에 그려진 벽화를 정방형으로 조각내 테이프를 붙여 떼어갔다니 이나마 남아있는 흔적이 신기할 정도다. 일본의 승려 출신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를 중심으로 한 탐험대도 이 키질 석굴의 유물 상당수를 도굴해 식민지 시절 우리나라에 보관했다고 한다. 패전 후 미처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한 유물의 많은 부분이 지금도 서울의 국립박물관에 남아있으니(오타니 컬렉션) 그 또한 우리와는 인연이 남다르다 하리라.

몇 개의 석굴암(石窟庵)을 참배하며 돌고나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동굴을 나서 계단에 내려서니 안계(眼界)가 시원하다. 저 아래 거울 같은 호수(湖水) 곁에 일자(一字)로 지어놓은 회랑(回廊)을 짝하여 갈대와 버드나무의 반영(反影)이 한 폭의 그림이다.

밥 때가 되었는지 어김없이 시장하다. 오아시스 한편에 자리한 식당은 기념품점을 겸했다. 이곳에만 있는 것이 무엇일까? 위구루족 형상의 인형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 조악하기는 하지만 혹시 이것이 기념이 될까? 다른 곳에서는 도통 눈에 띠지 않았던 것이어서 좋아 보인다. 점원과 흥정을 하다가 그만 일행을 놓쳤다. 당황스럽다. 알고 보니 식당의 가장 안쪽으로 안내되었단다. 두어 개 방을 지나쳐서 찾아드니 나의 룸메이트도 행방불명이란다. 안내인은 어디에 있는지 눈에 띠지도 않는다. 식사를 먼저 끝낸 한 명이 찾아 나섰다. 잠시 뒤에 나타난 룸메이트는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에 모두가 사라져 황당했단다. 어쨌든 금방 찾았으니 다행이다. 나는 당황했고, 조박사는 황당했고. 며칠 같은 방에서 지냈더니 둘이가 똑같아진 것 같다.

식사 뒤 둘러 본 호수가 또 다른 풍광을 제공한다. 수면 위에 비춰진 천불동 절벽의 반영(反影)은 이미 맛없이 메마른 모습이 아니다. 뺑 돌아 호숫가에 푸른 갈대 우거진 사이로 갯버들 늘어진 아래에 가늘게 흔들리는 물결은 생동감을 불어넣기에 충분하다. 그 뒤로 솟아있는 녹색의 방풍림(防風林)과 더불어 작은 오아시스의 온전한 평화를 느낀다.

사막의 하루는 종잡을 수 가 없다. 낮의 길이가 길기도하다. 벌써 오후 세시인데도 태양은 아직도 머리 꼭대기에서 내리 비췬다. 하지만 오늘의 남은 일정(日程)도 만만치 않다. ‘시바스(蘇巴什) 고성’을 보고서 쿠얼러(庫兒勒)에 닿으려면 서둘러야만 한다. 천불동 오아시스를 뒤로하고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연속 되는 황량함 속에서도 드문드문 자라주는 풀들에 기대어 수십 마리의 양 떼가 방목되었다. 눌러 쓴 호떡모자의 늙은 양치기는 작대기를 흔들며 양몰이에 여념이 없다.

한 시간을 달려 바위산 고갯마루를 넘는다. 저 편 아래와는 달라 풀 이 한포기도 없는 검푸른 바위산이다. 멀리서 볼 때는 그 검푸름이 혹시 말라붙은 이끼가 아닐까 했다. 착각이다. 하지만 이끼란 본래 습한 기후의 산물이 아닌가. 이렇게 건조한 지역에서는 천부당(千不當)한 것이다. 철분(鐵分)이 많아서 붉어진 먼 산과는 달리 이곳은 구리 성분이 많아 푸른 것이란다. 중국 정부가 이곳 위구루지역의 독립 움직임을 강력 저지하는 여러 이유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부존(賦存)한 천연자원 때문이라는데 허언(虛言)이 아니다. 더군다나 근래에 사막에서 석유(石油)까지 발견되었음에야 더할 나위가 있겠는가. 무진장(無盡藏)한 광물 자원이 부러울 따름이다.

고갯마루 아래 자리한 염수구(鹽水溝) 톨게이트를 잠깐 지나니 시바스(蘇巴什) 사원(寺院)의 옛 터가 눈에 들기 시작한다. 북쪽으로 메마른 천산의 거대한 능선이 방벽(防壁)이 되어 준 아래 넓게 펼쳐진 언덕 위에 고대(古代) 구자국(龜玆國) 최대의 불교 사원 터가 거의 폐허인 채로 덩그러니 놓였다. 그 옛날 화려했던 면모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고 흙으로 된 건물 잔해와 성터만이 옛날의 영화를 넌지시 보여줄 따름이다. 언덕의 가장 위쪽에 자리한 거대한 불탑(佛塔) 또한 거의 무너져 내려 본래의 모습을 거의 짐작하기가 어렵다. 다만 부서진 계단을 밟아 탑 위로 올라서서 주변을 조감(鳥瞰)해보면서 옛날의 면모를 짐작해볼 따름이다.

혜초(慧超) 스님의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때문에 우리에게도 아주 인연이 없는 곳이 아니다. 여행기 전편(全篇)을 통하여 행적(行蹟)의 시간을 밝힌 곳은 여기가 유일하다. 스님은 이렇게 적고 있다. “소륵국(카슈카르)에서 동쪽으로 한 달을 가면 구자국(龜玆國)에 이른다. 이곳은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가 있는 중국 군대의 대규모 집결처이다. 절도 많고 승려도 많으며 소승불교가 행해지고 있다. 고기와 파 , 부추 등을 먹는다.” 등등(等等)의 기록이 있으니 스님도 필경 이곳 시바스사원을 참배했으리라. 한반도에서 부터 이역만리 쿠처 땅에 이른 최초 인물의 발자취를 따라서 이처럼 먼 훗날에 불자(佛子)인 내가 그의 뒤를 밟아온 데에 대한 의미가 남다르다. 서유기(西遊記)의 기록에 의하면 현장법사(玄?法師)도 인도에서 불경을 구해 돌아 올 때 이 사원(寺院)에서 두 달 간 머물렀다하니 칠년 전에 방문한 바 있는 저 ‘투루판(吐魯番)’의 ‘화염산(火焰山)’과 더불어 같은 감회가 인다. 또한 혜초(慧超)와 거의 동시대 인물인 고선지(高仙芝)장군은 망해버린 고구려의 유민(遺民)으로서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의 절도사(節度使)라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뒤 전진기지 격인 이곳 쿠처를 거점으로 파미르고원을 넘어 원정(遠征)을 단행했던 것이니 이 또한 나의 발길이 여기에 이른 것에 한 줄기 의미를 덧댈 수 있으리라.

해가 기울어가면서 흐리던 하늘이 듬성듬성 열린다. 동서로 늘어진 구름 사이로 쪽빛 보다 더한 푸른색이 해무리에 벗하여 그윽하다. 이제는 동쪽으로 가는 길을 재촉해야만 한다. 사막 저 건너 물경 200km 너머에 신흥 도시 쿠얼러(庫爾勒)가 있다. 도로 형편을 짐작할 수 없기에 도착 시간 또한 가늠할 수가 없다. 그 곳은 사막의 유전 개발로 인해 급격히 커진 한족(漢族)들의 도시이다.

쿠처 시내를 벗어나 한 시간 여, 한적한 시골의 좁은 차도가 갑자기 정체된다. 주로 많은 짐을 실은 거대한 화물차들이 줄 선 가운데 마차(馬車)들 까지도 갈 바를 모르고 섰다. 알고 보니 경운기(耕耘機)에 의한 경미한 접촉사고라는데 삼거리의 좁은 길에서 도대체 수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방울을 딸랑이는 나귀 수레만이 마음대로 추월하며 움직임이 자유스러울 뿐이다. 무려 삼십분을 보내고서야 다시 출발할 수가 있었다.

갈 길은 멀고 해는 지평선을 향해 낮아진다. 뺑 돌아 끝없는 초지의 대 평원이다. 하지만 여간해서는 경작지를 발견할 수가 없다. 소금기가 많은 땅인지라 개간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애초에 이곳은 바다가 융기하여 이루어진 지형이다. 또한 강수량도 전혀 없다시피 한 곳이다 보니 아직까지도 간기가 빠지지 않아 작물을 기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소금기에 강한 염생(鹽生)식물들만이 대지를 덮고 있을 뿐이다.

지평선 저 멀리에 붉은 화염을 뿜어내는 철탑이 보이기 시작한다. 유전(油田)이다. 구름 걷혀 푸른 하늘색 아래로 석유 정제시설의 하얀 빛이 대비를 이룬다. 잘 닦인 공로(公路)를 달리노라니 이내 타림사막공로(塔林木沙漠公路)가 시작점이다. 이 도로는 타클라마칸을 관통(貫通)하여 저 남쪽에 자리한 ‘민팽(民豊)’에 이르는 길로서 사막의 첫 번째 고속도로다. 석유를 실어내고자 만들어진 길이기에 입간판을 세워 그를 기념해두었다. “(千古夢想沙海變油海, 今朝奇迹大漠變通途)모래의 바다가 변하여 기름 바다가 됨은 천년 된 꿈이요, 큰 사막이 변하여 길이 뚫림은 오늘날의 기적이다.”라 했으니 오랜 동안 버려졌던 땅에서 노다지를 발견한 기쁨을 이렇게 형용한 것이다.

간이 휴게소에서 잠시 쉬며 하미과(哈蜜瓜) 한쪽을 입에 무는데 시원한 맛에 더불어 코에서 뭔가 찜찜하다. 무심결에 손을 올려 닦아보니 빨간 피가 묻어난다. 어지간히도 고된 여정인가보다. 결국 코피가 터졌다. 짧은 시간에 너무도 넓은 곳을 다니다보니 조금 지쳤나보다. 잠깐 그늘에 쉬면서 수습하고 나니 머릿속이 도리어 개운하고 마음도 차분하다.

우리가 갈 길은 남쪽으로 열린 타림사막공로(塔林木沙漠公路)가 아니다. 큰 사막은 이미 종단(縱斷) 해서 북쪽으로 넘어왔으니 이제는 동쪽 방향의 ‘유전전용공로(油田專用公路)’를 타야한다. 이정표에는 ‘쿠얼러(庫爾勒)’까지 175km가 표시되었다. 공로(公路)의 초입(初入)에 다가가니 가로막힌 바리케이트에 ‘대형차량 통행엄금’이 대서특필되었다. 이거 낭패다. 만약에 이 길을 이용하지 못한다면 훨씬 먼 길을 돌아가야만 한다. 가이드와 기사가 분주히 오가더니 결국 통행 허락을 받아온다. 오늘은 이곳의 관리자가 기분이 좋은날이란다. 별 말 없이 선선히 통행을 허락했다하는데 당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끝없는 직선 길을 달리다보니 이제 태양은 낮은 구름과 함께 지평선에 닿으려한다. 시계는 벌써 아홉시 반을 가리키지만 아직은 길고 긴 사막의 낯 시간이다. 그래도 푸른 하늘과는 달리 땅에는 어두움이 깔려온다. 쿠얼러에 가까워지는지 또 다시 먼발치에 백양나무가 눈에 띠기 시작하고 거대한 산줄기는 장막(帳幕)처럼 막아섰다. 병풍(屛風)을 두른 듯 비슷한 높이로 죽 늘어선 ‘천산산맥(天山山脈)’이다. 주위의 벌판은 경작지로 개간 중인지 중장비로 평탄작업을 해 둔 곳에 물을 잡아두었다. 하지만 말라붙은 많은 부분에 허옅게 덮인 것은 돋아난 소금기이다. 그냥 사진으로만 찍어 둔 채라면 초겨울 벌판에 내린 서리인줄 알리라.

밤 열시가 되어서야 사막을 벗어났다. 아직도 이정표에는 쿠얼러 60km가 적혔다. 그래도 여기서부터 사람이 사는 곳이다. 거의 다 왔구나 하는 안도감도 잠시, 또 다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새로 개발되는 도시다운 것인지는 몰라도 너무도 많은 도로에 공사판이 벌어져있어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곳곳에 우회도로요 비포장 구간인지라 무려 두 시간을 더 보내고 자정 무렵이 되어서야 목적지에 도착되었다.

쿠얼러(庫爾勒) 시내에 들어서니 완전히 현대판 도시로서 이제까지 보아왔던 오아시스들과는 완전히 다른 신천지 계획도시다. 수많은 고층빌딩들이 즐비한 가운데 가이드조차도 오늘 묵을 호텔을 찾지 못한다. 궁여지책으로 택시를 앞장세우고서 따라가다가 그만 그 택시의 행방을 놓쳤다. 전화를 주고받으며 무단으로 유턴하기를 여러 번, 우여곡절 끝에 겨우 호텔에 찾아드니 가이드는 너무도 미안해한다. 하지만 기왕지사를 어찌하랴. 그 덕분에 시내 관광을 잘했노라고 자위하니 속이 편하다. 사막 안에서 휘황한 가로등에 비추인 호수의 경치가 얼마나 좋았던가.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다.

차려진 음식을 어찌 마다하리오. 밤참에 가까운 저녁식사지만 훌륭한 음식들이 정말 꿀맛이다. 특히 ‘양갈비탕’과 ‘양창자볶음’이 별미중의 별미다. 소화제를 빙자한 고량주 한 모금에 목울대가 따끔하더니 속이 따뜻해온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