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게 하는 '세비로(せびろ)'란 단어! '세비로'란 일본어로 양복 또는 신사복이란 의미로 한자로는 '배광(背広)'으로 쓴다는데...같은 뜻을 가진 단어로 ようふく(洋服)도 있지만 늙은 나에게는 '세비로'란 단어가 훨씬 정겹게(?) 들리는 건 어인 까닭일까? 요즘 일본의 젊은이들은 이런 단어 대신에 주로 양복을 '수트(suit)'로 부르고 있다네.
우리들이 어렸을 때는 해방이 되고 6.25 전쟁이 몇 년 전에 끝났으니 뭐 길거리에 흰색의 두루마기와 갓을 쓴 노인들을 쉽게 볼 수 있었으니 지금으로 치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었을까. 흐흐흐... 당시 이웃집 젊은 형님이 양복을 입고 나타나면 어른들은 "세비로 한 벌 쫘악 빼 입고 어딜 가시누?" 하고 놀리곤 했는데, 그때는 두루마기, 삼베 바지, 모시 적삼이 아니면 기냥 다 세비로라고 칭하는가 보다 라고 했거든...
원래 세빌로란 단어는 양복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 어원에 대해선 몇 가지 말들이 있더만. 뭐 영국의 유명 양복점들이 주욱 늘어선 거리가 세빌로우가(Sevile Row street)여서 일본인들이 받침이 없는 언어를 쓰기 땜시 세비로로 불렀다는 설도 있고, 또 누구는 양복이 거추장스런 영국의 귀족 복장이 아닌 일반인들의 옷이라 해서 'civil clothes'라 불렀는디 그걸 줄여서 만든 말이란 설도 있더만.
어쨌든 일본에서 양복을 칭하는 세비로란 단어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데는 또 다른 역사적 이유가 있었다네. 다이쇼(大正)왕이 중병 중이었음도 왕의 실권이 날로 쇠약해짐을 의식한 궁은 서양의 신문물을 익히게 할 목적으로 대를 이을 왕자 히로히토(裕仁- 나중 쇼와왕으로 왕위를 계승함)를 유럽 순방에 나서게 한다. 해서리 1921년 왕자는 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을 여행하면서 서양의 발달한 문명을 접하는 경험을 하는데...
특히 영국에서 환대를 받았는데 이유는 20년 전 영일동맹으로 약소국 침략을 상호 용인하는 조약을 체결한 우방으로 서로가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해서리 히로히토는 영국의 왕과 왕자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는데, 그때 히로히토는 양복점이 늘어선 세빌로우가(Sevile Row street)에 들러 양복을 몇 벌 맞춰 입고 영국의 왕가 가족들과 기념사진까지 찍었다는구만글쎄...이게 일본의 언론에 대문짝만한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되었으니 아시아의 후진국 가운데 처음으로 대영제국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상징성을 획득했다고 우쭐할 수밖에...
그때부터 영국의 세빌로우라는 거리 이름은 아예 일본에서는 양복이라는 의미로 고착되었으니 재미있지? 김대중 슨상님이 퇴임 후 하루 일과를 노벨상패 닦는 걸로 시작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하튼 쇼와왕은 태평양전쟁 패전으로 모든 실권을 내려놓자 허구헌 날 유럽 여행에서 선물 받거나 구입한 물건을 어루만지면서 '아, 옛날이여!'를 중얼거렸다고 하더만, 믿거나 말거나...
돌아보니 양복 입어본 지도 참 오래도 되었다. 직장에 다닐 때는 거의 매일 잘 다림질 된 와이셔츠에 양복을 입고 다녔지만, 퇴직 후에는 그럴 일이 없어져 버렸으니...이젠 옷장에 와이셔츠도 넥타이도 없지만, 그렇다고 생활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으니 괜찮은 거 아닌가? 그래 말이야 맞는 말이지, 직장 다니는 주인님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와이셔츠 다린다고 일요일 온 종일 고생하던 모습이 이젠 아득한 옛날 일이 되어 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