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된 지 일년 만에 그는 발견되었다 죽음을 떠난
흰 뼈들은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무슨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독극물이 들어 있던 빈 병에
는 바람이 울었다 싸이렌을 울리며 달려온 경찰차
가 사내의 유골을 에워싸고 마지막 울음과 비틀어
진 웃음을 분리하지 않고 수거했다 비닐봉투 속에
들어간 증거들은 무뇌아처럼 웃었다 접근금지를 알
리는 노란 테이프 안에는 그의 단단한 뼈들이 힘센
자석처럼 오물거리는 벌레들을 잔뜩 붙여놓고 굳게
침묵하고 있었다
[2005년 조선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김승해
소백산엔
사과나무 한 그루마다 절 한 채 들었다
푸른 사과 한 알, 들어 올리는 일은
절 한 채 세우는 일이라
사과 한 알
막 들어 올린 산, 금세 품이 헐렁하다
나무는 한 알 사과마다
편종 하나 달려는 것인데
종마다 귀 밝은 소리 하나 달려는 것인데
가지 끝 편종 하나 또옥 따는 순간
가지 끝 작은 편종 소리는
종루에 팽팽한 뿌리로 모아
풍경 소리를 내고 풍경 소리를 내고
급기야 안양루 대종 소리를 내고 만다
어쩌자고 소백산엔 사과가 저리 많아
귀 열고 산문 소식 엿듣게 하는가
[2005 한국일보 신춘문예 詩 당선작]
나무도마
신 기 섭
고깃덩어리의 피를 빨아먹으면 和色이 돌았다
너의 낯짝 싱싱한 야채의 숨결도 스미던 몸
그때마다 칼날에 탁탁 피와 숨결은 절단 났다
식육점 앞,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버려진 맨몸
넓적다리 뼈다귀처럼 개들에게 물어뜯기는
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
몸 깊은 곳 상처의 냄새마저 이제 너를 떠난다
그것은 너의 세월, 혹은 영혼, 기억들; 토막 난
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
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
간혹 매운 몸들이 으깨어지고 비릿한 심장의
파닥거림이 너의 몸으로 전해져도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었다 상처 많은 너의 몸
딱딱하게 막혔다 꼭 무엇에 굶주린 듯
너의 몸 가장 자리가 자꾸 움푹 패여 갔다
그래서 예리한 칼날이 무력해진 것이다
쉽게 토막 나고 다져지던 고깃덩이들이
한번에 절단되지 않았던 것이다
너의 몸 그 움푹 패인 상처 때문에
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
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
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
세월의 때가 묻은 손바닥같이 상처에 태연한 곳
혹은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 무덤 속 같은
너의 몸, 어느덧 냄새가 다 빠져나갔나 보다
개들은 밤의 골목으로 기어 들어가고
꼬리 내리듯 식육점 셔터가 내려지고 있었다
【세계일보 신춘문예-詩 당선작】
母女의 저녁식사
윤 진 화
배추김치.... 파김치.... 상추겉절이.... 오이소박이.... 어머니.....
.... 어머니.... 우리 집 식탁에는 온통 풀뿐이네요
우리의 저녁 식사는 말들이 좋아하겠어요
보세요? 하얀 접시 위에 그려진 말이 우리보다 먼저
우리의 저녁 식탁에 와 있잖아요. 그래요. 거기요. 가만히,
아이처럼 귀를 기울이면,
어디선가 또 다른 말이 들길을 지나 마을 건너
가난한 우리 식탁으로 달려와요. 들리세요?
주인을 버리고 달려오는 말울음 소리요
저기 먼 곳에서는,
젖가슴 하나 달린 여자들이
안장도 없는 말을 타고
드넓은 대지를 흔들며 산다던데... 히잉! 어머니
주홍빛 하늘이 몰려와 대지를 덮으면
동그랗게 몸을 웅크린 여자들이
말갈기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우리 식탁을 향해 자신의 말들을 찾아
고단한 하루치 태양을 쉬게 하고 달려와요
... 히잉! 어머니
당신이 좋아하는 딸기 아이스크림이 녹을 때처럼
하늘이 물들어갈 때, 그녀들이 달려와요
가슴 하나를 도려낸 그녀들이, 자꾸만 자꾸만
초대받은 손님처럼 달려와요
어머니, 유방암에 걸린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테여
듣고 계신가요?
전사들이
우리의 밀림으로 몰려오는 소리,
그 침묵의 소리들이요
… 히잉! 어머니.
[2005년 경향신문 시 당선작]
오페라 미용실
윤석정
능선으로 몰려든 검은 구름이
귀밑머리처럼 삐죽삐죽 나온 지붕에 한발을 걸친다
그 사이, 좁다란 골목길이 계단을 오르며 헉헉 숨 내쉬는 곳에
할아범 측백나무와 오페라 미용실이 마주 서 있다
그는 매일 미용실 바깥의 오페라를 감상한다
미용실 눈썹처마에 모아둔 나뭇잎 음표들이 옹알거릴 때
가위를 갈다가 번뜩이는 악보의 밑동,
백지에 오선을 긋던 어머니는 병세를 자르지 못해
머리에 자란 음표를 모두 빼내 옮겨 적었고
연주가 서툰 아버지는 가파른 골목길로 내려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해 오페라를 관람하려고 모여든 사람들은
측백나무에서 음표를 떼어 내던 앙상한 어머니를 목격하였다
어머니를 마구 흔들고 지나간 바람이 옥타브를 높이며
구름 떼를 몰고 오기도 했다
미용실 문이 열리자 그는 내내 벌려 예리해진 가윗날을 접는다
머라숱이 적은 손님의 머리카락이 잘려나갈 때마다
음치인 울음이 미용실에서 뛰쳐나간다
동네 아이들이 집으로 가는 길에선
울음이 두근거리는 아리아로 변주해 울려 퍼지고
측백나무에서 마지막 남은 음표가 눈썹처마에
떨어질 때
낮은 지붕 위로 함박눈이 음계 없이 쏟아진다
나뭇가지 오선지 끝에 하얀 음표가
대롱대롱 매달리고
악보에 없는 동네 사람들이 돌림노래처럼
몰려나와
희희낙락 오페라를 구경한다
[200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집시가 된 신밧드
서영식
대리석 바닥 틈으로 발을 밀어 넣은 이끼
널브러진 빵조각을 뜯어먹는 푸른 곰팡이
빌붙어 사는 것들도 푸르를 수 있는 그 곳
서울역 지하도 바닥에 사내가 잠들어 있다
종일토록 모래를 이고 날랐을 머리칼 사이
탈출한 사막의 알갱이들도 빌붙어 잠잔다
맹독의 백사처럼 또아리 틀고 치켜든 고개
수건 하나만 사내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신밧드처럼 사내는 저 수건을 머리에 감고
대 낮 온통 사막을 짊어 날랐을 것이다
신밧드를 태우고 날던 양탄자 끝이 풀려있다
드문드문 찢어진 흔적, 상처들이 선명하다
갑자기 들이닥친 어둠에 길을 잃은 양탄자
캄캄한 비행, 도시 어느 빌딩 숲을 헤치다
빌딩을 박고 도시 아래로 추락했을 것이다
사고는 어린 신밧드의 꿈들을 바스러뜨리고
양탄자의 나는 기능을 상실케 했던 것이
영혼은 밤이면 막차를 타고 어디로 떠나는가
멀리 해가 뜨는 사막을 비행하는 꿈으로
양탄자를 돌돌 말고 잠든 신밧드
그가 따뜻해 보이는 이유는 무언가
[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즐거운 제사
박 지 웅
향이 반쯤 꺾이면 즐거운 제사가 시작된다.
기리던 마음 모처럼 북쪽을 향해 서고
열린 시간 위에 우리들 一家는 선다
음력 구월 모일, 어느 땅 밑을 드나들던 바람
조금 열어둔 문으로 아버지 들어서신다
산 것과 죽은 것이 뒤섞이면 이리 고운 향이 날까
그 향에 술잔을 돌리며 나는 또
맑은 것만큼 시린 것이 있겠는가 생각한다
어머니, 메 곁에 저분 매만지다 밀린 듯 일어나
탕을 갈아 오신다 촛불이 휜다 툭, 툭 튀기 시작한다
나는 아이들을 불러모은다 삼색나물처럼 붙어 다니는
아이들 말석에 세운다. 유리창에 코 박고 들어가자
있다가자 들리는 선친의 순한 이웃들
한쪽 무릎 세우고 편히 앉아 계시나 멀리 山도 편하다
향이 반쯤 꺾이면 우리들 즐거운 제사가 시작된다
엎드려 눈감으면 몸에 꼭 맞는 이 낮고 포근한,
곁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가작 입상작
항해
손 병 걸
비린내 그윽한 다대포 바닷가
꼼장어 구이집 방문 앞에
각양각색의 신발들이 뒤엉켜 있다.
다른 구두에 밟힌 채 일그러진 놈
에라 모르겠다 벌러덩 드러누운 놈
물끄러미 정문만 바라보는 놈
날씬한 뾰족구두에 치근대는 놈
신발 코끝 시선들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어느새 젓가락 장단 끝이 나고
사람들 한 무더기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다대포 앞바다 썰물 빠지는 소리가
꼼장어 구이집 창 너머로 아득하다.
연방 뭐라고 중얼거리는 꼼장어 안주 삼아
슬며시 쓴 소주 몇 잔 들이켜고는
담배 한 개비 입에 문 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잠시 정박했던 배들이
저 푸른 바다로 떠난 것이었다.
그 순간, 꼼장어 구이집 안으로
환한 웃음 실은 만선(滿船)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200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꽃 이름, 팔레스타인
경 종 호
올해도, 고향엔 칡꽃이 흐드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계집 아이 몇이 고무줄놀이를 하고 놉니다. 고무줄이 튕튕 울릴 때마다. 호박이며, 박이며, 수세미 꽃이 핍니다. 어느 새 검정 고무줄에도 꽃이 피어, 달맞이꽃으로 피어, 계집 아이 몇은 노래를 부르며 툭툭 튀어 오릅니다. 미사일 날리듯 양지바른 골목길 벽돌 속에 아비와 오래비를 묻고 옵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예루살렘으 흐르는 계곡마다 넘쳐나는데 칡넝쿨 얽힌 이국의 틈으로 어김없이 달은 떠오릅니다. 어김없이 총알은 밀알처럼 떨어집니다.
폭격기가 지나간 바위 밑 두 눈만 깜박이다, 꿈벅거리다, 풀이 되고 나무가 되어 버린 못생긴 계집 아이는 어느 새 어미가 되고 전사가 되어 아이를 안고 모래 틈을 가로 지르며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의 군화에도 꽃이 피었습니다.
바위를 덮고, 돌산 넘쳐나는 꽃이 피었습니다. 동방 외간 사내가 보내는 꽃, 생리를 하고, 배
란이 지나 생산을 하는 동안에도 그 꽃이 신화(神話)보다 더 질긴 꽃이었음을, 옆구리에 낀 아이가 그 꽃을 닮았다는 것을 몰랐어도 그녀는 좋았습니다.
[2005년 국제신문신춘문예 시당선작]
혁필화(革筆畵)를 보며
이민아
맞춤주문한 전각(篆刻)을 품고 도장집을 나서는 길,
인사동 돌확 옆 낡은 좌판 위로 어스름한 새벽을 펼쳐놓은
노인을 향해, 다채로운 구두코가 나이테처럼 둘러서서
푸른 중절모를 쓴 혁화쟁이의 거친 손이 그려내는 혁필화를 본다
어느새 기념족자 신청 순서에 놓인 아버지 이름 석자,
닳고 닳아 유통기한을 넘긴 듯한 넓죽한 가죽 붓에
곤궁한 물감을 묻혀 그려내는 획을 낮은 포복으로 따라가다 보면,
순식간에, 생면부지의 한 사내가 길어올린 필생의 알리바이를
어떻게 알아챘는지, 쉼 없는 영사기처럼 거침없이 풀어내는
혁화쟁이의 은밀한 내간체가 설화처럼 피어나고, 환하게
어룽거리는 혁필화 한 장으로 남은 아버지, 두 손 가득 펄럭이는데
네모난 비단천 속, 피뢰침같은 철심이 박힌 지문의 파원(波圓) 위로
바스락, 굴참나무 거친 수피가 뗏목처럼 흐르다 멎고
저만큼 달아난 행서체 굴곡 따라 범람하는 푸른 바다,
서늘한 그늘 겹겹 장마 속에 깃들어 계신 아버지 용오름을 하며
빈한의 그림자를 도려내던 모진 칼바람을 듣는다
정자체로 양각한 옥돌전각을 아버지의 혁화와 번갈아 보며,
온전히 다 타버린 참숯처럼 더 이상 사그라들 것도 없던
옥탑방 가득 고인 내 아버지 시린 청년을 읽는다
장난감 블럭을 쌓아 안으로만 숨어들던 내 나이 미운 일곱 살
문득 주머니 속 깊이 넣어둔 전각 틀이 비좁다, 여기
가난의 골목 끝에 펼쳐진 혁필 한 장은 비로소 마주 앉은
탁란(托卵)의 깊은 둥지, 수척한 아버지 긴꼬리태양새되어
끝없는 비단길 위로 날아가는 에움길인지도 몰랐다
[2005년 경인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
철거지역
정경미
굴피집 처마 끝에서 포크레인이 홰를 친다
노란 살수차가 산동네의 새벽을 깨우며
을씨년스런 거리를 적신다
콘크리트 더미에서 요란하게 터져 나오는
철지난 전화부가
다이얼을 돌리며 안부를 묻는 동안
재개발 택지 분양 프랭카드는
부푼 몸을 날리는 햇살에 눈을 뜬다
비닐 하우스의 골담초는
봄을 기다리며 세간들을 살피고
떠도는 개똥지빠귀새 추운 어깨에
살풀이구름이 내려앉는다
찢긴 연체료 고지서가 수화를 건네며
검은 입술에 묻은 상처를 펄럭이고
왼쪽 어깨가 밀려나간 외등이
백밀러 속으로 뒷걸음질 친다
멈춰버린 괘종시계는 언제나
뜨거운 한낮에도 저무는 하늘을 가리킨다
팽팽한 오후가 하수도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골목길은 말 잔등처럼 출렁거리며
어두운 길목에서
희미한 등불을 켜고 있다
[2005년 강원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
안개
최재영<경기도 평택시>
길을 나서면 안개가 먼저 다가온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내력
지상의 열린 틈마다 안개가 스며들고
사람들은 한번쯤 기침을 호소한다
새들은 노래하지 않으며
길은 늘 젖어있다
세상의 새벽은 잠 못 이루는 곳에서 먼저 개어나
충혈된 소음이 도시를 빠져나가고
밤새 안개에 젖어 퉁퉁 불은 가로등이
불면의 문장처럼 침침하다
정오가 되기까지는 완전한 침묵이다
이곳의 시간은
안개의 흐름에 따라 정해진다
사물들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낼 때쯤이면
정오의 햇살이 길의 한복판까지 나와 있다
지루한 변명들이 길게 꼬리를 남기고 사라진다
내 안에 내가 관여할 수 없는 것들처럼
대부분의 안개는 길 위에서 소멸해 버리고
구부러진 생의 길목마다
어둠은 먼저 찾아드는 법
새들은 모두 어디로 날아갔을까.
[2005년 광주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
멜순
강윤미
길섶 가시덤불 속에서
용케도 멜순을 찾아내시는 어머니
재잘거리는 내 눈이 서운할까
마주치시는 것도 잊지 않고
말에 간간이 추임새를 넣어주면서도
그녀의 등허리는 보이지 않는 그것을 향해 있다
두 눈 부릅뜨고 그녀의 눈길을 따라가 보지만,
내 눈에는 엉킨 실타래같은
가시덩굴 뿐
선밀 나물은 나를 피해 요리조리 숨어 있다가
어머니가 부르면 얼른 달려와 다소곳이 앉는다
그 부름으로 환해지는 산보길
멜순도 허겁지겁 봄을 불러와 꽃을 피운다
내 입에서 나오는 선밀 나물과 어머니의 멜순
길바닥에서 엉켜 뒹구는 그 말들을 모아
어머니는 버무리신다
데쳐도 향기는 손끝에 남고,
어머니 몸엔 멜순향 나는 파스가 숨어 있다
**멜순: 선밀나물의 제주도 방언
[2005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항아리
최재영
처음 나는 겸손한 흙이었다
진흙 층층이 쌓인 어둠을 밀어내고
누군가와 끈끈하게 얽혀진 숨결
불룩한 옆구리를 뽐내며
어느 집의 연륜을 저장하는,
도대체 우화를 꿈꾸지 않았건만
나는 햇살을 움켜쥐고
내 안의 목록을 삭여내는 중이다
아주 오랫동안
해마다 비밀스런 내력을 보태며
맛과 맛, 그 아귀를 맞추는 시간들은
서로 맥박을 주고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럴때마다
번쩍이는 세월의 빗금하나 그어지고
그리운 것에 대한 열망으로
짜고 싱거움에 길들여진 것들
손꼽아 여닫히던 햇살들
점점 순도 높은 깊은 맛을 우러낸다
내게 저장된 세월을
프리스틱 통에 담아가는 사람들,
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으며
겸손한 덕담 하나씩 건네준다.
[2005년 전북중앙신문 신춘문예 가작]
겨울 강가의 사시나무
정지웅
그래 아직은 행복하구나
네 그루터기에
부모 없는 잡풀 몇 키우고 있구나
호주머니에 숨어있는 한 가계의 벌레들
잎사귀에 재우고 나뭇가지에 앉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모두들 잘 보살펴 주었구나
작년부터 꽃 피우지 못하여
영양제 꽂고 긴 겨울을 나더니
올해도 꽃 한 송이 없이 낙엽만 태우고
지붕 없이 살아가는 새들의 엄마가 되었구나
산다는 것은 숨이 내려앉는 순간까지
제 것이 아닌 목숨들을 껴안고 사는 일
죽어서도 발끝을 모아
가까운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었구나
수면 위에 배 한 척 떠 있지 않아도
강물은 흐르고 갈대는 손을 흔든다
어름치는 네 머리 위를 지나 떨어진
가슴 뜨거운 별을 남몰래 주어 먹고
나는 떨어지는 낙엽들을 주어다
세상 슬퍼하는 사람들과 빵을 구워야겠다
잃어도 모든 것이 온전할 사시나무여
눈 내리는 캄캄한 밤이 오면
너의 가지마다 살찐 빵을 달아주어야겠다
[2005년 전북중앙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가작]
달의 페달
이우규
지상에 새벽 달빛이 내려앉는다
삶의 모퉁이를 돌고 돌아가는
낡은 자전거 위 촉촉한 이슬이 스며들수록
삐걱거리는 생의 다리를 동동 구르며
어두운 길 밝혀줄 눈, 생기 있으라고
힘껏 페달을 밟는다
세상 어디든 달려나갈 듯
의지를 펄럭이는 깃발 아래
개미떼 같은 활자들 사이로
유럽풍의 고급 아파트 한 채,
바겐세일 명동 의류 한 벌씩 단단히 끼워 넣고
한층 두툼해진 신문들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신문이 비대해질수록 우리네 삶의
외투 한 벌 두툼해 질 수 있다면
뒤뚱거리는 생의 어깨를 움켜쥐고
어두운 세상 시원하게 밝혀주라고
힘껏 페달을 밟는다, 자꾸만
따라오는 새벽 하늘가의 초승달
누가 저 달에 페달을 달아놨을까
[2005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오래된 집은 달밤에 알을 품는다
최종무
보름 달빛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부러진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여물 냄새를 풍기며 올랐다
봉당 무너져 내린 틈으로 구렁이 허물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오얏나무가 뒤울안에 새까만 알들을 수북이 낳아 놓았다
달빛이 알들을 품고 있었다
방에서 아버지 마른 기침소리가 났다
쪽문이 열렸다
이제 왔니
네 기둥은 비스듬히 개울을 향해 누워있었다
함석지붕에 베인 손바닥에서 붉은 녹물이 흘렀다
오래 전부터 나는 파상풍을 앓고 있었다
덧난 생채기에서 바람이 나고 있었다
바람은 집을 감싸고 휘 돌았다
마당귀 미륵 바위 그늘에서
질경이 씨가 여물고 있었다
달빛이 녹슨 괭이 날을 노랗게 벼렸다
오는 봄엔 굵은 물푸레 자루를 박고
비탈 밭을 팔 수 있을 거라고
널빤지 부엌문 앞에서
짤순이가 벌건 쇳물을 짜내고 있었다
보름 달빛 술렁이는 오래된 집에선
까만 알들이 부화되고 있었다
집이 일어나 나를 손짓해 부르고 있었다
뚫린 창호지 안에서 까만 눈의 아이가 마당을 보고 있었다
이제 왔니
[2005년 영남일보 문학상 시 당선작]
라훌라
최해경
-길모퉁이에서
누군가를 부르며
부르트며 바람이 거리를 휘감는다
어둔 밤 얼룩처럼 드문드문 가로등이 번지고
막차를 기다리는 내 등뒤에서
멀어져라 뒤돌아보지 마라
바람은 쉰 목소리로 다그치듯 나를 자꾸 떠민다
그는 저 만치서 나를 향해 말없이 서 있을 것이다
자울대다 눈을 거푸 치켜 뜨는 길모퉁이 가게 불빛 사이로
밤은 더욱 자우룩해지고
여전히 그의 눈빛은 차게 떨리겠지
스무 살 적, 객지에 나를 처음 떨구고
곧 목놓아 울 듯 그렁그렁하던 그 눈빛이
내 가슴에 단단히 말뚝을 박고는
녹작지근한 해질녘이면 어지러이 발길질을 해대곤 했었다
어미 소의 말간 눈망울에 들이치던 석양빛처럼
빛의 눈물 자국 다 떠메고
차마 못다한 말 되새김질하듯
그리움도 순하게 견뎌야한다는 것
오랜 후에야 그 눈의 얼룩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한여름 소낙비가 얼룩져 시린 겨울 강 핥는 여울이 되고
사랑은 얼룩져 돌이킬 수 없는 그러나
돌이킬 밖에 없는 괴물같이 눈부신 추억을 매달 듯
얼룩이 마냥 뼈아픈 얼룩만은 아니지
이제서야 나는 나를 다독여준다
언제나 뒤돌아보면
나의 짓무른 가슴의 얼룩, 아버지가
끝내 저기 서 있다
세상 없어도.
* 산스크리트명은 라훌라(Rahulla)이다. 장애로 의역되고 있다. 싯다르타가 생로병사의 고통을 목격하고 출가를 결심하여 돌아오던 길에 아들이 태어나 "라훌라(장애)가 생겼구나!"라고 통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2005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중 심
심 수 향
11월에도 꽃이 필 수 있다는 듯이
배추가 제 삶의 한창때를 건너고 있다
꽃을 피우고 싶어하는 푸른 이마에
금줄같은 머리띠 하나 묶어주려고
이참 저참 때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 배추는 중심이 설 무렵
묶어주어야 한다고 귀뜸을 한다
배추도 중심이 서야 배추가 되나보다
속잎이 노랗게 안으로 모이고
햇살 넓은 잎들도 중심을 향해 서기 시작한다
바람이 짙어지는 강물보다 더 서늘해졌다
띠를 묶어주기에는 적기인 것 같아
결 재운 볏짚을 들고 밭에 올랐더니
힘 넘치는 이파리가 툭 툭 내 종아리를 친다
널따란 잎을 그러모아 지그시 안고
배추의 이마에 짚 띠를 조심스레 둘렀더니
종 모양 부도처럼 금새 단아해졌다
부드러운 짚 몇 가닥의 힘이 참 놀랍다
이제 배추는 노란 제 속을 꽉꽉 채우며
꽃과 또 다른 길을 걸어갈 것이다
추수 끝난 들녘에 종대로 서 있는 배추들
늦가을의 중심으로 탄탄하게 들어서고 있다
[2005년 동양일보 신인문학상(신춘문예) 당선작]
구두코에 걸린 달빛이 흐리다
하봉채
하룻밤이면 달이 차겠다
비우는 일만 남겠다
곁눈질 모르고 달렸어도
여전히 의문투성인 불혹의 세월
강가를 서성이다 구두를 벗는다
조심스럽게, 강물도 호흡을 멈춘다
온쉼표 하나 없던 일상으로
굽이 낮아지고 한쪽으로 기우는 구두
가죽이 닳고 헐거워져 모양 잃은 구두를
시멘트 둑에 가지런히 놓는다
풍덩, 몸을 던지면 꺾이던 순간마다
마디마디 스며든 악취를 씻어 낼 수 있을까
저리 잔잔하게 살아낸 날은 얼마였던가
양말을 벗으니 울퉁불퉁한 굳은 살
군데군데 각질이 일어나는 발이
놀란 듯 움츠린다. 양말은 구두에게
한 짝씩 나눠주고, 일상을 통째로 감아 쥔
넥타이와 채찍질만 일삼아 온
시계를 푼다, 디지털 포위망을 좁혀 오는
핸드폰도 내려놓는다
한여름인데 시멘트 강둑은 차갑다
한 쪽 발을 내 딛는다, 남은 발을
마저 들여 놓는다, 강물은 더 차갑다
한 걸음 두 걸음 흔들리는 횡보에 달빛이
흔들린다, 줄 선 빛고드름이
사납게 일그러진다
풍덩!
강 가운데 떠 있던 바지선에서
개구리 한 마리가 먼저 뛰어든다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을까
발목을 간질이는 파문은
짧다
이내 고요하다
구두코에 걸린 달빛이 흐리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 당선작
얼음을 주세요
박 연 준
어제 나는 남자와 자고 나서 홀로 걷는 새벽길
여린 풀잎들, 기울어지는 고개를 마주하고도 울지 않아요
공원 바닥에 커피우유, 그 모래 빛 눈물을 흩뿌리며
이게 나였으면, 이게 나였으면!
하고 장난질도 안쳐요
더 이상 날아가는 초승달 잡으려고 손을 내뻗지도
걸어가는 꿈을 쫓아 신발 끈을 묶지도
오렌지주스가 시큼하다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아요, 나는 무럭무럭 늙느라
케이크 위에 내 건조한 몸을 찔러 넣고 싶어요
조명을 끄고
누군가 내 머리칼에 불을 붙이면 경건하게 타들어 갈지도
늙은 봄을 위해 박수를 치는 관객들이 보일지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추억은 칼과 같아 반짝 하며 나를 찌르겠죠
그러면 나는 흐르는 내 생리 혈을 손에 묻혀
속살 구석구석에 붉은 도장을 찍으며 혼자 놀래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새벽길들이 내 몸에 흘러와 머물지
모르죠, 해바라기들이 모가지를 꺾는 가을도
궁금해하며 몇 번은 내 안부를 묻겠죠
그러나 이제 나는 멍든 새벽길, 휘어진 계단에서
늙은 신문배달원과 마주쳐도
울지 않아요
첫댓글 그레이스님 수고하쎴네요 벌써 3월 말이라 시춘의 흥분이 앋득한 기억인 줄 알았는 데 다시 읽어 보니 새삼스럽네요 내가 몰랐던 시도 있고 고맙습니다
수준높은 시만 올려놓았네요. 이런것도 시가 될 수 있는가하고 생각되는 그런 시도 있고요 여하튼 고맙습니다. 내일도 즐거운 하루가 되길...
언니..좋은 자료 감사해여...한번쯤은 읽어 본 글들이 벌써 아슴아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