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힘'이 없고 '백'이 없어 못 받았다 생각해요. '김철호'가 돌아오면 그때는 모든 게 다 밝혀지겠죠. 평생을 미국에서 도망 다니며 살 수는 없잖아요. 언젠가 한국에 돌아오겠죠. 오직 김철호만이 그 진실을 얘기할 수 있어요. 언젠가는…."
하버트 강, 김태식의 뒤를 잇는 한국의 저돌적 인파이터 문성길. 한국 복싱 전성기의 마지막 불꽃이 '10차 방어전의 편파적 승패'와 '2억원 사기'라는 풍파를 맞으며 신음 소리 한번 못낸 채 꺼지고 말았다.
"제가 다운도 뺐었는데 억울했습니다. 주변인들은 비즈니스 부족이 패배의 원인이라고 말을 해요. 그래도 다시 당당히 복귀해 일본 선수와 통합 타이틀 매치를 벌이려고 했어요. 정말 자신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형철 선수가 저와 대전할 일본 선수를 이겼었는데, 정작 이형철 선수는 저한테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는 선수예요.
근데 피땀 흘려 열심히 운동하면 뭐합니까? 9,10차 대전료 2억원도 못받은 상태에서 앞으로 받는다는 보장도 없이 뭘 믿고 운동합니까? 제가 원래 은퇴를 하려 했던 게 아니었어요. 통합 타이틀 매치가 바로 눈 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그래서 은퇴를 했던 거죠."
1993년 11월 13일 10차 방어전. 문성길은 멕시코의 호세루이스 부에노에게 3회 한 차례의 다운을 빼앗고도 2대 1로 판정패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3년 10개월의 왕좌가 소리없이 무너졌다. 그 당시를 기억하는 그의 얼굴엔 아직도 털어버리지 못한 회한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챔피언 벨트를 잃어버린 순간. 그에겐 기다렸다는 듯 갖은 시련이 덮친다. 눈자위가 찢어지고 코피까지 흘리며 벌었던 피땀 어린 파이트 머니 '2억원'이 증발해 버렸다. 온 국민이 증인이 되어 관람했던 9, 10차 방어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에게 남겨진 건 상처와 사람에 대한 배신감뿐이었다.결국 그는 없는 돈으로 사비를 털어 외로운 법정 공방을 시작했다. 그러나 경기를 주선한 프로모터 심영자씨는 책임이 없고 선수 매니저 김철호씨가 모든 돈을 가지고 미국으로 도피한 것으로 공방이 매듭지어졌다.
"권투위원회는 신경도 안 써요. 원래는 시합 전 프로모터가 권투위원회에 파이트 머니를 예치시키게 돼 있어요. 그후 선수가 시합을 마치고 정당한 파이트 머니를 받는 거죠. 근데 선수의 권리를 보호해주고 지켜주어야 할 권투위원회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요. 이건 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닌 모든 선수들의 문제예요. 복싱이 부활하려면 권투위원회부터 변해야 해요."
오랫동안 옆에서 그를 지켜본 조영섭 관장은 "문성길 선수는 사람이 너무 순수해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자신과 똑같은 줄 알죠" 라며 "문 선수의 죄가 있다면 김철호 매니저를 너무 믿은 것과 그저 열심히 죽어라 운동한 것 밖에 없어요"라고 말한다.
챔피언 시절 모 제약회사에서 그에게 이사자리를 제시했다. 은퇴 후 그가 그 제약회사에 들어가 한 일은 부산 주유소에 있는 사장 아들을 돕는 것이었다. 그렇게 3년을 버텼고 이런 저런 사업을 하다 97년 잠실 롯데 백화점에서 철판 볶음집을 열었다. 현재는 둔촌동에 있는 체육관을(문성길 복싱 클럽) 운영하며 부업으로 철판 볶음집도 계속하고 있다.
"정말 선수 땐 후회 없이 열심히 했어요. 원 없이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봤기에 아쉬움이나 과거에 대한 그리움은 없어요."
프로통산 전적 22전 20승 2패. 20승 가운데 16번을 KO로 이긴 한국의 돌주먹! WBA 밴텀급, WBC 슈퍼플라이급 2체급의 챔피언을 석권하며 한국 프로 복싱 경량급 사상 가장 무거운 주먹을 가졌던 복서. 그는 선수 시절 자신의 별명에 만족해 한다.
누가 뭐래도 주먹엔 자신이 있었습니다. 외국엔 '타이슨' 한국엔 '문성길'이라는 말을 듣는 게 좋았어요. 전 아마추어 시절부터 K.O율이 높았어요. 복싱에 있어서 기교나 파워 스피드 등 많은 것들이 중요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복싱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주먹을 뒷받침하는 체력이죠."
바로 그가 강조하는 '체력'에 막혀 번번이 그의 벽을 뛰어넘지 못한 선수가 있다. '원투'를 주무기로 화려한 기술을 선보인 아웃복서의 본보기 '허영모'. 유명우 대 손오공, 박종팔 대 나경민 등과 함께 문성길 대 허영모의 경기는 그 어느 세계 타이틀 매치 못지 않은 인기를 구가했다.스피드와 기술은 정말 대단했어요! 하지만 결국 고질적인 체력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죠. 저랑 세 번 싸웠는데, 세 번째 시합에서는 비록 제 생각이지만 허영모 선수가 체급을 올렸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아쉬움이 남아요. 무리한 체중 감량을 하느라 체력 소모가 더 컸을 거예요.
그 친구는 '프로' 스타일이 아니었어요. 본인도 프로로 전향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요. 게다가 아마에서 프로로 전향하는 것, 아마선수가 프로에서 성공하는 건 굉장히 어려워요. 멀리 살아서 연락은 자주 못하고 지금은 체육 교사로 재직중입니다."
그는 한국 복싱 역사상 아마와 프로에서 그랜드 슬램을 이룬 전무후무한 복서이다. 보통 문성길의 돌주먹하면 일반인들은 거침 없는 양훅을 떠올리지만, "문성길의 레프트 잽에 당했다"는 허영모 선수의 고백대로 그의 진가는 훅이 아닌 '잽'에 있었다.
그와 함께 운동한 조영섭 관장은 "사실 일반인들은 문성길 선수의 '훅'을 많이 얘기하는데 내가 볼 땐 '훅'보다 '잽'이 대단했어요. 실제로 문 선수도 매일 잽을 단련하기 위해 남들이 잠든 시간 홀로 남아 2시간씩 아령을 들고 '잽' 연습을 했죠"라며 남모를 사연을 들려주었다.
그는 '아프리카의 표범' 가나의 '나나코나두'와의 시합을 최고의 라운드로 뽑았다. 1991년 3월 16일. WBC의 지시에 따라 스페인까지 날아가 벌인 나나코나두와의 재대결은 한국 챔피언이 치른 적지 방어전 가운데 가장 통쾌한 시합 중 하나였다. 그 시합을 통해 그는 '복싱이란 피하지 않고 전진하며 싸우기 위해 존재한다'라는 복싱 미학을 여실히 보여줬다.
"나나코나두의 1차전 시합에서는 테크니컬 판정을 받아 승패의 결과가 찜찜했어요. 그 후 적지인 스페인에서 제가 보란 듯이 다운을 빼앗아 당당히 승리했던 그 시합이 가장 잊을 수 없고, 개인적으로도 뿌듯하고 명예로운 승부였죠."
온 국민을 열광시켰던 7,80년대 최고의 프로 스포츠 복싱. 한국 복싱 전성기의 마지막 불꽃이었던 그가 사라지자 복싱도 사양 스포츠로 급속히 전락하고 만다. 스타의 부재, 권투위원회의 무능, 시대의 변화 등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와 조 관장은 복싱 침체의 가장 큰 원인으로 '비현실적인 파이트 머니'를 지적한다.
"세계 챔피언이 아니라면 먹고 사는 게 불가능하죠. 4라운드 프로 선수의 대전료가 보통 40에서 50만원인데 그 중 52% 정도 20만원 내외를 선수가 받아요. 보통 한국 챔피언의 대전료는 200만원인데 그것마저도 시합이 없어 복싱을 프로 직업화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 돈 받고 어느 누가 운동합니까?"그는 복싱의 부활을 여자 복싱에서 찾는다. 이제 막 발아한 여자 복싱이 오히려 대중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유발시키며 잊혀진 복싱 열기를 되찾아주지 않을까 지켜보고 있다. 특히 그는 이인영 선수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여자선수로서는 보기 드문 파워와 체력을 겸비한 선수예요. 몇 번 시합도 봤는데 정말 대단하더라구요. 운동으로 완벽하게 다듬어진 몸이죠. 앞으로도 계속 그 기량을 유지하고 더 노력한다면 대성할 수 있는 선수예요."
이젠 더 이상 복싱이 배고파서 하는 운동이 아니다. 아무 것도 없이 순수한 맨몸 하나만으로 명예와 부를 동시에 얻을 수 있던 시대는 끝났다. 다이어트와 본인의 체력을 위한 즐기는 복싱 문화가 서서히 자리잡아가고 있다.
"사람들이 아직도 복싱을 흔히 싸우기만 하는 위험한 스포츠라고 잘못 생각을 하는데 실제론 그렇지 않아요. 혼자 줄넘기하고 샌드백 치며 개인이 즐기는 스포츠예요. 더불어 최단 시간에 최고의 효과를 내는 운동이기도 하구요. 체력도 관리하며 즐기는 건강한 운동입니다."
과거의 영광과 상처를 뒤로 복싱 체육관과 철판 볶음집을 운영, '현재'를 건실히 살아가고 있는 그에게 챔피언의 화려함이나 거만함은 없다. 정직하게 흘린 땀과 끈질긴 근성으로 서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했던 그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문성길답게 정직하고 건강하게 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과거 선수 시절처럼 매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