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산속 풍경을 뽑내는 자리에는 절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관아 있던 곳에는 향교가 자리잡고 있고, 냇가와 산풍경이 어우려진 곳은 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아름다운 산수가 어우려진 자리에서는 딴 마음 안먹고 마음 수양과 학문을 쌓을 수 있었는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절은 영주 부석사, 서원은 안동 병산서원을 꽂을 것이다.
병산서원 만대루에 바라본 낙동강과 병산은 많은 사람들의 넋을 빼기에 충분하다. 왜? 병산서원, 병산서원 하는지 만대루에 올라 가보면 안다. 그냥 좋다.
서원은 요즘으로 치면 사립학교다. 병산서원은 풍산현에 있는 양반들이 세운 서원이다. 사당에는 서애 류성룡, 류성룡 셋째 아들 류진을 모셔두고 있다. 사당에 위패를 모시는 사람들은 학문 발전과 나라를 위해 끼친공이 큰 사람들일 것이다.
요즘 사립학교에 견주어 본다면 조선시대 서원에 모신 위패만큼 모실수 있는 학자가 몇명이나 될까싶다.
사립학교가 처음 생길때에는 나라에서 다하지 못한 본래의 교육기능을 해왔다. 학교를 세우기위해 개인돈과 노력을 아끼지 않은 설립자도 많았다. 그러나 몇년전 사립학교법 개정을 통해 본 모습은 교육기관 본래의 모습을 잃은 점이 많아 국민들을 실망시키고 있다. 영화 '공공의 적' 에서 일부 몰지각한 사립학교 관계자들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문제는 영화의 모습이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나라 많은 절이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불에 사라져 버렸다. 서원도 전쟁과 불로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허물어지게 된다. 흥선대원군이 지금 정치를 한다면 문닫을 사립학교가 많을 것이다.
병산서원도 임진왜란 당시에는 풍산현 시장에 있던 풍악서당을 류성룡 선생의 지시에 따라 병산 앞으로 옮기고 병산서당으로 이름을 고쳐 부른다.
그런데 병산서원은 골짜기 깊은 곳에 있어 일본군에 의해 침탈을 당하지 않았지만 임진왜란 중에 일부 백성들이 불을 질렸다고 한다. 왜? 병산서당에 불은 지른 것일까? 개인의 원한이 때문일까? 아님 병산 서당에 다니던 양반 자제들이 백성들에게 횡포을 부렸을까? 이에 대해 정확히 밝혀진 자료는 없다고 한다.
다행히 병산서원은 대원군때 내려진 서원철폐때에도 살아난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된다. 풍경 좋은 곳에서 공부한 양반 자제들이 훌륭한 선비가 되었을 것이다. 개인의 삶만을 닦는 학자가 아니라, 백성들이 고루 잘 살수 있는 그런 학자로서 말이다.
▶ 미국 부시 대통령이 방문해서 심은 소나무. 가장 한국적인 곳을 찾은 곳이 병산서원이다. 영국 엘리자베스2세 여왕이 찾은 곳이 안동 하회마을과 봉정사이다.
▶ 서원 앞에 있는 낙동강과 병산. 병풍처럼 둘러쌓인 산이라고 병산이라고 한다. 이 물이 하회마을을 돌아 나간다. 요즘 여기서도 레프팅을 한다. 병산 앞으로 낙동강 대운하가 만들어진다면?
▶복례문 행랑채에 있는 가마.
▶만대루에 올라가는 통나무 계단. 계단이 하나의 조각품이다.
▶만대루 바람구멍(풍헐)에서 바라본 교실(입교당).
▶ 만대루에서 바라본 병산은 한폭의 산수화다. 사계절 변화가 없다면 고정된 그림이 되어 답답함을 느낄을 것이다.
▶만대루 천장. 보와 써가래 어우려져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고 있다.
▶입교당. 교장실(명성제) 교무실(경의제) 교실(강학당)로 이루어져 있다.
▶존덕사. 사당이다. 배롱나무가 꽃은 피우면 사당의 단청과 어우져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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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굴렁쇠 원문보기 글쓴이: 갈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