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암사 체류기 [2002. 8. 11 ~ 8. 16]
[선암사 소개]
해천당[빌린사진]
아도화상 창건, 통일신라 도선국사 와 고려 대각국사 중흥
조선중기 호암대화상 선교양종 현양...
의천 대각국사가 고려시대 중국 송나라에 다녀와서 본사 대각암에서 오도하고 산 이름을 조계산이라 한 것은 육조 혜능대사의 찬란한 종지종풍이 본사로부터 천하에 널리 거량될 것을 시공을 넘어 꿰뚫은 일이라 할 것이며 혹독한 추위를 겪은 뒤라야 코를 찌르는 매화향기가 나듯 조선의 억불사태에 우리 본사에서 걸출한 종안이 연이어 속속 배출됨이 다른 일이 아니다.(주지 지허스님의 글에서 인용)
曹溪山 仙巖寺 현판이 걸린 一柱門 안쪽에는 전서체의 古淸凉山海川寺 현판이 걸려 있다. 절의 잦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조선중기 이름을 海川寺로 바꾼 적이 있었다 한다.
일주문 지나, 중국 육조시대부터 있어온 오랜 절이라는 뜻의 六朝古寺 현판(西浦 김 만중의 아버지 김익겸[1614~1639]이 썼다고 전해진다)이 있는 萬歲樓를 지나면 尋劍堂과 說禪堂이 좌우로 배치된 가운데 三層雙塔이 있고 그 위로 대웅전이다.
대웅전의 현판은 純祖의 장인이며 안동김씨 세도의 장본인이었던 金祖淳 書. 작년 추석 귀경 길에 잠시 들렀을 때 한창 보수공사 중이었다. 지금은 말끔하다. 단청을 새로 입히지 않은 것이 오히려 포근함을 느끼게 한다. 보수 공사할 때 본존불 좌대 밑에 부처님의 발 형상이 바닥에 암각되어 있었다 한다. 주지스님 말씀은 과거 이곳은 미륵전이 자리잡고 있었고 대웅전은 지금의 三聖閣 자리였다 한다.
주지스님 이야기 한 토막...
옛날 주지스님이 젊은 스님들을 대웅전 앞에 앉게 한 후 "이곳에서 바다가 보인다. 바다가 어디 있는가?" 젊은 스님들이 아무리 찾아 보아도 바다가 보일 리 없다. "안 보입니다." 하는 스님에게 "그것도 안 보이느냐?" 하며 棒을 메기고, "보입니다" 하면 거짓말 한다면서 또 방을 메겼다. 그러나 그곳에 바다가 있었다!!!!
대웅전 왼쪽 심검당 벽에 투각된 海水라는 글자가 그것. 잦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비보 목적으로 海水 두자를 장식해 놓고 젊은 스님들의 불조심 경각심을 일깨웠다는 것.
팔상전과 불조전 가운데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圓通閣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 모셔진 관음보살상은 선암사 중흥조인 護巖禪師가 조성한 것이다. 그의 스승 枕肱(침굉)스님으로부터 선암사를 보호하라는 뜻의 '護巖'이라는 호를 얻은 그는 선암사 중흥을 위하여 발원하고 지극정성으로 기도하였으나, 효험이 없자 낙담하고 선바위(立巖) 위에 올라가 투신한다. 이때 관세음보살이 현현하여 "그대는 왜 이렇게 성미가 급한가?" 하며 그를 구해준다. 그가 친견한 관세음보살 모습을 그대로 조성하여 지금의 원통각에 모셨다.
조선시대 正祖 임금이 후사가 없어 당시 선암사의 큰 스님에게 부탁하여 이곳에서 기도 후 純祖를 낳았다 하여 예로부터 기도가 영험한 곳으로 인식되고 있다. 조선왕실에서 발원하여 건립된 이 전각은 왕실 齋閣에 特有한 丁字형 건물구조로, 순조가 12 세때 직접 썼다는 大福田 御筆 현판이 남아 있다.
원통전 뒤로 湖南第一禪院 정문현판과 안쪽에 世界一花祖宗六葉(추사 서) 현판이 걸린 문간채를 지나면 정면에 응진전이 있고 좌우로 역대 조사 스님들의 진영을 모신 진영각과 달마전이 있다. 응진전 왼쪽 미타전에는 지허 주지스님이 거처하고 있다. 응진전 뒤쪽에 한사람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작은 공간으로 이루어진 山神閣이 또 있다. 그래서 선암사는 대웅전 구역, 원통각 구역, 칠전선원 구역으로 각각 독립적인 공간구조를 갖추고 있는 별개의 사찰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칠전선원 안 뜰에는 담장 넘어 야생 차밭에서 흘러나오는 石間水가 긴 통나무에 홈을 파서 만든 수로를 따라 아래로 흐르고 있다. 중간에 화강석 샘(돌확)에 고인 물은 넘쳐서 다시 대나무로 된 수로를 타고 두 번째 돌확에 고인다. 이렇게 크기, 높이, 모양이 서로 다른 4 개의 돌확이 물길로 구불하게 연결되어 있고, 표주박 두개가 놓여 있다.
動과 靜, 人工과 自然의 對比와 조화를 구현한 옛 조경의 古拙함을 느낄 수 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한밤중, 아니면, 달 밝은 밤의 적요함과 그 정적을 깨는 돌확을 넘쳐 흐르는 물소리를 상상해 본다. 그 때 소리를 “본다”고 할 수 있을까?
첫 번째 물(상탕)은 부처님께 올리는 정화수, 다례용 찻물로 쓰인다. 상탕에서 대나무를 연결해 흘러 모이는 두 번째 중탕 물은 스님들이 마시는 찻물로, 삼탕은 밥과 반찬 등 음식물을 만드는데, 제일 아래 있는 하탕은 허드렛물로 사용한다.
(조형성과 소박한 아름다움이 국보급이라는 이곳은 유명 사진 작가들이 그토록 촬영하고 싶어하나 개방하지 않고 있다 함)
운수암 가는 길목에 별채로 선방으로 쓰이고 있는 無憂殿과 안채에 覺皇殿이 있다. 각황전 부처님은 선암사 초창기에 조성된 부처님으로 추측하고 있다. 건너편 끝머리에 講院으로 쓰이고 있는 無量壽閣이 있다. 현판은 추사글씨.
현 주지 지허스님이 여러 대중들의 도움으로 조사당을 짓고, 우리나라(海東) 선종의 傳法初祖 태고보우 스님과, 당 육조혜능, 임제의현 세분 진영을 조성하여 봉안하고 있으며, 초조 달마대사, 양기방회(楊岐方會 : 993-1046), 태고의 스승 元 石屋淸珙 스님 세분의 진영을 현재 조성 중에 있다.
봉안된 세분 진영을 직접 보여 주시면서 "이 진영이 100년 후에는 우리 나라의 국가보물로 지정될 만큼 귀한 유산이 될 것이다"는 주지스님의 말씀이다. 진영 조성불사에 대한 그의 자부심과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역사는 지금 여기서도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선암사 체류기(2)
선암사는 우리 나라에서 제일 아름다운 절로 일컬어질 만큼 사계절 꽃이 만발한다.
꽃처럼 장엄한 화엄세계를 구현하고자 함이었을까?
800년 된 차나무, 300년생 철쭉, 대웅전 앞 400년생 영산홍, 고목동백, 왕벚꽃, 자목련, 백목련, 雪吐花(佛頭花), 九峰花(홍황철쭉), 부용, 수국 등 절 전체가 온통 꽃나무 일색이다. 특히 찻잎이 움트는 봄, 영산홍과 벚꽃이 필 무렵이면 꽃빛이 반사되어 사람 얼굴이 벌겋고 또 밤에는 등불이 필요없을 정도라 한다. 아치형의 화강암으로 만든 昇仙橋를 지나 降仙樓 뒤쪽의 선암사 입구 넓다란 언덕배기와 절 뒤편에는 모두가 차밭이다.
雲水庵 가는 길목 - 無憂殿 담장에 검은 매화등걸들이 줄지어 있다. 이 `仙巖 古梅'도 600년 된 것이라 한다. 이끼 낀 아름드리 등걸이 그걸 말해준다. `매화 600년', 나이 걸친 매화나무로서 이 보다 더한 것은 몇 없으리라. 이 古梅는 이른 봄 꽃송이가 신종 매화만큼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으나 그 향기는 여느 매화보다 진하고 멀리 멀리 퍼진다 한다.
푸른 산은 쓸지 않아도 띠끌이 없고
열린 사립문으로는 찾아오는 이, 님이로다
눈 덮인 봉우리 너머 지는 달이 찬데
창문 앞 한 가지여, 피었구나 매화여
山地無塵長不掃
柴門有客구方開 *구 : 두드릴 구(手 + 口)
雪晴斜月侵담冷 *담 : 치자나무 담 (艸 + 詹)
梅影一枝窓上來
- 石屋 스님
어느 해 이른 봄, 꽃봉오리 내민 선암 古梅의 향에 취해 볼 시절인연이 찾아올지 모르겠다...
남도의 이른 봄 이곳 선암사에도 어김 없이 붉게 피는 꽃으로 동백이 있다. "어떤 이"는 동백의 아름다움은 "그 소멸에 있어 아름다운 자기 목을 일순에 떨어 뜨려 추하지 않은 일생을 마치는 것에 있다"는 아름다운 표현을 썼다. 지금 그 동백이 반질반질 윤기 나는 잎과 함께 꽃을 피웠던 자리에 야무지게 생긴 둥그스럼한 열매를 매달고 있다. 현오 스님이 거처하는 방에는 동백열매를 모아 짠 동백기름으로 윤택을 낸 나무탁자가 있다. 동백기름은 참기름 처럼 구수한 냄새가 나지만, 식용으로 쓰지는 않는다.
[빌린사진]
白雪이 눈부신
하늘 한 모서리
多紅으로 불이 붙는다
차가울사록 사모치는 情火
그 뉘를 사모하기에
이 깊은 겨울에 애태워 피는가
-丁薰의 冬柏
불조전 바로 앞에 서 있는 芭蕉 잎이 한여름의 풍성함을 더해준다. 모든 것을 감싸듯 넉넉한 자태는 王者의 기상을 대변한다 해서인지 조선시대 正祖가 그린 수묵화로 芭蕉圖가 있다.
한여름 이 즈음에는 순백의 옥잠화와 相思花가 여기저기 만발하고 있다. 옥잠화는 순백의 꽃잎 속에 머금은 향기를 "함부로 흘리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다 밖으로 흘러나와 바람에 실린 강한 향기는 지나는 이의 코를 찌른다.
相思花는 풀잎이 봄철에 나오며 연한 녹색이고 6~7월에 갑자기 시들어 버린다. 풀잎이 없어진 8월 경에 꽃대가 땅속에서 올라오는 데 높이 60센티미터 정도까지 자라고 그 끝에 네 송이 내지 여덟 송이의 꽃이 핀다. 꽃은 길이 9~10센티미터 정도의 통꽃으로, 통 부분의 길이는 2.5센티미터 정도이며 연한 홍자색을 띤다. 꽃잎은 여섯 개로 갈라지며 옆을 향하여 비스듬히 퍼진 모습으로 핀다. 수술은 여섯 개이며 꽃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아직 한번도
당신을 직접 뵙진 못했군요
기다림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를
기다려 보지 못한 이들은
잘 모릅니다.
좋아하면서도
만나지 못하고
서로 어긋나는 안타까움을
어긋나 모지 않은 이들은
잘 모릅니다.
날마다 그리움으로
길어진 꽃술
내 분홍빛 애틋한 사랑은
언제까지 홀로여야 할까요
오랜 세월 침묵 속에서
나는 당신께 말하는 법을
배웠고
어둠 속에서
위로 없이도 신뢰하는 법을
익혀왔습니다.
죽어서라도 꼭
당신을 만나야 하지요
사랑은 죽음보다 강함을
오늘은 어제보다
더욱 믿으니까요 - 이해인
그러나, 선암사, 쌍계사, 선운사 등 사찰에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불교의 不二의 이치를 사유케 한다는 설이 있다. 또, 보다 현실적인 목적, 즉 옛날 절에서 책을 많이 만들던 전통에 비추어볼 때, 책을 제본할 때 쓰이는 풀에 곰팡이가 생기지 않도록 이 꽃의 독성을 이용하기 위해서 절에서 재배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상사화로도 알려진 꽃 중에 절 입구 三印塘 연못에서 추석 무렵 피는 꽃무릇(일명 석산화)이 있다. 수면에 비치는 빨간 꽃무릇 아래 연못에는 하얀 睡蓮이 피어 있다.
삼인당 [빌린사진]
조선시대 선암사는 정유재란의 참화 속에 1 철불, 2 보탑, 3 부도와 문수전, 뒷간, 조계문 만이 남았다고 한다. 이후 100 년이 지난 후부터 각고의 노력 끝에 선암사는 복구될 수 있었다. 실례로 護巖 若休(1664-1738) 등은 원통각을 세우는 등 각 전각의 중창불사를 일으키고 1707년에 昇仙橋와 <曹溪山 仙巖寺 重修碑>를 건립하였다.
이와 더불어 1691년 栢巖 性聰(1631-1700)이 선암사에서 대대 적인 화엄대회를 열어 화엄교학의 명문강원으로서 전통을 확립하게 된다. 1765년 상월새봉(1687-1767)스님이 개최한 화엄강회가 펼쳐져 교학이 크게 융성하여 조선시대 말기와 일제 강점기까지 남암인 大乘庵에서는 涵溟-景鵬-擎雲-錦峰 스님으로 이어지는 1문 4대 강사를 배출하여 그 전통을 이어 갔다.
조선 후기 화엄5대 강백을 배출할 만큼 교세를 떨쳤던 선암사는 당시 본사 주위에 대각암(大覺庵), 대승암(大乘庵), 청련암(靑蓮庵), 운수암(雲水庵), 선조암(禪助庵), 향로암(香爐庵), 비로암(毘盧庵) 등 22개 암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한다. 동서남북에 각각 위치한 네 암자 중 북암인 운수암은 비구니 도량으로 남아있다.
칠석날 일행 몇이 운수암을 참배하다가, 그곳 비구니 學人 스님들을 지도하고 있다는 明智스님의 따뜻한 환대와 함께 차를 대접받는 행운을 얻었다. 집안이 정갈하다. 부처님 생존 당시 이미 여성 성직을 허용할 만큼 불교는 혁명적이었지만, 남녀 성직간의 차별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地藏]사상이 출현하면서 비구니의 지위가 본격적으로 향상되었다고 明智스님은 설명하신다.
우리 일행을 이끌고 있는 법안 법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조선시대 탄압정책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면면히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지장신앙의 힘이 컸다고 한다. 유교를 숭상하였지만, 인간의 근본문제인 생사에 대하여 유교가 만족스러운 해답을 줄 수 없었다. 더구나, 명부세계의 한 중생도 남기지 않고 모두 구제할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의 서원은 돌아가신 부모 조상에 대한 효도사상과 어우러져 사대부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의 큰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지장신앙이 불교의 맥을 잇게 한 힘이 된 것이다.
남암인 大乘庵은 최근 복원되었다.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힌 순간, 대승암에서 조계산 정상이 한 눈에 들어온다. 굽이굽이 내려오는 길에 문득 고개를 드니, 운수암이 보인다. 전성기 시절에는 이곳 대승암에서만 20 여명의 도반들이 공부를 하던 곳으로 선암사의 유명한 강백들은 이곳 출신이 많았다 한다. 현재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스님들은 이 암자에서 배출되었던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전통을 이어가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굳은 의지로 정진하고 있다.
대각국사 의천이 머물렀고, 현재도 그의 부도가 남아있는 서암 - 大覺庵은 당시의 명성에 비해 지금은 건물이 많이 퇴락해 있다. 현재 스님 한 분이 지키고 있는 이곳은 조만간 東庵과 함께 복원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라 한다.
선암사 체류기(3)
6년차 관음 기도회를 하는 일행과 광주에서 참여한 도반 등 모두 14명의 도반이 일요일 오후 늦게 합류했다.
6시에 저녁 공양. 7시에 대웅전에서 저녁예불 후 원통각에서 관음기도. 9시 취침 시간이다.
새벽 2시 30분경 잠을 깬다.
[아침예불]
道場釋...
[도량석 집전스님은 법당 어간 앞에서 시작하여 도량을 두루 돌면서 경문을 염송]
도량석에 이어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린다.
鍾頌...
[종송은 미망에 빠진 중생의 깊은 잠을 깨어주며,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에게 극락세계의 장엄을 일러주고 귀의 발원하도록 하는 의식. 집전스님은 대웅전 옆에 있는 金鼓 앞에 앉아서 도량석 목탁이 끝맺음을 할 때 먼저 종틀을 울리고 종을 올려치며 종송을 시작한다.]
원차종성변법계, 철위유암실개명,
삼도이고파도산, 일체중생성정각
(원컨대 이 종소리가 법계에 두루하여, 철위산의 어두움 모두 밝히고, 지옥, 아귀, 축생의 고통 여의며 칼산지옥 파해서 모든중생 깨달음 이루어지이다)
나무비로교주, 화장자존,
연보게지금문, 포낭함지옥축,
진진혼입, 찰찰원융,
십조구만오천사십팔자, 일승원교,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비로자나 교주시며 화장세계의 자존께서 보게의 금문 연설하시고, 낭함의 옥축 두루펴서 티끌과 티끌 서로 들며, 국토와 국토가 원융무애한 십조 구만 오천 사십팔자인 화엄경의 가르침에 귀의하옵나이다.)
제일게,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사람이 만약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인 모든 것이 마음에서 지어진 것임을 관할지니라.)
나모아따 시지남 삼먁삼못다 구치남 옴아자나바바시
지리지리 훔
파지옥진언, 나모아따 시지남 삼먁삼못다 구치남 옴아자나바바시
지리지리 훔
원아진생무별념, 아미타불독상수, 심심상계옥호광, 염염불리금색상,
아집염주법계관, 허공위승무불관, 평등사나무하처, 관구서방아미타
나무서방대교주, 무량수여래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원컨대 이내 몸이 다하도록 오직 한 생각,
아미타 부처님만을 따르옵니다. 마음에는 옥호광이 항상 머물며 생각 생각 금색상이 빛나지이다. 제가 일심 염주 돌려 법계를 두루 보고 허공으로 줄을 삼아 모두다 꿰고보니 비로자나 부처님의 평등성품 없는 곳 없고 언제나 서방정토 아미타부처님을 뵈오니 이와같이 극락세계 구하옵니다.)
나무 서방대교주 무량수여래불,
나무아미타불
청산첩첩미타굴 창해망망적멸궁
물물염래무가애 기간송정학두홍
나무아미타불
(첩첩한 푸른 산은 아미타불의 궁전이요, 푸른 바다 망망하니 열반의 세계로다. 세상사 모든 것에 걸림 없거니 몇 번이나 소나무 정자에 학머리 붉은 것 보았느냐)
심양왕생원왕생 극락원 상품상생원 광도중생원락
심양왕생원왕생 극락원 상품상생원 광도중생원락
나무아미타불
지옥도중수고중생, 문차종성이고득락,
아귀도중수고중생, 문차종성이고득락,
축생도중수고중생, 문차종성이고득락,
나무아미타불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든 중생과 아귀도에 고통을 받는 모든 중생과 축생도에서 고통을 받는 모든 중생이여, 이 종소리를 듣고 이고득락 하소서.)
원공법계제중생, 동입미타대원해,
진미래제도중생, 자타일시성불도,
나무아미타불
(원컨대 법계의 모든 중생, 모두 함께 아미타불의 대원해에 들어가 미래 제가 다하도록 중생제도하여, 자타가 일시에 불도 이루어지이다. 나무아미타불)
阿彌陀佛 本心微妙眞言 다냐타 옴 아리다라 사바하(3회)
아미타불 본심미묘진언 다냐타 옴 아리다라 사바하(3회)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원컨대 이 공덕이 널리 일체에 미쳐 나와, 더불어 중생이 마땅히 극락세계에 태어나서 함께 무량수불 뵈옵고 다 함께 불도를 성취하여지이다.)
범종루에서 四物의식이 시작된다.
四物...
[범종루에 있는 법고, 범종, 목어, 운판 등의 사물을 쳐서, 축생, 지옥중생, 수중생물, 날짐승 등을 깨우는 의식]
뭍짐승을 깨우는 法鼓소리가 짐승들의 숨소리 같이 쉬지 않고 땅 주위를 감돈다. 이어서 날짐승을 깨우는 雲版 소리는 퍼득이는 새들의 날개짓 마냥 하늘로 올라 퍼진다. 물짐승을 깨우는 木魚소리는 잠에서 막 깨어난 물고기가 물장구를 치며 튀긴 물방울이 다시 수면 위로 우수수 떨어지듯 빠른 가락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나서 梵鐘소리가 긴 여운을 남기며 저승세계의 중생들을 어루만지듯 느리게 울려 퍼진다.
聞鐘聲 煩惱斷 이 종소리 들으시고 번뇌를 끊으소서.
知慧長 菩提生 지혜를 키우고, 보리심을 발하소서.
離地獄 出三界 지옥 고통 끊고서 삼계를 벗으소서.
願成佛 度衆生 원컨대 성불하셔 중생 제도하옵소서.
여기 저기 전각에서 목탁 소리와 함께 염불이 은근히 들려온다
小鍾내림...
[범종루의 사물이 끝남과 동시에 소종을 쳐서 예불을 준비하는 의식]
대웅전 아침 예불이 시작되었다.
香水海禮
茶偈頌이 시작된다.
아금청정수 변위 감로다 봉헌 삼보전(반배)
원수애납수(절)
원수애납수(절)
원수자비 애납수(절)
나무 향수해 화장계 비로해회 제불제보살(절)
南無 香水海 華藏界 毗盧海會 諸佛諸菩薩
나무 천화대 연장계 사나해회 제불제보살(절)
南無 千華臺 蓮藏界 舍那海會 諸佛諸菩薩
나무 천화상 백억계 석가해회 제불제보살(절)
南無 千華上 百億界 釋迦海會 諸佛諸菩薩
나무 일월광 유리계 약사해회 제불제보살(절)
南無 日月光 琉璃界 藥師海會 諸佛諸菩薩
나무 안양국 극락계 미타해회 제불제보살(절)
南無 安養國 極樂界 彌陀海會 諸佛諸菩薩
나무 도솔천 내원계 자씨해회 제불제보살(절)
南無 兜率天 內院界 慈氏海會 諸佛諸菩薩
나무 대위덕 금륜계 소재해회 제불제보살(절)
南無 大威德 金輪界 消災海會 諸佛諸菩薩
나무 청량산 금색계 문수해회 제불제보살(절)
南無 淸凉山 金色界 文殊海會 諸佛諸菩薩
나무 아미산 은색계 보현해회 제불제보살(절)
南無 峨嵋山 銀色界 普賢海會 諸佛諸菩薩
나무 금강산 중향계 법기해회 제불제보살(절)
南無 金剛山 衆香界 法起海會 諸佛諸菩薩
나무 낙가산 칠보계 관음해회 제불제보살(절)
南無 洛迦山 七寶界 觀音海會 諸佛諸菩薩
나무 칠진산 팔보계 세지해회 제불제보살(절)
南無 七珍山 八寶界 勢至海會 諸佛諸菩薩
나무 염마라 유명계 지장해회 제불제보살(절)
南無 閻摩羅 幽冥界 地藏海會 諸佛諸菩薩
나무 진허공 변법계 진사해회 제불제보살(절)
南無 盡虛空 邊法界 塵沙海會 諸佛諸菩薩
나무 서건사칠 당토이삼 오파분류 역대전등 제대조사
천하종사 일체미진수 제대 선지식(절)
유원 무진삼보 대자대비 수아정례 명훈가피력
원공법계제중생 동입미타대원해(반배)
四聖禮
아금지차 일주향 변성무진 향운개 봉헌극락 사성전(반배)
원수애납수(절)
원수애납수(절)
원수자비애납수(절)
나무 서방정토 극락세계 아등도사 나무아미타불[10번] (절)
나무 서방정토 극락세계 대자대비 관세음보살[10번] (절)
나무 서방정토 극락세계 대희대사 대세지보살[10번] (절)
나무 서방정토 극락세계 일체청정 대해중보살[10번] (절)
나무서방정토 극락세계 삼십육만억 일십일만 구천오백 동명동호 대자대비 아미타불
나무서방정토 극락세계 불신장광 상호무변 금색광명 변조법계 사십팔원 도탈중생
불가설 불가설전 항하사 불찰미진수 도마죽위 무한극수 삼백육십만억 일십일만
구천오백 동명동호 대자대비 아등도사 금색여래 아미타불
나무무견정상상 아미타불
나무정상육계상 아미타불
나무발감유리상 아미타불
나무미간백호상 아미타불
나무미세수양상 아미타불
나무안목청정상 아미타불
나무이문제성상 아미타불
나무비고원직상 아미타불
나무설대법나상 아미타불
나무신색진금상 아미타불
나무문수보살
나무보현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대세지보살
나무금강장보살
나무제장애보살
나무미륵보살
나무지장보살
나무일체청정대해중보살
마하살
원공법계 제중생 동입미타 대원해
시방삼세불 아미타제일
구품도중생 위덕무궁극
아금대귀의 참회삼업죄 범유제복선 지심용회향 원동염불인 진생극락국 견불요생사
여불도일체 원아임욕명종시 진제일체제장애 면견피불아미타 즉득왕생안락찰
원이차공덕 보금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원왕생 원앙생 왕생극락 견미타 획몽마정수기별
원앙생 원앙생 원재미타 회중좌 수집향화상공양
원왕생 원왕생 왕생화장 연화계 자타일시성불도
<상품상생진언>
옴 마니다니 훔훔바탁 사바하[세번]
<원성취진언>
옴 아모카 살바다라 사다야 시베훔[세번]
<보궐진언>
옴 호로호로 사야몰케 사바하[세번]
<보회향진언>
옴 삼마라 삼마라 미만나 사라마하 자가라 바훔[세번]
계수서방안락찰 접인중생대도사 아금발원원왕생 유원자비 애섭수(반배)
神衆壇 예불이 이어진다
신중단
다게
청정명다약 능제병혼침 유기옹호중(반배)
원수애납수(절)
원수애납수(절)
원수자비애납수(절)
지심귀명례 진법계 허공계 화엄회상 욕색제천중(절)
지심귀명례 진법계 허공계 화엄회상 팔부사왕중(절)
지심귀명례 진법계 허공계 화엄회상 일체호법선신중(절)
원제 천룡팔부중 위아옹호불리신 어제난처무제난 여시대 원능성취(반배)
대웅전 안에 낭낭하게 울려퍼지는 예불 소리 - 사람의 肉聲만으로 어우러져서 나오는 예불소리는 이미 肉聲을 초탈하여 장중한 聖聲으로 化하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악기 중 사람의 목소리 만큼 아름다운 악기는 없다고 했다.
예불은 기본적으로 信心을 고양하기 위함일 것이다. 자신의 참 성품 - 진여자성을 밝혀서 무명을 깨치자는 것이 불교의 대의라 할 때, 신앙으로서의 불교, 특히 지나친 기복신앙의 측면에 대하여 당혹스러운 점도 있었다. 이점에 대하여 가르침을 주는 부분이 다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信解行證 四科와 敎理行果의 四法가 그것이다.
有信無解하면 增長無明이오
有解無信하면 增長邪見이니
信解圓通 이라야 方爲行本 이니라 (涅槃經)
信爲道元 功德母 하야 長養一切之善法이라,
斷除疑網 出愛流 하야
開示無上涅槃道 니라 (華嚴經)
위 구절을 감안하면, 대승불교로 발전하면서 불교는 이미 신앙 우선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확연대오하기 위해서는, 참선이 알음알이로써 되는 것이 아니다. [禪要]에서 고봉스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가슴에 맺힐 정도로 세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곧 간절한 믿음(大信根), 큰 분심(大憤志), 절박한 의심(大疑情)이다고 옛 선사들은 가르치고 있다.
[관음기도회]
대웅전 예불이 끝난 후 일행은 다시 원통각 관음기도장을 참배한다. 이곳에는 3년 전부터 원통각 1000일 관음기도를 계속하고 있는 젊은 스님이 이미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고 있다.
아금청정수 변위감로다
봉헌관음대성전 원수애납수 원수자비애납수
지심귀명례 보문시현 원력홍심 대자대비 관세음보살
지심귀명례 심성구고 발고여락 대자대비 관세음보살
지심귀명례 좌보처 남순동자 우보처 해상용왕
유원 관음대성 대자대비 수아정례
명훈가피력 원공법계제중생 자타일시성불도
관세음보살 멸업장진언
옴 아로늑게 사바하
구족신통력 광수지방편 시방제국토 무찰불현신
고아일심 귀명정례
원멸사생육도 법계유정 다겁생래제업장 아금참회계수례
원제죄장실소제 세세상행보살도(살생업) 십악업
다시 巳時에 관음예배를 시작한다.
천수경에 이어 관음예문이 계속된다.
지심귀명례 해안고절처 보타낙가산 정법명왕 성관자재
발응취대 순염주홍 금투단하 미만초월
사칭다리 시호길상 교소의이목환중동 좌청련이신엄백복
향접이고 성찰구애 사월현어구소 형분중수 여춘행어만국 체비군방
대비대원 대성대자 성백의 관자재보살 마하살
보타산상유리계 정법명왕관세음
영입삼도이유정 형분육도중무식
자비불사수형화 선설총명비밀언 관세음보살
멸정업진언 옴 아로늑계 사바하
...................
관음예불 중 燒身供養을 통한 참회의식도 있다.
기도는 正午까지 계속되었다.
선암사 체류기(4)
예불 후 아침 공양. 공양을 끝내고 미타전의 지허 주지스님을 찾아 뵙는다. 스님은 그 유명한 선암사 차를 내놓으신다.
[지허스님은 1941년生으로 56년 선암사에서 만우스님을 은사로 득도, 60년 선암사 강원 대교과를 수료했다. 해인사 통도사 용연사 선암사 등에서 수행하고 지금은 선암사와 금둔사 주지. 정수원장, 중앙선원장, 중앙종회의원, 선암사 박물관장 등을 맡고 있다 함.]
차는 본래 불교와 함께 인도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그리고 다시 일본으로 전해졌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에 차가 들어온 시기를 살펴보면 `통일신라 시대' 김대렴이 화개골 쌍계사 옆 대밭(차시배지)에 심었다는 흥덕왕 2년(828)보다 훨씬 앞서 東晉 마라난타를 통하여 백제에 불교를 최초로 도입한 침류왕 원년(384) `징광사(벌교) 선암사(승주) 금둔사(승주) 차 시배설'이 설득력을 갖는다.
또, 당나라에 유학 갔다 돌아온 스님들도 九山禪門을 개창할 때 함께 가져온 차를 각각 재배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퍼진 차는 기후를 따라 차령산맥 이남의 사찰들로 들어가 선원을 중심으로 승려와 문인사회에 전래되었다.
조선 말기까지는 그래도 전통 제다법에 따라 차를 만들었다. 일제 말 경남 화개쪽의 최아무개, 윤아무개 스님, 전남 해남의 박아무개 스님 등 일본 유학파가 들여온 일본 차문화와 함께 일제가 보성 등지에 일본 차나무로 조성한 차단지는 "녹차"를 이 땅에 퍼뜨리고 있다.
일본차는 차나무부터 다르다. 야부기다라는 사람이 육지 쪽에서 건너온 것을 일본 기후에 맞게 개량한 것이다. 이 야부기다종은 잎이 크고 비료를 주면 쑥쑥 잘 자란다. 그러나 잎이 연해 벌레가 생기므로 농약을 쳐야 한다. 농약을 친 찻잎은 과일처럼 씻거나 깎을 수가 없으니 그대로 우려 마시는 결과가 어찌될까. 일본차는 또 고온다습하고 염기가 많은 기후에서 오래두기 위해 찻잎을 쪄(데쳐)야 한다. 데친 잎이어서 물에 풀어내면 녹색이 되고 그래서 `녹차'라 한다. 여기에 형식 위주의 일본 `다도'가 얹혀져 소박, 겸허의 한국 전통 `禪茶一味' 정신을 밀어내 버렸다.
1954년 10월에 일어난 불교계 보․혁 대결은 한국 전통禪茶의 맥이 유일하게 선암사에만 남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당시 남북에 있던 31곳의 대본산 가운데 이남에 있던 본산은 모두 `혁신'을 표방한 대한불교 조계종 쪽이 접수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절들의 차밭은 모두 방치, 폐기되었고 태고종 승려들이 조계종 비구니들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살던 선암사에만 차밭이 살아남게 되었다. 거기에는 출가 직후부터 `茶角‘ (절에서 차를 달여 여러 중에게 이바지하는 일, 또는 그 일을 맡은 사람)의 일을 맡았던 지허스님(현 선암사 주지)의 피눈물이 서려있다.
5천 평에 이르는 완전 야생 선암 차밭은 선각국사 도선스님(827~898)이 이 절에 계실 때 `禪茶一味'의 정신으로 일구었고, 중흥조 대각국사 의천(1055~1101), 지허스님 등 그 차밭지기들을 통해 한국 전통 禪茶의 맥과 계보를 전하고 있다. 차밭에 기대어 들어선 칠전선암은 보․혁 대결의 와중에서 선암차를 한국 전통차의 유일한 맥으로 지켜내는 `선다방' 역할을 해왔다. 칠전선암 초대원장 침굉스님(1616~1684)은 지금의 벌교 金華山 澄光寺터 차밭을 가꾸었고, 2대 원장 백암스님(1631~1700)이 열반하기까지 부렸던 하동 쌍계사 신흥암(신흥리 초등학교터) 차밭은 하동 일대 자생차밭의 발원지가 되었다.(최성민 / 사진작가 글 참조)
선암사 체류 닷새 동안 그분을 뵐 때 마다 이야기는 끝이 없다.
서당 지장(西堂 智藏:735-814), 백장 회해(百丈 懷海:749-814), 남전 보원(南泉 普願: 748-834) 스님이 馬祖스님을 모시고 달구경을 하던 차에 마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바로 지금같은 땐 무얼 했으면 좋겠는가?"
서당스님은 "공양하기에 딱 좋군요"하였고,
백장스님은 "수행하기에 좋겠습니다"하였다.
남전스님이 소매를 뿌리치면서 그냥 가 버리자, 스님이 말씀하셨다.
"경(經)은 장(藏:서당)으로 들어가고, 선(禪)은 바다(海:백장)로 돌아가는데,
보원(普願:남전)만이 사물 밖으로 벗어났구나."
달 밝은 밤 스승의 물음에 대답한 셋 중 누가 가장 멋있는가? 禪은 바로 그런 것이다.
茶와 禪은 닮아 있다. 처음 마실 때는 맹숭맹숭할 뿐, 그 맛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는 정신을 맑게 해주고 단맛이 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참선도 그렇다. 참선을 통하여 우리의 정신이 맑아지며, 참선을 통해 달콤한 맛을 알 수 있게 된다.
차를 대접하는 주인을 烹主(물을 끓이는 주인)라 한다. 대숟갈로 찻대롱에서 차관으로 차를 떠 옮겨 넣고 물을 부운 다음, 한참 있다 뚜껑을 연 순간 솟아 오르는 茶香은 팽주 혼자만 맛볼 수 있는 것 - 팽주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다.
우리 나라의 차는 덖어서 향이 좋지만 변질이 쉬워 보관에 유의해야 한다. 보관을 위해서는 한지로 싼 뒤 오동나무 통에 넣어 두거나 습기가 없는 곳, 온도가 낮고 다른 냄새가 없는 건물의 그늘진 곳이 좋다고 한다.
옛날 스님들이 부처님께 차를 올리며 茶偈를 읊었다.
밑 빠진 茶器에 차를 따르고
구멍 뚫린 바루에 밥을 담는다.....................
이 세상의 모든 차를 다 담을 수 있는 다기는 밑 빠진 그릇이 아니면 넘쳐 흘러버린다.
이 세상의 모든 밥을 다 주워담을 수 있는 그릇은 구멍이 뚫려 있지 않으면 넘치고 만다.........
출가 후 자신의 힘으로 우리 나라에서 제일 가는 세 가지를 만들어 내기로 결심했었다. 역대 선암사의 대선사들에 의해 전해오던 차를 다시 만들어 내는 일, 맥이 끊긴 전통 기와와 韓紙를 생산하는 일. 셋 중 차 외 두 가지는 아직 이루지 못했다. 선암사 뒤쪽 야생차와 금화산 기슭 야생차밭에서 이른 봄 찻잎을 따서 스스로 전통 차를 만드는 법은 「샘이 깊은 물」에 소개된 바 있다.
한때 그는 스승으로부터의 내침을 받아 다른 선원 책임자 자리의 제안도 거부하고 낙안 금전산에 천막을 치고 혼자 수행 정진하다가 태풍을 만났다. 천막도 태풍에 날아가 버리고, 한밤중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일각여삼추 절체절명의 순간을 넘긴 그는 그때, 사진 촬영과 취재 차 왔던 브리타니카 출판사의 「뿌리깊은 나무」 기자를 만나고, 이를 인연으로 그의 행적과 전통차가 서울에 소개된다.
그가 제조하고 브리타니카는 판매를 맡기로 하여 내놓은 차가 [가마금 잎차] 였다. 일본에도 수출하여 들어온 수입으로 금전산 금둔사와 금둔선원을 중창했다. 그후 「뿌리깊은 나무」사의 한창기 사장이 물러난 후 본인이 개발했던 가마금 잎차의 특허권이 그 회사 소유로 되어있다며 미국인 후임사장이 특허권 양도를 거부하자, 선암사 인근 벌교 금화산 징광사에서 차를 만들었던 침굉스님 등 옛날 큰 스님들의 행적을 감안하여 '금화산 잎차'로 다시 내놓고 있다.
역대 선암사 큰스님 가운데 제일 가는 분은 枕肱스님이라 할 수 있다. 침굉이라는 號대로 그는 항상 팔을 베개 삼고 臥禪을 한 분으로 유명했다. 절의 모든 대중들이 동원되는 울력에 불참하면 그 절에서 쫓겨나는 것이 보통이지만, 침굉스님 만은 "와선으로 바쁘다"며 나가지 않았다. 임종이 가까워 오자 제자 호암스님에게 유언하되, 옛날 조사스님들은 굶주린 들짐승나 한겨울 먹을 것이 없는 기러기떼에게도 자신의 살점을 떼내어 보시했다. 나는 평생 베푼 것이 없었으니, 이제 죽으면 화장하지 말고 저 깊은 산속 절벽 옆에 그냥 두거라. 그리하여 배고픈 짐승이나 새들의 먹이가 되도록 하라. 이점을 간곡히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다....... 제자인 호암스님은 그의 유언대로 했다. 그러나 3년 동안 침굉스님의 몸은 전혀 손상되지 않고 머리칼이 자라고 손톱이 길렀다. 호암은 때때로 찾아가 스승의 머리칼과 손톱을 잘라주었다. 아랫 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하러 왔다가 살아있는 부처님이라 여기고 가져왔던 점심밥을 그대로 공양했다. 이렇게 하여 3 년이 지나자, 호암스님은 스승을 다비하기로 했다. 다비식날 스승을 알고 있던 도반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살아 있을 때 항상 臥禪하는 모습만 보이던 침굉이 다비를 위해 모처럼 앉아 있는 것을 본 한 도반이 말했다. "침굉이 오늘은 모처럼 한가한 모양이구만." 그 순간 침굉은 한손으로 불끈 주먹을 들어 올리며(一拳) 공중으로 散華해 버렸다.................
선암사 체류기(5)
참선....
3일간의 관음기도가 끝난 후 이틀 동안은 지허스님의 지도로 無憂殿 선방에서 참선을 시도해 보았다.
인도에서도 초보자가 하는 참선으로 數息觀이 있다. 단전으로 천천히 호흡을 하며 자기의 호흡 회수를 하나 둘........세어 가는 방법이다. 잡념으로 수를 놓치면 처음부터 다시 세어 나간다. 이렇게 수를 놓치지 않으려고 마음을 집중하면, 다른 것을 모두 잊게 되고 "시간 가는줄 모르게 된다"고 하였다. 죽비 소리가 나자 모두 일념만년의 정신으로 초보들의 순진한 초발심을 내어 몰두해 본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이 순간 감돈다.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 뿐. 그러나 마음은 어제 오늘 내일, 이일 저일, 이곳 저곳을 쉼 없이 오고 간다. 순간 수를 놓친다. 다시 수를 세다 보면, 무릎이 저리기 시작한다. 등이 굽고 허리가 내려간다......... 마음 속으로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들, 저려오는 육신의 고통, 시간은 더디 가고, 휴식을 알리는 죽비 소리는 언제 울리나.....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스님은 일상에서의 참선의 생활화를 강조하신다. 중국 당나라때 유명한 방거사(龐居士)의 게송을 들려준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아들과 딸이 장가 가고 시집 가는 世上事를 잊고 오직 生死를 여의는 일에만 몰두한다는 내용이다. 가정생활 중에도 하루 한 두시간 참선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권한다. 화두를 들기엔 아직 멀다.
저녁 예불........
저녁 공양 후,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에 이어 법고소리가 들린다. 운판, 목어, 그리고 범종 소리가 이어진다. 대웅전에서 저녁예불을 시작한다.
[오분향례]
戒香 定香 慧香 解脫香 解脫知見香 光明雲臺 周弁法界 供養十方無量佛法僧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광명운대 주변법계 공양시방무량불법승
[다게]
아금청정수
변위감로다
봉헌 삼보전
원수애납수
원수애납수
원수자비애납수
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달마야중
지심귀명례
대지 문수보살
대행 보현보살
대비 관세음보살
대원 본존지장보살
제존 보살 마하살
지심귀명례
영산당시 수불부촉 10대 제자
16성 오백성 독수성
내지 천이백 제대 아라한 무량성중
지심귀명례
서건 동진 급아 해동
역대 전등
제대 조사 천하종사 일체 미진수
제대 선지식
지심귀명례
차사창건주 아도화상
도선국사 대각국사
호암대화상 여선교 양종 제대 조사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승가야중
유원무진 삼보대자 대비
수아정례 명훈 가피력 원공법계제중생
자타일시 성불도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독송이 이어진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부감 시고 공중 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야뇩다라삼먁삼보리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증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반배)
빌린 사진
공양.....
寂黙堂에서 아침 점심 저녁 공양을 한다. 선암사 공양은 쌀밥에 콩고기, 들깨가루 우거지국, 미역국, 무채무침, 묵은 배추김치, 콩나물 등등이다. 가장 인기 있는 반찬은 묵은 배추김치이다. 선암사 김치는 토종배추에 소금간과 고추가루만 친 것으로서 이 땅에서 사라져간 우리 `토종김치'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배추는 기를 때 퇴비만 준 것이다. 속이 들지 않고 벌어진 채 내내 햇볕을 쬐고 자란 토종이어서 무척 푸르고 싱싱하다. 김치가 익어 해를 넘겨도 배추의 푸른 빛이 그대로 살아있다. 옛날 가난한 시절 김치처럼 젓갈도 넣지 않는다. 맛이 파삭파삭하고 고소한데, 무엇보다 배추의 향이 그대로 살아있다는 게 특징이다. 주지 지허스님이 이 선암김치 담그는 비법을 유일하게 전수하고 있는데, 96년에는 이 김치맛을 아는 사람들로부터 주문이 쇄도해 김치판 돈으로 50평 남짓 되는 지금의 공양방(寂黙堂)을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팔지 않고 있다.
선암사 뒷간 이야기
선암사의 명물은 仙巖梅, '선암김치' 말고도 `ㅅ간 뒤'란 이름표를 단 변소가 있다. 선암사 뒤깐은 크기로 유명하다. 20개의 칸이 앞뒤, 남․녀별로 늘어서 있고 마루에서 바닥까지 깊이가 10m 정도나 된다. 그 사이는 통풍이 잘 되도록 사방에 큰 문이 나 있고 마루쪽 앞 벽은 성긴 나무창살로 되어 있어서 바람이 잘 통한다. 이 나무창살은 쪼그려 앉은 자세에 있을 때 마루에서 얼굴 높이까지 위치해 있다. 그 창살 사이로 숲이 보인다. 거북한 냄새가 머무를 수가 없는 `토종변소'의 설계이다. 여기서 일을 보면 한참만에 바닥에 떨어지니 하도 이상해 뒤아래를 살펴보게 되므로 `뒤를 본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에 통곡하라 - 정호승
선암사 체류기(6)
지허스님의 글
(유서 깊은 역사와 가람배치의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선암사가 당면한 시련 또한 작지 않은 듯 하다. 시련을 극복하고 청정수행 도량으로 거듭나서, 師資相承의 위대한 전통을 이어가는 것은 오늘날 한국 불교계에서 비단 선암사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5박 6일의 선암사 체류 인연으로 선암사를 아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 나로서는 다음 글을 통해서나마 지허스님의 절절한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해동초조 태고화상진영 조성기]
의천대각국사가 고려시대 중국 송나라에 다녀와서 본사 대각암에서 오도하고 산 이름을 조계산이라 한 것은 육조 혜능대사의 찬란한 종지종풍이 본사로부터 천하에 널리 거량될 것을 시공을 넘어 꿰뚫은 일이라 할 것이며 혹독한 추위를 겪은 뒤라야 코를 찌르는 매화향기가 나듯 조선의 억불사태에 우리 본사에서 걸출한 종안이 연이어 속속 배출됨이 다른 일이 아니다.
최근 반세기 동안 나라 안 부처님 집안의 어지러움이 일어나 가시지 않으니 눈 바른 자의 근심이 살을 도려내어 사무쳐 아픈 것이 끝이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설상가상으로 실참실구 없는 학자들이 역대조사의 이심전심한 전등가풍을 생각 가는대로 말장난으로 훼손하니 혹 후학이 눈을 가릴까 염려 되었다.
이에 앉아 강 건너 불이라 할 수 없어 본사가 처한 미증유의 역경 속에서나마 제불조사의 종통을 바로 세움이 오랜 법난을 평정하는 일이라 여겨 우선 본사의 불조전 곁에 조계육조와 임제조사와 태고화상을 모실 조사당을 이 병납이 지난번 본사주지 소임 동안 집만을 짓고 진영을 모시지 못하고 본사를 떠났는데 우리 종단의 총무원장이자 본사주지인 인곡대사와 혜우스님이 내외의 어려움 속에서 본사의 재정으로 불사를 시행하여 우선 태고화상의 진영을 모시게 되니 사람과 하늘의 기쁨이 헤아릴 수 없다 하겠다.
태고 해동초조의 진영이 이미 속리산 법주사 조사당에 모셔져 있기는 하나 다소 미흡한 부분이 있어 그를 따르지 않고 이번 본사에서 새로 조성한 것이다. 진영은 참된 그림자란 뜻이니 참됨은 바로 태고화상이요 태고화상의 참됨은 태고화상의 도에 있음이라. 비록 열반한지 600여년이 지나 태고화상의 자태는 안 계시지만, 그 어록에 나타난 도가 역력하니 그 도를 보고 도의 그림자를 그림이 타당하다 하겠다.
아! 어찌하리오. 부처와 부처도 서로 보지 못한다 하매 태고화상의 도에 이르지 못한 자가 어찌 그 도를 볼까 보냐
그렇다하여 그리지 않으면 미천한 후학이 종통을 바로 하는데 방편이 되지 못하니 화상을 흠모하는 후대가 정성과 뜻을 다한다면 화상께서 파안대소하고 귀엽다 할 것이다. 화상을 화상이라 함은 크게 깨달아 일체중생에게 깨달음의 덕을 베푼다는 뜻이요. 조사라 함은 가섭존자 이후 대대로 깨달음을 이심전심하여 잇고 이어진 혈맥의 종사를 말하며 국사는 나라에서 주는 벼슬이니 아무리 온 나라에서 숭상하는 분에게 준다 하더라도 조사나 화상 아닌 분일 수도 있다.
화상께서는 역대조사의 법등을 전해 받고 이은 하늘 아래 당대에 유일한 분이다. 화상의 세수 82세 동안 69년을 수행자 모습을 하셨으니 수행자 모습을 그림이 마땅함이요 수행자 모습 중에 대도를 성취하여 석옥 청공선사에게 친히 인가를 받아 임제의 적손이 되어 원황제의 청으로 원태자의 생일에 만조백관과 비구, 비구니등 사부대중이 구름처럼 운집한 가운데 사자후 하시던 무렵의 모습을 그림이 적합하다 생각 되었으며, 그때의 세수가 46세이시다.
화사를 선택함에 있어 오래 보존할 담백한 석채를 쓰되, 속되지 않으며 참신한 필력으로 전심전력의 정성을 다할 사람을 찾아 그렸다. 참고한 문헌은 태고화상 어록에 의지하였고, 석옥 청공선사 어록과 역대조사가 전하고 전한 도를 보인 선문염송과 전등록으로 보필을 삼았고 참고한 진영은 해인사, 통도사, 법주사, 송광사, 선암사의 진영 등의 법의를 두루 연구하여 그 본을 삼았다.
끝으로, 아승지겁 전부터 오늘까지 전해 온 제불조사의 법통이 바로 서서 우리 본사의 수난이 그치고 둘로 나뉘어 싸우다가 다시 수십 갈래가 된 우리 불교 집안이 오직 견성성불하는 일로 하나 되는 서원이 이 불사로 꼭 성취되어 삼화상의 종지종풍이 모아져서 삿된 혼란이 영멸하고 정법만이 무성하여 한 중생도 남김 없이 모두 확철대오하기를 업드려 빌고 빈다.
금둔선원에서 조계병납 지허 분향삼배
※
깨달음(INSIGHT)
수년 후 어느 맑고 따스한 시월 오후, 나는 쓰러진 밤나무 가지 사이에 편안하게 기대어, 몽상가의 시절 모르는 오락 삼아 다람쥐를 벗삼고자 하였다. 내 앞에는 참나무와 솔송나무 숲속 공터에서 햇살이 졸고 있었다. 바람 없이 공기는 부드럽고 고사리 냄새가 향긋했다.
아직 자주색 잎에 덮여 주홍색 열매를 달고 있는 말채나무 덤불 너머 가까운 곳에서 마른 낙엽을 뒤지며 도토리를 찾는 다람쥐 소리가 들렸다. 기억 속에서 살아나는 낯익은 설레임, 더없는 행복감과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느낌이 나를 휩쌌다.
여러 해 똑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때는 北京市 북문 鼓樓에서 저녁 어스름 속의 시가지를 내려다 볼 때였다. 일본 가쓰라 별궁 정원에서 소나무 그림자 드리운 고요한 호수를 바라다 볼 때도 같은 느낌이었다.
잔자갈을 물결무늬로 갈퀴질해 바다를 상징하고 그 사이에 壽石을 아름답게 배치한 료안지 龍安寺 정원에서 목재로 이은 산책로를 걸을 때도 똑같은 느낌이었다.
자, 그렇다면 내가 앉아 있던 숲속과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곳들이 같은 느낌을 주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한 순간 그 이유가 떠올랐다.
넋을 잃게 하는 료안지의 비밀은 그 평면 구성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곳에서 "체험"하는 것에 있었던 것이다. 銀閣寺가 주는 목가적 느낌도 평면형태나 모양을 의식해서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 장소가 그런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장엄한 북경 시에서 가장 큰 감동을 받는 장소는 뚜렷한 평면계획이 없는 곳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양이나 공간이나 형태의 설계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체험experience이다!
이러한 사실의 발견은 즉시 Le Corbusier가 왜 강력한 계획이론가인가를 이해하는 실마리로 이어졌다. 꼬르비제는 휘갈기듯 몇 개의 선을 그려 아이디어를 표현하는데, 그것이 형태나 크기를 표현한다기보다 경험의 창조를 나타낸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水晶 결정체 모양을 본뜬 계획이 아니다. 그 자체가 결정체이다. 생명체 모양을 본뜬 계획이 아니다. 그 자체가 진정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내게는 이러한 깨우침이. 눈부신 순수진리에 한줄기 밝은 광명을 비추는 것과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깨달음의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계획가는 장소places를 계획하는 것이 아니다. 공간spaces을 계획하는 것도 아니고, 물체things를 계획하는 것도 아니다. 계획가는 체험experience을 계획한다.
-첫째, 용도 즉 경험을 설정하고, 그런 다음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형태와 공간 특성을 그에 맞게 설계하는 것이다. 장소, 공간, 물체 등은 오로지 기능을 충족시키고 기능을 표현하도록 설계하면 되는 것이고, 계획하는 경험을 가장 잘 창출할 수 있게 설계하면 되는 것이다.(‘조경학’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