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호의 경조오부도이다.경조오부는 서울을 포함한 한성부 전체를 이르는 말이다.
조선시대 한성부는 도성과 그 주변 10리까지를 관할했다. 이 도판에서는 윤곽만 그려져 있는 도성 내부를
자세히 그린 ‘도성도’가 대동여지도에 따로 수록돼 있다. 도성에서 뻗어나간 갈색의 선들이 전국 각지로 이어지는 10대로이며,
이 길들은 지금 국도의 기준이 됐다.
이 지도 왼쪽 하단에 서강이 흐르고 있다. 노량진에서 용산강을 지나 마포강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샛강이 갈라선다.
샛강 방학곶(放鶴串)과 시흥간로를 나타냈고 남북으로 백사주이십리(白沙周二十里)가 길게 펼쳐있다. 서강 남쪽 건너 밤섬(栗島)이
보이고 인천간로 축에 목양(牧羊)과 여의도가 있다. 윗쪽에는 당산리(堂山里)가 자리한다. 아래쪽 영등포(英登浦)가 있다,
오늘날 영등포(永登浦)라고 표기하는 나루터다.

영등포는 예전부터 한강가의 유명한, 신비한 사연을 안고 있는 포구였다.
영등포는 왕성하게 번성하고 있던 이웃의 노량나루(鷺梁津)에 치여 내내 밀렸다.
영등포란 나루터는 지금의 한강성심병원 건너편 여의도샛강변에서 여의도의 사라진
옛 양말산(羊馬山)을 오가며 한강 밤섬(栗島)과 마포를 연결하는 소규모 나루터이었다.
'永登浦',한자의 포(浦)는 물가, 즉 바닷가나 강가를 의미하는 글자이다.
강가나 냇가에 있는 마을을 의미한다. 서울의 永登浦나 거제도의 永登浦는 같은 의미의
해변 강변마을을 의미하는 지명이다.
永登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영등굿에서 찾는다. 우리 민속에는 음력으로 정월과 음력 2월 초하루를
영등일(靈登日)로 하여, 보름까지 여의도샛강변에서 성행된 영등굿을 벌였다. 이 포구에서 영등굿으로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한다. 늘 소원하는 것을 이곳 한강에서 빌면 다 들어주는 명당으로 알려져 '靈登'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이 영등(靈登)이 永登(영등)"으로 변형표기된 것이라고 한다. 이 포구를 영등포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영등포구(永登浦口) 서쪽 끝자락에 당산(堂山) 마을이 있다. 그 당산마을의 유래가 되는 당산동 부군당(府君堂)이다.
그 마을에는 포구에서 영등굿을 치르던 당집이 있었다. 지금도 당산동에 부군당(府君堂)이 있다. 부군당 부근이 당산마을이다.
서울 경기 지역 물가에서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당집, 부군당이다.



부군당 앞에는 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에는 1450년 4월 8일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비는 1974년 4월 15일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 안에는 아홉 신이 그림으로 모셔져 있다.
오른쪽에서부터 대동할아버지, 대감님, 장군님, 부군할아버지, 산신님, 칠성님, 삼불제석님, 대신할머니, 각씨님이다.
매년 음력 7월 1일과 10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마을의 안녕과 가정 및 주민의 건강을 기원하는 당제를 올리고 있다.
당산동 부군당굿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 굿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목적으로
당산동 향우회를 비롯한 마을 토박이들이 중심이 되어 매년 음력 7월과 10월에 진행한다.

<여지도서> <금천현>을 보면 당산이 소개되어 있다.
거기에는 당산리(棠山里)와 마찬가지로 당산(棠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당산(棠山)은 금천현(衿川縣)의 읍치(邑治)에서 20리(里)에 있다. 양화진(楊花津) 가 산(山) 앞의 한강(漢江)에
흰 모래가 명주비단과 같은데 해당화(海棠花)가 흐드러지게 핀다. 옛날 중국의 사신이 왕래할 때에 배를 멈추고
두루 다니며 구경하였다고 하였다. 마치 당산을 한강 가 흰 모래밭에 핀 해당화 때문에 당산(棠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당산(棠山)이 있는 마을이니 당연히 당산리(棠山里)라고 표기하여야 맞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듯하다.
물론 여기에 등장하는 당산리(棠山里)가 당산리(堂山里)를 지칭하고, 당산(棠山)이 당산(堂山)을 지칭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해당화는 정말 기품이 있는 꽃이다.
모란이 꽃 중의 왕으로 부귀를 상징한다면 해당화는 꽃 중의 신선(神仙)으로 탈속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숙종 때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이 지은 <산림경제(山林經濟)>를 보면 중국 명나라 때 전여성(田汝成)이
지은 <거가필용(居家必用)>이란 책을 인용하여 중국사람들은 해당화를 꽃 중의 신선(神仙)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옛날 선비들이 기를 만한 꽃을 꼽을 때 해당화가 빠지지 않았다.
문득 당산동 한강 가에 명주비단 같은 흰 모래가 펼쳐진 속에 해당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흰 모래 사장도, 흐드러지게 핀 해당화도 상상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그림이다. 개발이나 정비를 안 할 수야 없겠지만
개발이나 정비라는 미명 하에 우리도 모르게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 많다.



당산동 110번지 언덕에 수령 500년이 되는 은행나무가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약 500년간 조선초 어느왕이 언덕을 지나다가 쉬었던 기념으로 당산동 110번지에
은행나무 두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이 나무는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마을의 안녕과 나라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삼아 마을사람들이 제사를 지내왔다. 6.25동란 후 이 중 한그루가 소실된다.
한 그루만 남아 있어 이를 안타깝게 여긴 마을 주민들이 약 30년 전에 행정당국에 건의하여 그 옆에 한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어 현재는 두 그루 은행나무가 나란히 서 있다.
이 나무와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가 이렇게 전한다.
"조선초기 임금님이 쉬어간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식수한 것으로 이후 동네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아 제사를 지내왔으며,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이 일대가 침수되자 동네 사람들이
이 나무 밑으로 파신하여 무사하였다 하여 주변에 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