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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념
전쟁은 인간의 가치관을 크게 변화시켰다.
인류 문명은 끊임없는 변화와 발전의 수레바퀴를 돌리며 더욱 편하고 아름답고 고귀한 위치로 전진 해왔지만 전쟁은 이 모든것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파괴해 버렸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이후 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시달렸던 지구촌 곳곳의 예술세계는 그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급기야 전쟁이전의 인류를 찬양하고 보존하려했던 그 모든 문명의 결과와 정신은 부정하는 현상이 싹텃다. 그것이 다름아닌 다다[dada]였던 것이다.
다다라는 명칭은 1916영 2월 스위스 취리히에서 결성된 국제적인 전위예술가 그룹이 그들의 회합 장소인 카페 볼테르에 증축한 화랑을 위해 시인인 트리스탄 짜라가 선택한 것이었다.
사전에서 우연히 찾게된 '다다'라는 어원은 프랑스어로 '목마' 또는 '장난감 말' 이란 뜻을 지닌말로 독일어로는 출산의 기쁨, 유모차,바보스런 순진함의 의미를 지녔다.
다다는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에 편승하여 온 유럽을 급속히 전염 시켯고 결국 현대미술에 흐름까지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인류 문명을 파괴하는 문화는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 시작 되었건 결국 전쟁을 야기하는 하나의 보조적 가치를 지녔음으로 아주 나쁜 문명이라고 주장 하였고 이는 당연히 거부되어야 한다는 명분을 갖도록 한것이다.
다다는 미래주의[futurismo:이태리]와 함께 20세기 초반의 가장 강력한 문예 운동이었다.
전통을 거부하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미래주의가 산업혁명에 따른 과학과 과학기술을 찬양하는 것과는 반대로 이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미래주의가 전쟁을 긍정한 반면 다다는 전쟁을 반이성적이고 반인륜적인 행태라고 하며 격렬히 반대 했다.
다다는 이성과 합리에 대한 다른 의미를 지향 했으며 부정과 파괴, 다시 말해 '반예술'의 태도로 우연에 의거한 작업 태도를 보였다. 특유의 유머가 있었고오브제[object]를 사용하여 기성관념을 부정함으로써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2. 발생 배경
1914년에서 시작하여 1918년까지 계속되는 전쟁은 이를 지켜본 사람들에게 지적, 문화적, 사회적 체계를 붕괴시키는 충격을 안겨 주었다.
다다는 세계대전의 불안감이 인류의 심리를 지배 하면서 그 이전의 문명과 사회체제를 부정하면서 시작되었다.
급속도로 발전한 산업과 기계기술의 급성장에 의해 현대 문명이 약속 했던 모든 낙관주의는 바로 그 기계에 의해 파괴되어 버렸다.
세계제1차 대전의 결과가 예술언어의 성격을 변화 시킨 정도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종교, 합리적인 사고, 그리고 인간적인 가치들은 유럽 문명국들이 앞장선 대량 학살에 의해 절대적으로 부정 되었으며, 정치인과 군인 뿐만 아니라 지성인과 예술인까지도 점차 이러한 사실에 대해 무감각지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을 자양분 삼아 기성의 것과 전통을 거부하는 다다는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다다이스트들과 당시의 예술가들의 눈에는 전통적인 도덕관념이 이미 파멸 해 버렸을 뿐만 아니라 미술과 문학, 과학, 정치 등 모든것이 이제는 다른 기반으로 부터 출발하여 다시 생각 해 보아야 하는 것으로 비쳐졌다.
모순된 기존의 통념과 질서를 파괴하기 의해 다다는 결정론에 비해 비 결정론을, 범주에 비해 탈 범주를 , 예술에 대한 반 예술을 내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그 당시 상황속에서 맞아 떨어 졌으며 전통적 문명에 대하여 정식적으로 반기를 든 예술에 있어서 거의 혁명적인 사고 였다.
3. 전개
다다이즘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 되었다.
1916년 2월 작가겸 연출가인 H 발이 카페 볼테르를 개점하고 시인 트리스탄 짜라 와 장 아르프, 마르셀 앙코, 휄젠벡 등과 함께 과거의 모든 예술형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비합리성, 반도덕, 비 심미안적인 것을 찬미 하였다.
잡지 '다다'가 발간되고 우연을 이용한 추상시, 음향시가 발표되는 등 이 취리히 다다는 20년 까지 계속되었다.
독일에 있어서 다다이즘은 베를린, 하노바, 퀠른 등 세곳에서 진행되었다.
베를린에서는 하우스만,그로스, 메링, 헤이 등이 다다운동에 참가 하였다.
베를린은 정치적 중심지 답게 다다이즘도 혁명적 요소를 갖추고 하우스만의 아쌍 블라쥬나 헤히의 포토 몽타쥬, 그로스의 격렬한 반전 시리즈인 [이사람을 보라]등을 탄생 시켰다.
[이 사람을 보라]는 제 1차 세계대전중의 군부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전후의 황폐, 그리고 다시 권력자로 변해가가고 있는 사회 상층 계급에 대한 공격을 내포하고 있었다.
베를린에서의 다다는 전쟁이 끝난 18년 부터 33년 까지 계속 되었다.
하노버에서의 중심인물은 슈비스터였다. 그는 시와 조형에서 다양한 활동을 보였고 23-32년 까지 잡지 [메르츠]를 간행하고 있었는데 주목할만한 작품은[메르츠 바우]이다.
이것은 길에서 주운 널조각과 잡동사니를 소재로 하여만든 기중기인데 조각에서 표현한 콜라쥬의 선구적 예이다.
콜라쥬는 다다의 유력한 무기로서 일찍이 입체주의의 파피에 콜레에서도 같은 종류의 경향을 볼수 있었다.
특히 슈비스터는 폐품을 이용한 정크 아트를 한 작가이기도 했다.
퀠른에서는 에른스트와 바르겔트가 활약 했다.
바르켈트는 잡지 [선풍기]를 창간 하였고 아상 블라쥬 작업을 했다.
에른스트의 기법은 콜라쥬 이며 20년 파리에서 열린 콜라쥬전은 이제까지의 회화 개념을 바꿔 놓았다.
그는 또한 초현실주의 운동에도 참가 하였는데 프로타쥬 기법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따라서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는 거의 큰 차이가 없는 종이 한장 차일라고 할수 있었다.
한편 파리의 다다는 1919년에 이루어졌다.
요절한 시인 바쉐 외에도 [검은 유모어]의 브르통 등도 다다이즘의 선봉자로 빼놓을 수 없었다.
이와 함께 엘리 아르, 아라공, 페레 등도 동참 한다.
뉴욕에서의 다다는 취리히와 그 모습을 같이 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또는 전쟁 전부터 전위적인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은 1913년에 개최된 사진과 회화의 모던 아트전인 아오모리쇼의 영향이 었을 것이다.
이 전람회에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 오는 누드]는 미국 전람회 역사상 보기 드문 스캔들을 일으켰다.
그 작품은 메커니즘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데 마치 고속 사진의 한 장면 같이 역동적이고 미래파 작가 작품에 호응하여 사진과 예술의 새로운 결합을 가능하게 했다.
그 뒤 뒤샹은 기성품을 곁들인 레디 메이드[ready made]를 발표하여 다다이즘이라고 하면 만 레이의 [선물]이냐, 아니면 뒤샹의 [샘]이냐 할 정도로 상징적인 존재가 된다.
다다이즘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네오 다다` 라는 명칭으로 부활되어 전후 고조 되던 기계문명, 인간소외 등의 이유에서 생겨 났으며 대표적 작가는 리히텐 슈타인, 쟝 팅겔리, 올덴버그 등을 들수 있다.
1920년대 초반에 다다는 대중적인 의식에 대한 조직화된 공격이나 타락한 사회 예술적 가치의 단호한 공격수로서의 효용성을 상실하게 된다.
다다이스트들의 난동이나 도발적인 헤프닝도 표준적인 일들로 간주 되었고 충격적인 모든 일들이 점차 내성화 된 것이다.
4. 작가
1)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55]
프랑스 출신의 미국 화가로 현대 미술에서 사물과 관념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서민위주의 작업을 하면서 브르조아 딸과의 결혼식을 이벤트화 하여 2주만에 이혼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다다이스트로 평가되고 있으며 모나리자의 얼굴에 수염을 그린 [L,H,O,O,Q]를 통해 기존의 가치를 조롱하였고 레이드 메이드를 이용한 [샘]을 통하여 일상품과 예술품,그린다는 것의 의미, 장소 등 여러가지 사변적인 미술을 이끌어냈다.
자전거 바퀴를 의자 위에 거꾸로 고정 시켜 관객이 돌릴수 있도록 고안한 작품은 후에 키네틱 아트에 영향을 준다.
그의 작품의 원천은 다다와 초현실주의와 마찬가지로 미술보다는 문학 작품이었다.
현대 초기의 많은 회화와 조각이 전념 햇던 비해학성 때문에 아마도 뒤샹은 그것을 거부하게 됐을 것이다.
1912년 그는 스스로 고안한 기계적 회화로 전향 하였다. 이중 맨 먼저 나온것이 [날랜 누드가 가로질러간 왕과 왕비]의 여러 변형작이다.
뒤샹은 [처녀], [처녀에서 신부로의 이행], [신부], [총각들에의해 발가 벗겨진 신부] 등의 습작에서 기계적인 환상을 추구 하였다.
많은 작품을 남기진 않았지만 미술의 형태를 변화 시키기 보다는 미술에 대한 개념 자체에 혁신을 가져온 뒤샹은 20세기 미술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작가이다.
그는 훗날 많은 미술사조의 연원이 되기도 하였는데 [너는 나를 ]이란 작품에서도 하드에지 미니멀 아트의 양상을 보였고 옵아트의 기법도 보여 졌다.
2) 한스 아르프 [Han Arp,1887-1966]
스트라스부르 출생(집안은 스위스계). 바이마르의 미술학교에서 배움,뭰휀에서 칸딘스키를 만나 [청기사] 운동에 참가해서 전위적 경향으로 들어가기 시작 했다.
가끔 파리를 방문하여 여러 화가를 알게 되었고 병역을 기피해서 스위스에 망명하였으며 곧 후고 발을 통해서 츠아라, 얀코, 세르너,휄젠벡 등과알게 된다.
1920년 까지 취리히 다다의 중심의 한 인물이 된다.1920년 그는 쾰른에서 에른스트와 바르겔트와 함께 다다운동의 한 지파를 만들었다.
2년 후부터는 파리에 정주하며 27년엔 쉬르,30년 세르클 에 카레[Cercle et Carret], 31년에는 [추상 창조]의 운동에 참가하는 등 다다와 추상 미술을 결합 하는 특이한 입장에서 다채로운 활동을 전개 하였다.
작품도 회화, 콜라쥬, 채색 릴리프, 조각등 폭 넓은 작품을 구사 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후에는 둥근 타원형의 뉴기적 형태의 조각을 시도 하였으며 아르프는 초상조각이란 말을 싫어해 자기의 작품을 구체 미술 [Art Concret, 아르콩크레]이라고 불렀다.
3) 피카비아, 프랑시스 [Francis Picabia, 1879-1953]
파리 출생, 부친은 스페인계 뒤샹과 동세대이며 후의 다다이스트 보다도 연장.
그 때문에 20세기 초의 근대파의 운동과 제 1차 세계대전 직후의 새로운 운동과의 과도기를 잇는 존재로 평가된다. 조숙한 화가이며 1900년 부터 인상파풍의 풍경화가로서어느정도의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기질은 늘 변화 하였다.
새로운 경험을 늘 기다리고 있는 그는 추상 예술의 선구자의 한사람 이였으며 뒤샹과 유럽에서 망명자 일행으로 만나
다다의 활동을 시작 하였다.
1917년 기관지를 간행 취리히에 이어서 파리에서 24년 까지 간행을 계속 하였다.
뒤샹과 경쟁 하며 더욱 노골적으로 된 독자적인 기계양식의 회화, 비예술적 재질에 의한 콜라쥬 등을 제작 하였다.
1918년 취리히에 가서 츠아라와 만나서 그곳 다다운동과 합류했다.
피카비아는 다다의 최전성기에 시집[사기꾼 예수,그리스도](1920) 를 출판 햇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을 어리둥절 하게 하는 출품을 계속 하였다.
1921년 5월 그는 다다와는 결별 하였으나 스캔들을 일으키는 독자적 행동으로 파리의 신문에 주목감이 되었다.
22년 소위 [몬스터 시대]가 시작 되어 때로 에나멜 도료를사용한 반 예술적인 타블로를 제작 하기도 하였다.
그는 파리의 사교에 출입하면서 발레의 장치와 의상을 제작 하엿고 영화에 협력 하기도 하였다.1924년 브르통이 선두가 된 쉬르레알리즘 그룹에 지도자급으로 끼려고 했으나 좌절 당한다. 그후 파리의 생가에서 정주하다가 사망.
4) 만.레이 [Man Ray,1890-1976]
미국 필라 델피아 출생, 미국의 사진가, 화가, 전위 사진의 선구자, 여러가지 일중(조형예술, 사진 영화, 문학,건축) 결국 하나를 최종적으로 선택 할수는 없었다.
그는 모든 재능에 뛰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1914-18년 까지 뉴욕의 아방가르드의 모임 장소 특히 알프렛,스티 글리츠의 화랑에 자주 출입 하다가 15년 그곳에서 마르셀 뒤샹과 만나 이후 다다의 모험적인 운동에 참가 한다.
16-21년까지 뉴욕에서의 시위운동이나 전람회에 참가하고 출판물에 협력 했다.
1919년에 3월에는 개인 잡지 (TNT)까지 발행 했다. 이어 1921년에는 뒤샹을 따라 파리에 가서 츠아라, 브르통, 피카비아의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된다.
파리 다다의 중심에 있으면서 정력적인 활동을 전개 하엿으나 그의 관심 은 조형예술의 제작에 있었다.
다다시대를 통해서 상상력을 자유로이 구사 하기위해 그는 타블로의 제작을 중지 하고 사진[Aerograpy,Rayograme등]과 영화 [이성에의 회기,1923] 시각적 실험 기계 (뒤샹과의 협력),다양한 콜라주의 구성, 오브제등 온갖 실험을 하였다.
그 중에는 쉬르레알리즘 운동에 참가하여 그룹의 공식 사진가가 되었다.
그러나 작품은 늘 아이러니와 다다특유의 불순함을 띄고 있었다.
결국 그는 사진가로서 피사첼를 쓰지 않고 직접 필름을 감광 시키는 레이요 그램이나 포토그램을 창시한 작가로 기억하게 되었다.
5. 영향
다다가 현대 미술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많다고 해야 할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추상적 표현주의와 1960년대 신 사실주의를 거쳐 1970년대의 신 회화 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추상화에 이르기 까지 영향을 준다.
특히 다다는 초현실 주의(surrealisme)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데 초현실주의는 다다운동의 자연스러운 결과 라고도 할수 있다.
이것은 고정 관념으로부터의 해방이었고 논리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 가려는 것이었다.
초현실주의가 그 소산이라면 이러한 다다 운동이 필연적으로 관련 지어졌을 것이다.
초기의 초현실주의자들은 다다운동에서 일종의 근거를 잡았고 다다의 정신과 그 표현 수단 또한 알고 있었다.
우연성의 이용이라는 것과 계획적이 없는 상태, 즉 [자동기술]과 모든 표현을 원점으로 환원 시킨다는 점 등이 다다 표현의 최상이었던 바 이것이 초현실주의에서 엿보이게 된다.
그리고 다다의 작가 중 마르셀뒤샹[Marcel Duchamp]은 현대 미술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그 영향은 어느 작품이 어느 사조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만큼, 다시 말해 작품 하나가 하나의 사조를 포괄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실제로 현대 화가 조각가들의 어휘 속에 자주 등장 하는 오브제[object]라는 말은 마르셀 뒤샹의 레디 메이드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특히,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추상 표현주의의 관념적이고 과장된 논조가 지배적일때 야스퍼 죤스[Jsper Johns]와 라우젠 버그[Robert Raus-Chenberg]등 네오 다다[Neo-Dada]라고 불리워지는 일련의 미국 작가들 뿐만 아니라 유럽의 작가들도 뒤샹의 예술개념을 찬양하고 받아 들였다.
이후에도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의 액션 페인팅이나, 현대에 와서 앗상 블라쥬, 팝아트, 유럽의 신사실주의 등등 다다운동의 원리를 확대 발전 시켰으며 예술 양식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다다가 이렇게 현대 미술에 끼친 영향은 대단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현대예술 영역의 확장'이다. 예술이 정형성을 과감히 파괴한 것이다.
그것의 확장은 예술의 개념에서 부터 재료에 있어서도 오브제의 등장을 가져 왔고 표현의 방식에 있어서도 엄청난 변화를 초래해 키네틱, 비디오 아트 등 토탈 아트의 개념으로 확대 시켰다.
이것은 곧 예술의 장식성, 회화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계기도 됐다.
설치와 개념 미술을 통한 조형적 미의식은 물론 미술을 사물의 세계로 끌고 나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