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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이전에 “홍익인간”
크리슈나무르티 : 꺼지지 않는 불꽃,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위하여
-- “聖人”의 시대를 살면서, “내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He is regarded as one of the greatest philosophers and religious teachers of all times. For more than sixty years he travelled the world over, giving talks and holding dialogues that communicate directly to anyone seeking answers to the present world crisis as well as the eternal problems of human existence.
그는 모든 시대를 통털어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자 종교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받들어진다. 60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면서 강연을 하고 대화를 나누었으며, 오늘날 세계적 위기와 인간 존재의 영원한 문제에 해답을 찾는 사람 누구에게나 다 직접 소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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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머리 20220529] ‘낡은 가치’들이 사라진다 해도
좀 엉뚱한지 몰라도,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이 있지요? 끝내 ‘고도’는 오지 않지만 말씀입니다. 혹시, 그때 ‘고도’의 상징을 ‘새로운 가치’로 볼 수는 없을까요? 이 지구촌 위기의 시대에 말씀입니다.
비약이라고 하실까요? 여튼, 수십만 ~ 수백만 년 인류사에 새로 오신 “성인(聖人)” “지두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 지난 5월 11일이 그 분, 태어나신 날이었습니다. 5 년 전, 그 당시에는 무슨 사정이었는지, 보름도 넘은 뒤에 저 짧은 소개 글을 인용 · 게시했었군요.
“크리슈나무르티” 출현의 의미는, “고타마 싯다르타” 이후 “미륵불”께서 오신 것이라고도 하더군요. 그게 사실이라면, 누군가가 제 아무리 막아서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겠지요? 견제세력들이 이 세상 판을 날마다 들었다 놨다 한다 해도, 그야말로 인류사적인 이 일이 그냥 없던 일로 사라지겠습니까? 비록, 전후좌우상하 꽉꽉 다 막힌 한반도라고 해도 말씀입니다.
소위 ‘불교’의 시타르타 부처님께서도, ‘자신을 우상화하지 말라!’고 하셨겠으니, 오늘날 ‘불교’라는 조직종교는 결코 그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는 무리들 소행이 아닐 터입니다. 여기만 그렇겠습니까만. 그 말씀 ‘안 따르는 무리들의 소행’이라고 해야겠지요? 어떻게 부처님 가르침을 살아낸다는 사람이 “일종의 서비스업 종사자”로 머물러 있겠습니까? 그 근본부터가 제대로 된 처사 아니지요?
단정적입니다만, 싯다르타 · 크리슈나무르티 두 분은, 분명히 인간들 각자가 ‘조직’을 거부하는 “개인”으로, “자유인”으로 살아라, 그런 가르침 아닐 수가 없지요? 아주 명백한 사실 아닙니까? 언젠가 한 번 드린 말씀입니다만, 싯다르타 부처님 돌아가신 뒤 600 년인가 흐른 뒤에도, 그 설법 광경을 그린 그림에.. “부처님 모습은 그리지도 않았다. 앉아 계신 곳 의자만 그려 놨다.”고 하지요? 그만큼 우상화를 경계하고 있었다는 거지요. 교조 · 교주 · 신 등등 그런 개념들은 그 뒤 세월 흐르면서 왜곡된 거겠고 말씀입니다.
여기서 좀 무리한 가설이겠습니다만. 불가에서는 3,000 년마다 우담바라, 그 꽃이 핀다는 얘기도 있고요. 그 말은 한 3,000 년마다 그런 “성인(聖人)”께서 오신다는 의미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거야 또 어쨌든지 간에, 싯다르타 부처님 후 크리슈나무르티 그 분께서 오신 거니까, 싯다르타 부처님 이전에 오신 분은 과연 없었을는지요? 지금으로부터 12,000 년 전의 ‘종교’ 유적이라고도 하는, 저 터키 ‘괴베클리 테페’도 있다고 합니다만, 역시 그런 거야 어쨌든지 간에, 저런 의문은 그리 허무맹랑한 질문만은 아니지요?
그런 면에서, 이 세상 가장 “종교적인 마음씨”라고 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저’ 하는 마음, “홍익인간”을 저 흐름과 이어볼 생각도 드는 것입니다. 더는 언젠가는 이런 것들이 사실로 밝혀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일고 말씀입니다. 오늘날까지도.. 한반도 사람들 보면, 그만큼 ‘종교성’이라고 할까, 그런 모습들이 뚜렷하게 보이는 듯하기도 하고 말씀이지요. 특히, 북한 지도자 우상화 모습에서도 그렇고, 남한의 정립해 있는 조직 종교들과 사이비라고 하는 현상들을 봐도, 그런 생각들이 스치곤 하거든요. 그게 다, 저 홍익인간 마음씨지만, 이래저래 왜곡된 거라서 오늘날 모습을 보이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너무 나갔네.’ 하실지 몰라도, 여튼 이런저런 생각들을 한번 발설해본다고, 뭐, 그리 과한 허물 않으시기만 바랍니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오늘날 ‘인간세’ 기후위기는 피부로 다가오고 있고, ‘인간상실’의 꼴불견들 역시 하루하루 다양하게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서 한때 “동방의 밝은 빛”이었던, 이 삼천리금수강산 너머 아시아 동쪽 끄트머리 한 무리의 사람들의, 그 옛날 저 ‘고운 마음씨’들을 되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도 해보는 것입니다. 왜, 하필, 역사정립 · 고대사발굴만 제일 중요한 일은 아니겠지요?
게다가 국제적으로 여전히 지구촌을 지배하는 건 서구물질문명이지요? 오늘날 거기에 대한, 러시아의 ‘대륙문명’ 운운이라든가 중국의 ‘중화굴기’ 운운이라든가 하는 것들도, 끝내 그 와중의 ‘지꺼 쟁기기’밖에 아닌 듯해서 말씀입니다. 그런 움직임 바탕에는 별로, 거의 아무 것도 없는 실정이며, 오늘날 인류가 닥친 거대한 ‘위기’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고 말씀이지요. 그래, 비록 나 하나뿐일지라도, 이렇게 생각이나마 함 해보자, 그런 심정입니다.
눈곱만치의 가치도 없는,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니, 별로 의미 없는 넋두리일지라도.. 어떻게든 저 “홍익인간 마음씨”를 한 번 들추어보기라도 하자, 그런 나날들이라서요. 크리슈나무르티 가르침을 “홍익인간”에 가져다 붙여보자, 그런 마음이 진작부터 있었기에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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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끄적거려놓은 건 몇 년 사이의 ‘사족’인데요, 그저 내다버리지 못 하는 ‘집착’ 때문에 달아놓은 것뿐입니다. ‘이딴 걸 왜 못 버리냐?’ 하시겠지만, 혹시나 관심 있으신 분, 흘낏, 읽어라도 보시라고 그대로 달아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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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1 부연, 날짜가 며칠씩이나 지나버렸군요.]
5월 11일. 크리슈나무르티 생일! ‘성탄일’이라는 이름도 아니고 ‘불탄일’이라는 이름도 아닙니다만, 케이 재단에서라면 잔치를 벌이곤 하는 날입니다. 조촐하게 말씀이지요.
대한민국에서는 정말 아무도 관심 없는데, 오늘 단지 저 혼자서라도 그 분 생일잔치를 해야 할까요? 날씨 추워지고 동짓날 즈음이면 성탄 운운하면서 온 세상이 펄쩍 들썩거리는데 말씀입니다.
그러나 ‘실상’으로서 세상 되어 있는 꼴을 보면, 어찌 잔치 운운하며 흥청망청 보낼 수 있습니까? 그런 것들도 모조리 다들 무슨 권력욕·장삿속에 놀아나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오래 된 미래이기도 하고요.
오늘도 역시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사랑’ 빼고는 세상 모든 것들이 다 그렇겠습니다만, 특히 ‘국제관계’라는 것은 한 치도 못 벗어나는 ‘힘의 논리’지요. 그 가장 불쌍한 나라가 미국이라는 나라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힘’ 써서 먹고 사는 나라니까, ‘노가다 국가’라고 하면 또 뭐라 그러겠지요? 그만큼 그 나라 백성들은 진짜로 다 죽을 맛 아닐까요? 국민소득이 행동을 막아주고 있는 거겠지만요. 행동해봤자 결과도 이상하겠고 말이지요. 거기서는 꼭 무슨 ‘폭동’이라는 말이 붙어다니는 머리에..
오늘은 크리스마스라거나 하는 식의 잔치와는 무관하게,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속으로나마 감사한 마음을 지닐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관심들이 없어서 그렇지, 무엇보다도 인류사적 성인께서 새로 오셨다는 건 가장 ‘복’ 받은 일이겠습니다. ‘나한테 복 좀 달라’는 식의 복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더구나 딴 사람도 아니고, ‘고타마 싯다르타’와 꼭 같으신 분께서 오신 거니까 말씀이지요. 이렇게 말하면 여전히, 무슨 정신이상자 따위로 치부되는 한국 사회입니다만. 평생을 걷는다고 걸어도.. 각설,
흔히 인류의 사대성인 · 오대성인 얘기들을 하곤 하지만요, 오늘날에도 세상은 그분들을 빙자하는 인간들로 갈가리 너덜너덜 찢어져 있고, 눈만 뜨면 서로 치고 박고 물고 뜯고 아웅다웅 싸우는 통에, 지구 전체가 진짜로 평화로운 날이 단 하루도 없습니다. 명색이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저 ‘힘 쎈 나라’가 해온 짓들을 보면, 정말 속이 안 편하지요? 안 그렇습니까? 비교적 상당히 평화롭게 살고 있던 그 많은 인디언들 다 죽이고 세운 나라가 오죽하겠습니까마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건 참으로 무지막지하게 잔인한 인간들 망나니짓이었습니다.
왜 미국이라는 나라는 온 세상으로부터 저다지 밉보여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건 그렇다 치고, 본문 첫구절부터 보십시다. ‘모든 시대를 통털어 가장 위대한 사람 가운데 한 분!’ 그런 분에게 철학자라고 하건 종교인이라고 하건 종정 · 교황(이런 말은 더 해당이 안 됩니다만)이라고 하건, 그런 게 그리 의미가 있는 건 아니겠습니다. 그냥 ‘인간’, 그것도 ‘참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요? 진짜 참된 인간이라면, 세상에 아무 것도 바라는 것 없이 정말로 “종교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겠지요?
엊그제도 드린 말씀입니다만, 세상은 영락없는 아귀지옥입니다. ‘아수라’니 ‘수라도’니 ‘무간지옥’이니 하는 말도 있지요? 그 속에서 하루하루 겨우겨우 목숨 부지해가며 끌려가고 있는 인간들에게, 정말 그 무엇 하나 내꺼 바랄 게 있겠습니까? 있는 거 다 퍼주어도 턱없이 모자라는 판에 말씀입니다.
소위 ‘인생’을 운운하는 인간들 모두 다 마찬가지지요? 우리 부모님도 꼭 그렇게 살다 가셨으며, 지금 내 형제 내 친구들도 꼭 그러고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저마다 인생이라는 ‘짐’을 지고, 무거워서 채 일어서지도 못 할 만큼 ‘나’라는 짐을 지고, 쓰러질 듯 자빠질 듯 엎어질 듯 안쓰럽게 발 떼고 있는 것이니까요.
이어지는 본문 내용은, ‘인류사적 성인’으로서 크리슈나무르티 생애를 간략하게 서술해놓은 것입니다. 그게 무슨 조직종교에서 인정해주고 말고 하는 그런 “성인(聖人)”이 아니지요. 문득 생각나는 일화입니다만, 저의 학위논문 심사위원이었던 어느 교수에게, ‘크리슈나무르티는 인류의 성인이다’고 알려주었는데요, 그때 그 양반 하는 말이, ‘무슨 소리냐? 교황청에서 인정하지도 않은 성인이 세상 어디에 있느냐?’고 삐딱하게 말하기도 했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지금도 열에 아홉은 여전히 그런 수준이겠지요? 그리고 크리슈나무르티 출현으로 해서, 자신들의 ‘밥그릇’ 좀 덜 차겠다 싶은 무리들은, ‘한 숟가락’이라도 덜 차겠다 싶은 인간들은, 이 엄연한 사실이 더욱 더 ‘알려지지 못 하게’ 적극 훼방 놓지 않겠습니까? 흔히 말하는 ‘종교’라는 것은 그 역사를 통털어봐도, 인간을 살짝 위무해주는 것 말고는 기껏해야 ‘세력’ 가지고 먹고 사는 행태밖에 보이지 못 하고 있습니다. 역시나 ‘힘’ 써서 먹고 살아온 거지요. ‘왕권’과 ‘교권’ 사이의 싸움이기도 했고 말입니다. ‘십자군’이라는 것도 있었고 말이지요. ‘면죄부’라는 것도 있었다지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종교인’이라고 하는 게 그냥 하나의 노가다 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끝내 참된 ‘지성인’이라야만 ‘종교’에 가 닿겠지요?
당연한 얘기지만 ‘종교’가 어찌 한낱 ‘밥벌이’겠습니까! 천번만번 아니 될 일이지요? 어찌 해서 다들 ‘종교’랍시고 ‘사랑’을 말한다면서, 서로 물고 뜯고 찢고 주먹질이란 말이겠습니까? 잘 모르는 영역이라서 얘기가 좀 이상한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의미에서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종교의 자유’라는 개념도, 저런 쌈박질을 전제로 하고서야 나올 수 있는 개념 아니겠습니까? 선진 모든 헌법에 그 ‘종교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
저때 말하는 ‘종교’란 그 자체로 이미 ‘속박’이요 ‘구속’일 따름입니다. ‘조직’이니까요. 제 아무리 고급의 수많은 종교가 있다고 해도, 인간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야 그게 말 그대로 ‘으뜸 되는 가르침’이 되는 거지요. 그러나 그게 아니라 각자의 조직으로, 의식 밑바닥에서부터 서로가 적대시하고 있는 판에 그 어찌 ‘사랑 · 자비 · 행복’을 얘기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냥 ‘분열되면 싸웁니다.’ 그러니 저건 눈 가리고 ‘아웅’이지요. 아니면 ‘냐옹’이겠습니까? 이게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얘기라면, 너그럽게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하나 초등학교까지 배운 지식으로 해도, 분명히 저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구태여 크리슈나무르티 탄신일 즈음해서 해보는 생각만은 아닙니다만, 아무리 희대의 성인께서 오셨다 한들, 인간들이 그 말씀을 제대로 듣고 깨달아서, 그리 살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인류라는 종족이 앞으로 지구 나이만큼을 더 산다고 해도,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전부 다 ‘행복’한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단 한 사람이라도 더 행복한 사람이 나와서, 그 사람의 향기가 바람에 주변으로 퍼져갈 수 있을 뿐이겠지요. 기득권 분위기야 ‘알게 모르게’ 그런 흐름을 막을 수밖에 없이 되는 있는 것이겠고 말씀입니다.
그런 행복이 어찌 저잣거리의 쾌락 따위겠습니까? 그 때문에라도 인간 각자가 정말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내야만 하겠습니다. 바로 그게 진짜배기 ‘교육’의 참된 역할 아니겠습니까? 분명히 ‘쾌락’은 행복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거의 모든 인간들이 쾌락밖에 모르거든요. ‘생각’ 자체가 이미 쾌락입니다. 절간에 있는 ‘스님’이나 교회 ‘목사님’이나 성당 ‘신부’님, 비구니, 수녀, 정녀 등등 소위 저 ‘종교인’이라고 해도 그들에게 붙여진 바로 그런 ‘이름’ 자체가 쾌락을 포함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조직’이 문제라고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기분 안 좋은신 분 계시다면, 제 말이 틀렸기만 바랍니다.
대부분의 종교 행위라는 것이 ‘기복신앙’을 넘어서지 못 하고 있는데 말씀입니다. ‘구도자’라고 해도 ‘조직’에 가담하고 있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망가뜨리는 짓이지요. 흔히들 ‘복’이라는 것도 역시 좀 이상한 구석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지구의 유한한 자원으로 도대체 어떻게 저 인간들의 무한한 욕망을 다 채운단 말입니까? 결코 안 되는 일이지요? 무슨 태양열, 그 에너지를 무한하게 그냥 끌어다 쓸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몰라도, 그런 거 아닌 다음에야, ‘나한테 복 좀 더 달라’고 ‘기도’하는 행위 역시, 심한 말로 안 해도 그 ‘도둑놈 심뽀’ 비슷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으뜸 가르침’이라면, ‘참된 이치’라면 역시 ‘지성’이 작동 될 수 있을 뿐이겠습니다. 그런 면에서도 ‘저다지도 아등바등 죽어라 살아가는 인간’들을 바라보면, 그냥 ‘짠’해지 않겠습니까? 저렇게 ‘결코 안 되는 일’에 목숨 걸고 살아가는 저 불쌍한 중생들 말씀입니다. 이미 가진 것만 해도 너무 많으면서 말씀이지요. ‘나’ 하나만 해도 엄청 버겁지 않습니까? 부디, 저더러 ‘너는 도대체 과연 그리 사느냐?’고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오로지 모든 인간들 각자 자기 자신일 뿐입니다. 저야, 크리슈나무르티 말씀으로 해서 그냥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보는 것일 뿐이지요.
그러니 쾌락과 멀리 떨어진 사람이 바로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겠습니다. 그래서 그게 또한 ‘종교’ 영역이겠고 말씀입니다. 명색이 종교인이라면서 노름하고 쌀롱 다니고 그러면 쓰겠습니까? 그러나 그 ‘아무 것도 아님’ 자체 역시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그건 단지 하나의 바탕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진짜 중요한 것은, 사회 구성원 각자가 최소한의 ‘지성’은 꼭 발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물론 당장에 될 수 있는 일도 아니며, 더구나 이렇게 글 몇 줄 갈겨쓴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닙니다.
어쨌든지 간에, 무슨 수를 쓰든지 간에, 최소한 젊은이들에게만이라도 진리를 얘기해줘야 할 것이며, 어떻게 해서라도 단순한 ‘소개’라도 해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한두번 하는 소리도 아니지만, “정작 본인들이 어떻게 살든지 간에, ‘이런 게 있다’고 소개라도 해줘야지요.” 세세한 정보 전달과 해설과 솔선까지는 무리라고 해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마저도 못 하게 해서야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일까요? 대한민국에서는 진짜로 아무도 없다면 외국인이라도 모셔 와야 할 판입니다. 정작 ‘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겨우 한 오라기 흐름마저 훼방 놓기에 혈안이니 말씀이지요. 그건 최소한이나마 ‘된 사람’도 못 되는 거지요?
뭐가 어찌 되든지 간에, 사람을 먼저 길러내야만 하겠습니다. 혹시 오늘날 우리 사회의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이 이런 데에도 해당이 되겠습니까? 설마, 여기까지 해당될 수는 없을까요? 어찌 됐 건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한발두발 나가야겠습니다. 어떤 조직에도 기대려 하지 말고, 기득의 조직 종교들이 시뻘건 눈으로 비껴보고 있어서도 그럴 테지만, 여튼 그런 건 우리 사회 실정에서는 말도 안 되는 얘기니까요.
여튼 어쩌든지 간에 마음 있는 개인들이 모여야만 하겠습니다. ‘마음 있는 척’하는 인간들 말고 말이지요. 아무리 꽁꽁 숨겼다고 해도 그런 ‘거짓,’ ‘가짜’들은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그 따위 마음으로 물 타기하려거나, 오히려 이렇게 소리도 한번 제대로 못 내고 꼴꼴 흘러가는 흐름에 빌붙어서 ‘지꺼’나 챙기려 하는 인간이 있다면, 지금에라도 손을 탈탈 털어야만 할 것입니다.
또한 얼치기 모임 하나 만들어놓고, 사람들 현혹시키는 짓들도 이제는 그 수작이 다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거기서도 사람들이 흩어지고 있지요? 참 오랫동안 ‘안 그런 척’ 하고 숨겨왔지만 말씀이지요. 마치 뭐 하나라도 ‘있는 척’ 하지 않았습니까? 각설.
그 사이 또 하루.. 5월 11일, 크리슈나무르티 생신 기념으로 한 줄 적어보자 한 건데, 이리 끌고 저리 미루다 보니 이틀이 지나버렸군요. 저한테는 주말이라고 뭐 다른 게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여전히 마무리를 못 짓겠습니다. 여기까지 쓴 글 읽어봐도, 분명 쓰다 만 글입니다. 그냥 묵혀버릴까 싶기도 하지만.. 억지로나마 끝을 맺어보겠습니다.
뭐니뭐니 했지만 그냥 딱 한 마디로, ‘인간이라는 게 이 모냥 이 꼴의 됨됨이로는 인생 별로 의미 없다’는 것이고, “그러니 ‘이 모냥 이 꼴’이 정말 어떤지 스스로를 확실하게 보는 것부터 해라.” 그 말씀입니다. ‘각자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라’는 그 말씀이지요. 정말로 확실하게 본다면 행동은 거기서 저절로 나올 테니까요. 애기 하나가 우물로 기어가는 게 보인다면, 그냥 가만히 앉아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실제적인 ‘자신의 모습’을 안 봅니다. 무의식적으로 피해 다니기만 하는 거거든요. ‘무슨 행동이 나올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겠습니다. 최소한 ‘지금 상태는 유지하겠다’는 거지요. 이미 나이 들어버린 사람들이야 그런 경향이 더 강하다고 하겠지만, 글쎄요, 젊은이들이라도 ‘고해’로 안 살 게, ‘지성’으로 살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정말 ‘아깝지 않게’ 키워야지요. 거창하게 무슨 ‘인류공영’ 따위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그냥 자신의 인생을 좀 더 의미 있게 가꿀 수 있도록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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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렇게 다녀가셨네요.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길님의 시도 있었던 것 같군요..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게 홍익인간의 마음씨겠지요?
표현하기 조심스럽지만, 뭔가 신성함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 무한하고 깊은 뭔가를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이 종교적인 마음씨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 면면이 아련하게나마 이어지는 것이 홍익인간의 전통일까요?
저는 그게 그렇지 않을까..? 그런 생각입니다. 증거를 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확신도 금물이겠으니.. 더 이상 나가는 건 더 부질없는 짓이겠지요.
술샘이나마 이렇게 답글 달아놨으니.. 오늘 끄적거린 거 하나 더 올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