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도 창의군(倡義軍)의 서울진격을 기념하는 탑(塔)이다.
1907년 일제는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한다. 전국의 의병을 일으켜 서울로 진격하여
통감부를 격파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1907년 12월 경기도 양주에서 전국의병부대 13도 창의군을 조직한다.
서울 중랑구 망우동 산57-3 망우산 북쪽 기슭, 13도창의군 군사장 왕산(旺山)허위(許蔿)가 이끄는 선발대 300명이
서울로 진격하여 일본군과 혈전을 벌인 그 자리에 기념탑(현충시설물)이 들어섰다.
창의군은 1907년 11월부터 1, 2차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화력 부족과 중과부적으로 서울 탈환 작전에 실패했다. 동아일보사가 항일 의병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3·1운동 유적 보존 운동의 일환으로 건립하였다. 국가보훈처 현충 시설물로 지정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서울시는 허위의 업적을 기려 청량리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가로를 ‘왕산로’라고 명명했다.
왕산 허위는 1895년 명성황후 살해사건과 1904년 을사늑약 직후 의병을 일으켰다.
일제가 정미 7조약 체결을 강요하고 군대를 해산하자 허위는 세 번째로 의병을 일으켰다.
그에게 거사 밀명을 내린 사람은 고종이었다.
고종은 강제로 퇴위당하기 직전인 1907년 4월 ‘거의’(擧義)라는 두 글자가 쓰인 편지 의대조(衣帶詔)을
옷 속에 넣어 허위에게 비밀리에 전달했다. 을미의병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이인영도 다시 뛰어들었다.
이인영은 전국에 격문을 띄워 1907년 12월 각도의 의병부대를 경기도 양주에 집결토록 했다.
경기도에서 거병한 허위도 의병들을 이끌고 동참했다. 의병 총수가 1만명을 헤아렸다.
이인영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하는 연합의병대(13도창의대진소)가 결성됐다.
1908년 1월 연합의병대는 서울진공작전을 개시했다.
화승총에 짚신을 신은 의병은 애초에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군(日軍)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더욱이 서울 진공 계획을 알아챈 일제는 동대문에 기관총을 설치하는 등 방어망을 펼치고 있었다.
허위는 선발대 격인 감사병(敢死兵) 300명을 지휘해 선두에 서서 서울로 진격했다.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서 일본군과 마주쳤다. 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일본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아 패퇴하고 말았다. 이인영이 이끄는 본대도 뒤이어 1월 28일 동대문 밖에 도착했다.
바로 그날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이인영에게 부친의 부음이 날아든 것이다.
이인영은 후사를 허위에게 맡기고 급히 경북 문경으로 돌아갔다. 서울진공작전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의병들은 부대별로 흩어져 유격전에 들어갔다. 허위는 주로 임진강 유역에서 일본군의 진지를 습격하고 관공서를 덮쳐
친일파들을 처단했다. 그의 의병들이 수많은 전과를 올리자 이완용은 사람을 보내어 관찰사, 내부대신 직을 주겠다고 유혹했다.
“너(이완용)는 반드시 죽일 것이로되 심부름 온 놈이야 죽여서 뭐하겠느냐!”
허위는 이완용의 심부름꾼을 크게 꾸짖어 돌려보냈다.
1908년 6월 11일 아침 오오타 기요마쓰 등 일본 헌병 수십 명이 영평군(지금의 포천) 서면 유동에 있던 그의 은신처를 덮쳤다.
헌병들이 의병 한 사람을 붙잡아 회유와 협박을 해 은신처를 알아낸 것이다. 그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체포에 응했다.
13년 의병투쟁은 그렇게 끝났다.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찌하랴.
지금 내가 죽을 곳을 얻었으니 너희 형제간이 와서 보도록 하라.”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군 헌병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의 심문을 받았다.
허위는 헌병사령관 아카시에게 “일본이 한국의 보호를 부르짖는 것은 입뿐이요, 실상은 속으로 한국을 멸할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적은 힘으로나마 의병을 일으켰다”고 말한다.아카시는 “일본이 한국을 대하는 것이 마치 병자 몸뚱이를 주무르는 것과 같아서
처음에는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마침내는 병이 나을 것”이라고 응수한다. 허위는 책상 위의 연필을 가리키며 “이 연필은 붉은 빛깔이지만 내면은 남색이지 않은가. 귀국이 한국을 대하는 것도 껍질과 내면이 크게 다름은 다툴 것도 없이 명백하다”고 반박했다.
아카시는 그의 강직한 성품과 늠름한 태도에 감복하여 ‘국사’(國士)라고 칭하며 존경을 표했다.
아카시는 또 허위의 목숨을 구하려고 데라우치 통감에게 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재판에서 일본 재판관이 “의병을 일으키게 한 것은 누구이며 대장은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웃으면서 “의병이 일어나게 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이며 대장은 바로 나다”라고 대답했다.
“왜냐”고 묻자 “이토가 우리나라를 뒤집어 놓지 않았다면 의병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토가 아니고 누구겠느냐”고 반문했다.
허위는 9월 18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렇지만 서대문형무소에는 사형시설이 없었다.
일본은 허위를 사형시키기 위해 서대문형무소 옥사 옆에 사형장을 급히 만들었다.
허위는 서대문감옥에서 1908년 9월 27일(양력 10. 21) 교수형을 당해 55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왕산은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 제1호 사형수였다.
1908년 10월 21일 정오. 허위는 경성감옥의 교수대에 올라갔다.
안색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태도는 당당했다. 왜승(倭僧)이 불경을 읽으며 명복을 빌어 주려 했다.
그는 “충의(忠義)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요, 혹 지옥으로 떨어진 대도
어찌 너희의 도움을 받아 복을 얻겠느냐”고 꾸짖었다. 검사가 시신을 거둘 친족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죽은 뒤의 염시(斂屍)를 어찌 괘념하겠느냐. 옥중에서 썩어 문드러져도 좋으니 속히 형을 집행하라”고 일갈했다.
털끝만큼의 흔들림도 없었다.
구한말 대법원장을 지내고 전국 의병을 총지휘해 서울 진격을 노렸던 13도 창의군 대장 허위의 최후였다.
그의 나이 53세였다.
대한매일신보는 "하늘의 태양이 빛을 잃었다."(天日無光’)이라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국치민욕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이하리오. 아버지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했으니 불충불효한 몸이 죽은들 어찌 눈을 감으리오!”
(國恥民辱 乃至於此 不死何爲 父葬未成 國權未復 不忠不孝 死何瞑目)
그는 이같은 유서를 남겼다. 죄수들과 도성(都城) 안팎의 백성이 통곡했다.
시신을 수습한 사람은 제자 박상진이었다.
박상진은 하얀 천으로 시신을 감싸 안고 나와 금오산 아래에 묻고 장례를 치렀다.
상주인 장남 허학을 비롯한 유족들은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어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왕산 허위는 1854년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에서 태어났다.
허위는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했다.
"달은 대장군이 되고(月爲大將軍) 별은 만병이 되어 따르노라(星爲萬兵隨)"
그는 8세 때 벌써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뒷날 13도 창의군을 모아 수도 서울을 향해 진격하던 그 자신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꽃을 꺾으니 손에 봄이요(折花春在手) 물을 길으니 달빛이 집 안에 드네(汲水月入家)"
또다른 구절은 그의 뛰어난 시상(詩想)을 짐작케 한다.
그의 맏형인 허훈은 의병운동가로 활동하였고, 셋째 형 허겸은 독립투사로 활동하였다.
집안의 영향을 받아 왕산 허위는 1896년 을미의병 때부터 의병활동을 했다.
재야유생들이 주도한 을미의병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허위는 고향에서 이기찬, 이은찬, 조동호 등 인근의 지사들과 1896년 3월 26일 김천 읍내의 장날에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이 항일의병을 ‘김산의병’이라 부른다. 이들은 대구로 진격하기 위해 각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공주와 대구에서
관군과의 전투 끝에 참패를 당하였다. 아직 의병이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적군을 만나게 되어
의진이 쉽게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이후 의병의 주모자들은 관군의 포로가 되었고 선생은 잔여 의병들을 모아 북상하여 충북 진천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해산하라는 임금의 밀지를 받고 의병을 해산하였다.
허위는 의병을 해산한 후 성균관박사, 평리원 서리재판장 등 중앙의 관료로 진출하였다.
이때에도 그는 공평하고 신속하게 업무를 처리하여 선비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또한 이때에 항일 언론가였던 장지연과도 교우를 하며 지내었다.
1904년 2월, 일제는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고 한국침략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러일전쟁을 도발하였다.
그리고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조인케 함으로써 일제는 한국침략의 뜻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더 나아가 일제는 조선의 군사요충지를 확보하게 되었고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허위는 이상천, 박규병 등의 관료 동지들과 함께 배일통문을 돌려 일제의 침략상을 규탄하며
전국적인 분발을 호소하였다. 다음은 배일통문의 내용이다.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느니보다 온갖 힘을 다하고 마음을 합하여 빨리 계책을 세우자.
진군하여 이기면 원수를 보복하고 국토를 지키며, 불행히 죽으면 같이 죽자. 의(義)와 창(槍)이 분발되어
곧 나아가니 저들의 강제와 오만은 꺾일 것이다(…)비밀히 도내 각 동지들에게 빨리 통고하여 옷을 찢어
깃발을 만들고, 호미와 갈고리를 부셔 칼을 만들고(…)우리들은 의군을 규합하여 순리에 쫓게 되니 하늘이 도울 것이다.”
어떤 정부 관료도 일제에 대항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그는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항변하였다.
일제는 이런 허위를 구금하고 항일투쟁을 중단하라는 압박을 주었지만 그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라며 반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