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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2024년 겨울호
【김남주 읽기 · 4】
김남주는 진실로 민중의 밑바닥을 안아준 시인이다
대담 : 이강(김남주 친구) | 맹문재(시인)
일시 : 2024년 10월 20일
장소 : 광주광역시 <달정원>
사진 및 유튜브 : 박이정 TV
참석자 : 조봉훈(동학 천도교 광주 교구장), 박석삼(국제포럼 대표), 이효복(시인), 박이정(시인)
[김남주의 친구 이강]
맹문재 : 김남주 선생님의 산문들을 읽으면 이강 선생님이 가장 많이 언급되어요. 그만큼 김남주 선생님과 가까운 친구 사이라고 볼 수 있지요. 연보에 따르면 두 분이 중학교 때부터 어울렸다고 하는데, 언제부터 가까운 사이가 되었는지 말씀을 듣고 싶네요.
이 강 : 함께 해남중학교에 다녔는데,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같은 반이었어요. 1학년 때는 그렇게 가깝지 않았고, 2학년 때부터 가까워졌어요. 왜 가까워졌는지 잘 모르지만, 둘 다 해남 읍내 학교가 아니라 시골 학교 출신이라는 동질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둘 다 시골 학교에서는 공부를 잘했고, 해남중학교에서도 잘했어요.
맹문재 : 기존의 김남주 선생님의 연보를 보면 삼산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제가 조사해보니까 교명이 삼화초등학교인데,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이 강 : 그 당시에는 학교 이름이 삼화초등학교인데, 나중에 삼산초등학교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여요.
맹문재 : 네. 참고할게요. 그런데 두 분이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했어요. 아주 가까운 사이였는데, 왜 다른 학교로 가셨는지요?
이 강 : 둘 다 광고(광주고) 입학시험을 봤는데 남주가 떨어졌어요. 이상하게 남주가 나보다 공부를 잘한 것 같았는데,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나는 학교에 다니고 남주는 1년 쉬었어요. 그런데 남주는 공부는 안 하고 매일 우리집에 놀러왔어요. 내가 학교를 파하고 오면 우리 집에 와서 자고 했어요. 1년 365일 중에서 300일을 우리 집에 와 지냈어요. 그렇게 한 해 쉬고 광주일고(광주제일고등학교)를 들어갔어요.
맹문재 : 김남주 선생님께서 중학교 시절에 영어 실력이 상당히 뛰어났다는 기록이 있어요. 학교생활은 어떠했는지요?
이 강 : 기억에 남는 것은 아주 우악스럽게 생긴 영어 선생님이 계셨는데, 처음 수업할 때부터 영어로 이야기를 했어요. 그리고 책을 무조건 외우라고 했어요. 그래서 공부를 잘하는 한 10명은 영어책을 다 외우고 다녔어요. 나도 그중 한 명이었지만, 남주가 제일 잘했어요. 탁월한 소질이 있었어요.
맹문재 : 공부 말고 학교생활에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겠지요. 소풍 때라든가 운동회 때라든가 재미있었던 일이 있는지요?
이 강 : 그런 건 별로 없어요. 중학교 졸업하기 한 3개월 정도 남주하고 하숙을 한 적이 있어요. 해남중학교 산꼭대기에 있는 집이었어요. 그런데 둘이 공부를 해본 적이 없어요. 하숙집 주인아저씨가 우리 아버님하고 잘 아는 사이였어요. 그래서 공부 좀 하라고 야단을 맞은 적이 있어요.
맹문재 : 그렇게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도 광주고와 광주제일고에 진학했으니 그야말로 천재시네요. 그런데 김남주 선생님께서는 광주일고를 다니다가 2학년 때 학업을 포기하고 자퇴를 해요. 그러고 나서 검정고시에 합격해요. 김남주 선생님께서 왜 자퇴했는지요?
이 강 : 내가 물어봐도 남주가 대답하기 싫어했어요. 학교가 입시 위주로 공부를 하는 바람에 남주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 얘길 딱 한 번 했어요.
맹문재 : 김남주 선생님은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에 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해요. 이강 선생님도 그렇지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이 강 : 나는 연세대학교 정외과 시험을 쳤다가 떨어져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어요. 3년 동안 열심히 일했어요. 놀면 안 되었는데, 내가 할 일이 그것밖에 없었잖아요. 쟁기질을 제외하고는 농사를 다 지었어요. 그때 남주는 광주로 올라가 우리 동생들하고 놀았어요. 서울대학교를 두 번인가 지원했는데 안 되었어요. 그런데 추석 지난 뒤 대학 입시에 예비고사 제도가 생긴다는 뉴스가 났어요. 전 과목 시험을 봐서 대학 시험 자격을 갖는다는 뉴스를 듣는 순간, 대학을 못 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광주로 올라갔어요. 남주하고, 또 광주고 나와서 쉬는 친구들이 모여 저녁마다 화투를 치고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 놀았어요. 그렇게 해서 나는 전남대 법학과를, 남주는 영문과를 시험 봐서 합격했어요. 나는 형제가 많다 보니 고급 공무원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법대로 진학했고, 남주는 영어를 잘하니까 영문학과로 간 것이에요.
[김남주의 동지 이강]
맹문재 : 두 분이 전남대에 입학해서 교련 반대 운동을 하셨는데, 그 상황을 들을 수 있는지요?
이 강 : 대학 입학하기 전에 송정민이 주동이었어요. 송정민은 우리보다 나이가 한 살 적었지만 제대로 입학해 4학년이었어요. 송정민의 부친은 교장 출신인데, 박석무 선배가 존경하는 사회적 인물 중 한 분이었어요. 그만큼 인품이 훌륭했어요. 박석무 선배는 송정민의 집에서 하숙했는데, 따라서 송정민이 박석무 선배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어요. 교련 반대 운동에도 관계가 깊어요. 송정민은 머리가 좋고 본질적으로 리더 기질이 있었어요. 아버지의 성품을 이어받았겠지요. 교련 반대 운동으로 송정민은 대학에서 제적당해요. 그랬다가 나중에 복학되어 전남대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되었어요. 지금도 살아 있어요. 우리는 송정민의 뒤를 이어 했을 정도였어요.
맹문재 : 언제 기회가 되면 송정민 선생님을 뵙고 말씀을 듣고 싶네요. 이강 선생님께서는 3선개헌 반대 운동도 하셨지요? 그 상황을 듣고 싶네요.
이 강 : 1969년 전국의 대학에서 3선개헌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어요. 전남대에서는 하는 사람이 없어 1학년인 내가 주위에서 내세워서 할 수 없이 나선 것이에요. 윤한봉과 함께했어요. 전남대 정문으로 진출해 돌멩이 좀 던지다가 잡혔어요. 그것으로 강제 징집이 되었어요.
맹문재 : 좀 전에 말씀하신 박석무 선생님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릴까요? 제가 언젠가 인사를 드렸는데, 저의 이름을 듣자마자 신창 맹(孟) 씨 족보를 다 꿰고 있어 깜짝 놀랐어요.
이 강 : 그러한게 그 양반은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 시대의 고귀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에요. 진짜 지식이 대단해요. 내가 언제 서울에서 박석무 형과 함께 유명한 석학들과 식사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석무 형이 그 사람들에게 지지 않았어요. 워낙 공부가 많이 돼 있어요. 책을 안 보려면 우리 집에 오지 마라, 책도 안 읽으면 너하고 나하고 뭐 할 얘기가 있겠냐, 공부한 내용을 갖고 얘기를 해야 어디가 틀렸다든가 맞았다든가 어쩐다 하지 않겠냐,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분이에요. 공부에 대한 지론이 있고, 고유한 훈육의 관점이 있어요. 할아버지께서 고향 일대에서 유명한 한학자였어요. 그래서 박석무 형이 다산 정약용 같은 연구를 했어요. 영어도 잘하고, 원래 영어 선생이었어요. 처음에는 석무 형이 남주를 지도해주었지요. 남주나 나는 석무 형처럼 많은 책을 접할 계기가 없었잖아요.
맹문재 : 선생님께서는 3선개헌 반대 운동으로 강제 징집이 되었는데, 왜 김남주 선생님은 징집이 되지 않았는지요?
이 강 : 남주는 혼자 징집이 되게 생겼으니까 그 전에 자진해서 31사단 신병교육대에 입영했어요. 그래서 신체검사를 했는데, 떨어진 것이에요.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지만 어떻든 신체 사에서 떨어져 쫓겨나온 것이에요.
맹문재 : 선생님께서는 강제 징집되어 카투사(KATUSA)가 되었지요? 어떻게 되셨는지 궁금하네요.
이 강 : 징집 과정을 거친 다음 부대 배치할 때 카투사로 갔어요. 카투사가 되기는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에요. 내가 영어를 좀 잘해서 가지 않았나 싶어요.
맹문재 : 카투사 생활은 어땠어요? 그곳의 책들을 훔쳐서(웃음) 김남주 선생님께 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 강 : 처음에는 양놈과 우리나라의 차별성이 너무 뚜렷하게 나타나니까 기분이 나쁘고 부아가 났어요. 그런데 양놈들이 다 건달이 아니었어요. 공부하는 군인도 꽤 많더라고요. 카투사 중에도 공부하는 카투사들이 있었는데, 실력을 갖춰가는 군인들은 부대에서 인정받는 분위기였어요. 군대 생활을 꼬박 3년 했어요.
미8군 도서관에 가면 책이 많이 있었어요. 내가 그쪽에서 근무하면서 책 도둑질을 한 것이에요. 그런데 내가 그 책을 외부로 들고 나가기는 어려워요. 헌병이 조사를 까다롭게 하거든요. 그래서 나에게 도움을 주는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에게 부대로 놀러 오라고 해서 책을 전달했어요. 광주에 있는 남주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가르쳐주고 부치라고 부탁했어요.
맹문재 : 왜 책들을 김남주 선생님께 보내야겠다고 생각하셨는지요?
이 강 : 그 책들을 읽을 만한 수준이 있는 사람은 남주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또 남주한테 보내놓아야 책이 안 없어져 나중에 나도 제대하고 볼 수 있지 않겠어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남주밖에 없었어요. 그때 미8군 도서관에 마르크스가 쓴 『자본론』 1, 2권이 목록에는 있었는데, 실물이 없어 가져오지 못했어요. 누군가 빌려 갔는지, 1년 이상 기다려도 끝내 안 나왔어요.
[『함성』지 사건]
맹문재 : 선생님께서 제대하고 나서 『함성』지를 만드셨지요. 그 상황에 대한 말씀을 부탁드려요. 김남주의 산문에 따르면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이 10월 유신을 선포한 것을 고향의 집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들은 뒤 광주로 올라와 이강과 함께 결의했다고 되어 있어요.
이 강 : 나는 제대하고 나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유신이 터진 것이었어요. 남주가 전화하고 해남에서 올라왔어요. 그때 남주는 4학년이었어요. 다른 학생들은 교생 실습을 나갔는데, 남주는 학점이 부족해서 갈 곳도 없고 하니 시골에 내려가 있었던 것이지요. 남주는 아무에게도 올라가는 것을 얘기하지 말라고 했어요. 특히 박석무 형한테 절대로 알리지 말라고 부탁했어요. 석무 형하고 친한 것을 모두 아니까요. 남주와 나는 학교가 휴교 상태였으니 대안을 마련할 수도, 누구를 만날 수도 없어 갑갑했어요.
맹문재 : 그래서 어떻게 하셨는지요? 두 분이 투쟁의 결의를 다지고자 전봉준 장군의 생가, 동학농민군의 집결지인 백산, 동학농민군의 최초 전승지인 황토현, 전북 진안에 있는 마이산 등을 답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네요.
이 강 : 남주와 나는 동학혁명 지역을 버스를 타고 갔어요. 백산, 죽산 등을 다니면서 크게 감동했어요. 황톳재에도 가보았어요. 그곳에 가니 갓 쓰고 흰옷 입은 두 노인이 와 있어 깜짝 놀랐어요. 두 분이 서로 모르는 사이인지, 아는 사이인데 일부러 비밀을 유지하려고 모른 체 하는 것인지, 말씀을 나누지 않고 따로따로 둘러본 채 가셨어요. 우리는 동학혁명지 일대를 둘러보았어요. 마이산에서는 스님으로부터 역성혁명을 일으켜 조선왕조를 연 이성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전봉준 장군 생가도 찾아갔어요. 전봉준 장군이 살았던 집이 아주 허술하게 그대로 있었어요. 그런데 그 옆집에 할머니가 살고 계셨어요. 우리가 집을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니까 어디서 온 누구냐고 물었어요. 광주에서 왔다고 하니까 전봉준 장군이 살던 집이라고 했어요. 할머니는 당신이 전봉준 장군에게 밥을 세 번 해주었다고 했어요. 그리고 진실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전봉준 장군이 돈이 없는 애들을 집에 모아놓고 공부를 가르쳐주었다고 했어요.
맹문재 : 백산에 올라 동학농민군들이 읽었던 창의문을 김남주 선생님과 함께 읽으셨지요? 감개무량하셨겠네요.
이 강 : 그렇지요. 동학농민군들이 읽은 창의문을 찾아 읽었어요.
맹문재 : 여순항쟁이 발생한 여수와 순천도 답사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 강 : 거기에는 『함성』지 사건 이후에 계획을 세워 남주와 함께 다녀왔어요. 희생자들의 무덤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와 있었어요. 함부로 방문도 못 하는데 우리 보고 기특하다고 했어요. 정권에 의해 역사가 한 번 짓밟히면 밝혀지기가 어려운 것이에요.
맹문재 : 한국전쟁 당시의 격전지인 인천 월미도에도 다녀오셨는지요?
이 강 : 인천 월미도까지는 가지 못했어요. 계획은 세웠는데 이러저러한 이유로 실행하지는 못했어요.
맹문재 : 두 분께서 유적지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셔서 『함성』지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셨지요. 돈도 부족하고 인력도 없으니 아주 어려웠을 테지. 두 여대생인 이경순과 강희순으로부터 용돈과 졸업 기념 금반지의 도움을 받아 줄판 등을 구입했다고 김남주 선생님께서 밝히기도 했어요.
이 강 : 이경순은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하신 이기홍 어르신의 따님이에요. 돈이 없어 졸업기념 반지를 내놓았어요. 강희순은 형편이 좀 괜찮아 돈을 내었어요. 모두 살아 있지요. 이경순은 전남대 영문과 교수를 지냈어요. 강희순은 같은 영문과 동기와 결혼해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영사관 같은 데서 근무했어요. 강희순은 글을 잘 써 어느 해 체험담을 응모해서 무슨 상을 받기도 했어요.
동학 유적지에서 감동을 많이 느껴가지고 남주하고 전주로 나와서 서점에 가봤어요. 거기서 무정부주의 혁명 비슷한 제목의 책이 있길래 한 권 샀어요. 제대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남들이 많이 아는 책 말고 우리가 스스로 도서 목록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광주 시내 헌책방을 싹 뒤졌어요. 그런데 살 책이 없었어요. 그 와중에 발견한 책이 영어로 된 『공산당 선언』이었어요. 남주가 영문과의 이경순과 강희순에게 읽고 번역하라고 주었는데, 우리가 『함성』지 사건으로 감옥에 가니 없애버렸대요. 그 책을 가지고 있으면 문제가 될 수 있잖아요.
그때 내가 산수동 5거리에서 한 10만 원짜리 전세를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2만 원짜리 사글세로 돌리고 8만 원을 가지고 물건들을 샀어요. 그것도 한 군데에서 산 것이 아니라 뭣은 장성에 가서 사갖고 오고, 뭣은 담양에 가서 사갖고 오고, 또 뭣은 화순에 가서 사 오는 방식으로 했어요.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한 것이었어요. 원고 초안을 종이에 다 써놓고 줄판만 구하면 되었어요. 그래서 북성중학교 교사로 있는 박석무 형한테 부탁하려고 찾아갔어요. 석무 형은 줄판은 안 된다고 거절했어요. 그러면서 시국에 관한 일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하면서 김남주가 광주로 올라오면 바로 집으로 찾아오라고 했어요. (웃음) 그래서 박석무 형한테는 줄판을 빌리지 못하고 돌아와 양동시장 고물상에서 샀어요.
남주가 자청해서 앞 장을 쓰고 나머지는 내가 썼어요. 그런데 우리가 친필로 쓰면 필적이 금방 드러날 것이기에 내 동생 이황과 전남대 물리학과에 다니는 이정호 등이 긁었어요. 그때 내 여동생 이정은 밥해준다고 와 있었어요. 그래서 공범이 많아진 것이에요.
맹문재 : 유인물 제작을 다 끝낸 뒤 어떻게 하셨는지요?
이 강 : 『함성』지 500매를 제작했는데, 유신 체제여서 학교가 휴교 상태이기 때문에 뿌릴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12월 10일 전국 개학이라는 발표가 나 학교에서 기말고사를 실시했어요. 학생들을 진급시키기 위해서였지요. 그래서 12월 9일 밤에 마스크를 끼고, 빵모자를 쓰고, 잠바를 입는 등 평소와는 다른 스타일로 우리를 가리고 유인물을 들고 나가 전남대 법대부터 뿌렸어요. 상대, 문리대. 농대, 공대까지 뿌리고 조선대를 가려고 했는데 12시 통행금지에 걸릴 것 같았어요. 그래서 유인물을 광주고, 광주일고, 전남여고, 광주여고, 광주공고 등에 뿌리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다음날 나는 학교로 갔고, 남주는 해남으로 내려갔어요.
맹문재 : 『함성』지의 제호를 1929년 광주학생운동 당시의 지하신문과 러시아 혁명기의 지하신문을 연구한 뒤 규모는 작지만 목소리가 거족적으로 울리는 것을 추구하는 의미로 지었다고 알고 있는데요.
이 강 : 그렇지요. 그 당시에는 그 의식을 가지고 지었어요. 내가 이름을 지었어요.
맹문재 : 제호의 뜻이 참으로 대단한 것 같아요. 『함성』지를 뿌리고 나서 방학이 되었겠네요.
이 강 : 다행히 방학이 되어서 유인물을 뿌리고 난 뒤 우리는 잡히지는 않은 거죠. 남주는 의심을 받지 않았어요. 평소에 학생들이 남주를 그런 것을 할 만한 인물로 보지 않았고, 학교에도 잘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나도 3년간 군대 갔다 와서 복학했기 때문에 교수들이 몰랐어요. 그래서 학교에서 학생들을 불러 조사하다가 그만두었어요. 인문사회대 학장과 전남대 담당 정보부 담당관이 박석무 형을 호출해 유인물을 갖다 놓고 이 정도로 쓸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고 닦달했지만, 뚜렷한 혐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의심이 가는 인물을 대라고 강요하니 박석무 형은 김남주가 광주에 온 적이 없다고 하니까 송정민, 고재득, 김정길과 함께 들먹였어요. 정보부에서 김남주 사진을 들고 영문과 학생들에게 탐문을 하니 생전 수업도 안 받고, 학교에도 잘 안 나오고, 그런 일을 할 수준이 못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조사하다가 중단된 것이에요.
맹문재 : 이듬해(1973년) 2월 반유신 투쟁을 전국적으로 확산하기 위해 다시 이강 선생님께서 유인물의 제호를 『고발』로 바꾸어 제작하셨어요. 『함성』의 여분 100매와 『고발』 500매를 이불 속에 숨겨 서울의 김남주에게 수화물로 탁송하면서 “각 학교에 배포하기 바란다.”라는 이강 선생님의 편지가 발각되어 수사가 본격적으로 개시된 것이지요.
이 강 : 남주는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자 서울로 피신해 내 6촌 동생인 이개석의 자취방에 있었어요. 『고발』을 만들어 뿌리려다가 들통나면서 남주까지 잡히게 된 것이에요. 『고발』지 사건이 발각됨으로 인해 묻혀 있던 『함성』지 사건이 밝혀진 것이지요.
맹문재 : 『고발』지를 어떻게 서울로 부치려고 했는지요?
이 강 : 화물소에 가서 붙이기까지 했는데 발송이 안 된 것이에요. 거기에서 덜미가 잡힌 것이에요. 유인물뿐만 아니라 등사기까지 다 넣어 너무 무거워 의심받은 것으로 보여요. 그래서 학생운동 범행자로 잡혔어요. 눈가리개를 하고 잡혀가 거의 정신이 나갈 정도로 맞았어요. “북한에는 언제 갔다 왔냐? 암호명은 뭐냐? 무전기는 어데 있냐?” 등으로 물으며 몇 차례 혼절하도록 맞고 물고문을 당했어요. “『녹두』는 어데서 구했느냐?”라고 물어 박석무에게 받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석무 형이 잡혀 온 것이에요. 석무 형도 엄청나게 맞았어요. 석무 형은 『함성』지 등에 전혀 관련이 없는데, 예전의 경력이 있어 주범으로 만들어진 것이에요. 그래서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 혐의를 덮어씌워 석무 형을 수괴, 다음이 나, 그다음이 남주, 나머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을 엮어 9명 구속에, 6명 불구속을 시켰어요.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를 운운하며 국가보안법 혐의로 만들어 재판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광주구치소가 아니라 광주교도소에 가두었어요.
맹문재 : 왜 『고발』지 사건이 아니라 『함성』지 사건이라고 불리는지요?
이 강 : 『함성』지 사건은 이미 발표되어 전남대에서 3천 명이나 조사를 받았어요. 그런데 혐의자를 못 찾았어요. 그래서 외지인이 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어요. 그에 비해 『고발』지는 아직 뿌려지지 않은 미범죄 사건이잖아요. 『함성』지를 몇 달 동안 조사했는데도 못 잡았다는 것에 대한 정보기관의 보복 심리도 있었어요.
맹문재 : 김남주와 이강 외에도 전남대생 이평의·김정길·김용래·윤영훈·이정호, 서울대생 이개석, 석산고 교사 박석무, 김남주의 동생 김덕종, 이강의 동생 이황 등 총 15명이 광주경찰서 대공분실과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었네요.
이 강 : 정보부에서는 사건을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사람들로 확대한 것이지요. 전국 최초로 반유신 투쟁을 한 지하신문을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혐의로 덮어씌운 것이에요. 도서 반입, 영치금 사용, 운동, 면회 등이 완전히 금지되었어요. 인권이 전혀 없는 상태였지요. 이와 같은 상황인데도 홍남순·이기홍·윤철하·권신욱 변호사가 공동으로 변호해주셨어요. 함석헌 옹도 몇 차례나 서울에서 방청을 오셨어요.
맹문재 : 함석헌 선생님도 격려하러 오셨다니 놀랍네요.
이 강 : 그분을 우리는 함석호 옹이라고 불렀어요. 우리가 대학생이었던가 휴학생이던가, 광주 YWCA 강당에서 함석헌 옹이 강연을 한 적이 있어요. 남주하고 같이 들었는데, 광주고 교장이 제일 앞자리에 앉아 듣는 것을 보았어요. 그분은 전라도 교육감 물망에 여러 번 오르고, 문교부 장관 물망에도 오르던 분이었어요. 그런 분이 듣고 있으니 함석헌 옹이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유명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 뒤로 함석헌 옹이 강의를 오시면 들으러 갔어요.
그런 분이 『함성』지 사건의 방청객으로 오셨으니 힘이 났지요. 직접 대면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어요. 함석헌 옹뿐만 아니라 장준하 선생님을 비롯해 유명한 분들도 많이 찾아주셨어요. 석방되고 나서 남주하고 함석헌 옹의 댁에 찾아간 적이 있어요. 『함성』지 재판 때 찾아주셔서 감사인사를 하러 왔다고 전했어요. 그랬더니 안 와도 되는데 찾아왔으니 고맙다고 하시면서 이제 노인인데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신경 쓰지 말고 자기 일을 열심히 하라고 말씀해주셨어요. 1시간 정도 앉아 있었는데, 대단한 인물들이 계속 찾아왔어요.
맹문재 : 제가 함석헌기념관에서 함석헌의 문학 세계에 대해 강의를 두 번 했어요. 학술지 논문도 쓰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함석헌 선생님께서 재판장의 방청객으로 찾아온 것은 그만큼 『함성』지 사건이 많은 관심을 받았다고 볼 수 있지요.
이 강 : 함석헌 옹이 『함성』지 사건을 어디에다 글로 쓴 적도 있어요.
맹문재 : 1973년 9월 25일 광주지법 재판부는 『함성』지 사건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여 김남주와 박석무에게는 징역 2년, 이강에게는 징역 3년을 선고했고, 그 밖의 김정길·김용래·이정호·이평의·윤영훈·이황 등 관련자는 집행유예로 석방했어요. 그렇게 되자 12월 20일 전남대생 1,023명이 박석무·이강·김남주의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국무총리에게 제출했어요. 결국 12월 28일 항소심 판결에서 박석무는 무죄, 김남주와 이강은 각각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어요. 검찰의 상고 대상자여서 석방되지 않다가 12월 28일 1인당 공탁금 3만 원을 납부하고 석방되어요. 수감된 지 9개월 만이네요.
이 강 : 박석무 형한테는 개인적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그렇지만 워낙 의도적으로 덮어씌우려고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요.
맹문재 : 석방된 뒤 김남주 선생님은 해남으로 낙향해 농사일을 거들면서 중앙정보부에서 겪은 가혹한 고문을 시로 써서 『창작과비평』에 투고해 시인이 되어요. 시인이 된 것을 아셨지요? 축하 자리를 갖거나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이 강 : 김지하는 글로 쓰는 의미의 저항을 했는데, 남주는 글로만 쓴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농사를 짓고 그런 일을 한 사람이기에 한 단계 높이 갔지요. 그러니 김지하보다 더 나은 글을 앞으로 써야 할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한턱내라고 했지요. (웃음) 남주의 집이 잘살았으니까요. 끝내 한턱을 안 내고 말았는데, 일찍 세상을 뜬 것이 안타까워요. 그러니까 남주의 동생 덕종이가 나한테 원망이 있을 수 있어요. 자기 형이 일찍 죽은 이유 중 하나는 징역을 살고 해서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남주가 시인이 됐을 때 기분이 아주 좋았어요. 우리 전체의 명예가 같이 올라가게 된 것이잖아요.
맹문재 : 두 분이 석방된 뒤 전남민주회복구속자가족협의회 창립에 관여하셨지요? 소개를 부탁해요.
이 강 : 우리가 하지는 않았고, 다른 가족들이 하는 데 우리가 적극적으로 협조를 한 것이지요.
조봉훈 : 구속자가족협의회는 주로 엄마들, 부인들, 그리고 가족들이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가족들이 처음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구속자가족협의회가 아니고 황석영 소설가의 부인인 홍희담을 중심으로 한 송백회라는 모임이었어요. 그 구성원 중 한 사람이 함석헌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김은경이었는데, 실무 역할을 크게 했어요. 지금은 익산에서 목사하고 있어요. 김은경은 함석헌 선생님의 집에 가서 밥도 해드리고 뒷바라지했어요. 전남여고 재학 중에 이미 함석헌주의자가 되었어요. 뛰어난 활동가였어요. 구속자가족협의회는 조금 시차를 두고 봐야 되어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나는데, 전국적인 학생들 조직을 잡기 위해 민간인들을 끌어들여요. 그것이 허구라는 게 드러나 1975년 2월 15일 김지하를 비롯한 일반인들을 제외하고 학생들은 이철 등 사형수까지 전원 석방을 했어요. 그 2.15조치로 인해 서울에서 학교 다니던 광주 전남 출신들이 다 고향으로 내려왔어요. 학교에서는 제적당했으니까요. 그래서 광주가 학생운동의 천지가 됐어요. 독재정권이 보기에는 완전히 문제의 도시가 된 것이지요. 그래서 광주를 집중적으로 감시했는데, 그 감시망을 피해서 윤한봉 선생을 중심으로 해서 구속자협회가 만들어졌어요.
맹문재 : 다소 복잡한 역사가 있네요. 김남주 선생님은 구속자가족협의회의 일에 협조하면서 ‘카프카’라는 서점을 운영하기 시작해요. 그 일에 대한 말씀을 부탁드려요.
이 강 : 나는 그때 시골에 있었어요. 카프카 서점은 동부경찰서하고 보성건설협회 옆에 있었어요. 지금도 그 건물이 있어요. 자그마했지만 대학생들의 아지트였지요.
맹문재 : 카프카 서점이 광주 지역 운동권의 구심체이자 문단의 사랑방 역할을 했어요. 김남주 선생님은 문병란·송기숙·김준태·양성우·송기원·윤재걸 시인 등과 친교를 맺었고, 후배인 황지우와 <5월시> 동인으로 활동한 박몽구·이영진·나종영·나해철 등이 이곳에서 문학적 세례를 받았다고 해요.
이 강 : 남주가 모임 터를 만든 것은 큰일을 한 것이지요.
맹문재 : 카프카 서점을 한 1년 남짓 운영한 것 같아요. 서점의 운영이 어려워져 문을 닫고 전남대 후배인 김정길의 집에 칩거해요. 광주 봉선동의 봉심정에서 6개월 이상 머무르다가 귀향하지요.
이 강 : 김정길이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 집과 한참 떨어진 데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한 채 있었어요. 그 밑에 저수지가 있었고, 집 근처에 샘물이 나 떠다가 먹었어요. 남주는 거기에서 오래 있을 수가 없으니까 다시 해남으로 내려갔어요. 남주가 공부하겠다고 돈을 타 와서 김정길의 집에서 살면서 다 써버렸어요. 공부도 안 되고 굶게 되자 정길이가 남주 아버님한테 좀 올라오시라고 연락했어요. 아버님이 올라오시자 정길이는 남주가 공부가 많이 되어 있습니다, 잘 표현하지 않지만 큰 시를 쓸 수 있습니다, 시골로 데리고 가서 정착형 인간으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남주를 보낼 테니 그리 아시고 믿고 내려가세요, 등으로 진지하게 말씀을 드렸어요. 아버님이 평생 처음으로 남주에 대한 의미 있는 얘기를 들었는가 봐요. 그랬더니 아버님이 알았다고 하시고 진 빚을 얼마 갚고 내려가셨어요. 그런 뒤 정길이가 남주를 설득해 해남으로 내려보낸 것이에요.
맹문재 : 김남주 선생님은 고향에서 농사일하면서 황석영, 최우열 목사 등과 ‘사랑방 농민학교’ 운동을 시작해요. 11월에는 해남군 기독교 농민회와 해남YMCA 농어촌 분과위와 함께 제1회 해남 농민 잔치를 개최하지요. 이 행사를 기반으로 한국기독교농민회의 모체가 되는 해남농민회가 결성되지요.
이 강 : 황석영은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에요. 해남에 이사 와서 살면서 남주하고 친해졌어요. 『한국일보』에 「장길산」을 연재하고 있었어요. 해남에서 문화 행사를 한 번 했는데 500명이 모였어요. 해남읍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큰 행사였어요. 서림공원 단군전 광장에서 했는데, 그때 나도 갔었어요. 황석영과 그런 행사를 추진하면서 남주의 명예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어요.
맹문재 : 김남주 선생님은 광주로 다시 돌아와 12월경 황석영과 최권행이 주축으로 개설한 ‘민중문화연구소’의 초대 회장을 맡아요. 또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대표간사인 고은 시인과 백범사상연구소의 백기완 소장을 초청해 기념 강연회도 열지요.
이 강 : 나는 직접 같이하지는 않았어요. 남주가 그런 활동을 하니까 아버님도 아들을 활동가로 좀 인정하셨어요. 박석무 형이나 황석영만큼은 안 되어도 그들에 준하는 위치가 된 것이지요. 황석영 소설가가 해남에 내려오기 직전에는 김지하 시인이 와서 살았어요. 김지하 시인의 원래 고향이 해남이에요.
맹문재 : 김남주 선생님은 그와 같은 생활을 하면서 다시 이강 선생님의 집에서 생활해요. 그리고 민중문화연구소 활동의 일환으로 ‘녹두서점’에서 전남대 후배들에게 『파리코뮌』을 강독해요. 그것이 문제가 되어 1978년 2월 중앙정보부로부터 피습되어요.
이 강 : 그때는 내가 꼬마시장을 운영하고 있었어요. 지역에서 농산물을 사가지고 와서 소비자들에게 싸게 파는 방식이지요. 일종의 직거래였어요. 남주는 우리집에 와서 놀다 가곤 했어요.
조봉훈 : 녹두서점에서 김남주 선배 등이 찌그러진 주전자에 막걸리 부어갖고 찌그러진 잔에 따라 마시고 <봄날은 간다>, <순이 오빠>,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뭐 이런 노래 부르던 시절이 있었어요. 박석삼 선생 집이 바로 그 옆이에요.
맹문재 : 김남주 선생님이 녹두서점에서『파리코뮌』을 강독하다가 중앙정보부로부터 피습되는데, 다행히 윤한봉 선생님의 소개로 전남 무안에 있는 나환자촌 여성숙 의사의 도움을 받아 피신해요. 그리고 다시 서울로 피신해요. 이 상황에 대한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요?
이 강 : 남주가 피신한 것이 아니라 그날따라 서점에 안 나타났고, 우리 집에도 안 들어왔어요. 우리 집에 당연히 올 줄 알고 정보부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끝내 안 들어왔어요. 남주를 도와준 여성은 성도 여 씨였어요. 남주는 거기에서 좀 있다가 서울로 올라간 것이지요. 여 선생이 몇 시 기차로 올라갔다고 나한테 얘기해줬어요.
맹문재 : 그 뒤로 연락이 없었는지요?
이 강 : 전화 한 통 없었어요. 남주의 방은 끝끝내 비워놨죠. 책이랑 물건이 있으니 필요하면 찾아오겠지 하고 기다렸어요. 연락할 데도 없었고, 또 남주의 거처를 알아보는 것은 정보부에 근거를 알려줄 수 있으니까 찾지 않았어요.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사건]
맹문재 : 김남주 선생님은 서울에 올라가 자유실천문인협의와 백범사상연구소 공도 주최로 개최한 민족문학의 밤 행사장에 가서 박석률 선생의 권유로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 가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 상황에 대해서 아시는 것이 있는지요?
박석삼 : 내가 7월 8일인가 서울에 올라갔을 때 이미 장위동에 김남주 형이 석률 형과 함께 살고 있었어요. 조그마한 방 두 개인데 아버지와 석률 형, 석조 형, 남주 형이 살고 있었어요. 장위동 고가 아래에서 바로 들어가자마자 집이 있었어요.
박이정 : 거기가 제가 어렸을 때 살던 동네예요. 숭인초등학교, 숭곡초등학교가 있어요.
맹문재 : 김남주 선생님은 남민전 가입해서 지하신문인 『민중의 소리』를 만들고, ‘땅벌작전’을 수행하는 등 전위 조직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러는 동안 1979년 4월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남민전 사건으로 검거되기 이전이지요.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문상을 가셨는지요?
이 강 : 몰랐어요. 연락이 없어가지고.
맹문재 : 남민전 사건이 터지면서 김남주 선생님이 검거되어요. 이강 선생님도 남민전에 가입하셨으니까 잘 아시겠네요.
이 강 : 나는 남민전에 가입한 것이 아니라 민투(민주화투쟁위원회)에 가입했어요. 그것을 통칭해서 남민전이라고 해요. 나는 도망 다니다가 늦게 잡혀 들어갔어요. 조사가 이미 다 끝난 상황이어서 추가로 조사받을 것이 별로 없었어요.
조봉훈 : 최상위 조직이 남민전이고, 하부 조직으로 이재오 등이 가입했던 민주화투쟁위원획가 있었고, 또 학생 조직이 있었어요. 그러한 다중 구조의 조직을 뭉뚱그려서 남민전이라고 불러요. 광주에서 가입한 김남주, 김정길 등등은 모두 박석률 선생을 통해서 가입했어요. 박석률 선생이 나중에 잡혀 들어가 우리는 별로 안 당했어요. 우리를 보호하려고 많이 축소한 것이지요.
맹문재 : 김남주 선생님은 10월 4일 체포되어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60일 동안 가혹한 고문 수사를 받아요.
박석삼 : 조사를 심하게 받았어요. 그래서 결국은 빨리 돌아가셨어요.
맹문재 : 남민전 사건으로 이재문과 신항식은 사형, 박석률, 안재구 등은 무기징역, 김남주는 15년형을 선고받아요. 11월 22일 이재문은 가혹한 고문 수사 때문에 서울구치소에서 옥사하고, 신항식은 1982년 10월 8일 사형이 집행되어요.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어요.
이 강 : 그렇지요. 무장 게릴라 간첩단 사건으로 키운 것이지요. 모든 신문의 1면을 장식했어요.
조봉훈 : 1면에 대문짝만하게 8명의 사진이 실렸는데, 거기에 전남대 학생 조봉훈 사진도 딱 게재되어 있었어요. 우리 집안 전체가 그냥 피해받을 수밖에 없었어요. 가족 면회도 안 되었어요.
맹문재 : 참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김남주 선생님은 15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는 동안 이강 선생님께서는 3년 형을 치르고 나오셨어요. 그 뒤에는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요?
이 강 : 또다시 농사를 짓는다고 해남으로 내려갔어요. 마을에 점방이 하나 있었는데, 아버님이 워낙 술을 좋아해서 소주를 됫병으로 사 갔어요. 아버님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셨어요. 할아버지도 주량이 대단하셨어요. 어느 날 술을 받으러 갔는데, 그 점방 주인이 저녁에 다시 오라고 했어요. 누구한테 얘기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서 갔더니 마을을 떠나라고 했어요. 이유는 군청에 다니는 사람들이 경찰서의 조사를 받는데, 이강 때문에 괴로워서 못 살겠다고 했어요.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빨갱이로 몰렸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조사를 받는데 서로 말이 안 맞으면 계속 받아야 하니 힘들다고 했어요. 그래서 다음날 아버님께 인사를 드리고 광주로 올라갔어요.
맹문재 : 김남주 선생님은 감옥에서 시를 써 1984년 첫 시집 『진혼가』(청사)를 출간해요. 시집을 낼 때 선생님께서 무슨 역할을 하셨는지요?
이 강 : 남주가 쓴 원고를 누가 받아가지고 출판사에 전달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나같이 위험한 인물 말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전달했겠지요.
조봉훈 : 제가 광주교도소에 잠깐 있었는데, 홍인표라는 장흥 출신 교도관이 있었어요. 장흥 출신 문인으로는 한승원, 송기숙, 문병란 등이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 문학의 큰 맥이에요. 그 광주교도소의 교도관이 김남주 선배의 원고를 받아 송기숙 교수한테 넘겼을 것으로 보여요. 송기숙 교수는 전문가이고 출판계도 좀 관계하고 있었거든요.
맹문재 : 두 분의 말씀을 들으니 다소 이해가 되네요. 그런데 1986년 김남주 선생님의 비매품 시집인 『농부의 밤』이 기독생활동지회 이름으로 발간되어요. 이 시집이 아주 많이 팔린 것으로 알고 있어요. 시집이 어떻게 나온 것인지 알고 있는지요?
이 강 : 우리도 지금 그 시집을 누가 냈는지 모르고 있어요. 찾아봐야지요.
맹문재 : 김남주 선생님은 1988년 12월 21일 구속된 지 9년 3개월 만에 형집행 정지 조치로 전주교도소에서 석방되어요. 그때 환영하러 가셨는지요?
이 강 : 못 갔어요. 나는 광주교도소에서 석방된 사람들을 만나러 갔고, 거기는 박석무 형이 갔어요. 서로 역할을 분담해 나누어 갔어요.
맹문재 : 그 뒤에 만난 적이 있을 텐데 나누신 말씀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있는지요?
이 강 : 남주는 원래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나라를 바로잡는 것이 간단하고 쉽지 않다고 말하더군요. 대오각성이라고 할까요. 그러면서 러시아혁명이나 제3세계 국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말했어요.
[김남주 시인의 친구 이강]
맹문재 : 1989년 1월 29일 광주 문빈정사에서 김남주 선생님이 결혼식을 올려요. 그때 참석하셨을 텐데 어떤 느낌이 드셨는지요?
이 강 : 남주도 결혼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결혼 같은 것을 안 할 사람으로 보였거든요. 축하객들이 아주 많아 그야말로 인산인해였어요.
맹문재 : 김남주 선생님하고 결혼한 박광숙 여사를 아셨는지요?
이 강 : 광주 운동권하고 친하게 지낸 전남대 상대의 박광서 교수 친동생이어서 다 알고 있었어요. 박광숙은 오빠 못지않게 지식과 인식이 있었어요. 실력이 있으면서도 말을 많이 하지 않는 품격이 있어요.
박석삼 : 박광숙 형수가 옥바라지를 계속해왔기 때문에 광주에서 석방 운동하는 사람들과 결속력이 있었어요.
맹문재 : 김남주 선생님은 결혼해서 서울에서 주로 활동하시고, 이강 선생님은 광주에서 활동하셨기 때문에 서로 만나기가 쉽지 않았겠네요.
이 강 : 그렇지요. 한동안은 그랬다고 봐야지요.
맹문재 : 김남주 선생님께서 몸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을 텐데요.
이 강 : 남주가 몸이 안 좋아 여기저기 병원에 다녔는데 다 위궤양이라고 했을 뿐 췌장암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조남중 의사가 처음으로 췌장암이 의심된다고 알려주었어요. 처음에는 안 알려줘 남주가 조르니까 좀 기다려 소주나 한잔하자고 그러더래요. 그래서 저녁 식사를 하면서 췌장암이 의심스럽고, 3개월을 넘길지 의문이 간다고 하더래요. 조남중 의사가 그런 얘기를 하면서 울었대요. 그러고 나서 남주가 답답하니까 우리 집에 와서 얘기했어요. 나로서도 어떤 방법이 없으니까 조남중이가 다 아냐, 실수할 수도 있지, 라고 말했어요. 단식을 해보는 것도 권유했어요. 조남중은 광주의 의사 중에 3대 천재로 불릴 정도였어요. 자다가 보니까 남주가 나를 껴안고 있는데 눈물을 흘리고 있었어요. 소리는 안 냈는데 스스로 췌장암이 진행되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았어요. 남주가 서울로 올라간 뒤 만나보지 못한 채 그만 운명했어요.
맹문재 : 마지막 만나는 날 유언 같은 말씀은 없었는지요?
이 강 :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맹문재 : 선생님의 친구이자 동지인 김남주 선생님에 대해 어떤 말씀을 해주실 수 있는지요?
이 강 : 남주는 적어도 삼산면이 낳은 천재 중의 한 사람인데,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큰 인물인데 너무 일찍 가버려서 아쉬움이 남아요. 김지하가 민중의 괴로움과 외로움을 추상적인 의미로 표현했다면, 김남주는 민중의 처지를 생활하면서 알았기 때문에 훨씬 민중 시인이지요. 나중에 남주의 글을 보니까 새로운 내용이 많았고, 진실로 민중의 밑바닥을 안아주고 있었어요.
맹문재 :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해요. 늘 건강하세요. 함께해주신 조봉훈, 박석삼, 이효복 선생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려요.
■ 이강
1947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해 전남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최초로 유신헌법을 공개 비판한 지하유인물 『함성』 및 『고발』 제작했다. 민청학련, 함평 고구마 사건,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국본(민주쟁취국민운동 전남본부) 등에 참여했다. 5․18기념재단 상임이사,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이사장, 광민회(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상임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
■ 맹문재
1993년 김남주, 신경림 시인의 심사로 전태일문학상을 받았고, 『김남주 산문 전집』을 간행했다. 공저로 『김남주 시인의 삶과 문학』이 있다. 김남주기념홀 건립 전문위원, 김남주 시인 개인화 음성합성 기술(P-TTS) 서비스 플랫폼 구축 사업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안양대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