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감격을 재현하며 베이징 올림픽에서 값진 동메달을 거머쥔 여자 핸드볼 대표팀 임영철 감독.
경기 종료 1분 전, 그는 은퇴 직전의 노장 선수들을 코트에 세워 유종의 미를 거두게 했다. 이러한 배려의 리더십은 가정에서도 통한다.
두 아들의 아빠, 캠퍼스에서 만난 아내의 완소남편으로 살아가는 그를 만났다.
*** 결혼 22년 차 부부의 애틋한 장거리 연애
아버지 따라 핸드볼에 인생 건 둘째 아들
그는 원광대학교 4학년 재학 시절, 같은 캠퍼스의 두 살 연하 무용학과 여학생을 만나 4년 교제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당시 국가 대표로 발탁돼 훈련 중이던 그는 대학교수의 꿈을 안고 대학원 진학을 하려 했지만 낙방을 했다. 처음으로 실패의 쓴맛을 본 그는 수개월 동안 풀이 죽어 지냈다.
“꿈이 한순간 사라진 것 같아 매일같이 술을 마셨는데, 어느 날 아내가 46번이 적힌 수험표를 주더라고요. 2학기 후기 전형에 도전해 보라며 예상 문제도 정리해서 줬어요. 시험장에 갔더니 정말 여섯 문제 중에서 세 문제가 출제 됐더라고요. 아, 이 여자는 놓치면 안 되겠구나 싶었죠.”
원광대 대학원에 진학한 후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로 바쁜 지도자 생활이 시작됐고, 줄곧 주말 부부로 지내왔다. 1984년 LA올림픽 국가 대표 선수를 마지막으로 한국체육대학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크로아티아 실업 팀에서 1년간 감독 생활을 하며 견문을 넓혔고, 1995년 세계선수권대회 당시 코치로 한국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데 일조했다.
그에겐 1998년, 감독을 맡았던 종근당 여자 핸드볼 팀이 해체된 것이 가장 가슴 아픈 기이다. “IMF 때 종근당 팀이 해체되고, 그 무렵 일본 도쿄 여자 대학에서 교수 제의를 해왔어요. 가족들과 짐도 다 정리하고, 보험까지 해약하며 준비했는데 결국 무산됐어요. 그 후로 핸드볼은 쳐다보지도 않겠다고 다짐했죠.”
졸지에 직장을 잃은 그는 방황하기 시작했고, 네 가족은 처가가 있는 전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남편 내조에 올인하던 아내가 옷가게를 운영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다시는 핸드볼을 쳐다보지도 않겠다고 한 남편이, 핸드볼 경기가 있는 날이면 경기장에 가서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심판을 보고, 친구 부탁으로 강원도 소년체전 훈련을 맡더니 우승을 시키더라고요. 이 사람은 핸드볼을 떠나선 살 수 없는 사람이구나 싶더라고요.”
고진감래랄까. 이즈음부터 국내에서 그를 찾는 기업체가 다시 늘어났고 잇단 대표팀 감독 러브콜에 2002년 시드니 여자 국가 대표팀 사령탑으로 화려한 복귀를 했다. 그동안 이사를 열여섯 번이나 했지만 매번 즐거웠다.
이사 때마다 매번 그에게 더 좋은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얼마전 둘째 아들 태양(15.인천 효성중학교 핸드볼 팀)군은 아버지처럼 핸드볼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어려서부터 태양이가 아빠처럼 되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어요. 먹지 않던 음식도 아빠가 맛있게 먹으면 먹을 정도니까요. 아빠가 코트에서 진두지휘하고, 승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극을 많이 받았나 봐요.”
그는 비인기 종목을 선택한 아들이 걱정이 되면서도 대견하기만 하다.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도 많고, 보여 주고 싶은 것도 많지만 당분간 지켜보기로 했다.
“아버지로서, 지도자로서 왜 욕심이 없겠어요. 하지만 아들이 학교 코치와 감독에게 배우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공 잡는 방법조차 안가르쳐 줬어요. 제 아버지가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신 것처럼 저 역시 태양이한테 그런 존재가 돼주고 싶어요.”
전주와 인천을 오가며 주말 가족으로 지내던 그들은 태양이 덕분에 모처럼 함께 지낼 수 있게 됐다. 태양이를 핸드볼 팀이 있는 중학교로 전학시키기 위해 보금자리를 인천으로 옮긴 것.
큰아들 태민(22)군도 한 달 전 제대를 했고, 지난 추석에는 네 가족이 오붓하게 강원도 여행도 다녀왔다. 이들 부부에겐 요즈음 하루 하루가‘생애 최고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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