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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가 있는 여행기 >
태백 이야기
전 병 태
지난 10월 한국공항공사 2008년 퇴직자 모임으로 괴산 사담골에 갔을 때 가을이 저물기 전에 영서지방을 여행하자는 약속을 Y형과 S와 하였기에 좀 늦기는 하였으나 모두가 시간을 맞추어 부전역에서 만났다. 이번 여행을 굳이 불편한 기차여행으로 선택한 것은 퇴직으로 시간의 압박을 받지 않아도 되고, 실업급여 마저 끝났으므로 수입이 없는 것이 조금은 부담이 되어서이지만 흔들리는 기차에 몸을 맡기고 여유롭게 편안한 마음으로 즐기고 싶은 욕심에서 이다.
부전시장에서 3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소주와 맥주, 간식꺼리를 사서 10월 27일 15 : 50에 출발하는 영주행에 몸을 실었다. 결코 빠르다고 볼 수 없는 무궁화호는 해운대에서부터 바다를 끼고 기적을 울리며 열심히 달렸지만 울산을 지나자 어둠이 차창을 노크하기 시작 하였다.
차창 밖 시골풍경을 사진으로 담기에 바빴던 Y형은“이제 쓸쓸 시작해 보자.”면서 검정봉투를 풀고 소주 파티를 벌렸다. 주거니 받거니를 되풀이 하며 못 만난 동안의 이야기와 요즘 돌아가는 얄궂은 세상사를 술에 타 마시고는 울분을 토하기도 하였고, 술이 약한 S는 억지로 잠을 청하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20 : 34. 종착역 영주역에 도착하였다. 싸늘한 날씨로 일없는 여행객을 맞이한 낯선 소도시는 너무 환산하여 오라는 곳도 꼭 갈 곳도 없는 우리를 허전하게 하여 우선 영주역 앞에서 낙지볶음으로 저녁을 먹고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10월 28일. 콩나물국밥으로 아침을 먹고 갈 곳을 의논하다가 S가 태백의 석탄박물관에 가고 싶다고 하여 영주에서 태백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강원도의 계곡과 계곡사이 구불구불한 도로를 버스는 경적을 울리며 돌아가는데 옛날 번창했던 탄광촌의 흔적들이 군데군데 흉물스럽게 남아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였다.
태백에서 먼저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로 갔다. 황지연못은 길이 525㎞(1300리)로,‘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척주지’,‘대동지지(大東地志)’등에서 낙동강(洛東江)의 근원지라고 밝히는 곳으로 시내의 중심부에 있었다. 이 못에서 솟아나는 물들이 넓은 영남의 평야들을 도도히 흘러가며 적시게 된다는데 연못의 둘레가 100m인 상지와 중지, 하지로 구분되며 1일 5천t의 물을 용출하고 있다고 한다. 태백 8경중 5경인 ‘낙동강 발원지 황지연못’을 들여다보니 물이 너무 맑아 내 마음속까지 환하게 보이는 것 같아서 모두가 오염의 주범임을 자청하고 이곳에 와서 시작을 바로 보자는 뜻으로 ‘황지에서’라는 제목으로 시조를 메모하여 보았다.
초심으로 돌아가자 / 샘솟는 이곳에서
물소리 들어보고 나를 다시 찾아보자
황지는 변함없는데 / 탁(濁)해버린 나를 보자.
무거운 함묵으로 낮은 곳 찾아가며
부대껴도 변치 않는 / 사랑을 살펴보자
아무리 변명을 해도 / 맑지 못한 나를 위해.
외면하지 마십시오 / 물에 담긴 자화상을
화장을 고쳐 해도 일그러진 얼굴이요
알면서 버리지 못한 / 일렁이는 양심이요.
전설에 의하면 황부자 집터가 연못이 되었다하여 황지(黃池)라고 부른다는데 훨씬 이전에는 하늘 못이란 뜻으로 천황(天潢)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시주를 온 노승에게 황부자가 쇠똥을 퍼주었는데 이것을 본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잘못을 빌며 쇠똥을 털어내고 쌀을 시주하니 "이 집은 운이 다하여 큰 변고가 있으므로 살려거든 날 따라 오고,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라고 한 노승을 따라갔는데 도계읍 구사리에 이르렀을 때, 집 쪽에서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며 천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나서 깜박 잊고 놀라서 돌아보니 황부자 집은 땅 밑으로 꺼져 큰 연못이 되어버렸고, 황부자는 이무기가 되어 연못에 살게 되었으며 며느리는 아기를 등에 업은 돌로 변하였다고 한다. 집터는 3개의 연못으로 변했는데 큰 연못이 집터, 중지가 방앗간 터, 하지가 화장실 자리라 전한다.
황지를 돌아본 후 태백시장으로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지난번 이곳에 왔을 때 Y형은 강원도 친구에게 전화로 태백 특산품을 물어보고 소고기 등심을 시켰다가 실망을 하였기에 나는 강원도 곳곳을 다니며 약초를 수매를 하여 경동시장에 파는 친구 K에게 전화하여 부산이 고향이라는 숯불구이 전문집에서 강원도산 삼겹살과 고랭지 배추에 배낭에서 꺼낸 C1소주로 궁합을 맞추어 맛있게 먹고, 알맞게 취한 우리 셋은 시내버스를 타고 석탄박물관으로 갔다.
매표소에서 올라가는 길목에는 때늦은 단풍들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활활 타오르고 있어서 카메라 슈트를 연방 누르게 하였다. 태백시 소도동 166번지 일원 7,255평에 있는 석탄박물관으로 들어갔다. 탄전지대(40개)의 본산인 태백이 석탄산업 합리화에 모두 문을 닫고 1∼2개만 남자 국가기간산업의 원동력이었던 석탄의 역할과 역사적 사실들을 한 곳에 모아 일목요연하게 전시 연출하여 교육의 학습장으로 활용하며, 우리들에게 잊혀져가는 석탄의 기억을 되새기고 석탄산업의 쇠퇴로 인한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94년부터 3년 동안 153.3억원을 들여 97년 5월 27일 국내 최대의 석탄박물관을 개관하게 된 건립취지 및 개요와 연혁을 읽고 제1전시실로 들어갔다.
1전시실에는 600여점의 암석과 광물, 화석을 시대별 또는 성인별로 전시되었는데 화성암과 퇴적암, 변성암과 희귀 광물을 직접 볼 수 있었으며 가공이전의 보석원석 및 운석도 있었고, 지질시대 중요자료인 화석이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의 순으로 삼엽충, 공룡알 등이 전시되어 과거로의 여행을 안내하였다.
2전시실에는 석탄의 생성과정을 알려주는 곳으로 유연탄과 무연탄은 석탄화의 진행정도에 따른 분류이고, 세계의 전탄전(全炭田)의 약 1/3이 고생대(5억~2억년 전)가 대부분으로 이 밖의 석탄은 중생대(2억년~5천만년 전)와 신생대(5천만년 전 이내)이고, 가장 많이 생성된 시기는 고생대 말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BC 315년 최초기록으로 보아 석탄은 인류문화의 성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전후(戰後) 서민들의 연료였던 산림자원의 황폐화로 생활고가 극심하였는데 유일의 연료자원인 연탄은 걱정을 덜어주는 돌파구로 평남, 화순, 장성 등 탄전들은 에너지원의 중심에서 검은 황금이라 불렸으나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채탄막장의 심부화로 생산원가 증가와 청정연료의 등장으로 사양화로 접어들어 폐광을 하고 몇 개의 광업소가 명맥을 이어가고 실정이라 한다.
3전시실은 채굴과정과 연료의 변천사를 볼 수 있었는데 석탄채굴의 초기 암반에 불을 피운 뒤 물을 끼얹어 급격한 온도차로 인한 균열을 이용하여 채탄하던 화흉법, 정과 망치를 이용한 채탄, 기계장비를 이용한 근래의 채탄방법과 망태기를 이용한 운반에서 레일광차의 활용, 채탄막장까지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운반까지의 채굴장비 등과 기계화 된 과정을 볼 수 있었고, 에너지연료(전기에너지, 재의 이용, 정수용(淨水用), 경량골재, 연소 열에너지)와 석탄화학 원료 및 2차 에너지원으로 석탄을 이용한 다양한 연구와 개발과정, 조개탄과 주먹탄에서 9공탄, 19공탄, 22공탄, 31공탄 등으로 시대 및 용도에 맞게 변화된 것을 알 수 있어서 지난해 연탄의 고마움을 적은 시조‘炭의 一生’을 외우며 탄처럼 살다 가자고 다짐하였다.
막장서 잠만 자다 놀라서 쫓겨 나와
다듬고 고친 후에 검은 줄을 알았다
모두가 비켜서 가는 두려운 존재란 걸.
가난을 찾아 간다 산 번지 달동네로
지게에 올라앉아 세상을 나무라며
이한 몸 다 바칠 곳을 이제야 찾아왔다.
차례를 기다린다 열정을 다할 때를
가난한 할머니 삶 온기로 두드리며
하루를 살다가 가리 세찬 냉기 막으며.
온몸을 불살랐다 따뜻한 세상 위해
수만 년 검은 살갗 죽어서 벗겨내고
깨여져 빙판에 누워 이 겨울을 살란다.
4전시실은 안전사고에 관한 곳으로 광차의 연결핀 절단과 좁은 갱도에서의 통행으로 인한 사고, 탄층에서 발생하는 가스의 폭발 및 질식사고, 암괴의 붕락과 막장의 광석 또는 석탄의 붕괴사고, 갱내 화재사고, 갱내 침수사고와 구호활동을 장비, 의료장비 및 광부가 착용하는 안전화, 안전모, 전기안전등, 척추보호대, 자기구명기 등과 기계시설 검정장비, gas 검정장비 등 이 전시되어 있었고 음향효과와 특수 장치로 실감 있게 꾸며 놓았었다.
5전시실에는 광산의 각종 법령을 소개하는 곳으로 진폐의 예방과 진폐 근로자의 보호 등에 관한 법률, 밀폐된 공간에서의 작업과 미세한 분진으로 생기는 폐결핵, 결핵성 기관지, 속발성 기관지염, 속발성 기관지 확장증, 속발성 기흉 등 병명도 생소하고 무서운 합병증을 알 수 있었다.
6전시실은 광산촌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곳으로 너와집이나 굴피집에서 화전생활을 하던 주민들이 광부라가 된 달라진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 도시락을 쌀 때에는 네 주걱을 담지 않고, 부녀자가 길을 갈 때 광부를 앞질러 가지 않으며, 갱내에서는 쥐를 잡지 않는 등 안전을 염원하는 여러 가지의 금기사항을 읽었다.
7전시실에는 태백시를 홍보하는 장으로 1천m나 되는 10여 개의 산으로 에워싸여 태백은 한때 640만t의 석탄을 생산하여 전국 생산량의 30%를 차지하여 제1의 광도로 국가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나 지금은 800m의 고원지대로 모기가 없는 지역특성을 살려‘고원 관광, 휴양, 체육도시 신태백 건설’이라는 시정방침 아래 관광도시 건설을 통한 새로운 태백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고 하였다.
8전시실은 일반인들의 접근이 어려운 광산작업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실내전시가 어려운 광산장비들을 야외전시한 곳으로 120점의 암석류와 기계장비와 운반 장비로 기관차, 광차의 종류 및 대형 채탄, 채굴장비, 지하채탄막장까지 신선한 공기를 넣어주는 송풍기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석탄박물관에서 보고 배운 것을 요약하면 석탄의 최초기록은 BC 315년 그리스의 과학자 디오플라테스(Theophrastos)의 암석학 저서에 "암석 중에는 연소되는 것이 있어 금속을 녹이는데 사용할 수 있다"라는 것이 최초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에 신라 진평왕 31년(서기 609년) 모지악에서 동토함산지가 불탔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 경북 영일군 갈탄지역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석탄은 지질시대의 육생과 수생식물이 수중에 퇴적하여 매몰된 후 가열과 가압작용을 받아 변질하여 생성된 흑갈색의 가연성 암석을 말하는 것으로 넓은 면적에 두꺼운 석탄층은 많은 시간이 요구되며, 장소도 지반이 서서히 침강하는 퇴적분지에 형성된 것으로 지반위에 침강이 진행되고, 그 위에 토사가 덮이고 다시 식물이 번창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지하에 매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주요 고사리류, 속새식물류, 인목류, 코다이테스 등이며 높이는 20~30m에 달했고, 석탄의 구성은 주로 탄소로 되어있고 수소와 산소가 들어있으며 질소· 황· 무기물 등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머리가 띵하던 지독한 연탄가스 중독을 시원한 동치미국물 한사발로 치료하던 기억이 생생한 연탄은 모든 것을 꽁꽁 얼어붙던 육칠십 년대 겨울에 따듯한 아랫목을 만들어 주었기에 항상 고마움을 가졌는데 예순 나이 무렵의 지금에야 막장에서 탄보다 까만 광부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어 죄송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 관람이라 석탄박물관 건물을 뒤돌아보며 어둠이 짙어가는 당골소공원을 내려와 강원도에 오면 꼭 먹는 곤드래밥으로 저녁을 먹고 찜질방에서 잤다.
29일 05:30. 태백산을 오르기 위하여 S와 택시로 유일사매표소로 왔다. 너무 찍 서두른 덕분으로 표를 사지 않아도 좋았고, 너무 맑은 공기로 심호흡을 하니 지난밤 잠을 못 잤지만 기분이 좋다면서 신발끈을 졸라매며 노래를 흥얼대는 S에게 우리가 오를 태백산에 대하여 아는 것을 말해 주었다.
“태백산은 경북 봉화군 석포면 대현리와 태백시 소도동, 영월군 상동면 천평리와 접경을 이루며 동경 128。56', 북위 37。05'에 자리 잡은 해발 1,567m의 명산으로 이 산에서 발원하는 물이 영남평야의 젖줄인 낙동강과 우리민족의 역사와 함께한 한강, 삼척의 오십천을 이루므로 국토의 종산이자 남한 산들의 뿌리 산이다. 천제단이 있는 영봉을 중심으로 북쪽에 장군봉(1567m) 동쪽에 문수봉(1,517m), 문수봉사이의 부쇠봉(1,546m)로 이루어져 1989년 5월 13일 17.44㎢의 면적이 태백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고 말해주었다.
매표소에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오르는데 차 한대는 충분히 지날 수 있을 만큼 넓어서 등산로라기보다는 산을 오르는 도로에 였다. 절에 식량과 물자를 차로 운반하기 위하여 넓게 만든 것으로 보였다. 단독 산행을 하시는 50대의 여자분과 60대의 부부가 우리를 앞질려 저 만큼 앞서 갔지만 어젯밤 먹은 술과 퇴직으로 심신이 찌든 우리는 전혀 관계치 않고, 세상의 윤회에 잎이 전부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와 삶에 시달리다 죽은 고사목 등 기묘한 자연을 보고 즐기며 여유롭게 걸어서 1시간 만에 유일사 쉼터에 도착하였다.
짐을 운반할 수 있는 작은 콘도라가 보이고 그 아래에 유일사가 보였다. 너무 가팔라서 내려가는 길이 갈지(之)자를 닮았는데 조심해서 내려가니 바람소리 하나 들릴 것 같지 않은 깊은 골자기에 크지는 않은 무량수전이 조용히 앉아 있었고, 어디서 오는 지 알 수 없는 고무호스의 물줄기가 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있어서 수통에 물을 채우니 너무 찼다.
유일사는 태백산 백단사에서 이소선이 백일기도 중 사찰을 창건하라는 부처님의 현몽을 받고 이곳에 창건한 태백지역의 유일한 비구니 사찰이라 하는데 아쉽게도 조계종이나 한국의 사찰을 검색해보아도 이소선이 누구인지와 유일사의 창건 연대 등은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는 인터넷 기사를 본적이 있다. 내세울만한 문화재 한 점 없는 유일사를 뒤로 두고 다시 올라오면서 쌓은 정성이 돋보이는 석탑을 보았다.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적벽돌 같은 돌들을 모아 꽤나 공을 들였기에 선명한 새탑 보다는 좋아서 합장을 하고 올라와 정상으로 향했다.
정상으로 가는 길의 주목군락지(태백 8경 중 2경 : 태백산 주목)는 겨울태백산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웅장함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하는데 반은 죽어서 없어지거나 짓궂은 비바람의 폭력을 고스란히 받은 흔적을 지고 있는 삶의 무게가 안쓰럽기만 하였다. 주목마다 시멘트로 상처를 치료한 것이 흡사 붕대를 감은 것 같아서 강인한 생명력을 확인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양한 예술적인 형상으로 주목(注目:바라봄)의 대상이라 하여 작품 하나에 매달리는 작가의 정신을‘주목(朱木)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시조를 메모하여 두었다.
천년을 살았어도 할일이 너무 많아
종아리 걷고 서서 풍상을 손짓하네
하얗게 남은 뼈대에 / 회춘(回春)하는 만유의 정.
모질게 참은 삶에 훈장처럼 매단 상처
삶이란 애달픈 것 / 버릴 수 없는 애욕
풍상(風霜)을 사랑하면서 또 천년을 살리라.
태백산에서 자라는 주목은 2,805주이고, 그 중 높이 11m이상 것은 49주이며 지름 1m이상 나무는 15주라고 한다. 또 지름이 가장 큰 나무는 1.44m로서 수령은 500년 이상으로 우리나라에서 주목서식지 중 가장 대단위군락지를 형성하고 있고, 온갖 풍상을 다 격은 살아 천년과 죽어 천년(生千死千)의 주목은 태백산을 대표하는 나무로서 설경이 장관을 이루어 눈부신 아름다운 태백산을 만들어 겨울 낭만을 즐기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줄을 잇게 한다고 한다.
주목은 고산지대에서 자라며 한국과 일본, 중국 동북부와 시베리아 등지에 분포하는데 일본산으로 원줄기가 곧게 서지 않고 밑에서 여러 개로 갈라지는 것은 눈주목(var. nana), 잎이 넓고 회색이 도는 것은 회솔나무(var. latifolia)라고 하며 울릉도와 북쪽에서 자라고, 원줄기가 비스듬히 자라면서 땅에 닿은 가지에서 뿌리가 내리는 것은 설악눈주목(T. caespitosa)이라고 하여 설악산 대청봉 근처에서 눈잣나무와 같이 자란다고 한다.
1시간 40여분 만에 정상부근에 도착하였다. 장군봉(1,517m)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주봉(1,567m)으로 가면서 인터넷에서 본 태백산을 S에게 이야기 하여 주었다. 가지가지 고산식물이 자생하여 봄이면 산철쭉, 진달래의 군락지가 등산객을 맞이하고, 여름에는 울창한 수목과 차고 깨끗한 계곡물이 한여름 더위를 잊기에 충분하며 가을은 형형색색의 단풍으로 수놓고, 겨울은 흰 눈으로 뒤덮인 주목군락의 설경(태백 8경 중 3경 : 태백산의 설경과 눈꽃)을 보여 주는 곳으로 남성다운 중후한 웅장함과 포용력을 지닌 육산으로 이루어졌다는 태백산은 백두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가 금강산과 설악산을 지나 다시 솟구쳐 오르며 빛어 낸 백두대간의 등골로 태백(太白)이란 크게 밝다는 뜻으로 태백산을 '크게 밝은 산' 또는 '한밝뫼'라고도 하며 우리나라 3신산 중의 하나로 산 정상에는 태고 때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천제단이 있다.
천제단(중요민속자료 제228호)은 옛 사람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설치한 제단으로 삼국사기를 비롯한 옛 기록에 "신라에서는 태백산을 3산 5악(三山五岳) 중의 하나인 북악(北岳)이라 하고 제사를 받들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영산(靈山)으로 섬겨 왔음을 알 수 있다. 태백산 정상에 위치한 천제단(태백 8경 중 1경)은 천왕단(天王檀)을 중심으로 북쪽에 장군단(將軍檀), 남쪽 부쇠봉(1547m : 중국의 태산과 높이가 같아서 유명해진 봉우리로 차돌이 있어 부싯돌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부쇳돌봉, 부쇠를 부소로 보아 단군의 아들 부소왕자로 보아 부쇠봉)쪽에 정확한 이름을 알 수 없는 하단, 3기로 구성되었으며 적석으로 쌓아 신역(神域)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 있는 천왕단은 자연석으로 쌓은 둘레 27.5m, 높이 2.4m, 좌우 폭 7.36m, 앞뒤 폭 8.26m의 타원형으로 녹니편마암의 자연석으로 쌓아져 있는데 위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은 사각형 이다. 이러한 구도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 때문이라 한다.
단군조선시대 구을(丘乙)임금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이 제단은 상고시대부터 하늘에 제사하던 제단으로 단군조선시대에는 남태백산으로 국가에서 치제하였고, 삼한시대에는 천군이 주재하며 천제를 올린 곳이다. 신라초기에는 박혁거세 왕이 천제를 올렸고, 그 후 일성왕이 친히 북순하여 천제를 올렸으며 기림왕은 춘천에서 망제(望祭)를 올렸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방백수령(方伯守令)과 백성들이 천제를 지냈으며 구한말에는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우국지사들이 천제를 올렸고, 한말 의병장 신돌석 장군은 백마를 잡아 천제를 올렸고, 일제 때는 독립군들이 천제를 올린 성스런 제단이다.
지금도 천제의 유풍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으며 산꼭대기에 이같이 큰 제단이 있는 곳은 본토에서 하나밖에 없다. 천제단은 다른 이름으로 구령단(九靈壇) 또는 구령탑(九靈塔)이라 하고 마고탑(麻姑塔)이라 하기도 한다. 특히, 해마다 개천절에는 이곳에서 제사를 받드는데 중앙에 태극기(太極旗)와 칠성기(七星旗)를 꽂고 주변에는 33천기(天旗)와 28수기(宿旗)를 세우며 9종류의 제물을 갖춘다. 이 주변의 계곡 일대에는 치성을 드리는 기도처 로 사용된 크고 작은 적석탑과 석단들이 있으며 함부로 짐승을 잡거나 나무를 꺽는 일을 금하고 있다.
‘한배검’이라는 비석 앞에서 합장을 하고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듯한 두 사람 뒤에서 천제단 증명사진을 찍었다. 일출이 장엄하다는 동쪽으로 동해바다를 찾아보았으나 흐린 날씨로 볼 수 없어서 낙조도 장관이라는 서쪽을 보면서 붉게 물들어 가는 정경(태백 8경 중 4경 : 태백산의 일출과 낙조)을 상상하여 본 후 간식으로 가지고 온 떡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어 먹고 고려 말기의 문신 안축(安軸)의 登太白山(태백산에 오르다)을 흥얼대며 망격사쪽으로 내려왔다.
直過長空入紫煙 긴 허공 곧게 지나 붉은 안개 속 들어가니
始知登了最高巓 최고봉에 올랐다는 것을 비로소 알겠네
一丸白日低頭上 둥그렇고 밝은 해가 머리 위에 나직하고
四面群山落眼前 사면으로 뭇 산들이 눈앞에 내려 앉았네
身逐飛雲疑駕鶴 몸은 날아가는 구름 좇아 학을 탄 듯 하고
路懸危登似梯天 높은 층계 달린 길 하늘의 사다리인 듯
雨餘萬壑奔流漲 비온 끝에 온 골짜기 세찬 물 불어나니
愁度縈回五十川 굽이도는 오십천을 건널까 근심되네
정상부에서 300m를 내려오니 태백산 단종비각(太白山 端宗碑閣)이 있었다. 해발 1,500m에 있는 이 비각은 1955년 망경사(望鏡寺) 박묵암 스님이 건립하고, 비문(碑文)은 조선국 태백산단종대왕지비(朝蘚國太白山端宗大王之碑)라고 적혀 있었는데 비문과 현판(懸板)글씨는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탄허스님의 친필(親筆)이라 했다.
단종비각(端宗碑閣) 앞 안내문에는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端宗)임금이 인근 영월에 유배됐을 때 한성부윤을 지낸 추익한이 태백산의 머루와 다래를 진상했다고 한다. 어느 날 추익한의 꿈속에 곤룡포를 입은 단종이 백마를 타고 태백산에 나타났는데 바로 그날 17세의 단종이 고단한 삶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 뒤 이곳 주민들은 해마다 9월3일이면 비운의 왕 단종의 영혼을 달래고자 제사를 지내고 있다. 10세에 왕위에 올라 내내 권력에 눈먼 대신들의 암투에 희생된 단종이 죽어서나마 단종의 혼이 백마를 타고 이곳에 와서 태백산 산신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단종비각에서 조금 내려와 망경사에 도착하였다. 해발 1470m에 위치하고 있는 망경사(望鏡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월정사의 말사로 652년(신라 진덕여왕 6)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단다. 함백산 정암사(淨巖寺)에서 말년을 보내던 자장은 이곳에 문수보살 석상(石像)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암자를 지어 그 석상을 모셨다고 하는데 그러나 이후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망경사는 1950년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는데 우리나라 3대 영산(靈山)으로 지리산, 소백산(小白山)과 함께 태백산(太白山)이 민족의 영산으로 알려진 것은 천제단과 억울하게 죽은 단종의 비각, 망경사가 있어서 영험한 무속신앙의 발원지가 되고, 수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 된다. 망경사는 태백산에서 장기간 기도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도량으로 하늘의 문이 열린다는 자시(子時)와 인시(寅時)에 맞춰 천제단에서 마음을 잡고, 마음을 씻으며 안락을 비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망경사는 이름보다 작은 절로 문수보살상과 대웅전, 용왕각· 요사채가 있었는데 객사 앞에는 등산화가 몇 걸레 쉬고 있었다.
용왕각은 낙동강 발원지 중 하나이고, 우리나라 100대 명수 중 으뜸 명수라는 이름표를 단 망경사의 용정(龍井)이 새로 세운 큰 비석아래에 수도꼭지와 플라스틱 바가지를 매달고 있어서 한바가지 마시니 땀을 흘린 후의 물맛은 정말 시원하여 좋았다. 삼국시대 때부터 태백산 천제단에서 하느님께 제사 지낼 때 이 샘물을 제수(祭水 :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물)로 사용하였다는데 용궁에 연결되어 가뭄 때나 장마 때나 수량이 변하지 않는 신비한 샘물로 겨울에도 샘물이 얼지 않아 산을 오르는 많은 등산객에게 생명수 역할을 하는데, 부정한 사람이 마시면 물이 혼탁해 진다는 전설과 땅속에서 쉬고 있던 용이 하늘로 오른 자리에 물이 솟았다고 하여 용정(龍井)이라 하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샘으로 알려져 있다.
잠시 쉰 후 사륜오토바이가 다니는 비탈길을 조심하여 내려오다가 반재에서 당골광장 쪽으로 내려오면서 태백산을 지키는 수문장 석장승을 보고, 해마다 개천절이면 단군 할아버지께 성대한 제를 올리고 국태민안의 축원한다는 단군성전 단군상 앞에서 “세상을 편안하게, 더 때 묻지 않고 살아가게 하여 주십시오.”하고 기원한 후 다리가 아파 산행을 같이 못한 Y형에게 무사히 내려왔다고 전화를 하니 출발에서 하산까지 4시간이 걸렸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통리역으로 갔다. 온통 검은 색을 뒤집어 쓴 700m 고지의 작은 간이역은 추위에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석탄산업이 활기를 찾던 그 시절에는 가장 바쁜 곳이었을 것이나 지금은 텅 빈 대합실에 시간도 모르고 찾아온 우리들만 있었다. 1시간 반을 기다려야 하기에 며칠 전 TV에서 본 미인폭포를 다녀올 생각으로 두 친구에게 물으니 Y형은 아픈 무렵 때문에 싫다고 하고 S는 태백산을 다녀와 아픈 다리를 핑겨로 싫다고 하여 혼자서 통리역 건너편 산처럼 쌓인 탄 더미가 날려 흙이 새까맣고 먼지가 나는 철로를 건너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인 못살았다는 삼척으로 넘어가는 동쪽 고갯길을 20분 쯤 걸으니 ‘미인폭포 500m'라는 커다란 이정표가 나왔다.
미인폭포(삼척시 도계읍 심포리)는 계곡을 타고 올라야 하는 폭포와는 다르게 산을 거슬러 내려가야 만날 수 있는 특이한 폭포로 잡목과 낙엽송이 빽빽한 숲속 오솔길을 한참 내려가서 쇠다리를 건너니 주택인지 절인지 알 수 없는 외딴집이 나왔고, 장작이 많이 쌓여 있는 집의 마당을 지나 조금 더 내려가니 오봉산과 백병산의 두 산자락이 만나는 곳에 절경인 통리계곡과 미인폭포가 심한 가뭄에도 이름값을 하려는 양 통이 좁은 치마폭을 움켜쥐고 조심스럽게 내려오고 있었다.
비가 오면 붉은 절벽에서 물이 쏟아저 내려 한국의‘그랜드 캐년’이라 불리는 통리계곡의 이 폭포는 본시‘오십장 폭포’였는데 ‘폭포수 옆 높은 터에 살던 한 미인이 남편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았으나, 남편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 외롭게 삼년상을 치렀지만 그래도 사별한 남편 그리움을 떨칠 수 없어 폭포에 몸을 던졌다.’고 하는 슬픈 전설로 ‘미인폭포’라고 불러 여인의 한을 달랬다고 하여 떨어지는 폭포를 인간사의 행복한 순간으로 생각하며 지난해 지은 시조 ‘폭포처럼’을 외워 보았다.
세상아 밀지마라 / 어차피 갈 길이다
때로는 뒷짐 지고 / 갈지자(之)로 걸어보고
한 번 쯤 훨훨 날면서 / 춤추면서 살련다.
높이 30m의 바위절벽을 타고 내리는 이 폭포는 밑에서 위로 쳐다보면 시야가 트여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장관을 맛볼 수 있고, 물이 많아지면 포말되어 떨어지는 모양이 여인이 치마폭을 뒤집어쓴 형상이라고 한다. 보석 같은 폭포가 빼어난 협곡에 숨겨져 있어 많은 전설이 있는데 그 중에서 특이한 전설은‘옛날 태백지역에 대단히 아름다운 미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너무 아름다워 자신과 어울리는 짝을 만날 수 없었으나 이상형을 꾸준히 기다렸다고 한다. 물론 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청혼하였지만 그녀는 싫다고 하였는데 어느 날, 우연히 자신이 원하던 이상형을 본 기쁜 그녀는 그 남자에게 청혼을 하니, 남자는 "할머니, 놀리시지 말고 거울 좀 보세요." 라고 했단다. 놀란 그녀는 폭포 물에 자신을 비춰보고, 그제야 자신이 너무 늙은것을 깨닫고 절망하여 폭포위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떨어져 자살하고 말았다는데, 그 때 정말로 그녀가 원하던 이상형이 그녀를 만나려고 말을 타고 오다가 자살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말과 함께 굳어 바위가 되었다.’고 하는 슬픈 전설이다.
통리협곡은 중생대백악기에 퇴적된 역암층으로 물에 산이 침식되어 형성된 대규모 협곡으로 침식된 길이가 270m로 깊게 파여 그 형상이 마치 미국의 "그랜드 케년" 과 같은 장관을 이루고 있다. 특히 협곡의 전체적인 색조가 붉은 색조를 띠는 바위절벽으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살펴보면 암석의 입자가 굵은 자갈로 된 역암과 모래로 이루어진 사암이다. 이 고운 모래와 진흙이 굳어 몇 겹으로 차곡차곡 쌓인 구조가 마치 높게 포개어 놓은 시루떡을 연상케 한다.
미인폭포의 폭포수는 통리협곡을 지나 도계와 삼척을 거쳐 죽서루 밑으로 흘러 동해로 빠져나가는 "오십천강" 을 이루는데 일몰 전과 일출 전에 미인폭포에 따스한 바람이 불면 풍년이요. 찬바람이 불면 흉작이 난다는 옛말이 전해올 정도로 신비의 계곡에 신비의 폭포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13 : 50. 열차에 올랐다. 차창으로 펼쳐지는 늦가을 강원도 풍경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작은 시내를 끼고 달리는 열차와 열차를 따라오다가 멀어지는 산야에는 붉고 노란 단풍잎이 갈바람에 날리고 있어서 탄성을 자아내게 하였고, 작은 마을에는 군불 때는 연기가 피어올라 Y형은 “저것 봐, 저것 봐”를 연발하며 사진 찍기에 여염이 없었다.
자동차를 이용하는 여행에만 익숙한 우리는 처음으로 한 기차여행에서 일정을 제대로 짤 수 없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등 여러 가지 불편이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참 잘 했다고 입을 모았다. 창밖이 어두워 졌을 때 우리는 길게 앉아 동안의 피로에 잠을 청하였고 20 : 15. 동래역에 내려서 늦은 저녁을 먹은 후 헤어지면서 25년이 넘게 사겨온 우정을 다시 한 번 다졌다.
( 이 글은 우리 가족과 친지들에게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하여 3번의 태백여행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와 인터넷에서 퍼온 글들을 정리하여 2009년 겨울에 적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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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태백 이야기 수고많이 하셌네
[詩]시 잘읽고 가네
내가 쪽지 보냈는데 확인하지 안았드군
자주 들러서 좋은 글 올려주시게나
좋은 하루 되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