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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7년(1783년) 7월 18일 수레·벽돌의 사용, 당나귀·양의 목축 등 중국의 문물에 대한 홍양호의 상소문
대사헌 홍양호(洪良浩)가 상소하기를,
“신이 그 동안에 외람되게도 전대(專對)하는 사명(使命)을 띠고 연경(燕京)과 계주(薊州) 사이를 왕래해 보건대 산천(山天)과 성읍(城邑)은 모두가 요(堯)임금과 우(禹)임금 때의 고적(古跡)이었지만,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은 다시 옛날의 것이 아니었기에 둘러보고서 자다가도 한탄스러웠다고, 더욱이 황왕(皇王)의 훌륭한 시절을 보게 되지 못했음이 한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땅은 곧 옛 중화(中華)의 것이고 사람은 곧 선왕(先王)들의 백성이어서, 흘러 온 풍습과 남아 있는 세속은 그래도 징거(徵據)할 만한 것이 있었고, 이용(移用)과 후생(厚生)의 기구에 있어서도 모두 법도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대개 주관(周官)이 옛 제도가 백대(百代)토록 서로 전해지면서, 비록 여러 차례 병화(兵火)의 변이 있어 화이(華夷)가 번갈아 들게 되었지만, 민생과 국가의 큰 사용하는 것에 있어서는 고금(古今)의 변함이 없는 법이어서, 마침내 어느 외국(外國)이 어찌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간편(簡編) 내용에서 조금이나마 한두 가지를 연구하여 헤아린 것이 있었기는 해도, 귀로 듣게 된 것이 눈으로 보게 된 것만은 못한 법인데, 이제 와서 몸으로 그 땅을 밟아 보니 대개 놀랍게도 믿을 만한 것이 있었습니다. 대저 풍습을 관찰하고 세속을 물어봄은 사신(使臣)의 직책인 것이기에, 삼가 국가의 계책에 도움이 되고 민생의 사용에 절실한 것들을 취택하여 여섯 가지 조목으로 나누어 아랫 구절에 개열(開列)하였으니, 오직 성명께서 살펴보아 주소서.
첫째는, 수레 제도[車制]를 말하겠습니다. 옛적에 황제씨(皇帝氏)가 비로소 배와 수레를 만들어 통행할 수 없는 데를 건너 가게 하였기에 헌원(軒轅)이라고 이름하였음은, 만세의 공로가 수레를 만든 것보다 더할 수 없음을 보게 되는 일이요, 예법에 그 나라 임금의 부(富)를 묻게 되면 수레의 수효를 들어 답변하였음은, 그 나라의 사용하는 것으로 수레보다 더한 것이 없음을 보게 되는 일입니다. 《주례(周禮)》의 고공기(考工記)에 온갖 공장(工匠)의 일은 각각 구실이 한 가지씩인데, 오직 수레에 있어서는 윤인(輪人)·여인(輿人)·거인(車人)·주인(輈人) 등의 직책이 있고, 경(徑)·위(圍)·척(尺)·촌(寸)의 제한과 장(長)·단(短)·숭(崇)·박(博)의 식(式)이 그림처럼 섬실(纖悉)하게 되어 있어, 누구나가 손으로 대보며 자귀로 깎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선유(先儒)의 말이 ‘수레는 천지의 형상을 갖춘 것으로, 사람이 그 속에 있게 됨은 역리(易理)의 삼재(三才) 육획(六畵)을 본받은 것이라.’고 했으니, 또한 민생의 기구(器具)는 수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음을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대저 이러한 까닭에 다닐 적에 승차(乘車)가 있게 되고 싸울 적에는 융차(戎車)가 있게 되고, 짐을 실을 때는 대차(大車)가 있고 농가에는 역차(役車)가 있고 밭에 물을 댈 적에는 수차(水車)가 있으며, 천백(千百) 가지의 제작으로 각각 사용을 하게 되어, 안으로는 중국(中國)과 밖으로는 사방의 변방까지 수레를 사용하지 않는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시험삼아 이번의 사행(使行)에 본 것으로 말을 하건대 연경(燕京)에는 윤곡(輪轂)이 서로 거리에 그득하고 항간(巷間)에 넘치었는데, 진실로 비천(卑賤)한 노예나 가난한 아이들이 아니면 거개 모두 수레를 타고 다녔습니다. 연경에서 요동(遼東)까지 1천여 리의 사이에 궤도(軌道)가 서로 이어져 마치 하나의 도장[印]을 찍어 놓은 것 같았는데, 방울 소리가 서로 들리며 낮이나 밤이나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섬서(陝西) 관중(關中)·사천(四川) 촉도(蜀道)의 험악한 길과 강소(江蘇)·절강(浙江) 및 민월(閩越)·광동(廣東) 등의 먼 길을 호상(豪商)과 대고(大賈)들이 마치 문정(門庭)을 드나들듯이 했는데, 이는 단지 길이 뚫린 대국(大國)이고 재화(財貨)가 풍부한 소치 만이 아니라, 수레를 사용하는 편리가 말을 쓰는 것보다 몇십, 몇백 배가 되기 때문임을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사용하여 운행하고 있는 수레를 두고 보건대 1승(乘)을 메는 말이 5, 6의 나마(騾馬)에 지나지 않았는데 적재(積載)하는 짐은 수십 필(匹)의 힘이 들게 되는 것이었고, 당나귀 한 마리가 끌고가는 가벼운 수레도 세 사람이 함께 타고 다니며, 바퀴가 하나인 작은 원(轅)은 하나의 지아비가 뒤에서 밀고 다니니, 또한 일은 절반이나 하고 공효는 배나 됨을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대개 수레라는 것은 먹이지 않아도 되는 말이자 길을 다니는 집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민생들이 크게 사용하게 되고 온 나라의 편리하게 쓰는 기구가 이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유독 우리 동방(東方)에서는 수레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음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이 대략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도로가 험악하다는 것이고 하나는 우마(牛馬)가 희소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청컨대 신이 하나하나 변해(辨解)하겠습니다. 대저 천하에 험악한 길은 촉도(蜀道)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도,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적차 사마(赤車駟馬)로 일찍이 성도(成都)를 지나갔었고, 제갈양(諸葛亮)은 또한 목우 유마(木牛流馬)로 검각(劍閣)의 잔교(棧橋)를 통행하기도 했었습니다. 바로 신이 지나가 본 바를 가지고 말하건대, 청석령(靑石嶺)과 마천령(摩天嶺)의 험준(險峻)은 자못 우리 나라의 동선령(洞仙嶺)보다도 더했지마는, 수레가 거리낌없이 다녔고 상인과 나그네가 서로 바라보았으니, 이 하나만 들어도 여타의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로가 험악한 것은 근심할 것이 없는 일입니다.
대저 우리 동방(東方)에 우마(牛馬)가 희소한 것은 생산이 번식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특히 사육하는 방법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 부리기를 그의 성질대로 하지 못해서입니다. 탐라(耽羅)에서 나는 말은 본래부터 대완(大宛)의 종자라고 했고, 북관(北關)의 말도 기북(冀北)의 준마(駿馬)만 못하지 않습니다. 도장(島場)과 사원(沙苑)에 여기저기 놓여 있는데 어찌 참으로 말이 없는 것이겠습니까? 진실로 목자(牧子)들이 좀먹듯이 소모해 버리고 감독하여 지키는 사람이 허술하여 태만하기 때문인 것이니, 이는 잘못이 목양(牧養)에 있다고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축(牛畜)의 번성이 우리 나라 만한 데가 없습니다. 서울과 외방(外方)에서 도살하는 것이 하루에도 몇 천 마리가 되는지 알 수 없는데도 생산이 쉬지 않게 되니, 풍토(風土)가 합당한 것임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역경(易經)》에 ‘복우 승마(服牛乘馬)’라 하였으니, 대개 소는 복상(服箱)하기에 합당하고 말은 기승(騎乘)하기에 합당함을 말한 것으로, 일찍이 말에다 물건을 적재(積載)함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전(傳)에 ‘소로써 인중(引重)하고 말로써 치원(致遠)한다.’고 했는데, 인중이란 것은 수레를 끄는 것을 말한 것이지 등에다 무거운 것을 짊어짐을 말한 것이 아니요, 치원이란 것은 행진(行進)하는 것을 말한 것이지 물건을 먼 데까지 가져감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에 있어서 말은 타고 다니기에 합당한 것이지 인중(引重)하는 힘은 소와 같지 못함을 볼 수 있고, 소는 복상(服箱)하기에 좋지만 치원(致遠)하는 힘은 말만 같지 못함을 볼 수 있는 것이니, 또한 일찍이 소에다 물건을 적재(積載)함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그렇지 아니하여, 소와 말이 모두 등에다 짐을 지게 되는데, 소는 그래도 가능하지만 말은 위태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 까닭에 강 가에서 쌀을 실어나르는 말은 대부분 반년이면 한 번씩 바꾸어야 하고, 성 안에서 시목(柴木)을 운반하는 말은 삼동(三冬)이 지나고 나면 힘이 다 되어버려, 대체로 죽지 않으면 앉은뱅이가 되는 탓에 따라서 도살하게 됩니다. 이것이 어찌 말의 죄이겠습니까? 이는 잘못이 복승(服乘)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두 가지를 말한 것은 궁하게 된 것인데, 무엇이 괴로워서 수레를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불가능(不可能)한 것이 아니라 곧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대개는 일찍이 시행해 갈 방법을 찾지 않는 것이라 여깁니다. 어찌 오직 이것뿐이겠습니까? 군자(君子)들은 상례대로 하기만 편안히 여겨 변통해 가는 의논을 하려고 하지 않고, 중인(衆人)들은 견문(見聞)에만 익숙하여 희귀하고 특이한 일은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에서 일찍이 법을 만들어 금하지 않는데도 마침내 한 사람도 창시(創始)하여 실행해 가는 수가 없는 것인데, 비록 더러 분발하여 뜻을 가지게 된다하더라도 진실로 조정에서 명령하게 되지 않는다면, 힘이 미치지 못하는 데가 있게 되어 실행하기가 편리하지 못함이 있게 되는 법입니다.
신이 일찍이 여러 도에 벼슬살이 다닐 적에 또한 우리 나라 안에도 수레를 사용하는 데가 많음을 보았습니다. 영남(嶺南)의 안동(安東)과 의성(義城), 해서(海西)의 장연(長淵)과 신천(信川), 관북(關北)의 함흥(咸興) 이남 육진(六鎭)의 여러 고을들이 모두 한두 마리의 우차(牛車)를 사용하여, 곡식을 운반하고 시탄(柴炭)을 실어나르느라 수백 리의 사이를 오고가고 했는데, 제작이 거칠고 둔하여 멀리 가기는 불가능했음은 오로지 법도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니, 또한 수레를 운행하지 않을 수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수레를 운행하려고 한다면 그 방법을 중국에서 취해 오는 것이 좋으니, 먼저 여러 군문(軍門) 및 양서(兩西)의 감영(監營)·병영(兵營)과 의주(義州) 등의 곳으로 하여금 수레 공장(工匠)을 연경(燕京)에 보내어 모든 수레의 제작을 모사(摸寫)해다가 각각 몇 양(輛)씩을 만들도록 하고, 먼저 내다 사용하여 각자가 현리함을 보도록 한다면, 각 고을들이 본받게 되고 여타의 도(道)에서도 본받게 되며 부호(富戶)들도 본받게 되어, 몇 해가 지나지 않아서 온 나라에 퍼지게 되어, 이익이 넓어짐이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시험삼아 그 중에도 큰 것을 들어 말한다면, 하나는 상고(商賈)들이 전수(轉輸)하여 온갖 화물(貨物)이 유통하게 되는 것이고, 하나는 부세(賦稅)를 거두어 들이는 데에 고임(雇賃)을 덜게 되는 것이며, 하나는 말의 힘이 지치지 않게 되어 탈 말이 넉넉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융거(戎車)에 있어서도 구비되어 자연히 무위(武威)가 씩씩해지게 될 것이고, 체전(遞傳)하는 수레도 이루어져 역마(驛馬)가 다소 한가로워지게 될 것이며, 수차(水車)가 운행되어 전야(田野)가 크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또, 사행(使行)으로 말하더라도 세 사신(使臣)이 대동(帶同)하는 역마(驛馬)와 쇄마(刷馬)가 수백 필(匹)이나 되도록 많은데, 책문(柵門) 안에 이르게 되면 세폐(歲幣)와 건량(乾糧)을 으레 수레를 삯을 주고 운반하여, 대가로 수천의 은(銀)을 소비하게 되니, 이는 모두가 해마다 한정없이 낭비되는 것입니다. 어찌 우리 수레에 우리가 싣고서, 갈려면 가고 쉴려면 쉬는 것만 하겠습니까? 이미 고임(雇賃)의 허비가 줄어들게 되고 또한 지체하게 되는 폐해가 제거될 것이니, 그 이해가 어찌 교연(較然)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만부(蠻府)에서 사행(使行)의 마필(馬匹)을 헤아려 보고 몇 양(輛)의 가벼운 수레를 만들어서 싣고 왕래하도록 예비해 놓는다면, 잡혀야 하는 말[馬]을 3분의 1이나 5분의 1로 감하게 될 수 있고 그 고가(雇價)도 이에 따라 자연히 제감될 것입니다. 1년의 수레 만드는 비용을 헤아려 보더라도 두어 해의 말을 세내는 비용에 지나지 않으면서, 영구히 한없는 소비를 제감하게 될 것입니다. 《역경(易經)》에 ‘이롭게 되는 바를 말하지 않았으니 대단한 일이다.’라고 하였듯이, 왕정(王政)은 이로움을 말할 필요가 없이 용도(用度)를 절약함은 곧 민생들을 애호(愛護)하게 되는 바인 것이니, 진실로 민생들에게 편리하게 되면 국가도 따라서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말할 것이 없는 큰 이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수레 제도를 시행하게 된다면 국가는 부유(富裕)해지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자연히 부유해지며, 민생들이 풍족해지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풍족해지고, 군사를 강해지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자연히 강해지는 법이니, 어찌 도움이 적은 일이겠습니까? 오직 도로를 닦는 행정에 있어서는 다소 비용이 없지 않게 될 것입니다만, 고개의 좁은 목과 교량(橋梁)에 있어서는 관(官)에서 닦아가고, 가로(街路)와 천맥(阡陌)에 있어서는 백성들로 하여금 닦아가게 하면 되어, 한 번 호령을 내리는 사이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저 험악한 기산(岐山)에 평탄한 길을 내도다.’라고 하였고, 또 ‘숫돌 같은 한 길이 화살처럼 곧았다.’고 했습니다. 길을 닦는 한가지 일은 또한 왕정(王政)이 먼저 해야 하는 바인 것이고 유독 수레가 다니기 위한 것만이 아닌 것입니다.
둘째는, 벽돌 만드는 법을 말하겠습니다. 대저 벽돌이 생겨난 것은 경전(經傳)에 나오지 않습니다만, 도기(陶器)는 우제(虞帝) 때에 시작되었고 와옥(瓦屋)은 하후(夏后) 때에 비롯되었는데, 흙을 구워서 만드는 방법은 기와나 벽돌과 똑같습니다. 벽돌로 성을 쌓았음은 또한 어느 시대에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성(成)’이란 문자(文字)는 ‘토(土)’로 되고 ‘성(城)’으로 되어 있으니, 대개 흙을 쌓아 이루게 됨을 말한 것이고, ‘벽(甓)’이란 문자는 ‘벽(壁)’으로 되고 ‘와(瓦)’로 되어 있으니, 대개 기와로 벽을 이루게 되었음을 말한 것입니다. 성(城)이란 것은 장벽(墻壁)을 크게 쌓은 것입니다. 《역경(易經)》에 ‘성복우황(城復于隍)’이라 했는데, 이는 성이 무너져 흙으로 되돌아갔음을 말한 것이고, 《시경(詩經)》에 ‘토국성조(土國城漕)’라 했으니, 또한 성은 흙으로 쌓고 돌로 쌓은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이른바 흙으로 쌓았다는 말은, 마땅히 풀리어 흩어지는 흙으로 높다란 담장을 이루게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도성(都城)이 백치(百雉)였다.’는 말이 《춘추(春秋)》에 있는데, 치첩(雉堞)의 형태는 흙을 구운 것이 아니고서는 안되니, 이로 본다면 벽돌로 성을 쌓았음은 그 유래가 오래 된 것입니다. 사책(史冊)에 ‘하(夏)나라 임금 발발(勃勃)이 흙을 쪄서 성을 쌓았는데 견고하여 함락시킬 수 없었다.’고 했으니, 흙을 쪘다는 것은 벽돌 구운 것을 말한 것입니다. 진(秦)나라 만리 장성도 일찍이 듣건대 벽돌을 사용했다고 했었지만 여지껏 자세하게 알지 못하다가, 신(臣)이 이번 사행(使行) 길에 목도(目覩)하건대 산 정상에 주밀하게 이어져 있는 것이 모두 곧 벽돌이었습니다. 대저 무산(巫山)과 여산(閭山)의 돌은 이루 쓸 수 없는 것인데도 반드시 벽돌을 사용하였음은, 진실로 벽돌이 돌보다고 낫기 때문입니다.
대개 돌은 견고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오직 너무나 견고하기 때문에 깎을 수는 있어도 갈 수는 없기에, 많고 많은 돌들의 장단(長短)을 모두 가지런하게 할 수가 없고, 여러 길을 쌓을 적에 봉선(縫線)을 모두 딱 맞출 수 없어서입니다. 비와 바람이 쳐 씻기게 되고, 총과 포(砲)에 부딪치어 돌이 혹시 하나라도 빠져나가게 되면 치첩(雉堞) 전체가 모두 움직이게 될 것이니, 흙을 구워 만든 벽돌은 하나의 틀로 찍어내는 것이라 장단과 광후(廣厚)가 균일하고 방정하여, 천층 만층을 쌓더라도 착착 들어맞게 되는 것과 어찌 같게 되겠습니까?
대저 이러하기 때문에 안으로는 궁성(宮成)·도성(都城)과 밖으로는 주부(州府)·군현(郡縣)과 작게는 봉수대(烽燧臺)·초루(譙樓)에나, 홍예문(虹蜺門)과 비갈(碑碣)의 집까지 모두 벽돌을 사용하여 쌓게 되는 것입니다. 쌓는 방법은 하나는 종(從)으로 하고 하나는 횡(橫)으로 하여 장단(長短)이 서로 어긋나게 되면서 좌(左)인 듯하기도 하고 우(右)인 듯하기도 하여 후박(厚薄)의 등급이 가지런하며, 견아(犬牙)가 서로 물리듯 하고 어린(魚鱗)이 서로 연결된 듯한데, 두 벽돌의 사이는 회(灰)를 이기어 메우므로 견고하게 혼합되어 널찍하게 성석(成石)하여 자귀로 깍은 듯이 직선(直線)이게 되고 숫돌로 갈듯이 매끄럽게 되는지라, 비록 날랜 원숭이라 하더라도 발 붙이지 못하게 되는데, 견고하고도 완전하고 정미하고도 치밀함이 돌로 쌓은 것과는 비교가 안됩니다. 대저 부요(富饒)한 중국(中國)으로도 성 쌓는 방법이 대저 이와 같았고 보면, 옛사람이 규획(規畫)한 뜻이 어찌 그저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벽돌을 사용함은 오직 이것만이겠습니까? 궁실(宮實)에 있어서도 창고에 있어서도 이로써 짓고 장벽(墻壁)과 계정(階庭)에 있어서도 이로써 쌓는데, 꽃 벽돌과 문의(紋儀) 벽돌로 뒤섞어 괴어 놓아 온갖 형상으로 기교(機巧)를 부립니다. 사람의 공력을 허비할 것이 없게 되기 때문에 대하(大廈)의 목재(木材)도 기둥과 서까래나 창틀과 들창의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어서 목재를 씀이 이미 적게 되로 따라서 정철(釘鐵)도 감하게 되어 비용이 지극히 간략하지만 제도는 지극히 완전하게 되어, 밖에도 도둑 맞게 될 염려가 없고 곁에서 화재가 나도 연소(延燒)하게 될 우려가 없습니다. 관사(官舍)도 민가(民家)도 또한 오직 벽돌을 힘입게 되니, 벽돌이란 이기(利器)로 어찌 큰 것 아니겠습니까? 그의 이익이 넓음은 바로 수레와 동등하게 됩니다.
대개 일찍이 생각해 보건대, 수레란 것은 목재(木材)로 바탕을 하여 쇠로 이루어지는 이기(利器)이고, 벽돌이란 것은 흙으로 바탕을 하여 불로 이루어지는 이기로서, 이는 곧 천지가 생성(生成)해 놓은 자재(資材)가 민생들의 큰 사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서(虞書)에는, ‘오직 수(水)·화(火)·금(金)·목(木)·토(土)·곡(穀)을 닦는다.’고 하였고, 춘추전(春秋傳)에는, ‘하늘이 낸 다섯 가지 자재(資材)를 민생들이 모두 사용하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생성(生成)하는 자는 하늘이고 닦아가는 자는 사람인 것입니다. 옛적에 성인들이 천문(天文)을 관찰하여 이기(利器)를 마련하고 물건을 구비하여 사용하게 하였음은 모두가 천지에 합당하게 재성(財成)해 간 것입니다.
또한 그 수레란 것은 형체가 둥근 것을 움직여서 사용하게 되고, 벽돌이란 것은 형체가 모난 것을 인정시켜 이용하는 것이니, 모난 것과 둥근 것의 움직임과 안정됨은 음(陰)과 양(陽)을 갖춘 것이고, 하나는 음이고 하나는 양이면서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겨나는 것이니, 이는 자못 천지의 조화(造化)가 이 이기(利器)가 붙여지면서 자연히 만세(萬世)토록 민생들의 이익이 되어진 것이지 진실로 사람이 힘으로 능히 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물며 벽돌과 수레는 비록 이롭기는 균등하면서도 비용(費用)은 지극히 미미하여, 금단(禁斷)할 수가 없는 흙에서 재료를 취하게 되고, 한 없는 섭나무[薪]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니, 이는 참으로 만백성들의 무진장(無盡藏)이고 천하가 공공(公共)으로 하게 되는 바의 것입니다.
오직 우리 나라에서는 능히 사용하지 못하고 있음은 어찌 흙이 없어서이고 어찌 섭나무가 없어서이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아서이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이번의 사행(使行)에 벽돌 굽는 가마[窯]를 목도(目覩)하건대, 대략 우리 나라의 기와 굽는 가마와 같았고, 구워 내는 흙도 또한 기와를 굽는 흙과 똑같아 곳곳마다 산재(散在)해 있는 것이기에 당초부터 구득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찍어내기와 번조(燔造)에 있어서도 태우는 것이 아니라 곧 찌는 것이기 때문에 가마 하나에 들어가는 섭나무가 촉서(蜀黍) 대 수십 단이 되지 않아도 족했으니, 그 비용이 지극히 적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책(史冊)에 말한 바 ‘증토(蒸土)’라는 말은 진실로 사실대로 된 것으로, 옛사람들은 구차하지 않게 이름을 붙여 말을 함이 대개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벽돌 사용이 용이함은 더욱 더 수레 사용과도 비교가 안되는 것이니, 신(臣)은 청컨대 또한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연경(燕京)의 사행(使行)에 사람을 딸려 보내 제작하는 방법을 가져다가 그 법대로 증조(蒸造)하도록 하여, 먼저 궁성(宮城)에서부터 시작하여 헐어지는대로 개축(改築)하게 하고, 이어 제작하는 방법을 제도(諸道)에 반포(頒布)하여 모든 관방(關防)과 주군(州郡)의 성(城)이 있는데도 마땅히 보수(補修)해야 할 데와 성이 없어서 새로 쌓아야 할 데에 모두 벽돌을 쓰도록 하되, 쌓아 가는 방법은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대로 하도록 한다면, 나라를 굳건하게 만들고 변방 방어를 튼튼하게 하는 방도에 있어서 어찌 대단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공사(公私)의 가옥이나 민생들이 일용(日用)하는 자재가 되어질 것에 있어서는 곧 그 다음의 일입니다.
셋째는, 당나귀와 양을 길러 내야 하는 일을 말하겠습니다. 대저 땅 위에서 사용하게 되는 것으로 소와 말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미미한 축산물(畜産物)이지만 건(乾)과 곤(坤)의 상징(象徵)으로 하게 된 것이니, 성인들도 이처럼 중히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소와 말의 생식(生殖)은 수효가 있는데 민생들의 수용(需用)은 한이 없게 되니, 필경에는 뒤를 이어 가는 것이 있는 다음에야 동이 나게 되지 않을 것인데, 오직 무엇으로 이어 가야 할 것입니까? 당나귀와 양이 곧 그것입니다.
대개 당나귀와 양은 말이나 소와 동류(同類)이면서도 다른 무리입니다. 그러므로 삼생(三牲)의 제향(祭享)에는 유모(柔毛)가 대무(大武)의 다음이 되고, 사모(四牡)로 달리게 될 적에도 더러는 하사(下駟)를 열위(劣衛)로 보충하게도 되는 법이니, 이것들도 또한 축산물 중에 좋은 것들입니다. 옛적의 예법은 임금도 일이 없이는 소를 잡지 않았었는데, 우리 나라의 풍속에서 법도가 없이 도살을 하게 됨은 대개 손님 대접과 제사 반찬에 있어서 대신할 만한 물건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소는 생산이 본시 번성하는 것이어서 아주 없어지지 않는 것인데도, 농가(農家)에서 쟁기질하게 될 적에는 매양 구비되지 못하여 걱정하게 되니, 만일 지금부터라도 양을 많이 길러 제사 접시에 채우는 것을 대신하게 된다면, 소를 지나치게 소모하지 않게 되어 쟁기질하기에 남아 도는 것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양이란 것은 가장 생산하기 쉽다는 것으로 육축(六畜)에 끼어 사방에 펼쳐져 있고, 가죽·털·내장(內腸)·각재(角材)가 사용에 맞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臣)이 국경(國境)을 나가게 되기 전에 이미 진백(陳白)했던 것이고, 이번의 사행(使行)에 조금 사오기도 했습니다만, 역공(曆貢)의 길에 변문(邊門)의 저잣거리에서 으레 화매(和買)하도록 하여 점차로 번식시켜 간다면, 소 1만 마리쯤의 생명을 구출하여 삼농(三農)의 이익을 열어 놓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당나귀의 됨됨이는 말처럼 건장하지는 못하지만 성질이 길들이어 부리기 쉽고 값이 싸서 구하기도 쉽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은 집집마다 키우면서 이로써 수레를 매기도 하고, 이로써 물건을 싣기도 하며, 이로써 쟁기질을 하기도 하고, 더러는 곡식을 갈기도 하고 물을 운반하기도 하여, 마음대로 부리기를 마치 동복(僮僕) 부리듯이 하므로, 사람의 노력을 대신해 주고 말의 힘을 분담(分擔)함이 매우 큽니다.
노새라는 것에 있어서는 당나귀에서 나온 것인데 당나귀보다도 건장하여, 참으로 참새가 송골매를 낳고 추호(貙虎)가 이리를 낳은 것과 같은 일입니다. 무거운 짐을 싣고 멀리 갈 수 있어 소와 말의 장점을 겸한 것이기 때문에, 명(明)나라 황제가 촉(蜀)으로 행행(幸行)할 적에도 항시 파란 노새를 타고서 질주(疾走)했었고, 송(宋)나라의 요평중(姚平仲)도 흰 노새를 타고서 하루에 8백 리를 뛰었었으니, 제물(蹄物) 중에 기이한 물건입니다. 하물며 그의 성질이 쉽게 자라 태어난 지 반년이면 으레 타고 달릴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중화(中華) 사람들이 아끼기를 말보다도 더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당나귀와 노새를 비록 북방(北方)에서 가져온 것이 있기는 해도 일찍이 새끼 쳐 자라게 되지 않고 힘이 다하여 죽어버리게 되니, 이는 목축(牧畜)에 익숙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진실로 연경(燕京)의 저잣거리에서 많이 사다가 목장(牧場)에 놓아 기르며 종자가 번식한 것을 가져다가 국가의 사용에 대비한다면, 타고 다닐 것이 여유가 있게 되고 융마(戎馬)도 자연히 족하게 될 것이며, 혹시라도 수레 제도를 시행하게 되어 타고 다니거나 싣고 다니기에 사용한다면 소와 말의 절반을 담당하게 되어, 상인(商人)과 행려(行旅)들이 퍼지게 되고 민생들이 복리(福利)를 입게 될 것입니다. 대저 목축(牧畜) 행정은 비용이 적고 이익이 원대해야 하는 법이니, 당나귀와 양을 기름은 곧 소와 말을 기르게 되는 것으로써, 소와 말이 번성하면 백성들이 부유해지고 군사가 강해지게 될 것입니다.
네번째, 구리 그릇[銅器]을 금단하는 것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신은 듣건대 천지가 만물을 낼 적에 각각 그 성질에 전주(專主)하게 되고, 성인들이 재물(財物)을 다스릴 적에도 각각 그 직(職)에 맞게 한다고 했습니다. 서로 침해하게 되면 두 가지가 다 병들게 되고 한 쪽을 편중(偏重)하게 되면 결함이 생기게 되니, 이는 변경할 수 없는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무를 깎아 집을 짓고 흙을 뭉쳐서 그릇을 만들었음은 그 성질에 순응(順應)한 것이고, 가마와 시루로 밥을 짓고 쇠로 쟁기질을 하였음은 그의 직에 합당하게 한 것입니다. 그릇을 사용함도 또한 그러하여, 상고(上古) 적에는 단지 질그릇과 바가지만 사용하였는데, 그 뒤에 질(質)이 변하여 문식(文飾)하면서 검소가 화려함으로 치닫게 되어, 비로소 보궤(簠簣)와 조두(俎豆)와 호련(瑚璉)의 제도가 있은 것입니다. 보궤는 대나무로 만든 것이고, 조두는 나무로 만든 것이며, 호련은 옥(玉)으로 만든 것이고, 금(金)·은(銀)·동(銅)·석(錫)을 사용했음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글짜의 제정에 있어서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증(甑)과 언(甗)은 음식을 끓이는 그릇이고, 병(甁)과 앵(罌)은 물을 담는 그릇인데 모두가 와부(瓦部)로 되어 있고 상(觴)·광(觥)·치(鱓)는 술을 담는 그릇인데 각부(角部)로 되어 있고, 배(杯)·권(棬)·완(椀)은 국을 담는 그릇인데 목부(木部)로 되어 있어, 한 가지를 들어도 세 가지를 알게 될 수 있습니다.
오직 악기(樂器)는 소리를 숭상하는 것이고 이정(彝鼎)은 공적(功績)을 새겨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리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고, 부(釜)와 당(鐺) 등의 것을 금부(金部)로 되어 있지만, 대부분 철(鐵)을 사용했었습니다. 그런데 후세에는 사치가 퍼져 더러는 금(金)이나 은(銀)그릇을 사용하고 있는데, 일찍이 구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중국의 풍속이 지금도 그대로입니다.
신(臣)이 이번의 사행(使行) 길에 여염(閭閻)의 점포나 저자의 가게에서 보건대 그릇은 모두 자기(磁器)를 쓰고 있고 구리나 주석으로 된 것은 볼 수가 없었으니, 가령 황제(皇帝)의 연탁(宴桌)·옥가(玉斝)·금뢰(金罍)에 있어서는 찬란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떡과 과일이나 고깃국을 담는 그릇은 단지 자기(磁器)와 연기(鉛器) 뿐이었습니다. 이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일찍이 나름대로 생각해 보건대 대개 구리를 가지고 돈[錢]을 주조(鑄造)하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대저 돈이란 것은 온갖 재화(財貨)의 근원으로 민생들의 명맥(命脈)인 것이기에, 조금이라도 부족한 바가 있게 되면 민생이나 국가가 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하의 구리를 수집하여 모두 사농(司農)과 수형(水衡)3481) 에 돌리어 한없이 주조하게 된 것인데, 그렇게 한 다음에야 여러 가지 보화(寶貨)의 권형(權衡)을 운용(運用)하여 사해(四海)의 복리(福利)를 다하게 될 수 있는 법입니다. 이러므로 금은(金銀)보다도 더 아끼고 주옥(珠玉)보다도 더 보물(寶物)로 치게 되어, 주옥과 금은은 여마(輿馬)와 관패(冠佩)의 장식에 사용하게 되지만, 한 치[村]의 구리도 다른 데에 쓰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시험삼아 새로 반포(頒布)한 취진판(聚珍板)의 서문으로 보더라도, 활자(活字)를 녹이어 부원(寶源)으로 돌리도록 하게 된 것이니, 어찌 좋은 계책이 아니고 어찌 엄격(嚴格)한 법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생물(生物)의 성질에 순응(順應)하게 각각 그 직분(職分)을 얻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주례(周禮)》에 나와 있는 천부(泉府)의 유제(遺制)로서, 무릇 돈을 사용하게 된 이후부터 중국에서 대대로 지켜 오는 것으로, 백대(百代)토록 감히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 나라에서는 유(鍮)와 석(錫)을 함부로 여겨 법도가 없이 그릇을 만들고 있는데, 단지 술과 음식 및 국과 반찬을 담는 것으로만 사용하게 될 뿐만 아니라, 크게는 소반과 사발 및 화로와 남비, 천하게는 세수 대야와 소변 그릇으로 마구 사용하기를 아낌없이 하고 있습니다. 설령 나라에 동광(銅鑛)이 있어 끊임없이 생산하게 된다 하더라도, 물자(物資)를 아끼는 도리에 있어 마땅히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본래부터 토산(土産)은 없고 멀리 일본(日本)에서 사오게 되는데, 떠벌리며 속이기 잘하는 왜인(倭人)들이 으레 비싼 값으로 팔게 되니, 그 유래(由來)하는 바가 희귀(稀貴)하고도 힘드는 것이라 하겠는데, 우리 나라 풍습은 도리어 귀중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가(朝家)에서 매양 돈을 주조하게 되는 날에는 수만 냥의 적지 않은 재물을 내어 해외(海外)의 구득하기 어려운 재물을 무역(貿易)해 오지만, 주조해 낸 때에 당해서는 소득이 소비한 것을 보충하게 되지 못하기 때문에, 판을 차리고 돈을 주조하는 것을 가장 어렵고 신중해야 하게 되는데, 10년이 되지 못하여 한 번씩 거행해야 하니, 돈이 어떻게 흉년 들지 않을 수 있으며, 민생들이 어떻게 가난 들지 않을 수 있고, 부고(府庫)의 재정(財政)이 어떻게 고갈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저 중국의 부유(富裕)는 천지의 산물(産物)을 다 모으고 산해(山海)에서 자라는 것을 긁어모아, 배와 수레가 닿는 사방에 있지 않는 것이 없지만 물자(物資)의 사용을 반드시 근신(謹愼)스럽게 하고 재물의 운용(運用)을 절도가 있게 함이 그와 같았습니다. 양주(楊州)의 삼품(三品)인 〈금·은·동(金銀銅)과〉 오(吳)·촉(蜀)의 동산(銅山)이 샘물 솟듯이 폭주(輻輳)하게 되지 않는 수가 없지만 그처럼 아끼는 것은, 어찌 민생들의 명맥(命脉)이자 국가의 이권(利權)이어서 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유독 중국뿐이겠습니까? 오직 왜인들도 또한 그러합니다. 그들의 나라는 동(銅)의 생산이 천하에 으뜸인데도 일찍이 그릇 만드는 데에 사용하지 않고 오직 사기(沙器)와 칠기(漆器)를 사용하게 되는데 정교(精巧)한 제작이 금·은 그릇과 못하지 않습니다. 비용이 반드시 유기(鍮器)와 동기(銅器)보다도 더하게 되는데는 이것과 그것을 바꾸지 않는 것은 또한 재물 운용하는 도리를 잘 알아서일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게 된 까닭은 또한 그럴 만한 논의가 있습니다. 대개 국가 초기에 일찍이 돈을 사용하지 않고 단지 은(銀)과 포(布)로 재화(財貨)를 삼았었기 때문에 공물(貢物)의 저자에 나오는 왜인들의 구리를 쓸 데가 없으므로 집기(什器)를 만들게되고 따라서 풍습이 된 것인데, 돈을 사용하게 된 뒤에 이르러서는 국사(國事)를 담당하여 일을 주관하는 사람들이 깊이 옛 제도를 강구(講究)해 보지 못하고 그대로 인순(因循)하여 변통해 가지 않아서입니다. 이제 와서는 돈의 폐해가 날로 퍼지게 되어 민생들이나 국가가 다같이 곤궁해진 때인데 어찌 변경하여 변통해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온 나라 안의 유·동(鍮銅)으로 된 물건들을 제기(祭器)와 악기(樂器) 이외의 것은 일체로 금단하고, 시일의 기한을 정하여 관(官)에 수납(輸納)하도록 하고 그 대가를 계산하여 상환(償還)해 준다면, 민생들은 시끄럽게 될 폐해가 없고 국가에는 영구한 이로움이 있게 될 것이고, 대신 사용할 그릇에 있어서는 그럴 만한 그릇이 없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온 나라의 유(鍮)·동(銅)으로 된 그릇을 통계하면 억만(億萬) 근 가량이 될 것이나, 상환해 주어야 할 대가는 반드시 먼 왜인들의 저자에게 무역(貿易)하는 비용에 미치지 않을 것이니, 호조[度支]에 저장해 두고서 그것으로 돈을 주조해 낸다면 국가의 용도가 자연히 유족(裕足)해지고 구리의 값도 자연히 헐해지게 딜 것입니다.
또, 중국의 법제를 보건대 구리뿐만이 아니라, 오직 철(鐵)에 있어서도 또한 함부로 사용하지 아니하여, 농기구(農機具) 이외에는 비록 궁실(宮室)을 짓는 데에 있어서도 주로 흙과 목재를 사용하고 철을 사용하는 수가 지극히 적으니, 대개 철이 곧 병기(兵器)의 재료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난간과 대청의 벽은 모두 기와와 벽돌을 수용(需用)하고, 소반과 합(盒), 궤짝과 상자는 대부분 가죽이나 종이를 사용하여 목재(木材)를 쓰는 수가 지극히 적었으니, 이는 대개 목재는 곧 배와 수레의 재료이기 때문이고, 붓대와 담뱃대는 또한 갈대와 등(藤)나무를 사용하고 대나무를 쓰지 않음은 대개 대나무가 곧 화살과 활의 재료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는 모두 중국의 재물을 운용(運用)하는 법도이고 고금(古今)에 서로 전해 오는 비결(秘訣)로써, 백성들은 날마다 그대로 생활하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느 것이니, 어찌 국가가 부유해지지 않을 수 있고, 어찌 민생들이 살게 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군사가 강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경작(耕作)과 방직(紡織) 방아와 맷돌 같은 기구와 붓과 먹, 아교와 칠 같은 등류에 있어서는 또한 곧 민생들이 날마다 사용하는 것으로써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간단하여 용이하고 정밀하면서도 편리하게 되어, 모두가 자연스러운 솜씨와 바꿀 수 없는 법도가 있었습니다. 경서(經書)에 ‘지혜스러운 사람은 물건을 창안하게 되고 솜씨가 있는 사람은 이를 이어가게 되는 법이니, 온갖 공장(工匠)의 일 모두가 성인들이 창작해 놓은 것이다.’라고 한 말이 어찌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중국은 그전에 성인들이 살던 곳이니, 오묘한 제작(制作)은 그 유래가 오래 되었습니다. 신(臣)이 구리를 금단하는 이익에 있어서 그윽이 유추(類推)하여 묵계(默契)한 것이 있기에, 아울러 이를 곁들이어 진달하게 된 것인데, 국가의 방책을 도모해가는 사람은 모두 알지 않으면 안될 일입니다.
다섯째는, 모자(帽子)를 혁파하는 일을 말하겠습니다. 대저 교린(交隣)하고 호시(互市)하는 방법은 각기 소유(所有)한 것을 가지고 없는 것과 바꾸게 되는 것으로, 둘이 다 이롭고 다같이 편리하면서 오래도록 폐단이 없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송(宋)나라가 서하(西夏)와 호시(互市)하여 차(荼)를 가지고 말[馬]과 바꾸려고 할 적에, 원호(元昊)3482) 가 아직 어린 사람으로서 그의 아버지에게 허락하지 말도록 간했었는데, 그 당시에 식견있는 사람들이 그가 앞날에 근심거리가 될 것임을 우려했었으니, 또한 호시(互市)는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임을 보게 되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의 서북(西北)에서의 호시는 그만 공헌(貢獻)과도 같아 가진 것의 다과(多寡)를 비교해 볼 수가 없게 되고, 사행(使行)에 상인과 역관들이 교환(交換)하게 되는 물화(物貨)에 있어서는 일체를 화매(和買)하는 사례대로 하고 있으니, 그 득실(得失)을 헤아려 보아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갖고 있는 화재(貨財)는 오직 은(銀)이 제일 좋은 것이고 지난날에는 왜인(倭人)들의 은이 통행(通行)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연경(燕京)에 들어가기를 어느새 갔다가 어느새 왔다가 하여 마치 고리가 돌아가듯이 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물화(物貨)의 귀천(貴賤)과 무역(貿易)의 수영(輸嬴)이 있다 하더라도 본국(本國)에서는 으레 손실(損失)되는 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근(挽近) 이래로는 왜인들의 은이 들어오는 길이 끊어졌기에 그 대신 광은(鑛銀)을 보내게 되는데, 이 은은 한번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가기만 하면 영구히 돌아오지 않게 되어, 마치 깊은 연못에다 금(金)을 던져버린 것과 같게 되어 좋은 계책일 수 없으니, 이런 이유로 온 나라 안의 은화(銀貨)가 날로 줄어들게 됩니다. 시험삼아 신(臣)의 사행(使行)에 대해 말하더라도 원역(員譯)들의 포은(包銀)3483) 이 태반이나 비게 되었으니, 상화(商貨)가 고갈될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당면한 지금의 계책은 마땅히 바로 북인(北人)들의 은(銀)을 조금 절약하여 해마다의 자재(資財)를 비축해야 하는데, 공용(公用)의 반전(盤纏)3484) 도 감할 수 없고 역원(譯員)의 정액(定額)도 뺄 수가 없으니, 차라리 무역(貿易)하는 물건에 있어서 실용(實用)하게 될 것만 바꾸어 오게 한다면, 오히려 호시(互市)의 본뜻을 잃어버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특히 모자(帽子) 한 가지는 가장 쓸데없이 허비하는 것으로써, 국가의 재정(財政)을 손모(損耗)시켜 빠져나가게 하는 것으로 이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시급히 그 구멍을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개 모자란 것은 경사(經史)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이고 천하에 있지도 않던 것인데 유독 우리 나라에서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남자들은 관(冠) 위에다가 관을 더 쓰는 것이어서 이미 예법의 뜻을 잃게 된 것이고, 부녀들에 있어서는 비녀[筓]도 아니고 건(巾)도 아니어서 진실로 근거가 없는 것으로써, 단지 추위를 막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오직 추위를 막기 위해서라면 어찌 달리 할 것이 없어서 하필이면 멀리 딴 나라에서 구해야 할 것이겠습니까? 중국에서는 쓸 데가 없는 것이기에, 요동(遼東) 상가(商街)의 한 가게에서 털을 모아다가 타조(打造)하여 오로지 우리 나라에다 팔아 가만히 앉아서 막대한 이득을 거두고 있으니, 어찌 중화(中華)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한 해의 모자 값으로 거만(鉅萬)의 재물을 허비하게 됩니다. 셀수 없는 활화(活貨)를 가지고 쓸데없는 취물(毳物)을 무역해다가 겨우 가을과 겨울을 지내고 나면 헤어져 땅에 버리게 되는데, 올해에도 그러하고 내년에도 그러하게 됩니다. 산천(山川)에서 나는 보장(寶藏)은 한이 있는 법이고, 천하의 전모(氈毛)는 무진장한 것인데 장차 어떻게 계속할 수 있게 되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시급히 모자(帽子) 무역을 혁파하고 이어서 온 나라 안에 금령(禁令)을 내리고, 연경(燕京)에 들어가는 포은(包銀)으로 대신 쓸 데 있는 물건인 나(騾)·마(馬)와 포(布)·견(絹) 같은 것들을 무역해 오도록 한다면 거의 이용(利用)과 후생(厚生)의 재료에 도움이 있게 되어, 그날그날 헤아려 보면 부족하게 될지라도 한 해를 통산해 보면 여유가 생기게 될 것으로 여깁니다. 모자 세입(稅入)으로 공용(公用)을 보충하고 있는 것에 있어서는, 조금 변통해 가야 하는 단서가 오직 묘당(廟堂)에서 상확(商確)하여 구획(區畫)해 가기에 달려 있습니다.
여섯째는, 화어(華語)를 익혀야 하는 일을 말하겠습니다. 대저 한인(漢人)들의 말은 곧 중화(中華)의 정음(正音)입니다. 한번 진(晉)나라 시대에 오호(五胡)들이 서로 어지럽힌 이후부터는 방언(方言)이 자주 변하게 되고 자음(字音)도 또한 위작(僞作)이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 유사한 것에 따라 진짜 음(音)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어음(語音)은 가장 중국의 것에 가까웠었는데, 신라와 고려 이래에 이미 번해(翻解)하는 방법이 없었기에 매양 통습(通習)하는 어려움이 걱정거리였습니다. 오직 우리 세종 대왕께서 하늘이 낸 예지(睿智)로 혼자서 신기(神機)를 운용(運用)하여 창조(創造)하신 훈민정음(訓民正音)은 화인(華人)들에게 물어 보더라도 곡진하고 미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무릇 사방의 언어(言語)와 갖가지 구멍에 나오는 소리들을 모두 붓끝으로 그려 낼 수 있게 되는데, 비록 길거리의 아이들이나 항간의 아낙네들이라 하더라도 또한 능히 통하여 알게 될 수 있는 것이니, 개물 성무(開物成務)한 공로는 전대(前代)의 성인들도 밝혀 내지 못한 것을 밝혀 낸 것으로써 천지의 조화(造化)와 서로 가지런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가지고 한음(漢音)을 번해(翻解)해 나가면 칼을 만난 올이 풀이듯 하여, 이로써 자음(字音)을 맞추게 되고 이로써 성률(聲律)도 맞추게 되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대부(四大夫)들은 대부분 화어(華語)를 통달하게 되어, 봉사(奉使)하러 나가거나 영조(迎詔)하게 될 적에 역관(譯官)의 혀를 빌리지 않고도 메아리치듯 주고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임진년3485) 과 계사년3486) 무렵에 이르러서는 걸령(乞靈)하기도 하고 변무(辨誣)하기도 하는 국가의 큰 일들에 있어서 그 힘을 입게 되는 수가 많았으니, 화어를 읽히지 않을 수 없음이 이러합니다.
만근(挽近) 이래로는 한학(漢學)의 강구(講究)가 그만 형식이 되어버려 능히 구두(句讀)를 통하는 사람이 아주 적어졌기 때문에, 사신(使臣)들이 그들과 상대할 적이면 귀가 들리지 않게 되고 입이 다물어지게 되어, 한 마디 말이나 간단한 말에 있어서도 오로지 상서(象胥)들에게 의존하게 되는데, 소위 상서들도 또한 겨우 길거리나 항간의 예사 말만 알게 될 뿐이니, 장차 어떻게 심정과 의지를 통하게 되고 변란(辨難)을 다하게 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다행히도 두 나라가 교호(校好)하므로 사신(使臣)들의 일이 방해될 것이 없지만 혹시라도 주청(奏請)하고 진변(陳辨)해야할 일이 있게 된다면 아마도 책임지워 해 갈 수가 없게 될 듯싶으니 소소한 근심거리가 아닙니다.
몽학(蒙學)에 있어서도 한갓 헛 명칭만을 끼고 있고 전연 강습(講習)을 하지 않습니다. 몽고와 우리 나라가 지금은 비록 함께 통신(通信)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국경 지역이 매우 가까운데 그들의 병마(兵馬)가 가장 거세므로 앞날의 일을 헤아릴 수가 없으니 어찌 소홀히 여기어 살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사역원(司譯院)을 감독하고 신칙하여 모든 어학(語學)의 과정을 엄격하게 하여 방법이 있게 격려하고 권면하도록 하고, 따라서 상벌(賞罰)로 기어코 통숙(通熟)하게 되도록 하고, 조사(朝士)들 중에서 한학(漢學)에 선발된 사람에 있어서도 또한 마땅히 과조(科條)를 거듭 밝히어 전일한 뜻으로 이습(肄習)하게 하여, 전대(專對)해 갈 인재를 양성하도록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아! 천하가 태평한 지 오래입니다. 불행히도 강토(疆土)에 일이 많아져 관개(冠盖)의 왕래가 한창이게 될 적을 만나게 된다면, 국가의 경중(輕重)이 사령(辭令)에 매달리게 될 것입니다. 만일에 이처럼 한가한 참에 있어서 미리 대비해 놓지 않는다면 장차 어떻게 졸급(卒及)할 때에 대응해 갈 것입니까? 전해 오는 말에 ‘의원이 약재를 저축해 놓지 않으면 다급한 병을 다스리게 될 수 없고, 농군(農軍)이 곡종(穀種)에 물을 대주지 않으면 좋은 결실을 거두게 될 수 없는 법이다.’고 하였음은, 물건을 평소에 갖추지 않아서는 안됨을 말한 것입니다. 또, ‘홍수(洪水)에는 수레[車]를 갖추어 놓아야 하고, 가뭄에는 배[舟]를 갖추어 놓아야 한다.’고 하였음은 무릇 일을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안됨을 말한 것인데, 나랏일을 해 가는 방법도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지금 신(臣)이 진달한 말은 모두가 지극히 가까운 주변(周邊)의 알기 쉬운 일이고 당초에 동떨어지게 멀어 시행하기 어려운 법의 것이 아닙니다. 수레의 제도에 있어서는 고 상신(相臣) 김육(金堉)이 일찍이 사신(使臣)들이 교자(轎子) 타는 폐단을 진달하면서, 수레를 타도록 하여 일기(馹騎)의 힘을 펴주도록 청했었던 것입니다. 벽돌을 쓰는 법에 있어서는 고 상신 이항복(李恒福)이 성곽(城郭)의 제도를 한창 칭찬하고 또한 구워내기가 쉬움을 말해 놓은 것이 모두 그의 유집(遺集)에 실려 있으니, 선배들의 식견에 있는 논의에서 대개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나머지의 한두 가지 변통을 해 가는 정책에 있어서도 또한 인정에 거슬리게 되는 것이 아니고 진실로 민생과 국가를 원대하게 경륜(經綸)해 가는 방책이 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번거롭고 외람된 것임을 용서하시며 유의(留意)하여 말끔히 살펴 주시고, 경사(卿士)들에게 물어보시고서 채택하여 시행하게 하신다면, 거의 국가가 넉넉해지게 하고 민생들이 유족(裕足)해지게 하는 방도에 있어서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의 상소를 묘당에 계하(啓下)하며 품처하도록 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수레 제도를 창시하여 시행하는 일에 있어서는, 수레 사용은 진실로 민생과 국가에 관계가 있는 것이니, 각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따로 기교(技巧)가 있는 사람을 가려 놓았다가 절사(節使)가 연경(燕京)에 가게 될 때에 데리고 가도록 하여, 갖가지 수레 제도를 하나하나 모사(摸寫)해다가 그대로 본받아 시생하게 하기 바랍니다. 흙벽돌을 구워내는 일에 있어서는, 벽돌을 굽자는 의논이 그전부터 있었지만 시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군문으로 하여금 연경에서 제도를 가져오되 구워내는 방법을 자세히 탐지해 오도록 하여, 수용(需用)하게 될 수 있게 하기를 바랍니다. 당나귀와 양을 목축(牧畜)하는 일에 있어서는, 먼저 만부(灣府)로 하여금 약간의 당나귀와 양을 무역해 오도록 하여, 당나귀는 한광(閑曠)한 목장에다 방목(放牧)하도록 하고, 염소는 관서(關西)의 각 고을에 나누어 주며 저들에게 키우는 방법을 본받아 널리 번식시키는 방도를 마련해야 합니다. 구리 그릇의 사용을 금지하는 일에 있어서는, 돈 주조(鑄造)에 수용(需用)할 것을 보충하기 위한 것인데, 영구히 사용을 금하게 된다면 소란이 생기게 될 우려가 없지 않으니, 그대로 두기 바랍니다. 모자(帽子) 무역을 금단하는 일에 있어서는, 사행(使行)의 공용(公用)이 오로지 모자의 세수(稅收)에 의존하고 있으니, 대신할 세수를 구획(區劃)하기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상확(商確)하여 처결하기 바랍니다. 화어(華語)를 학습하는 일에 있어서는, 두 나라가 심정을 통해 가기는 오로지 언어(言語)에 달려 있으니, 거듭 사역원(司譯院)의 옛 법제를 엄격하게 하고 삼학(三學)의 강규(講規)도 닦아서 복구하도록 하고, 문신(文臣)을 신칙하여 화어를 익히게 하고, 상서(象胥)에게도 몽학(蒙學)을 익히도록 권과(勸課)하여, 그전처럼 포기(抛棄)하는 일이 없게 하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註 3481]수형(水衡) : 한나라 때 세무(稅務)를 맡은 관직. ☞
[註 3482]원호(元昊) : 서하 사람으로 본명은 이낭소(李曩霄)임. ☞
[註 3483]포은(包銀) : 외국에 가는 사신들에게 비용으로 나라에서 내려 주는 은. ☞
[註 3484]반전(盤纏) : 노자. ☞
[註 3485]임진년 : 1592 선조 25년. ☞
[註 3486]계사년 : 1593 선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