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의 본관은 탐진, 나주에 살았고 자는 연연(淵淵), 호는 금남(錦南)이다. 1454년 최택(崔澤)의 장남으로 태어나 사헌부 감찰, 홍문관 수찬, 홍문관 부교리 등 엘리트 코스를 걸었다. 제주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남중국으로 표류했던 최부와 수하 42명은 온갖 고초를 겪은 후 귀향길에 오른다. 영파(寧波)·소흥(紹興)을 거쳐 운하를 따라 항주(杭州)·소주(蘇州) 등 강남지방을 둘러본 후 양주(揚州)·산동(山東)·천진(天津)을 거쳐 북경(北京)에 도착해 명(明) 효종(孝宗)을 알현했다.
북경에서 다시 요동반도를 거쳐 표류 후 약 6개월 만에 압록강을 건넜다. 조선인으로 중국의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이던 강남지방(江蘇·浙江성)과 산동지방을 여행한 것은 최부가 처음이었다. 금남은 서울에 도착하자 성종의 명을 받아 청파역에 1주일간 머무르면서 그 견문기를 일기체로 써 바쳤다. 이 책이 <표해록>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표해록>이라고 한 것은 아니다. 금남은 처음 견문기를 써 바칠 때 <중조견문기(中朝見聞記)>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러나 이후 간행될 때 제목이 <표해록>으로 바뀐 것이다. <표해록>은 금남의 외손 유희춘(柳希春 ·1513~77)이 처음으로 선조 2년과 6년 두 차례 간행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 이전에도 조정에서 한 차례 활자본으로 간행한 사실이 확인됐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사대부 독서가들의 요구에 의해 몇 차례 간행되었던 것. 이 책에 굳이 <표해록>이라는 제목을 붙인 까닭은 그것이 왕명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풍랑을 만나 바다에 표류한 과정과 상륙해 중국의 내지를 여행한 과정을 포함한다. 이를 분량으로 보면 표류기는 견문기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날 학자들의 관점에 따라 표류기 쪽에 비중을 두어 해양문학으로 취급하기도 하고, 혹은 연행록(燕行錄)으로 분류해 중국 견문기에 포함하기도 한다.
<표해록>이 해양문학이든, 중국 견문기든, 일관되게 보이는 것은 조선의 선비정신이다. 최부는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10여 일 동안 사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잊지 않았다. 예컨대 뱃사람들이 심한 풍랑으로 배가 침몰할 위기에 처하자 최부에게 “당초 궂은 날씨에도 배를 띄운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항의하고 “지금이라도 기도를 하여 하늘의 노여움을 달래야 한다”며 기도할 것을 권한다. 최부는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했다. 유교적 이치에 닿지 않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최부는 중국 해안에서 해적들을 만났을 때 상복 대신 관복으로 갈아 입고 의젓한 자세를 보여주자는 수하들의 요청도 거절한다. 예(禮)에 어긋난다는 이유에서였다.
<중조견문기>에서 <표해록>으로 격하돼
그러면서도 그는 예교(禮敎)의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한 언제나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 최부의 탁월한 리더십으로 일행은 표류 내내 질서를 잃지 않았다. 최부 일행은 식수와 식량이 떨어진 후에는 빗물을 받아 목을 축였고, 술과 귤을 한 쪽씩 나누어 먹는 놀라운 동료애도 발휘했다. 최부는 중국 땅에 상륙해 왜구로 오인받았을 때와 혐의가 풀린 뒤 중국 관원을 대하면서 조선의 관인으로서의 의젓한 언행을 보였다.
중국 고전(古典)에 해박했던 최부는 종종 중국 관인들의 경탄을 이끌어낼 뿐 아니라 때로는 그들을 상대로 논쟁을 벌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일행이 북경에 도착해 황제를 알현할 때 예부(禮部)에서는 최부에게 상복을 벗고 길복(吉服)으로 갈아 입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최부는 자신은 상중이며, 상복을 벗는 일은 효에 어긋나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했다.
최부와 중국의 예부 사이에 효가 먼저니, 충이 먼저니 논쟁을 벌이다 결국 황제 알현시에만 잠시 길복으로 갈아 입는다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일개 조선 선비가 대명(大明)의 예부와 맞서 예를 논한 것이었다. 최부 일행의 중국 여행이 거의 끝날 무렵인 요동 광령역에서의 회합은 꽤 인상적이다.
수하 42명이 최부 앞에 무릎을 꿇고 ‘여기까지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게다가 오히려 중국인들의 대접을 받으며 무사히 온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 겸 기나긴 여정의 평가회 같은 것이었다. 금남은 이 모두가 ‘임금님의 은혜’라고 슬쩍 말을 돌리고 있다. 이 글의 문맥으로 보면 최부의 수하들은 금남의 지도력이 좋은 결과를 낳았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성종조의 선비 최부는 30대 중반, 한창의 나이로 강남지방을 비롯해 여러 지방을 여행하면서 보고 느낀 중국 사회를 비판하고 이를 견문기에 담았다. <표해록>에 나타난 비판적 관찰은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환관의 정치참여에 대한 비판이다. 최부와 일행이 산동성 노교역(魯橋驛)을 지날 때 환관 유(劉) 태감의 행차를 만났는데, 산하를 뒤덮을 만큼 소란을 피우며 미치광이처럼 총포를 난사하는 광경을 목도했다. 창주(滄州)에서는 호송인 부영(傅榮)이 며칠 전 궁중에서 일어난 일을 전해 주었는데, 어느 상서(尙書)와 학사(學士)가 마주서서 이야기한 사실을 문제 삼아 금의위(錦依衛 : 환관 특무기구)에서 조사한다는 것이었다.
명의 황제들은 환관으로 하여금 군주를 대리해 관(官)과 군(軍)을 감시하며 비록 고관이라도 의심가는 일이 있으면 체포·구금·취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부영이 조선의 환관에 대해 묻자 최부는 “우리나라 내관은 단지 궁중의 청소나 심부름에만 종사할 뿐 공적 업무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둘째, 명 왕조의 비(非)유교문화에 대한 비판이다. 일행이 표류 끝에 처음 도착한 절동(浙東)지역은 천태산과 보타산을 비롯해 불교가 번성한 곳이었다. 처음 우두외양(牛頭外洋)으로 상륙해 은사(隱士)로 자칭하는 왕을원(王乙源)을 만났을 때 “조선에도 불교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금남은 “우리나라에는 불법을 숭상하지 않고, 오로지 유술만 숭상해 집집마다 효제충신으로서 업을 삼고 있소” 라고 하였다.
15세기 말 중국은 근대화로 요동치는 혼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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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은 태조 때부터 성리학을 대도(大道)라 하여 치국의 이념으로 삼았다. 그러나 불교와 도교도 개인의 안심입명(安心立命)에 도움을 주는 소도(小道)로 인식해 국가 재정에 피해가 없는 한 굳이 이를 금지하지 않았다.
셋째, 사회적 명분질서의 혼란에 대한 비판이다. 최부가 북경에 이르러 그 문화에 대해 “도교와 불교를 숭상하고 유교를 숭상하지 않으며, 상업만 직업으로 삼고 농업은 직업으로 삼지 않는다. 의복은 짧고 좁아 남녀 모두 제도가 같았으며, 음식은 누린내 나는 것을 먹고 존비(尊卑)가 그릇을 같이했다” 며 사회가 무질서하고 혼란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최부는 여행기 말미에 중국사회의 공통적 특징을 설명하면서 상업을 중시하는 경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흥미있는 지적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상업을 직업으로 삼아 비록 높은 벼슬이나 문벌이 있는 사람도 때로는 저울을 소매 속에 넣었다가 조그만 이익이라도 챙긴다.’
최부가 본 중국은 농(農)과 상(商)의 본말(本末)이 뒤바뀌고, 상하·존비·남녀의 질서가 크게 문란한 나라였던 것이다.
<표해록>은 조선과 중국이 사대부에 대한 인식에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대부는 원래 중국 춘추시대의 사(士: 유교적 교양인)와 대부(大夫: 관인)가 송대(宋代)에 이르러 합쳐져 불려지게 된 것이다. 송대의 사대부는 당(唐) 말 군벌과 타협한 지주층이 그들의 자제를 출사(出仕)시키기 위해 유교를 교육했다. 그들은 사대부라는 새 시대의 역사 주체로 등장하면서 원시유교를 신유학(新儒學)으로 발전시켜 자기철학화했다.
당시 중국인들은 사대부를 ‘천하인의 근심을 먼저 생각하고, 천하인의 즐거움을 뒤에 즐긴다’는 이른바 ‘선우후락(先憂後樂)’으로 설명했다. 그같은 인식의 배경에는 치자(治者)로서의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치철학이 있다. 조선의 성종대에는 점필재 김종직의 학문을 계승한 제자들을 중심으로 사대부의 기풍을 형성했으며, 이는 송대의 경역사풍과 흡사했다. 성종은 지방의 사림이 대거 중앙으로 진출해 정치적 사림파로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 주었다.
최부는 북경의 어느 관리에게 “조선의 국왕이 책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우리 임금님은 하루 네 번 유신(儒臣)을 접견하시며, 학문을 좋아해 즐겨 독서하십니다”라고 대답한다.
실제로 국왕으로서 하루 네 차례 경연(經筵)에 참석하는 예는 중국의 어느 군주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일본 도쿠가와(德川) 시대 <표해록>을 자국어로 번역한 기요타 기미카네(淸田君錦)는 이 대목을 평하기를 ‘최부가 당토(唐土)에서는 무슨 거짓말이라도 할 수 있다. (국왕이) 하루 네 번씩 유신을 대한다는 것은 거짓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새빨간 거짓이라고 비웃었다. 일본과 같이 무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던 셈이다.
선비정신에만 집착해 해상로와 주변국 외면
사대부의 정치이념은 <논어>의 정명(正名)사상에서 비롯한다. 공자는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君君臣臣),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父父子子)” 하여 명(名)과 실(實)을 바로 하는 정명이 정치의 요체임을 말하였다. 그런데 그들 상하관계를 이루는 군과 신, 부와 자라는 이름(名)들 사이에도 서로 지켜야 할 도리(分)가 있으니, 이것이 명분(名分)이다. 이러한 유교의 명분주의는 대외적으로는 화이(華夷)적 세계관을 중시하며, 내부적으로는 사·농·공·상이라는 사회적 계층간 윤리를 강조한다. 따라서 유교적 명분사상은 원리적 면에서는 조선과 중국의 경우가 다를 수 없으나, 현실사회에서는 양자(兩者) 사이에 인식과 이해의 차이가 있게 마련이었다.
‘조선의 선비’란 신사(紳士) 혹은 향신(鄕臣)이라고 불리는 명·청(明淸)시대의 사대부와 차이가 있다. 조선의 사림(士林) 혹은 산당(山黨)은 때로는 왕권을 초월할 기개가 비치나 중국의 향신층 내지 신사층은 황제권에의 종속적 속성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 같은 양자의 차이를 최부의 <표해록>을 통해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표해록>은 조선의 선비 최부의 눈을 통해 본 15세기 말엽의 중국사회의 실상이다. 그가 관찰한 중국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전통적 사민(四民)질서, 즉 사·농·공·상의 서열에서 사(士)와 상(商)의 위치가 뒤바뀌고 있다는 비판은 당시 중국이 근대화로 접근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최부는 황해를 표류하는 과정을 아주 생생하게 문학적으로 표현하면서도 바다를 통한 해외 진출에 대한 관심을 한번도 표명하지 않았다. 사실 그가 표류한 길은 황해사단(斜斷)항로로, 계절풍이 불고 해류가 흘러 신석기시대부터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특히 당·송(唐宋)시대에는 한·중 교류의 주요 항로로서 재당(在唐) 신라인의 활동무대였다.
어떤 학자는 ‘당시의 한반도는 ‘동아지중해’의 중요한 위치에서 그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던 시대’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최부가 표착한 절동(浙東)지방에는 신라와 고려의 사신과 상인, 그리고 승려들의 족적이 지금도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항주에는 의천 대각국사와 관련 있는 고려사(高麗寺)가 있고, 고소성(姑蘇城)의 창문 밖에는 사신들이 머물렀던 고려정(高麗亭)이 있다. 최부는 항주에 고려사가 있다는 말을 듣자 “그것은 고려인이 세운 것이요, 지금 우리 조선은 이단을 물리치고 유도를 존숭해 사람마다 효제충신으로서 직분을 삼고 있소”라고 말하며 고려조의 불교 숭상을 애써 외면했다.
<표해록>에서는 일본과 유구에 대한 관심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최부 일행이 산동의 어느 역을 지날 때 그곳 뱃사람들로부터 ‘오야지(烏也機)’라는 말을 들었다. 그 뜻을 물었더니 그들이 일본 사신들을 실어다준 경험이 있어 최부를 일본인으로 알고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조공사신은 영파항(寧波港)으로 들어와 운하를 따라 북경으로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다시 해로로 귀국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와 달리 조선은 지정된 요동의 육로만 출입하도록 해 바닷길이 막혀 있었다. 신라와 고려시대에 활발하던 한·중 간의 내왕이 단절되어 버린 것이다. 이는 14세기 후기, 명 제국의 건국과 함께 해금(海禁)정책을 실시해 동아시아 세계가 쇄국적 분위기로 접어들면서 취해진 현상이었다. 그러나 섬나라 일본은 명과의 교섭을 위해 해로를 통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해상 진출에 관심이 높았다.
18세기의 일본에서 <표해록>이 번역 간행된 것도 이러한 관심의 산물이었다. 최부가 절동 연해에 표착하면서부터 왜구에 대한 해안 방어체제가 삼엄하였으나 그러한 사실을 전하는 것 외에는 일본에 대한 별다른 관심을 갖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그가 보름 가까이 풍랑과의 싸움을 마치고 난후 한 마디 남긴 말이 있다. 그것은 앞으로 공무로 연해지역에 파견되는 사람이 혹시 표류할 것에 대비해 조정에서 호패(號牌)와 석패(錫牌)를 발급해야 할 것이라는 대비책 정도였다. 우리 역사에서 황해를 무대로 동아시아 해상세력을 장악했던 장보고 선단의 눈부신 활동에 대해서도 애석하게 한마디 언급이 없다.
최부는 <표해록>을 통해 조선 선비의 투철한 예교 사상을 십분 표출했다. 특히, 그는 중국 관인(官人)과의 대화에서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와 긍지를 피력하면서 고구려의 강성을 자주 언급했다. 어느 관인이 “고구려는 무슨 장기(長技)가 있어서 수(隋)·당(唐)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는가” 하고 질문하자, 최부는 “지모 있는 신하와 용맹 있는 장수가 군사를 부리는 데 방법이 있었으며, 병졸은 모두 윗사람을 친애해 그들을 위해 죽었소. 그런 까닭으로 고구려는 한 작은 나라로서도 오히려 100만 군사를 두 번이나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문관과 무장들은 수하 장졸들을 헌신적으로 거느리고, 병사들은 상관을 믿고 따르는 신의와 명분 윤리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라는 설명이었다.
강한 고구려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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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리 검소함을 미덕으로 삼는 선비라도 현실생활에서의 빈한(貧寒)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 최부도 중국, 특히 강남사회의 풍요한 물질생활과 상업을 중시하는 사대부의 양태를 비판적 시각으로 보았으나 막상 압록강을 건너 의주성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는 실망을 금치 못하고 있다.
‘밤 삼경에 달려 의주성에 들어가니 성의 제도는 협소하고 퇴잔했으며, 성 안의 동리도 영락하였으니 실로 한탄스러운 일’이라며 탄식했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의 외침을 겪으면서 크게 위축되었다. 후기에 들어 이제까지 바다를 멀리하고 상업을 천시한 역사의 잘못을 뉘우친 실학자들이 상업의 진흥과 해외무역 육성론을 제기했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의 무역 육성론은 <허생전>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불후의 명작 <표해록>을 남긴 최부는 연산군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최부는 조선조 사림의 종장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다. 점필재 문하의 동문으로 손꼽을 수 있는 이는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이다. 조선조 사림의 기초를 닦은 쟁쟁한 학자들이다.
김굉필은 도학정치가 조광조를 배출했으며, 김일손은 사관으로서 스승의 ‘조의제문(弔義祭文)’을 사초(史草)에 올렸다 훈구파의 모함으로 사화의 빌미가 되었다. 이들은 선비로서 당당한 기상을 보였지만 연산군의 폭정에 모두 희생당했다. 최부는 형장에서 연산군이 보낸 관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마디의 말도 없이 담담히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은 금남의 인물됨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최부는 공명 정직하고 경사(經史)에 널리 통했으며, 문사(文詞)에도 능했다. 간관이 되어서는 아는 것은 말하지 아니하는 것이 없었으며, 회피하는 일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