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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년, 그 행복의 금자탑 권오웅 나는 49년 동안이나 근육병으로 인해 점점 힘을 잃어가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았다. 열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말 못하시는 아버지와 함께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자라면서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했었고, 중학교에 들어갔으나 학교가 수몰되는 바람에 더 이상의 진학은 포기해야만 했었다. 그 무렵 내 건강에도 근육병이라는 적신호가 내려졌고, 나는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가출을 했었다. 그리고 식당일이며 가구점, 제과점, 신문팔이, 버스계수원 등 숱한 고난을 겪으며 3년 동안이나 이 도시 저 도시를 헤매며 불안정한 밑바닥 생활을 한 끝에 죽지도 못하고 열여덟 나이로 다시 귀향을 했었다. 제법 진행된 근육병으로 인하여 힘든 일은 무리였으나 그래도 웬만한 농사일은 거들 수 있었기에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쓰러져가는 가정을 살려보겠다고 안간힘을 썼었다. 그때 형님께서는 잘 걷지도 못할 만큼 근육병이 진행되어 있었고, 열세살짜리 여동생은 겨우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었으니 청각장애인인 아버지와 함께 온통 장애가정 속에서 수시로 닥치는 생활고의 어려움을 해결해 나가야만 했었다. 얼마 안 되는 토지로 고추, 참깨, 콩, 약초 등 여러 가지 농작물을 심어 가꾸며, 봄가을로는 누에도 치고 남의 산을 개간하여 사과나무를 심으며 미래를 설계했었다. 힘에 겨웠던 그 과정을 풀어 쓰라면 한 권의 책으로도 엮을 수 있겠지만, 남모르게 울었던 눈물만큼은 아직은 좀더 숨겨둬야겠다.
그렇게 5년 정도를 쉴 새 없이 농사를 지으며 틈틈이 새농민지를 구독하여 농사지식도 익히고 독자투고란에 글도 보내다가 1982년도에는 그해 잘된 참깨농사를 글감으로 “참깨가 쏟아지는 땅”이란 영농수기를 썼었는데, 정말 부처님이 도왔을까? 지성이면 감천일까? 그 글로 하여금 나를 찾아 온 지금의 아내와 큰 어려움 없이 결혼을 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우리 집에는 봄기운이 감돌았고 하는 일마다 안되는 게 없었다. 내게 짐 지워진 근육병은 알게 모르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해가 갈수록 딸을 낳고, 아들도 낳고, 아내의 일손을 보탠 만큼 농사수입도 늘었기에 면소재지에다 가게도 차리고 집도 사서 이사를 했는데, 아버지는 물론 거동이 매우 불편해진 형님까지 함께 모시며 살 수 있게 되었다.
그 미약하던 희망의 빛을 쫓아 살아온 보람으로 어엿한 가정을 이루고 나니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라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래서 1991년도에는 진행된 근육병으로 지체장애 2급이 되었지만, 앞날을 위해 경북장애인 복지관에 입소하여 1년 동안 컴퓨터 전산교육을 받았었다. 거기에서 열심히 노력한 덕분일까 지방장애인기능경기대회에 참여할 때마다 입상의 영광을 차지하여 1993년도에는 마침내 전국장애인기능경기대회 컴퓨터프로그래밍 부분에서 최고상인 금상을 받고야 말았다. 그렇지만 그해에는 아내의 교통사고로 인하여 10개월 동안이나 입원한 아내를 간호해야 하는 심신의 고통도 곁들여야 했었다. 지체2급의 장애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나는 그해에 곰두리 문학상 공모에도 “미미의 봄”이라는 동화를 써 보내서 당선되는 기쁨을 덤으로 얻었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아들을 돌보며, 병원에서 살다시피 아내의 병간호를 하면서도 이루어낸 93년의 나의 업적은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나가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어떻게 그렇게 다 해낼 수 있었는지를….
하루도 쉬지 않고 진행되는 근육병을 생각하면 금세 무너져버릴 것 같은 위태로움이 항상 내 곁에 도사리고 있었지만, 나의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양 다행히 아내는 퇴원하여 다시 가정을 돌볼 수 있었고, 십년이상 함께 살아온 중증장애인이 된 형님께서도 동병상련의 장애인 형수님을 만나 결혼하고 분가하여 아버지까지 모셔가셨으니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랄까 이제는 정말 한시름 놓고 행복하게 살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새로 신혼살림을 사는 기분으로 컴퓨터게임 업으로 가게를 정비하고 주변의 시골 어린이들에게 컴퓨터 교육을 실시했으며, 그렇게 살아온 내 생활을 1995년도에는 샘터사에서 공모하는 올해의 인간승리상에 “지금은 봄날”이라는 수기를 써서 본상을 수상하기도 했었다. 그로인하여 TV에도 나오게 되었고, 믿던 구인사에 가서 생전 처음으로 그 많은 젊은 불자들 앞에서 살아온 이야기도 했었으며, 이곳 초등학교에 방과 후 컴퓨터 특별교육 과외강사로 1년 반쯤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었다.
그럴 즈음 나는 손수 익힌 한글워드 편집으로 인류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금춘가족지를 발행하였는데, 격월간으로 꾸준히 발행하며 작은 모임도 가졌었고, 년례행사로 금춘가족 만남의 날도 제정하여 매년 봄에 그 행사를 치르고 있으며, 지금껏 330여명의 회원을 확보하여 다음카페에도 금춘가족을 개설하여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사이 솟대문학에서 3회 시 추천을 받았고, 청민문학상도 몇 차례 수상했으며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에서도 수기글로 하여금 우수상을 받기도 했었다. 그렇게 모아진 글들을 1998년도에는 지금은 봄날이라는 글모음 집으로 출간하기도 했었다.
몸은 비록 부실하지만 늘 바른길로 살수 있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기도하면서 흐트러지지 않고 살아온 결과일까? 딸도 아들도 건강하게 잘 자라서 중 고등학교를 나오고 전문대를 다니며 제 할일을 알아서 잘 하더니 아들은 현역 군인으로 2년간 군복무를 잘하고 늠름하게 돌아와 올봄에는 새로 복학하여 학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딸내미도 졸업한 후에 취업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쉬지 않고 몇몇 회사를 거치며 일하다가 지난해에는 꽤 좋은 회사에 입사를 하였는데, 그 회사에서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 불과 3개월 만에 뜻하지 않은 결혼식을 올려주게 되었다.
장애인 부모로서 듬직한 사위가 나타나 딸내미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며 넙죽 절을 해대는 데는 정말 반대할 겨를도 없었다. 여태까지 속 썩이지 않고 착하게 살아온 딸내미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믿어 의심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믿는 부처님의 뜻이거나 하늘이 정해준 인연일 것 같았기에 못이긴 체 그들이 하자는 데로 상견례 예를 갖추었고, 예물 예단을 적절하게 준비하여 보낸 뒤에 이바지 정성을 주고받았다.
그런 후에 거행된 딸내미의 결혼식 날. 2008년 1월 6일. 그날의 날씨는 장애인인 나를 배려해서였을까? 겨울 중 가장 춥다는 소한이었음에도 봄날처럼 참 따스했다. 혼주로서 만반의 준비를 완료하고 예식장으로 가니 찾아오는 손님들이 한결같이 축하해 주며 딸을 예쁘게 잘 키웠다고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만감이 교차하는 그 들뜬 분위기로 하객들을 맞이하고 예식이 거행될 때 웨딩드레스를 화려하게 차려입은 딸내미의 손을 잡고 신부입장에 발맞추어 함께 걷는 순간 아내가 처음 내게 찾아와 함께 살겠다고 삶의 보따리를 풀어 놓던 날이 얼핏 떠올랐다.
지독히도 오랜 가난과 장애에 찌든 우리의 생활환경을 파악하고서도 그대로 살겠다고 마음뿌리를 박아 미처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함께 꽃잠을 잔 그날로부터 허니문베이비로 태어난 딸내미가 아니었던가! 그 25년이 엊그제 같은데, 낱낱이 더듬어 보면 그 세월이 그대로 딸내미의 성장 속에 묻어 있었던 것을….
지금껏 자신이 처한 환경에 잘 적응하며 살아온 딸내미의 기본 행실이 얼마나 예뻤으면 주변에서 하는 말로, “이집 딸을 누가 데려갈지 몰라도 그 사람은 복 터졌다.”고 했을까? 아버지인 내 외형적 신체장애와 비교하여 상대적 건강성을 강조하기도 하고, 진실한 사교성으로 붙임성 있는 품성에 점수를 더 딴 것도 있겠지마는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감 하나는 참으로 강하다는 걸 아버지인 나도 인정하는 바이니 내 딸이라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딸로서 어디로 시집간들 현모양처가 될 것임에는 틀림이 없을게다.
그런 온갖 생각들이 겹쳐지는 예식장에서 예식이 거행되는 동안 여러 절차를 따르느라 사실 나는 감회가 새로울 겨를도 없었다. 그렇지만 사회자가 주문한 ‘신부측 혼주를 눈물 흘리게 하라’는 즉석 이벤트가 실시되었는데, 그때 딸내미가 나서서 “엄마 아빠, 이렇게 저를 예쁘게 낳아주시고 바르게 길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행복하게 살면서 그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겠습니다.” 라고 말했을 때 나는 참으로 대견스런 딸내미로 여기면서 마음속 깊이 숨겨 놓았던 감동의 눈물을 울컥 쏟아내고야 말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많은 하객들도 웅성거리며 진정한 축하의 덕담과 나를 향한 부러움의 표현까지 아끼지 않았었다. “저 사람은 인생을 참으로 잘 살았네. 장애인으로서 장하기도 하고….” “어쩜 지금 죽어도 원도 한도 없겠네.” 그랬다. 그렇게 집안의 큰 경사였던 딸내미를 시집보내기까지 나는 48년을 근육병과 맞물려 살아왔다. 내게 주어지는 그 어려운 현실을 거부하지 않고 당당히 받아들이며 열심히 살아온 지난날들…. 그 고난들이 어느 흰 구름에 묻혀 사라지고 행복한 여운만이 내 주변에 머물고 있다. “이 사람아, 자네는 어예 그클 좋은 사위를 얻었는고?” “듬직한 게 너무 좋더라.” 연일 기분 좋은 인사만 듣다가 보니 파릇파릇 새봄이 움터오는 줄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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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햇살아우님의 49년, 그 행복의 금자탑이 고스란히 담겨있네요. 어찌 지나온 삶들이 이글 한장에 다 표현할수 있겠습니까 마는 정말 진솔하게 써 주신 이 글을 읽으면서. 가슴이 찡해옴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예 신랑이 듬직하고 믿음이 가서 좋아서요. 지인들이 칭찬할만해요. 이게 다 선예 복이고 아빠 엄마의복이죠. 행복한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리며 즐거운 하루 되세요.^*^
고맙습니다. 이슬누님. 짧은 글 속에 함축된 나의 이야기에 감동 먹었다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그저 닥치는 현실을 열심히 살아왔을 뿐인데요.
몸도 맘도 건강한 제가 숙연해집니다... 글제목과 넘 잘 어릴리는 글인것 같아요.. 파릇파릇 봄 날 만이 님의 가정을 장식할것 같습니다..감사합니다.좋은글 읽게 해주셔서.......
어우동님 맘도 맑은하늘처럼 남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묘약이 있는것 같아요. 옥이할매랑 친구되어 있기에 님을 만나뵐 날도 손꼽아 기다려 집니다. 고맙고요, 이참에 님의 아름다운 이야기도 술술 풀려나오기를 유도하고 싶습니다.^^
그렇군요. 49년의 삶을 일목요연하게 서술하고 있군요. 정말 고생도 많이 하셨지만 고난을 딛고 꿋꿋히 일어선 금춘햇살님께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덧붙여서 금춘햇살님의 삶에는 글이란 것이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군요. 결혼도 수기라는 글에서 시작되었고 지금의 금춘가족도 따지고 보면 글쓰기에서 첫걸음이 시작된 거 아닙니까. 이제 따님도 결혼시키고 좋은 일만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한번 큰 박수를 보냅니다.
예, 김선생님의 뜨거운 박수에 다시 가슴이 벅차오르네요. 김선생님 말씀처럼 제 삶은 글과의 인연으로 행복을 찾을수 있었어요. 새농민 책으로 하여금 시작된 글쓰기가 지금의 나를 있게한 시초였지요. 그재미가 이어져 지금 카페에서 대하는 대답이 돌아오는 글들도 아주 행복한 글쓰기 작업입니다. 아마도 이런 글쓰기의 작업들이 문장력을 길러서 내 삶 자체를 빛나게 하는지도 몰라요. 아무튼 고맙습니다.
"남모르게 울었던 눈물만큼은 아직은 좀더 숨겨둬야겠다."결혼식도 올리기도 전에 꽃잠을 잔 덕에 생긴 딸래미자랑에 남모르게 흘럿던 눈물에 축복을 받은 친구야?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48년을 살아온 친구야?거창한 행복보다 작은 햇살에도 감사하고 행복해 할줄 아는 친구야? 너로 인해 나는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엇고 나에게도 동창자랑을 할 수가 잇어서 감사하다. 근육병에 지지 않고 꿋굿히 힘을 다해 살아가는 너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언제나 함게 하시길 옥이는 기도한다.
나도 옥이를 다시 만나게 된걸 자랑하며 다녔는데, 내 모습으로 하여금 또다른 슬픔을 보게될까봐 노심초사 걱정도 많이 했는데, 근육병 감추지 않고도 너와 나란히 어린시절을 함께 공부했다는 그리고 지금 새로운 우정으로 지란지교 같은 친구가 되어간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고맙다. 옥아.^ㅎ^
그라고 인간아? 너 숙표씨보고 사위자랑 한다고 신나 잇다고 하드만 니는 딸래미자랑이 늘었졌구나? ㅎㅎㅎ딸래미 자랑하면 상주나? 나도 딸래미자랑 좀 해보까? ㅎㅎㅎ딸래미없는 사람들께 미안합니다~
자랑 해보소 나는 아들이 각 도에 99명 씩 있고 또 각 시에 딸래미들이 50명 씩 있는데 그걸 다 우에 자랑합니까 ~아직 얼굴도 모르는 자식들이 여기저기서 연락 오는데~~아~~미치갔네 ㅎㅎㅎㅎㅎ
그래, 이고은이 딸내미 자랑 좀 많이 해라..옥아... 이번에 딸내미 자랑하니까 상 주더구만...ㅎㅎㅎ. 너도 딸내미 자랑하면 누군가가 상 줄끼다.
이제는 남모르게 울지말고 삶의 충만함에 뜨거운 눈물 많이 흘리길 ~~지금의 자네 모습 그대로 라면 그런날들이 많이 있겠지~ 그 감격 또 주위사람에게 많이 전염시키고 말야~~자네를 알고 있는 내가 자랑스럽네~고마워~
고맙소...경남형... 껍데기만 벗겨내면 나랑 가장 닮은꼴의 마음의 소유자이시기에 내 글에서 감격했다면 그 행복이 곧 경남형한테 전염될 것이요. 예방 백신은 안 맞아도 좋을 것이니, 그 행복한 어떤 일에라도 부딪혀 보시요. 나도 형같은 사람을 알고 있다는게 무척 든든합니다.
고향이 그리워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금춘가족 카페를 알게되어 그때부터 주기적으로 들어온다.이 카페는 참 진실하고 소박하게 사는 우리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화려하지 않고 과장되지 않아서 좋다.항상 이 카페에 들어오면서 많은 스트레스와 들뜬 기분에서 정숙하며 제 자신의 마음을 제자리로 돌려보낸다.
고맙습니다. 파이넥님. 고향의 후배라지만 어린시절을 자라난 도목산천을 물속에 잠그고 타향객지로 다니시며 열심히 공부하여 지금쯤 잘 살것만 같은 예감으로 반기고 있었는데, 우리 카페를 좋게 평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곳에 님의 행복한 삶도 펼치시어 함께 공유해 봅시다. 형인 경탁이 소식도 종종 들려주시고요.
49년, 그 행복의 금자탑 잘 읽어보았습니다. 49년간의 님의 인생사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감동...그 자체입니다. 고난, 역경을 이겨내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신 님에게 저의 행복한 미소를 전합니다. 신입회원이 전합니다. 남을 칭찬한다는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우리회워님들! 남을 칭찬하는데 인색하지 맙시다.
무엇하나 내세울 것 없는 삶이었지만 그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글로 표현한 지난날들... 기득권층의 유리한 정치로 가난의 대물림이 되어버린 대한민국의 정치현실을 보면서 아직도 완전한 민주화는 멀고 먼 길임을 느낍니다. 그 속에서 견디며 살아나온 삶의 흔적들이 요즘에는 보람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부를 단념하고 행복을 앞장세운 제 삶의 철학이 맞아 떨어진 것이라 여깁니다. 푸른나무님께서 지나치면 별것도 아닌 제 삶의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습니다. 칭찬의 묘약을 진작에 금춘지에도 썼었지만, 칭찬은 그 어떤 교육보다 효과가 좋은 훈육방법인거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49년" 그행복의금자탐 잘 읽고 살짝감동받아서 눈시울도 적시었습니다 알고 지낸지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데 그런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섯기에 행복이 찿아오는게 아니겠어요 앞으로 살아가는동안 행복한 날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정말 잘 읽었어요 형님 한번 찿아 뵐게요 ^&^*
재극이를 처음 만난 것도 아마 십년은 되었을 것 같은데, 첫인상이 무지 좋았지만 나이차라든가 주어진 환경때문에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후포횟집에 함께갈 기회가 있어 더욱 선명히 기억이 되지. 그리고 동악골 원조횟집과 국제정비공장에 근무할 때 만났었고, 아무튼 남자지만 재극이의 미소에는 깜박 빠져든다니까... 7월쯤에나 덕왕사 스님께서 연꽃보러 오라하니까 함께 만날수 있는 날을 잡아보자고... 내 삶의 글 읽어주어 고맙고...
아..!!!찡하게 가슴저미는 글이군요 난 왜 이리 눈물이 많은지 주책맞게 또 난다..휼륭히 자식 농사 잘지으셨어요 감사드리고 사모님께 또 감사드려요 천사가 항상 옆에서 지켜 돌봐준 덕이라 믿어요 앞으로도 더 많은 행운이 깃들것 같네요 오웅씨...화이팅~~~^^*~~
이쁜 천사님도 답글을 주셨네요. 그것도 모르고 지내다가 다음검색에서 들어와 보니... 아무튼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