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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의성향토사연구회
 
 
 
 
 
카페 게시글
♬♬좋 은 글 방 목면, 조선 경제의 혁명이 되다.
김기문 추천 0 조회 38 11.09.14 15:38 댓글 12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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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9.14 16:18

    첫댓글 이 글을 읽으니 의성읍에서 금성면 조문국 경덕왕릉으로 가는 28번 국도 변에 목화재배기념비가 생각납니다. 의성군 금성면 제오리 일원이 목면시배지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제오리 마을에가면 마을주민은 몇 번지 일원이라고 말씀을 해주실 것입니다. 경남 산청군에는 면작시배지로 목화관련 박물관도 건립하였습니다.

  • 11.09.15 10:11

    목화가 문익점이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것이 최초가 아니라는 기록 및 고고학적 발굴이 있었습니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후한서 동이열전
    馬韓人知田蠶 作緜布

    삼국지 위서동이전
    馬韓在西 其民土著種植 知蠶桑 作綿布

  • 11.09.15 10:12

    능산리 절터에서 면직물은 567년 백제 창왕 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어 문익점이 중국에서 들여온 목화보다 무려 800년을 앞선 국내 최고(最古)의 면직물 - 2010년7월15일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기사

  • 11.09.15 10:17

    관련기록은 남당유고를 살펴보면서 국내에 현존하는 사서에도 여러곳에서 그 흔적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남당유고에는 기림이사금 원년(A.D.364)에 면(綿)에 관한 기사가 있고, 명심보감(明心寶鑑) 염의편(廉義篇), 동사강목(東史綱目) 및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는 유례이사금 말년 기사에 나온다.

  • 11.09.15 10:18

    명심보감(明心寶鑑)은 고려시대 문신인 추적(秋適)이 1305년에 중국의 고전에서 선현들의 금언(金言)과 명구(名句)를 편집하여 만든 책
    동사강목(東史綱目)은 조선 정조2년(1778년) 안정복이 저술한 사서로, 단군조선부터 고려 공양왕까지의 역사를 기록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는 원래는 1458년(세조 4)에 착수한 동국통감 편찬사업의 일환으로 시작한 것이다. 세조는 동국통감 편찬에 대단한 열성을 보여 동국통감청을 설치하고, 궁중비장의 책들도 내주어 삼국사기와 동국사략(東國史略)의 부족한 기록을 보충하게 했으며, 자신이 직접 검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은 세조가 죽을 때까지 완성되지 못했고,

  • 11.09.15 10:19

    예종도 일찍 죽어 완결을 보지 못했다. 1474년(성종 5) 신숙주의 건의로 다시 시작했으나, 다음해 신숙주도 사망하여 노사신, 서거정 등의 주도로 1476년(성종 7) 12월에야 삼국시대 부분을 완성하여 삼국사절요라는 이름으로 찬진했다. 편찬 담당자는 노사신, 서거정, 이파, 김계창, 최숙정이다.

  • 11.09.15 13:17

    정성일님 자료를 찾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댓글을 달지 않으셔도 삼국지 위지(위서) 동이전은 제가 대학1학년 때 번역을 한 책입니다. 그외 명심보감, 동사강목 등의 책의 개요는 검색엔진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을 너무 장황하게 다신 것 같습니다. 제가 문화재연구원에 근무하면서 고고학 자료는 정성일님보다 더 많이, 더 빠르게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 11.09.15 13:19

    정성일님께 한 가지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발굴 자료를 갖고 고고학에서 얘기하는 것이 목화가 중국에서 들어온 것인지 외국에서 들어온 것인지 어떤 경로를 갖고 들어온 것인지 얘기할 수 있으십니까? 남의 얘기를 옮겨와서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남들보다 자료를 조금 더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뽐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 11.09.15 13:22

    남이 이렇게 얘기하는데 내가 찾아보고 공부해 본 결과 이것이 아니고 저것이더라 라고 얘기를 하는 것이 연구를 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목화에 관련된 글을 읽고 금성면에 있는 면작기념비가 생각이 나서 댓글을 단 것입니다. 제가 중국에서 문익점선생이 최초로 목화를 가져와 심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정성일님은 조금 과민반응을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의욕이 앞서기에 그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11.09.16 08:47

    조문국 사적지 내에 있는 면작기념비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친일 지주에게 돈을 거둬 세운 일종 수탈비로 보고 있습니다. 목화씨가 언제 들어왔는가 하는 문제는 학계에서 어떻게 정리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정보를 접하게 되어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습니다.

  • 11.09.16 09:07

    회장님의 말씀과 같은 의견을 2002년도에 전 의성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이신 故 이선생님께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세계2차대전 말 무렵 비행기의 연료를 뽑기위해 목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의성문화지에도 이선생님의 글이 실린 것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고고학계에서 목화의 전래에 대해서는 정설로 잡힌 것은 아직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발굴조사가 많아질수록 새로운 유물과 유구가 나오므로 기존의 학설이 뒤집혀지는 경우가 많아서 명확하게 이렇다고 정의를 내리기 어렵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 11.09.16 15:28

    조금전에 의성군청으로 전화하여 정성일님과 한참동안 대화를 하였습니다. 대화 후 정성일님이 왜 목화에 관한 댓글을 달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남당유고>> 번역이라는 힘든 작업을 하시던 중 목화와 관련된 기사가 나오고, 목화와 관련된 고문서를 찾다가 제 댓글을 읽어보고 댓글을 달게된 것 같습니다. 조문국에 관한 좋은 자료가 있으면 서로 연락하고 공유하기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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