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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면, 조선 경제의 혁명이 되다. |
고려 말 조선 초기, 산업혁명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국부 증진과 백성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엇일까? 목면(木綿)의 도입이 가져 온 의류 혁명이 그 대표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말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비밀리에 가져온 목면은 조선 초기 대표적인 산업이 되었다. 조선전기의 학자 조신(曺伸)1)이 기록한 『소문쇄록(謏聞瑣錄)』에는 목면이 도입된 정황과 이것이 산업화된 과정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소문쇄록』은 6천여 자로 된 단편 수필집으로,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의 주요 일화들을 담고 있다.
목면(木綿)은 민광(閩廣 지금의 복건성 광동성 일대)과 교지(交趾 지금의 베트남) 등지에서 나는데, 그 크기가 술잔 만하다. 그곳 사람들이 그것으로 천을 만드는데, 길패(吉貝)라고 부른다. 송강(松江) 사람이 오니경(烏泥涇)에서 심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씨아[踏車]와 솜타는 활[推弓] 따위의 연장이 없었으므로 손으로 씨를 뽑고 활줄을 상 사이에 설치해 놓고 그것으로 타서 솜을 뽑았는데, 그 공이 심히 고생스러웠다. 원 나라 초에 황도파(黃道婆)라는 노파가 애주(崖州)에서 와서 솜을 틀고 무명을 짜는 연장을 가지고 깁[紗]을 섞어서 배색(配色)을 하여 짜기도 하고, 가로 세로 무늬를 놓기까지 하는데, 각각 방법이 있었다. 짜서 옷과 이불ㆍ띠ㆍ수건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그 방법을 다 배우자 서로 다투어 만들어서 다른 고을에 팔았다. 노파가 죽자 사람들이 다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함께 장사지내고 또 사당을 지어 제사하였다. 지금 북경(北京)ㆍ요양(遼陽) 등지에서 남녀가 일상 입는 옷이 모두 이 무명이다. 1) 조신 : 생몰년 미상, 성종 및 연산군 때의 역관. 자는 숙분, 호는 적암. 문장이 뛰어나고 시를 잘 지었으며, 특히 어학에 능하여 외국의 사절들을 따라 중국 및 일본에 여러 차례 왕래하였다. 『소문쇄록』에는 1479년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던 기사와 성종 때 중국에 표류되었던 최부의 표류 일기에 관한 내용과 일본 및 대마도의 풍속, 지리 등에 관한 내용도 소개되어 있어서 역사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위의 글에서 문익점이 처음 목면을 우리나라에 전래해 온 경위와 빠른 시간에 목면이 널리 퍼진 상황, 목면이 화폐 기능을 하게 된 것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에도 목면을 쌓아 부를 축적하였다가 화를 당한 재상과 상인의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
전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 문익점(文益漸)이 졸(卒)하였다. 익점(益漸)은 진주(晉州) 강성현(江城縣) 사람이다. 아버지 문숙선(文淑宣)은 과거(科擧)에 올랐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익점은 가업(家業)을 계승하여 글을 읽어 공민왕 경자년에 과거에 올라 김해부 사록(金海府司錄)에 임명되었으며, 계묘년에 순유 박사(諄諭博士)로써 좌정언(左正言)에 승진되었다. 계품사(計稟使)인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元)나라 조정에 갔다가,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에 길가의 목면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 갑진년에 진주에 도착하여 그 씨 반으로써 본고을 사람 전객 영(典客令)으로 치사(致仕)한 정천익(鄭天益)에게 이를 심어 기르게 하였더니, 다만 한 개만이 살게 되었다. 천익이 가을이 되어 씨를 따니 백여 개나 되었다. 해마다 더 심어서 정미년 봄에 이르러서는 그 종자를 나누어 향리에 주면서 권장하여 심어 기르게 하였는데, 익점 자신이 심은 것은 모두 꽃이 피지 아니하였다. 중국의 중 홍원(弘願)이 천익의 집에 이르러 목면을 보고는 너무 기뻐 울면서 말하였다. “오늘날 다시 본토(本土)의 물건을 볼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천익은 그를 머물게 하여 며칠 동안을 대접한 후에 이내 실 뽑고 베 짜는 기술을 물으니, 홍원이 그 상세한 것을 자세히 말하여 주고 또 기구까지 만들어 주었다. 천익이 그 집 여종에게 가르쳐서 베를 짜서 1필을 만드니, 이웃 마을에서 전하여 서로 배워 알아서 한 고을에 보급되고, 10년이 되지 않아서 또 한 나라에 보급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니 홍무(洪武) 을묘년에 익점을 불러 전의 주부(典儀注簿)로 삼았는데, 벼슬이 여러 번 승진되어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가 졸(卒)하니, 나이 70세였다.
이외에 『세종실록』에서도 “문익점의 공은 만세토록 백성의 이(利)를 일으켰으니, 그 혜택을 생민(生民)에게 입힘이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그의 사우(祠宇)를 세워야 한다는 기록이 보이고, 『정조실록』에서도 문익점의 서원에 사액을 하라는 기록이 보여, 문익점을 존숭하는 분위기가 조선시대 내내 지속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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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을 읽으니 의성읍에서 금성면 조문국 경덕왕릉으로 가는 28번 국도 변에 목화재배기념비가 생각납니다. 의성군 금성면 제오리 일원이 목면시배지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제오리 마을에가면 마을주민은 몇 번지 일원이라고 말씀을 해주실 것입니다. 경남 산청군에는 면작시배지로 목화관련 박물관도 건립하였습니다.
목화가 문익점이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것이 최초가 아니라는 기록 및 고고학적 발굴이 있었습니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후한서 동이열전
馬韓人知田蠶 作緜布
삼국지 위서동이전
馬韓在西 其民土著種植 知蠶桑 作綿布
능산리 절터에서 면직물은 567년 백제 창왕 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어 문익점이 중국에서 들여온 목화보다 무려 800년을 앞선 국내 최고(最古)의 면직물 - 2010년7월15일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기사
관련기록은 남당유고를 살펴보면서 국내에 현존하는 사서에도 여러곳에서 그 흔적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남당유고에는 기림이사금 원년(A.D.364)에 면(綿)에 관한 기사가 있고, 명심보감(明心寶鑑) 염의편(廉義篇), 동사강목(東史綱目) 및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는 유례이사금 말년 기사에 나온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은 고려시대 문신인 추적(秋適)이 1305년에 중국의 고전에서 선현들의 금언(金言)과 명구(名句)를 편집하여 만든 책
동사강목(東史綱目)은 조선 정조2년(1778년) 안정복이 저술한 사서로, 단군조선부터 고려 공양왕까지의 역사를 기록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는 원래는 1458년(세조 4)에 착수한 동국통감 편찬사업의 일환으로 시작한 것이다. 세조는 동국통감 편찬에 대단한 열성을 보여 동국통감청을 설치하고, 궁중비장의 책들도 내주어 삼국사기와 동국사략(東國史略)의 부족한 기록을 보충하게 했으며, 자신이 직접 검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은 세조가 죽을 때까지 완성되지 못했고,
예종도 일찍 죽어 완결을 보지 못했다. 1474년(성종 5) 신숙주의 건의로 다시 시작했으나, 다음해 신숙주도 사망하여 노사신, 서거정 등의 주도로 1476년(성종 7) 12월에야 삼국시대 부분을 완성하여 삼국사절요라는 이름으로 찬진했다. 편찬 담당자는 노사신, 서거정, 이파, 김계창, 최숙정이다.
정성일님 자료를 찾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댓글을 달지 않으셔도 삼국지 위지(위서) 동이전은 제가 대학1학년 때 번역을 한 책입니다. 그외 명심보감, 동사강목 등의 책의 개요는 검색엔진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을 너무 장황하게 다신 것 같습니다. 제가 문화재연구원에 근무하면서 고고학 자료는 정성일님보다 더 많이, 더 빠르게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정성일님께 한 가지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발굴 자료를 갖고 고고학에서 얘기하는 것이 목화가 중국에서 들어온 것인지 외국에서 들어온 것인지 어떤 경로를 갖고 들어온 것인지 얘기할 수 있으십니까? 남의 얘기를 옮겨와서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남들보다 자료를 조금 더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뽐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남이 이렇게 얘기하는데 내가 찾아보고 공부해 본 결과 이것이 아니고 저것이더라 라고 얘기를 하는 것이 연구를 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목화에 관련된 글을 읽고 금성면에 있는 면작기념비가 생각이 나서 댓글을 단 것입니다. 제가 중국에서 문익점선생이 최초로 목화를 가져와 심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정성일님은 조금 과민반응을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의욕이 앞서기에 그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문국 사적지 내에 있는 면작기념비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친일 지주에게 돈을 거둬 세운 일종 수탈비로 보고 있습니다. 목화씨가 언제 들어왔는가 하는 문제는 학계에서 어떻게 정리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정보를 접하게 되어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습니다.
회장님의 말씀과 같은 의견을 2002년도에 전 의성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이신 故 이선생님께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세계2차대전 말 무렵 비행기의 연료를 뽑기위해 목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의성문화지에도 이선생님의 글이 실린 것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고고학계에서 목화의 전래에 대해서는 정설로 잡힌 것은 아직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발굴조사가 많아질수록 새로운 유물과 유구가 나오므로 기존의 학설이 뒤집혀지는 경우가 많아서 명확하게 이렇다고 정의를 내리기 어렵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조금전에 의성군청으로 전화하여 정성일님과 한참동안 대화를 하였습니다. 대화 후 정성일님이 왜 목화에 관한 댓글을 달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남당유고>> 번역이라는 힘든 작업을 하시던 중 목화와 관련된 기사가 나오고, 목화와 관련된 고문서를 찾다가 제 댓글을 읽어보고 댓글을 달게된 것 같습니다. 조문국에 관한 좋은 자료가 있으면 서로 연락하고 공유하기로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