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2.주일. 창8:6-12. 비둘기와 까마귀.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보면 정말 신비롭고 궁금한 것들이 실타래처럼 계속 풀려나옵니다.
물론 인간의 입장이기 때문에 신비한 것 일뿐 창조주 전능자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별일도 아닐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말씀을 연구하며 원어분석을 통해서 궁금증을 조금씩 이해 해 보려고 애를 씁니다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믿고 깨닫는 것이 좋은 방법 같습니다.
천지창조를 비롯하여 인간창조 노아홍수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유한한 인간의 생각으로는 그저 약간의 깨달음만 있을 뿐입니다.
노아에 관한 성경내용이 5장에 걸쳐서 나오는데 노아에 관한 설교만 해도 1년 이상 걸릴 것 같습니다.
그만큼 노아에 관한 비중이 크다는 말이겠죠.
제2의 새 창조역사와 제2의 시조가 시작되는 것인 만큼 노아의 홍수사건은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아를 비롯한 홍수, 방주 등은 그리스도의 예표이자 구속사적 예표가 됨을 익히 알고 있을 겁니다.
창7장6절부터 창8장19절까지는 방주승선부터 시작하여 방주 하선까지의 과정이 총 377일이 소요됩니다.
약1년12일 동안 그야말로 천지개벽을 한 것입니다.
지구상의 풀 한포기 까지 모두 멸절되었으니 그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은 인정사정 없었습니다.
앞으로 있을 불 심판은 이보다 더 혹독할 수밖에 없음을 생각할 때 구원의 문이 열려있을 때 정말로 예수를 잘 믿어야 될 때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도 하나님은 120년 동안 기회를 주시면서 참고 또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2천년? 이상의 기회를 주시며 기다리시는 예수님께로 속히 들어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홍수가 일어날 때 하늘. 땅 모든 곳에서 물과 샘과 빗물들이 동시에 내리고 솟아났습니다.
그렇다면 불 심판을 어떻겠습니까?
하늘에서 불이 쏟아지고 땅에서 불이 솟아나는 등 그야말로 세상은 아비규환이 될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같이 구원의 방주 되시는 예수님께로 들어와야 불 심판에서 구원받습니다.
오늘은 그 방대한 노아홍수사건 속에서 두 마리의 새에 관한 말씀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노아홍수사건에 집중하면서 2마리 새에 대해 좀 더 생각하여 보게 되었습니다.
비둘기와 까마귀 는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새들입니다.
그중 까마귀 보다는 비둘기에 대한 호감과 생태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었지만 비둘기 보다는 까마귀에 대한 것은 성경 몇군데 나오는 내용으로 생각할 뿐 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서 까마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까마귀는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새지만, 그들의 지능과 특성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며, 오랫동안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해왔습니다.
까마귀는 고대부터 지혜와 죽음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현대에는 그들의 뛰어난 문제 해결 능력과 사회적 행동으로 인해 과학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까마귀는 새 중에서도 가장 지능이 높은 조류 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도구를 사용하며, 심지어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능력들은 까마귀가 생존을 위해 환경에 적응하고,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합니다.
까마귀는 단순한 새가 아닌, 자연이 만들어낸 진정한 천재입니다.
이들은 도구를 사용하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며,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등 놀라운 지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까마귀는 다양한 문화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인간과 오랜 시간 동안 깊은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아마 노아는 홍수가 끝난 후 물이 줄어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이처럼 똑똑한 까마귀를 미리 알고 이용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까마귀가 비둘기 보다 더 많이 날 수 있고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이 가능하기 때문에 먼저 내 보내지 않았을까?
6절- 40일이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7절- 까마귀를 내 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한글성경을 보면 까마귀를 내 보냈고 그 까마귀가 계속해서 되돌아왔다는 의미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까마귀가 계속해서 이리저리 날아다녔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 밖의 세상의 상황이 어떠한지 알기 위하여 까마귀를 내어 보냈지만 까마귀는 다시 방주로 돌아오지 않고 계속하여 스스로 원하는 대로 앞뒤로 날아다니기만 하였던 것입니다.
아마도 까마귀는 방주 안에서 답답하게 생활하다가 세상으로 나가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사체들의 썩은 고기를 자기 멋대로 먹어가면서 날아다니지 않았을까 여겨집니다.
이러한 까마귀의 모습은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생활하는 타락한 교인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요 6: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우리 성도들이 교회 밖으로 나가 일하면서 명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온갖 불법과 편법이 난무하고 부조리가 판을 치는 이 세상 가운데 우리성도들의 무엇을 위해서 일을 하며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맘모니즘에 얽혀 사는 우리 인생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자 본문의 까마귀를 통해서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합니다.
8절-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9절 -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성경에서 비둘기란 동물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비둘기는 대개 순결과 온유함의 표상이며 성령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아직 물이 빠지지 않아 썩고 젖은 것만이 이 세상에 머물지 못하고 방주로 다시 돌아온 비둘기는 앞서 나온 까마귀와는 반대로 죄로 물든 이 세상에 안주하지 못하고 구원의 방주인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와 참 안식을 찾는 성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둘기는 땅의 표면에 물이 있으면 서식하지 못하는 새이다.
본문에 사용된 ‘땅’ 이란 단어는 ‘에레츠’가 아니라 ‘아다마’ 즉 마른땅이기 때문에 노아는 비둘기를 통해서 인간이 살 수 있는 마른 땅을 찾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까마귀는 노아와 방주 안에 있을 생명들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까마귀가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방주가 상징하는 교회 안에도 교회의 양육을 받으면서도 세상으로 나가면 죄로 오염된 세상과 동화되어 살면서 썩을 양식을 얻기에 급급할 뿐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지 못하는 교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교회와 주님 나라 확장에 전혀 유익을 끼치지 못하고 도리어 교회에 무거운 짐이 되고 문제들을 일으키기 일쑤입니다.
살후 3: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반면 비둘기는 노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했지요.
즉 노아는 비둘기를 세 번 놓아 보냈는데 그때 마다 노아에게 적절한 소식을 전해 준 것입니다.
즉 첫 번째는 그냥 돌아옴으로써 물이 아직 감하지 않았다는 것을
두 번째는 감람 새 잎사귀를 물고 돌아옴으로써 물이 저지대까지 감했다는 것을
세 번째는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물이 지면에서 말랐다는 것을 전해 준 것이죠.
이처럼 노아의 보냄을 받은 비둘기가 노아와 방주의 생명들을 위해 자기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한 것과
우리 성도들은 멸망할 죄악된 세상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를 신앙으로 양육해 주는 교회의 은혜에 감사하며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교회의 은혜에 보답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정녕 나는 까마귀 같은 신자인가?
아니면 비둘기 같은 신자인가?
딤후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이 시간 설교를 하면서 까마귀를 부정적으로 비유하다보니 까마귀한테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까마귀는 똑똑하고 능력이 있어서 엘리야에게 먹을 것도 가져다 주어 생명을 유지시킨 영물이기도 합니다.
본문에 한해서만 까마귀비유를 들었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비유한 것 뿐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 모든 일, 역사적으로 호불호가 반드시 있기 마련이죠..
모든 사건의 역사적 평가도 긍정과 부정이 엇갈리기 마련입니다.
기준은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비둘기는 어떤가요?
성령의 상징이요. 순결함의 의미도 있지만 사실 비둘기 같이 인간들에많은 피해와 불결함을 주잖아요.
비둘기는 예민한 성격이 있어서 상대하기기 까다로울 때도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가만히 보면 교회에 도움을 줄때도 있지만 어려움을 제공할 때도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나 오늘날의 교회공동체 모두 예수님의 은혜와 보혈로 만들어진 은혜와 구원의 처소입니다.
내가 교회에 무슨 봉사를 하고 예수님께 어떤 충성을 해서 복 받겠다는 생각이 있기 전에
죄로 얼룩진 삶을 살아온 나에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희생의 보혈로 나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인쳐 주셨으니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여 주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봉사, 헌신, 사명감당이 우선시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현대 많은 신자들이 샤머니즘과 맘모니즘의 영향을 받아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여기에서 벗어나야 하기 위해서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하십시다.
기도의 능력과 성령의 권능으로 악한 세상을 이겨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보다 기도보다 앞서지 말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는 줄 앎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