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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Vitis님의 플래닛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acts
선교와 선교학
R. 프리들리/김웅태역1)
제 1절, 오늘날의 선교 상황
선교(Mission) 개념은 신학적인 어원에 있어서 지적인 혼동과 감정적인 불확실한 개념들로 뒤덮여 있다. 「선교란 먼저 세상의 비가톨릭 부분(portion)에 있어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위하여 시도된 사업」으로 이해되는데 이것은 선교의 신앙 고백적이며, 외적이고 지리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여러가지 다른 동기로서 이 개념을 비판되기도 한다.
선교에 대한 이러한 개념적 혼란2)은 두 세계대전 이후의 비식민지화의 결과로서 첨예화된 것이다. 사실상, 당시 선교의 대상이 되는 자들(이방인들 : paiens)은 다른 이들이 그들 고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고자 했던 첫번째 대상일 따름이었던 것이다.3) 선교의 행위자들(선교사들, missionnaires)도 역시 그들 나름대로 적어도 구세사와 비그리스도교 종교를 그리고 서양의 세속화 현상에 대한 경험 등의 면에 있어서 점점 더 긍정적이며, 종말론적이며, 그리스도론적인 해석으로 고민한 것이다. 「노동선교」(Mission ouvrière) 와 「프랑스의 선교」(Mission de France)는 주체성을 일반적으로 상실케 했다.4)
이러한 반응들은 이따금 공격적이며 자아비판적이었는데 서구 그리스도국가의 붕괴, 탈피 현상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것은 지리상의 대발견 시대로부터 그리스도교 국가는 자신을 하느님의 특권적 창조물로서, 그리고 절대적 계시의 배타적인 소유자로서, 그리고 세상의 정치적 주인으로서, 그리고 세계문명의 창조자로서 과학과 기술의 유일한 생산자로서 간주해 왔던 것이다.
반면에 다른 이들 즉 비서구인들은 대부분 이교도들(pagani), 미개인 혹은 실수나 하는 야만인이며 정치적인 적들로서 간주되어 온 것이다.
인종주의자적 사고가 선교의 개념에 연결되어서 이교(paganisme)에 관한 그러한 역사적 판단을 분리하기는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5) 당시 선교의 개념을 인종차별주의(Apartheid)와 선교사 특파원주의(Missionnaires correspondantes)에 근거하여 형성된 포교적인 개념이었다. 특히 1610년부터 1848년의 기간을 볼때 파나마, 파라과이이, 아르헨티나에서의 인디언들의 축소현상, 그리고 1665년부터 1742년 사이에는 중국에서 전례논쟁이 있었고, 1842년부터 1887년 사이에는 중국과 16개국 크리스찬 국가들 사이에 맺어진 22개의 불평등 조약, 그리고 식민지화된 아프리카 지역에서 동원된 강제 노동 등은 바로 인종차별주의에 근거를 둔 선교 방법이었다.
서양의 선교적 양심은 또한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역사와 인구통계학 사이의 불균형을 통해 볼 때 심히 의심시 된다. 즉 지중해 크리스찬 지역으로부터 오늘날의 제 삼세계의 교회에 이르기까지를 관찰해 볼때, 가톨릭 신자의 85%가 두개의 큰 지역인 유럽과 북 아메리카에 44% 그리고 41%가 라틴 아메리카에 퍼져 있는데, 라틴 아메리카엔 중앙 아메리카와 카리브인들이 포함된다.6) 이것은 말하자면 가톨릭 신자가 유럽보다는 라틴 아메리카에 더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1968년 메델린(Medellin)7)과 1979년 푸에블라(Puebla)8) 주교회의의 분석결과이다. 그리고 1978년 이후부터는 가톨릭 신자의 56%가 제 3세계에 살고 있으며, 2000년대엔 대략 70%에 이른다고 한다. 1981년부터는 백인 크리스찬은 47.4% 밖에 안되고 있으며, 1978년에 2,217명의 교구 주교 중에 1,390명이 비 서구지역에 속해 있다고(62.6%) 한다.9) 결과적으로 서양으로부터 온 일방 통행의 선교가 그 끝에 이른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여러 종교들이 서양에 반선교적으로 들어왔다. 예를 들면 유럽에 있어서의 아시아에 기원을 둔 새로운 종교운동들이 있는데 ; 초월적인 묵상(Méditation transcendantale), 크리슈나(Krishna)의 마음을 위한 국제 조직사회, 소각칼(Sogakkal), 그리고 문선명의 통일교회, 아마디야(Ahmadiyya)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무엇을 반영하는 것인가. 역전된 현상들이라고 볼 수 있으며, 종교현상학적인 관점에서 볼때 전통적인 크리스찬 선교와 동일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진리에 대한 배타적인 주장,- 내적 외적 절대주의 -, 그리고 이전 종교들과의 절교의 의미에서의 회개하려는 의지들, 그리고 기존 종교와의 공존의 거부현상인 것이다.10)
제 2절 선교 신학
선교에 있어서 최근의 이러한 역사는 완전히 선교적인 역동성을 가져다 주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단지 16-17세기 당시 선교(Mission)라는 의미는 세례받지 못한 자에게로 향하는 노력11) 이라든가 혹은 교회를 부식(扶植)시키는 일 (Plantatio ecclesiae) 등을 의미하는데 상투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이해한다.
예전에 선교활동을 뜻하는 의미들은 예를 들면 사도직(Apostolatus), 신앙의 전파(Propagatio Fidei), 구원의 전파(Propagatio salutis) 등과 같은 용어들이었다. 선교적(missionnaire) 이라는 용어가 함축한 선전열(개종열: proselytisme)의 뒷맛은 지리상 발견에야 비로소 등장한 것이었다.
선교라는 단어의 원래의 의미는 반대로, 이런 공격적인 뜻을 함축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파견-선교(envoi-mission)라는 말은 '보내다」(apostello)에 기원을 두는데12), 신적 친교를 사람들에게 제공하려는 뜻이었다.13)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려는 것이다 』 (요한 3, 16-17).
1. 삼위일체적인 관찰
중세 시대에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터득한 사상가들은 성부 성자 성신이 절친한 사랑과 상호 재인식으로 신성의 한 복판에서 긴밀한 교환을 하고 있음을 터득했다. 즉 그것은 능동적 수동적 발생(Génération active et passive) 이며, 능동적 수동적 분출 (Spiration active et passive) 이라고 성서는 Mission-missiones ; mission(s)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계시하고 있다. 이러한 내적 신성의 역동성14)은 tm스로 분출되고자 한다. 하느님의 창조적인 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새창조)를 통한 하느님의 구속적인 육화 안에서 그리고 성신강림날 하느님의 성령이 나타나심 안에서 스스로 분출되고자 한다.15)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은 선교적인 하느님 (Dieu missionnaire)은 하느님의 선교(Misssion de Dieu ; Missio Dei) 라는 말을 하나님의 구원적 의지가 모든 인간을 포용하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공현으로서의 선교가 나타난다고 교회 일치적인 차원에서 말하고 있다.
이처럼 선교는 먼저 세상 안에서 그의 백성들과 문화들과 종교들과 함께 하느님의 구원적 의지에 대한 전례적인 인식이며 그 이해에 대해 명상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신학적이며 명상적이며 삼위일체적인 선교 개념은 선교의 찬양적인 개념으로서 크리스찬적이며 인격적 그리고 교회적인 생활에 아주 다른 형태의 선교적인 개념을 주고 있는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교교령(1965, 「선교교령」 2-9)에는 선교적 실존과 교회 공동체의 선교구조의 근본적 동기로서 나타나고 있다 : 『나그네의 길을 가고 있는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니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신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16)
선교는 그러므로 교회 존재성의 구성 요소이다. 그것은 교회의 선험적인 개념으로서 지리적 혹은 조직이라는 개념으로 사도직의 의미를 축소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17)
선교는 선교의 명령18)에 순종하여 그 동기를 찾았던 것은 인류 전체에 관한 구세사의 이러한 전망 안에서 너무 피상적인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2. 그리스도론적인 근거
세상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 안의 말씀(Logos)의 육화는 대단히 희망적인 삶의 형태에로 모습을 보여준다 :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이 사람들을 세상에 보냈읍니다』 (요한 17,18 ; 6,57 ; 7,29 ; 20,21 ;...). 「.... 과 같이」 라는 말에 대해서 그리고 「사랑의 모범」에 대해서, 요한 13,34 ; 15,9 ; 17,23 그리고 마태 5,48), 유일하게 인도하는 실(방향)은 사도 - 선교사 예수이다 (참조 : 예수를 지적하여 유일하게 "사도"(apôtre)라고 사용된 곳은 히브리서 3,1이다.19)
사도성(L'apostolicité)과 선교(missio)는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신학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권위의 교회법적인 형태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행동 안에서의 희망'인데, 사도들을 본받아서 그들이 감히 그리스도의 구원과 역설이 아직 상호 침투되어지는 구체적인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자렛의 회당에서 엄밀히 직능적인 모습으로 이 선교를 묘사했다 (루가 4,18-19 ; Cf.v.18 : apostalken).20) 그는 이사야서 61장 1-2절을 참조하셨는데, 즉 이 광대한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권력이 없으며 물질적 심리적 곤란으로 짓눌린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친교를 약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방인이나 선택받은 이나 예외없이 베풀어지는 은혜이다.21)
3. 교회론적인 귀결
삼위일체적인 교리와 그리스도론은 그러므로 하느님의 이러한 구원적 의지에 대한 신빙성있는 표시로서 교회의 神論에 정당성을 보여주는데 일치한다. 하느님의 구원적 의지란 샬롬(Shalom), 즉 평화이며 모든 이를 위한 구원이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구원의 성사이다(이 금언의 긍정적인 표현 : 교회 밖에서의 구원의 관점). 교회는 이 구원 사건에서의 효과적인 표지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22)
메시아적 선물이 부재하는 곳 - 고통과 고뇌의 상황들 그리고 폭력, 불행, 무수한 투쟁의 형상아래 비참한 기아, 귀양, 가련한 죽음, 제 삼세계로 향한 여행에서의 매춘, 범죄로 인한 실망 등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선교는 교회를 통하여 어디서 어떻게 작용하게 되는지를 묻는다.
교회 공동체에 그리스도를 통해 맡겨진 선교는 외적이며 소외적인 과업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존재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선교를 정의하는 교회가 아니라 선교는 장소 (희망과 평화가 없는곳) 와 양식 [Koinonia, diakonia(부제), Kerygme, 복음화, 발전, 교회상호간의 봉사, 전례의식과 저항등]을 '평화의 성사'가 되는 교회로서 정의한다.
그리스도와 연관된 사건을 통해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상호 문화적인 협력은 이 증거 (Martyrion)의 신빙성을 위해 본질적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크리스찬들의 신앙고백의 경쟁 (이것은 선교의 암흑으로 표현된다) 을 중단하게 하기 위한 교회 일치적인 이해이며 제 1세계, 제 2세계, 제 3세계 신학자들간의 협력이다. 예를 들면, '제 3세계 신학자들의 교회 일치협회'(EATWOT)인데, 이것은 다르 에스 살라암(Dar-es-salaam)에서 1976년에 설립됐다.
그로 말미암아 목표된 것은 양적으로 산출된 가톨릭성이나 혹은 선교의 통계수치가 아니라 질적으로 평가된 가톨릭성인 것이다(Congar). 질적인 가톨릭성이란 민족들과 문화들과 종교들을 통하여 교회를 희생해서 이룩된 것으로 생각된다. 초국가적이며 지방적이고 지성적, 전례적이며 상호 인간적인 생활을 위해서는 몇가지 선교적 방법의 귀결이 있는 것이다.
제 3절 선교의 형태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와 그리스도의 파견의 수신인은 세상 혹은 계층들이다. 즉 말하자면 부활의 메시지가 전달되어져야 하는 구체적인 세상 안에서의 불행의 상황인 것이다. 바로 여기에 크리스찬들의 선교적 공동체를 창설하는 선교학적인 원리가 있는 것이다.
이 공동체는 성사의 성격으로서 전례 안에 찬양된 하느님과 평화없는 세상 사이에 사는 것이다. 즉 다른 사람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교회의 변두리적인 위치를 취하는 것으로, 세상은 타인을 위한 삶의 질서를 부여한다.23) 이??세상과의 교제는 그렇다고 해서 친절, 호의로서 새겨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적인 모범 「 ...처럼, ... 도 역시」(comme ... aussi)으로 보여진다. 즉 다른 이를 위해 생명을 바치며(참조. 마르 10,45), 세상에서 자기를 비우는(anéantissement, kénôsis) (참조. 필립 2,5-7), 고통받는 종 (이사 52,13 - 53,12)의 모습, 기도와 도움, 자아포기(en to krypto : 마태 6,4.6.18) 안에서의 분별력과 신비는 어떤 종류의 불가사의를 포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위선, 거만, 자만 (이런 덧없는 모습에 대해선 1 고린 4,7-12을 참조)의 죽음을 뜻하는 실존적인 조건들인 것이다. 선교사는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 혹은 발전 기술의 소유자가 아니라, 그는 그리스도처럼 「성사」(sacrement)이며, 자기자신의 「비움」이다 (필립 2,7; héauton ékenôsén).
이 비움이란 영성적인 태도, 선교적인 영성이며 문화적이며 인간학적인 태도인 것이다.24) 선교사는 서로 다른 계층 사람들을 이어주는 끈으로서, 자기의 인종차별주의적인 편견과 자기 문화적 풍요성에의 집착에서 자신이 해방되어야 한다.25)
그것은 그리스도를 설교하기 위해서이지, 자기 자신이나 문화나 문명 혹은 자기 종교 형태를 설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토착화(inculturation)에 대한 선교학적인 주제론은 그러므로 교육학적인 기술론이 아니다. 육화의 의무에 대한 것이다. 신앙의 일치는 여러 형태와 무한히 다른 표현들 속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면, 라틴 아메리카의 기초 공동체들과 사회적 분야에서 해방신학과 상응하는 신학, 그리고 법적이며 정치적인 인종차별주의의 맥락에서 이해되는 「흑인 신학」, 그리고 아슈람(Ashram)의 인디언 신학, 혹은 서양의 여성주의적 신학들과 같은 것이다.26)
이 점은 지리적 형태의 선교방식의 종말을 뜻하며, 비서구적인 교회 공동체들이 가능한 빨리 본연의 모습으로 되어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 교회들은 스스로를 다스리고 스스로를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扶植 : Plantatio ecclesiae). 이 "세 자율성" (재정적인 분야와 사도직의 선택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임명)이 실현되는 방법의 시기에 관한 의견들은 다양하다. 아주 좋은 예로서, 중국 교회의 최초의 역사27)는 선교 후의 시기가 어떠한 지를 보여준다.28)
교회론적인 관점에서 실제적인 계획에 관한 것으로서, 사람들은 개정된 상황 안에서 보편교회와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의 지방교회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설립할 것을 모색하고 있다.29) 주교회의들의 지방 분권화는 시노드적인 구조를 지닌 이러한 교회의 의미 안에서 이해된다.30)
제 4절, 교환으로서의 복음화
선교의 목적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Kerygme)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을 위하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증명이다. 선교란 그러므로 전파 전염되는 희망(Espérance contagieuse )이며, 바로 이러한 이유로, 선교는 '왕국과 세력들'에 대항하여 싸운다.31)
이처럼 하느님의 구원의지는 평화가 아직 정착되지 않은 곳에서와 인간 상호간 그리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상황들 안에서 평화가 손상되어지는 곳에서, 크리스찬들의 비판적 현존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다.32) 구조적인 부정의들33)과 인권 유린들은 "사회악"으로서 낙인찍혀야 한다.34)
그런데 교회 공동체들 자체도 부정의와 저개발의 이러한 매카니즘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으므로 선교는 그들 스스로가 먼저 회개를 해야 함을 의미한다. 선교사와 선교적 공동체는 그들 자신을 점점 더 상호복음화 한다. 그들은 다른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로의 회개의 길을 제시하고, 이 희망의 이유를 제시하기 전에 먼저 회개하는 것이다.35)
선교적 실존은 그러므로 타인을 위한 희망과 투쟁의 실존이며, 즉 선교사는 자신이 전하는 구룹 안에서 종교적인 모퉁이돌을 찾기 이전에 그 자신이 먼저 주요한 모퉁이돌 (Pierre d'attente)이 될 것이다. 신앙표현의 신학적, 사목적, 교리적, 전례적, 분야들 안에서의 적응은 전달자가 수취자의 환경에 대단히 조심하면서 메시지를 전하는 곳에 선결적으로 제 2의 토착화를 위한 문화적 인간학적인 과정을 요구한다. 이러한 만남은 직선적인 일방통행적인 선교가 아니며, 오히려 선교에 상호성을 보여주는 원형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수취자는 전달자에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선교준비는 그러므로 그 고유한 사고방식과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처신들 그리고 외국의 것들, 즉 언어, 문화적 인간학, 성서적 전통에 대한 역사 비판적인 주석, 종교학, 편견에 대한 탐구, 인종차별의 민족 중심주의, 신학적이며 전례적인 표현들의 고유한 형태들에 대한 대단히 존경스런 인식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것은 수월하게 개종하기 위함이지만 항구하게 「모든 이에게 모든 것」 (Omnibus Omnia)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36) 오직 이러한 방법으로 크리스찬적이든 아니든 한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창조적 삶안에서와 동일한 반응들과 결정들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37)
대화와 선교는 서로 배제되지 않는다. 타종교, 문화, 사상체계의 사람들과의 대화38)는 단지 개종을 위한 건설적인 실천인 것이다.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구원적 의지(Missio Dei)안에 뿌리박고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이끌려, 또 구속적인 그의 죽음을 통해 모든 인간들을 포용하신 하느님의 은총안에서, 선교사는 분명히 한사람의 절대적인 이교도도 결코 만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항상 이미 만나셨던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39) 그들의 문화적 제한들과 죄스런 분열 등의 이유로 해서40), 크리스찬 공동체와 그들의 선교사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취해진 부분일 뿐이므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증언을 불완전하게 간직할 뿐이므로, 선교적인 대화는 그리스도를 더욱 더 알게 되는 방법이며, 모든 인간적 처신과 사상을 초월하는 하느님 안에서 더욱 더 깊이 파고드는 방법인 것이다.41)
그러므로 대화는 단지 모든 전체적인 것을 말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함께 고통을 나누고 짐을 함께 지는데 있는 것이다.42)
이러한 대화의 운동 안에서 복음선교는 사회들과 문화들, 종교들이 비인간화된 행동으로 점철된 곳에서 비판적이며 정화되는 기능을 갖는 것이다.43) 같은 방법으로 이러한 대화의 과정 안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존재가 되는 구체적인 방법은 항상 의문의 여지로 남는다. 「종교 자유」 (DH)와 「비 그리스도교와 교회와의 관계들」 (NA)에 관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두 선언들은 사실상 그 실천적인 면에서나 신학적인 제한들에 대해 어떠한 면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그 두 선언은 차라리 그리스도의 선교 안에서 대화의 길들을 따르도록 근본적인 가능성(임의성, disponibilité)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44)
제 5절, 선교적 학문과 선교학
결론적으로 교회는 각각의 상황과 그를 구체적으로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메시지와 그 실천을 제시하는 초국가적인 공동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신학의 어떤 지방적 형태를 띈 것도 아니고 혹은 공동체적인 제작도 아니다. 그리고 그 신학이 절대 의무적으로 선언되어져야 하는 것도 아니며, 교회의 선교적 차원과 더불어 협소한 접촉도 없이 발전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신학과 선교학45)은 오늘날 다음의 문제들에 대한 결과를 제시하고 찾고자 함이었다 : 타인들, 성서적 개념, 주석학적으로 근본이 되는 일, 선교에 대하여 등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선교신학, 특히 십자가와 부활의 요소를 포괄하는 육화의 신학 ; 그 고유한 정신적 구조들과 그 고유한 사회적 처신들 그리고 그 고유한 종교적 표현들을 상대화시키는 것, 그리고 다른 이들 안에 점점 더 깊이 들어가는 것46) ; 문화들과 종교들 사이의 대화 유형에 관한 형태학 ; 평화를 위한 국제적 활동에의 공헌 ;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신학에 대해 대화를 통해 이룩된 공동제작 등등이다. 선교학은 작업(일)에 대한 값진 도구들로써 그것을 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 예를 들면, 「선교사 약전」47), 「선교 도서관」.48)
각주 ---------------
(註) 1) 이 글은 다음의 논술을 번역한 것이다 : Richard Friedli, (trad. H. Rochais), Mission/Missiologie, in Dictionnaire de Théologie, Paris, Le Cerf, 1988, pp. 430-435. 이 글의 번역문은 이미 다음의 계간지에 발표된 바 있다 : 「선교사」 (1990년 여름호, 통권 제 20호), 가톨릭 교리신학원, pp. 6 - 11, 같은 책 (1990년 가을호, 통권 제 21호), pp. 4 - 8.
2)* Hoekendijk, 1966, 315-388.
3)* Conférence mondiale sur la mission, à Bankok, 1972-1973. Cf. Polter, 1973, 180 쪽.
4)* Cf. Projet de moratoire.
5)* Hoekendijk, 1906.
6)* Sanon 1972, Bühlmann 1974 ; Cf. Marc 1980.
7) 메델린(Medellin) : 콜롬비아 서북부 1530m의 고지에 있는 그 나라 제 2의 도시이다. 부근의 코오피와 금, 은, 동의 집산지이며 섬유공업도 발달되어있다. 약 400만의 인구가 있는 도시이다.
8) 푸에블라(Puebla) : 멕시코시의 동남방 140km에 위치한 인구 60만(1977년 통계)이 있는 멕시코 제 4의 도시이다. 멕시코에서 가장 오래된 식민지로서 스페인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다. 면직물, 도자기 유리가 생산된다.
9)* Barret, 1982. 3.
10)* Hummel 1980.
11)* Cf, 1622년 포교성의 창설(Sacra 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
12)* Cf, Kertelg 1982.
13)* Cf, 디도 3, 4 ; Philanthropia Theou.
14)* Missio interior ; missio ad intra ; processiones aeternae.
15)* Missio exterior ; missio ad extra ; processiones temporales.
16)* 「선교교령」 2 ; 「교회헌장」 48) (Ecclesia peregrinans natura sua missionaria est ; Cf CIC. 1983, can 781.
17)* Congar, 1967.
18)* 마태 28, 16-20 ; 루가 24, 44-49 ; 마르 16, 14-20 ; 요한 20, 19-23.
19) 히브 3, 1에 대해 원문을 대조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공동번역」에는 『그러므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 여러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우리 신앙의 대사제이신 예수를 생각하십시오』에서 보듯이 '대사제'로만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The Greek New Testament (United bible Societies, 1968」에는 '사도이시며 대사제이신' 으로 나와 있다. 그리고 「La Sainte Bible (Paris, Le Cerf, 1961)의 번역에도 그 귀절은 '사도이시며 대사제이신' (L'apôtre et grand prêtre)로 나온다. 그러므로 「공동번역」에서는 '사도'라는 말이 빠져 있다.
20) 루가 4, 18 - 19 : 『주님의 성령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1)* Cf. Pollei 라는 말을 포함하는 성격에 대해서 마르 10,45 ; 14,24.
22)* Cf. 「선교교령」 1,5 ; 15 그리고 16.
23)* 「다른 사람들을 위한 교회」(L'Eglise Pour les autres, 1967), 「빈민들을 위한 교회」(L'Eglise Pour les bidonvilles, 1968).
24)* 선교적 인간학 (Anthropologie missionnaire). Cf. Luzbetak 1968.
25)* 탈토착화 (déculturation), 토착화와 초월 토착화의 과정 (processus d'acculturation et trans-culturation).
26)* 여기서 제기된 문제들에 대해서 : Commission internationale de théologiens, 1973 참조.
27)* 중국의 가톨릭 교회는 1949년에 모택동의 정당에 의해 흡수되었고, 1958년부터 애국 교회에 의하여 주교들이 직접 지명되고 있다.
28)* K. H. Ting, Nanjing.
29)* Cf. CIC. can, 782 ss. 1과 786; Cf. Vatican II, 「선교교령」(AG), 38.
30)* Cf.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 - Consejo Episcopal Latino - Americano) ; 「동부 아프리카 주교 협의회」(AMECEAE - Association of Member Episcopal Conferences in Eastern Africa) ; 「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 주교회의」(SECAM - Symposium des Conferences episcopales d'Afrique et de Madagascar) ; 「아시아 주교 연합회」(FABC - Federation of Asian Bishops Conerences).
31)* 에페 6,11-12 ; 루까 1,51-53 참조.
32)* 봉사와 애덕에 관하여 Cf. 마태 25,31-46 : 교회의 애덕행위의 간접선교, 그리고 봉헌물을 제공하게 하는 단식, 발전의 계획, 매스 메디아, 병원 학교들.
33)* Medellin 2와 6.
34)* 요한 바오로 2세, Cf. Puebla, 452.
35)* Cf. 1 베드 3, 15.
36)* Cf. 1 고린 9, 19. 22 ; 에페 1,10 : "그리스도 안에 만물이 모이는 것.
37)* Cf. 바오로 6세의 사도적 서간, Evangelii Nuntiandi (현대의 복음선교) n.63 과 n.20 ; 크리스찬 일치 사무국 1982.
38)* Cf. 1964년에 설립된 비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교황청 사무국의 대화의 프로그램, 그리고 1968년 웁살라(Uppsala)에서부터, 그리고 제네바(Geneve)에 있는 교회일치 협의회.
39)* 익명의 그리스도인 : anonymement(익명으로) : Cf. 이 주제에 관하여 구약성서에서는 "거룩한 이교도" 혹은 '외국인들' 의 사회적계층을 위한 호의, 그리고 'ab Abel 교회' 의 가부장적인 주제를 참조.
40)* Cf. 「교회헌장」, 8 : Ecclesia....sancta simul et semper purificanda.
41)* Cf. 1 고린 13,12 그리고 로마 11, 33-36.
42)* 사회적, 윤리적 대화에 대하여, 1971년부터 창설된 평화를 위한 종교들의 세계 협의회를 참조.
43)* Cf. 1 베드 5, 8.
44)* Cf. 양성을 위한 귀결들 : 「선교교령」 16.
45)* Cf. 첫번째 가톨릭 「국제선교학 연구소」는 슈미들린 (J. Schmidlin)에 의하여 1911년 뮨스터에 창설되었다.
46)* 문화적 인간학 (Anthropologie culturelle).
47)* Bibliografia Missionum, Roma, 1935 s.
48)* La Bibliotheca Missionum, Münster-Aachen-Fribourg, 1916 s.